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리의 보도블럭에서 밟은 껌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는 일
죽음까지 끌고 가는 일

「퍼니스트 홈 비디오」부분.



거리에서 보게 되는 더러운 것 중 대부분은 인간의 입을 통해 뱉어졌다. 그것들은 아직 온도가 짐작될수록 더러운데. 다시 말해, 인간의 안쪽과 가까울수록 더 더럽게 느껴진다. 이를 마주할 때 불쾌한 까닭은 삶과 죽음의 장소를 명백하게 분리한다고 믿는 인간의 사회에서, 흔적들이 뒤엉켜 유지되는 동물의 사회로 귀환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바닥에 붙은 껌의 원인을 찾는 일은 생각하기 무섭게 무의미해진다. 밑창에 눌린 껌을 보고 화를 내는 일이 가능할까? 개별 인간에 대한 추적은 가능하지 않다. 조장한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이 하찮은 권력을) 간섭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일은 내가 사는 곳 전체를 되돌아보아야 문제로서 인식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은 '익명으로 버려진 껌 따위가 누군가의 하루를 상하게 하는 일이 <시>로서 말해져야 할까?' 이다. 이 하찮은 일을 문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 지점에는, 길바닥을 제 것처럼 권력화하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시에서는 얌전하게 껌이라고 말했지만, 실은 침과 가래가 더 많다. 누가 이것들을 길바닥에 뿌려 놓을까. 이것을 피해 걸어 다녀야 하는 이는 누구일까. 


'대부분의 코미디가/ 운 나쁜 캐릭터의 수치심으로 마무리되는 일'처럼 우스워지면 끝난다. 이런 일에 반기 드는 것은, 살짝 뭉개지는 것이 당연했던 분위기를 깨는 일이다. 시인은 당하는 이의 잘못이 아니라고 재미없게-정의롭게 말하는 대신 만연한 웃음을 가로막는다. 아까 밟고 온 껌의 저편에 죽음이 묻어있는데요, 그게 다름 아닌 '아버지'였네요라고 말하는 식. 이 시의 제목은 <퍼니스트 홈 비디오>이다. 여기서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인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아버지인가? 아니, 그게 중요한가? 문제는 그런 '아버지'들을 모으면 사회 전체를, 그 중에서도 제법 높은 곳을, 문제를 겨누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대놓고 말하자. 화자는 명백하게 여자이다. 이 여자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 그녀가 '처세술'이라고 자조하는, 여성의 삶을 만나보자. 


공기 속의 말을 떨어뜨리지 않는 신체 훈련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좋다

「내일의 처세술」부분.

바닥에 버려진 껌과 침과 가래를 피해 걷고 급기야 화자는 '말하지 않는' 훈련을 한다. 이때 그녀의 침묵은 생각-없음, 말-없음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입과 성대를 스스로 잡아 붙드는 '힘'의 결과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바닥에 붙은 껌을 피해 걸어 다니는 날렵한 발과 이어져 있다. 이제 화자를 완전히 '그녀'라고 말하겠다. 그녀는 실은 '다 할 수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하고 그런 자신을 긍정한다. 그녀는 들리지 않게 살아있고, 보이지 않게 움직인다. 어째서 드러나는 방법을 연습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그녀로 살아보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기분에 비해 너무 작은 입으로/ 무슨 말을 남길 수 있을까/ 잘 죽지 않는 이 기분을/ 천천히 바뀌는 표정이 보여 준다" 「모형」 부분. 그녀의 입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은 체리를 먹기 좋을 만큼만 크고, 듣기 좋은 웃음을 지을 만큼만 크다. 하고 싶은 말을 목으로 붙들어 내는 것. 이것이 그녀가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 '처세술'이다. 

내가 사라져 주길 원하겠지만
나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나를 향해 무엇이든 던진다
팔걸이
손잡이
문고리의 위치

「뛰는 사람*」 부분.

하고 싶은 말을 붙들어 매는 그녀의 힘이 이것을 알아 채지 못할 리가 없다. '내가 사라져 주길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날린다. '나는 잘 사라지지 않는다' 그녀는 이런 사회에서도 '굳세게' 있기로 한다. 심지어 '문고리의 위치'를 던져도 말이다. '미시오'와 '당기시오'의 표시는 언제나 문 앞에서 속인다. 그녀에게는 언제나 '당기시오'였거나, 문처럼 생겼을 '벽'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문 앞에서 언제나 한 번 이상의 수고를 할 테고, 때문에 문을 여는 데 시간이 더 걸리며, 심지어는 지금도 문고리가 아예 없는 곳에서 문의 사방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대신, 그래도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먼저 대답하고, 같이 열자고 하는 대신, 그녀 이후의 세대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넨다. 

소년아 소녀아
지붕의 모양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높이 더 높이 올라가 보는 것뿐이다
너흰 가장 오래 지속되는 감정을 찾을 때까지
떠돌아야 한다
그래서 너희는

「불이야」 부분.

건물의 '꼭대기'를 상상하라고 말이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았을 건물, 알지 못하는 설계의 문 앞에서 그다음 공간에 진입하는 비좁은 상상을 하는 대신, 많이 떠돌아다니라고 말한다. 너희에게 문은 필요 없어. 그러니 그따위 열쇠를 가지려고 할 필요도 없지. 다만, 높이 올라가서 '지붕의 모양'을 확인해라. 나처럼 문 앞에 있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더러워진 거리에 닿지 않도록 온 다리에 힘을 주며 걷고, 거리의 껌 따위에 아버지의 죽음을 붙여 놓는가 하면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잡아 붙드는 신체 단련을 하고, 문고리를 던지는 이들에게 맞서 내 이후의 세대의 아이들에게 '지붕 꼭대기'를 살피라는 말을 전하는 그녀의 이야기의 끝에는, 어머니와의 만남이 있다. 거의 다 지워져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었을 흔적의 '어머니'. 이 둘의 만남이 공교롭게도 '문 앞'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어머니가 녹아 안이 된다'「불이야」 부분. '녹는 점'은 물질이 제 형태를 지키는 한계로서의 온도이다. 가부장제로 이뤄진 가족의 녹는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머니. 어머니가 녹으면 이 집도 끝이에요. 라는 탁월한 설명 앞에 도착한다. 이 집을 태우는 건 바깥에서 던진 불씨가 아니라 가부장제의 충실한 복역자로서의 어머니가 자신의 온도를 기억해 내는 일이다. 그간 어머니의 노력은- 인간의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일들은 대게-'믿음'의 소산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다. 이제 그 혼신의 힘을 그만 두세요. 그녀가 말한다. 

문 앞의 어머니
어머니가 녹아 안이 된다
안이 녹아 불이 된다
이 집은 믿는 집이야

「녹는점」
 
『온갖 것들의 낮』은 부서진 자리가 폐허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빛이 얼마나 환하게 들어올 수 있는 지 상상력을 보여준다. 그 낮을 보려면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자리와 나 스스로가 한 번은 깊은 나락에 이르러야 한다. 이 일을 대신하는 이, 시인은 이것을 먼저 다녀와서 들려준다. 이 책의 화자는 대체로 두 갈래의 이야기를 전했다. 하나는, 아프고, 잠이 들며, 병들어 새벽 4시를 보는 나의 폐허가 만난 낮이다. 이 글에서 제외된 이야기이다. 또 하나의 줄기는 '여자로 살기'이다. 저 바닥의 껌은 다 무언가? 그게 어디와 연결되어 있나? 여자는 왜 말을 하지 않는가? 그녀의 입은 왜 그렇게 작은가?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 

'여자'의 서사를 불러내고 싶었다. '욕심'이라고 말해도 좋다. 더 내고 싶으니까. 나는 유계영의 시집을 이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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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계는 고립되어 있었죠. 베토벤은 청력 상실로 인해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어 있었어요. 빈 음악계에서도 베토벤은 비협조적인 기질로 인해 동떨어진 존재였고요. 바그너가 그랬죠. "베토벤의 시선은 외부 세계에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거스르는 불쾌한 것들만을 보았다."


(...)베토벤의 입장에서 상상해보세요. 작곡 실력은 확실한데 귀먹

은 음악가가 오케스트라 음색이나 아름다운 화음 쪽으로 호기심을 끌고 가진 않겠죠. 당연히 형식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싸울 거라고요. 그의 비극, 그의 위대함은 자신에게 '들리지 않는'음악을 이용해서 '바라보는' 형식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는 겁니다. 소재에 대한 무관심, 과감하거나 새롭지 않은 음악언어(특히 리듬에 있어서), 하지만 엄청난 변주를 가능케 하는 대답한 형식이 이로써 다 설명됩니다. 


베토벤은 음악에 대한 생각 자체를 바꿔놓았어요. 그래서 음악이 잃은 것을 되찾기까지 꼬박 한 세기가 소요되지요. 


<음악의 기쁨 2>, 8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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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째 보고 있는 사랑스러운 책. '사랑스럽다'라는 말을 바로 이 책을 들어 전하고 싶을 정도이다. 작곡가이자 음악학자인 롤랑 마뉘엘과 피아니스트인 나디아 타그린이 주고받는 대담 형식의 책. 이들의 대화는 상대와, 음악에 대한 경의를 갖추면서 재치 있고, 서로의 견해를 타협하는 바 없이 지적이며, 유쾌하다. 그들의 대화 언저리에 앉아 어느새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보면 한껏 기분이 좋다.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행복하다. 말하자면 이런 대목에서.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제4번 이야기를 하는 중)


그 훌륭한 안단테는요?

그래요! 정말 훌륭한 안단테죠. 피아노가 비르투오소의 역할을 망각하고 계속 즉흥 연주를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한편, 오케스트라는 규칙적인 보폭으로 행진하는 것 같아요. 외롭게 고립된 베토벤 본인과 악기들로 구성된 집단이 나누는 대화 같다고나 할까요.


<음악의 기쁨 2>, 353p


'그 훌륭한 안단테'에서 '안단테'가 무엇을 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가운데, '훌륭한' 을 붙여서 묻고, 그게 정확한 설명이라는 듯 당연히 받아서 나가는 대화 자체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낀다. 음악과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는 각국의 역사, 전후 사정, 그 나라의 민족성(?), 음악가들과의 교류(인간 관계), 음악가의 인생, 같은 것과 종합적으로 소개되어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용한 두 대목 모두 베토벤에 대한 이야기이다. 총 4권으로 구성된 책 중 부제에 두 번이나 베토벤이 들어간다. <음악의 기쁨 2-베토벤까지의 음악사>,  <음악의 기쁨 3-베토벤에서 현대음악까지> 


음악가를 소개하기 전에 자기들끼리 어찌할 바 모르게 설레 하는 모습도 재미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


나디아 타그린 (바흐의 전주곡 하나를 피아노로 친다) 

매일 먹는 빵...... 결코 싫증날 리 없는 양식, 놀랍고 신기한 것이 피곤해지면 언제고 돌아갈 바로 그것, 바흐의 작품은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음악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새삼 찬사를 보내기가 어색할 정도입니다. 

동감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엄마 아빠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아이처럼 난처해진다니까요. 

드디어 우리가 한마음이 됐군요!


"매일 먹는 빵......" 말줄임표 부분부터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드디어 우리가 한마음이 됐군요!" 대목에서는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바흐에 대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찬사를 쏟는다. 거의 모든 책(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든 어느 날 겨우 찾은 행복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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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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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를 슬퍼하는 사람

미싱 영업을 하면서 '실'의 냄새와 촉감으로 감수성을 붙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상수는 단박에도 영업을 잘하는 이가 아니다. 그는 '제인에어가 어린 시절, 불우 아동들을 위한 기숙학교에 갔을 때 경험했던 그 교사의 차가운 공기가 상상되어 울었'던 이다. 이건 단순히 책을 많이 읽어서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니다. 소설 속의 공기가 상상되어서 우는 이. 그의 정체성은  두 개로 갈라져 있다. 그게 직장에서의 삶을 어딘가 모르게 자꾸만 뒤쳐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고, 그의 퇴근 이후의 삶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가 다름 아닌 낙하산이기 때문이라는 오해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완성한다. 국회의원의 아들, 불우한 어머니의 생을 지켜본 감수성 짙은 아들, 아버지를 증오하지만, 이 회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다름 아닌 아버지 때문이다. 가부장적이며 남성성만을 갖고 있는 이 집안의 남자들에게 질려 있으면서도 그것에 맞설 만한 힘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를 어렵풋이 알고 있지만 해결할 수 없다. 이 대척점에는 퇴근 후에 '언니는 죄가 없다'페이지 운영자로 활동하며 사랑에 아픈 이들에게 조언해주는 언니로 둔갑하는 그가 있다.


괄호를 읽지 않는 사람

상수가 일을 하는 비교적 위 직급의 경쟁, 일의 실재를 보여준다면, 경애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대신 경애가 간직하며 살아왔던 기준을 보여준다. 그녀에게는 그래야 하는 것과 그러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 두 가지 일에 괄호를 끼어 넣으며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판단하는 것과 달리, 경애의 문장은 단순하다. (직장의 눈 밖에 나고 돈을 못 벌지도 모르지만) 파업을 해야 하는가? (파업을 망칠지도 모르지만) 지도부의 성추행을 알려야 하는가? 그녀는 괄호 안의 말과 밖의 말을 잘 구분한다. 문장에서 더 가중되어야 한다고 믿는 괄호 안의 말을 읽어내는 정도가 사회적응도, 잘사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쳐주는 가운데 그녀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녀는 파업을 위해서 삭발까지 했던 이 중에 하나였지만, 파업을 망치게 했다는 욕도 들어야 했다. 조 선생은 그녀에게 절대로 사표를 쓰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녀는 그것만을 지키며 버텨왔다. 이런 것을 상관하지 않은 이의 말로는 무엇일까. 누가봐도 좌천중인 팀에 합류해 성과를 내는 거였다. 그것도 베트남에가서. 그녀의 마음은 그녀를 늘 벼랑에 서 있게 한다.  


인터넷과 교실 책상, 어떤 한 사람을 두 사람이 아는 일

이 둘은 E 혹은 은총이라는 사람과 연관되어 있다. 뭐 이런 우연이. 라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연관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일 뿐. 현실과 가상 세계 모두 지분이 있는 80년대 후반, 90년대 사람들은 이것을 신기해 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어떤 대화로, 어떤 이의 팬으로, 어떤 관심사의 하나로 깊게 만났던 사람은 현실에서 마주치며 생활하는 어떤 사람의 존재보다 더 실감 나게 살아있을 수 있고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이 단지 우연인 것은 아니다. 


한 사건을 기억하는 두 사람의 마음의 차이

같은 때에 둘 다 E와 은총을 잃었다. 그는 한 사람이고, 그것은 사고였으나 인간이 만든 재난이었다. 상수는 은총과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음에도 은총의 죽음에 대해 깊게 의문하지 않았다. 이때 상수가 기억하고 있던 건 경애를 몹시 아꼈던 은총의 마음이었다. 경애는 E의 죽음 앞에 괄호가 두세 개는 더 끼어 있었던 일을 기억한다. 그 괄호 중 하나는 탈출은 중요하지만 돈은 내야 한다 라는 사람에게 있었고, 또 하나는 '노는 애들'이 '그런 곳'에 가서 당한 사고라니 별로 할 말이 없다라는 시선에도 있었다. 이 둘은 각각의 마음을 간직하고 어른이 되었다. 다 자란 이들의 행보는 자신이 더 무겁게 기억하는 마음을 따른다. 사랑에 다치는 마음을 위로하는 일과, 사회에 다치게 하는 마음에 대항하는 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흰 윤리

이쯤에서 뻔하지만 기대하는 바와 같이 상수와 경애가 서로의 과거를 알게 되고 서로를 보듬는다는 이야기가 와야겠지만 소설은 녹록치가 않다. 같은 영업부 내에서도 성과를 빼앗기고 그에 대해서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상수와, 그런 상수를 상사로 두어서 조금도 힘도 나지 않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고 그를 모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는 경애는 좀처럼 친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한 땀씩 오가는 이야기는 혹시 E와 은총을 상기시켜 편하게 다가서지지도 않는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여기다. E와 은총을 아는이라고, 서로를 특정하게 된 순간에 기쁨이 오지 않는 것. 이 기쁨을 연기하는 것은 소설이 실제와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그런 상황에 있더라면 기뻐서 E와 은총의 이야기를 꺼냈을까? 서로가 모르는 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새로운 상처일 수 있다. 두려워하는 것. E와 은총이가 영원히 부재하는 중에 어떻게 내가 알고 있는 E와 은총을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그건 영원히 꺼내지지 않는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내가 당신의 일부를 안다는 것이 상처가 되지 않을지를 오래 고민한다. 


어렴풋한 혹시는 소설의 전반부에서 일찌감치 들통나지만 이를 고민하는 일은 소설의 내내 이어진다. 어쩔 수 없이 자수하듯, 혹은 고백하듯 자신들에게 중요했던, 지금은 없는 E와 은총의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그 후에 어떻게 서로를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가장 어렵고 흰 윤리가 여기 있다.  


마침내 다른 종류의 마음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둘은 서로의 마음의 가중을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고 따라가게 된다. 한 쪽으로만 자꾸 커져서 균형을 잃은 사람처럼, 분열하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던 이들이 마침내 다른 종류의 마음을 들여놓게 되었을 때, 비로소 소설은 연애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둘을 하면서 사회 속에서 살아있는 것을 확이하는, 월요일 출근을 준비하면서 바로 이 책을 읽을 '독자'를 같은 선 상에 놓게 된다. 비로소 입체적으로 나와 같은 시대의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때문에 누가 이 책을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상수가, 혹은 경애가, 그리고 당신 중 누가 읽어도 말이다. 


'마음은 폐기될 수 없다'는 소설의 주된 물음은 우리가 살기 위해서, 괴롭지 않기 위해서 갖고 있던 '마음'을 버리고 싶은 때를 떠올리게 한다. 상수가 '언죄다'에 쏟은 마음을 버리고 경애가 괄호를 읽지 않는 마음을 버리면 그들은 더 나은 상수와 경애로 살게 되었을까.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 마음을 버리도록 요구하는 등과 밥상을 견뎌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그렇게 견뎌야 하는 이유는 다른 종류의,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결의 마음을 하나 더 보태서 내가 갖고 있는 마음에 용기를, 박동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타인의 마음 한 가닥을 받아서 나를 지킬 수 있고, 그렇게 내가 사는 곳과 나 같은 다른 사람이 사는 이곳을 낫게 만든다고 믿게 된다. 라고. 


경애의 '마음'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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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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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레 G '검은 주머니'

그 때를 '과학시간'이라고 불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유년의 어느 수업에검은 상자(주머니)에 손을 넣어 물건을 꺼내는 활동을 한 적이 있다. 그때의 두근거림을 기억한다. 두려움, 궁금함, 놀라움. 여러가지 촉각을 잘 느끼게 하는 것으로 두려움 속에서도 마침내 재미있는 활동으로 남아있다. 소설은 그 검은색 주머니같다. 오감을 문장에 맞긴 채 읽어가야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소설엔 손에 들리는 거라곤 축축하고, 무겁고, 냄새가 나며, 보고 싶지 않은 것들 뿐이라는 점. 거센 숨결, 욕지거리, 음울하게 지껄이다가도 고음의 목청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쇼가 시작되었다.


 

욕망의 잔치에 잘 오셨습니다

도빌레 G의 스탠드 업 코미디의 드러난 주제는 '사드'의 그것과 같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해 보지 않은 욕망을 대신 까발린다그의 이야기는 금지된 것들을 욕망하도록 도와주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세련된 말장난같아 저속함이 쉬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쇼에는 두 가지 장치가 있다. 맥락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에 스스로를 찬탄하게 만들기그러나 그 정도의 지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육욕의 쾌락을 발견하고 즐기게 하기



고통스러운 쾌락 끝에 만난 지독한 광경

두 개의 트랩에 관객의 즐거움은 배가 되며, 관객은 '' 버리고 스포트라이트 주변의 어둠으로 숨어들어 가책없이 그를 지켜보게 된다. 그러나 도발레 G의 쇼는 그게 다는 아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느끼게 될 이야기를 함께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원하지 않았으나 잊어버릴 수도 없도록. 바로 도빌레 G의 이야기이다



이 고통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영원히 이야기해도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될 수 없는 그의 인생은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시작한다. 이를테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 '테이블과 벽 사이에 갇힌 채 아버지의 허리띠 채찍질을 받아내는 조그만 아이', '하루종일 땅바닥만 바라보고 넝마를 뒤집어쓰고 고무장화를 신고 걸어다닐 수 있는' 엄마, 그런 엄마에게 들리는 수군거림을 멈추기 위해 엄마 뒤를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가는 아이.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시대에 휩쓸려 '다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말하는 대신 자신의 삶과 부모의 생을 조롱하고 비웃으며 코미디의 소재로 써내린다.  


아버지의 눈에서 '검은 공깃돌'을 발견하고 짐승 한 마리의 진화를 기억하는 아이,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물구나무를 서서 걸어 다녔던 아이에게 '일상'이 존재했을까. '사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까. 동화 속 괴물이 은유가 아니라 일상에 존재한다고 어떻게 믿지 않을 수가 있을까이 아이의 성장을 어떻게 두렵게 지켜보지 않을 수 있을까. 마침내 한 무대에서 찾게 된다.  



그로스만의 주제: 자랄 수 없는 유년, 오직 한 명의 타인

도빌레 G는 원한 적도 없이 환멸에 찬 생을 살아 마침내 57살이 되었다이 나이는 작가가 작품을 쓴 나이와 비슷하다. 그의 전작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 <나의 칼이 되어줘>에서의 주제가 마침내 이 작품으로 모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만하다. 30대에 쓴 소설 <사랑 항목을 참조하라>에서는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그리고 작가가 된 후의 이야기가 녹여져 있다. 치유될 수 없는 것을 글 속에서 치유하기 위해 나치를 동물에 가두는 주술을 하고, 사람이 연어가 되고, 바다와 사랑을 하고가해자와 피해자가 당시의 시공에서 만나게 하는 등 그의 동화같은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나의 칼이 되어줘>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 믿을 수 있도록 세상에 단 한 사람, 하나의 타인을 갈구하는 병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우는 것이 맞습니까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은 압축적으로 이 모두를 담아낸다부모의 이야기부터 자신의 유년에 대한 무자비한 조롱이 이끌어가는 목적지는 자신에게 '슬퍼하는 방법' 알려주지 않았던 인생의 첫 번째 장례식이다. 도발레가 살았던 공동체에는 슬픔에 대해서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우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 모르는 어른이 아이를 위로하고자 전해 준 이야기가 '유머'였고,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우는 시간을 포용할 수 없는 사람들, 슬픈 일을 슬퍼할 수 없게 버려두는 방치하는 사람들, 마땅한 감정을 사용하지 못하고 어른이 된 이가 있다. 전작<나의 칼이 되어줘>에서 사랑을 빙자해 폭력으로 사용한 타인의 갈구를 들어줄 수 있을 정도로 다듬었다. '나를 봐주면 좋겠어. 나를 봐주면, 정말로 봐주면, 그런 다음에 말해주면 좋겠어.'라고. 자신의 유년을 함께 보낸 친구, 아비샤이에게 부탁한다.  



'피해자'라는 가면: 연약하고 착해서 우는 사람들

도발레 G는 우리가 생각해 온 일반적인 '피해자'상을 뒤집는다. 연약하며 착해서 불쌍해지며 우는 사람들. 피해자는 도와야하는 사람들이라는 등식을 파괴한다. 사회에서 '피해자'는 보호하고 무엇보다 다룰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도발레 G는 그렇지 않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영혼을 갉아먹히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이런 명명이란 그저 또 다른 가해자의 탄생을 막기 위한 억압의 장치는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야말로 악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을까. 거의 악마가 된 도발레 G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매우 빠르게 도발레의 삶 자체가 '피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삶이 위험하며, 그가 있는 사회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더해서 든다. 복구 불가능한 삶. 같은 인간이라고 놓을 수 없는 선을 발견하게 된다



한 번도 말해진 적이 없는 피해자의 증오

'나를 봐달라'는 그의 부탁은 동시에 독자들에게 건네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검은 주머니를 뒤집어 쓰고 그는 아직도 희망 같은 것을 기다리고 있다. 증오가 다 말해지고 나면 끝내 나오게 될 희망 같은 것을.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언어를 말이다. 연민이나 사랑을 원하지 않고, 죄책감과 반성을 원하는 바 없이 역사가 기억할 수 없는 사실을 기록하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으로 탄생한 인간의 마음을 보여준다전쟁이 보여주는 끔찍한 결과는 바로 이런 인간의 탄생이라고.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피해자들의 파괴되 영혼 자체라고 말이다


도발레 G는 무대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몸을 몇 차례 보여준다. '수평으로 흉터가 있는 쑥 들어간 배, 좁은 가슴, 무시무시하게 두드러진 갈비뼈, 궤양 때문에 군데군데 쪼그라들고 반점이 있는 팽팽한 피부.' 이것은 홀로코스트로 죽어 간 이들의 몸이며, 동시에 그곳에서 살아남은 부모의 몸이다.  몸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생생한 목소리가 내리꽂는 무대의 기이함. 우리는 어둠을 견디기 위해 스스로 어둠이 된 인간에게서 오는 공포를 읽고 있다


몸과 목소리의 부조화는 결국 하나의 진실을 향한다. '그는 병이 들었다.' 아비샤이는 마침내 깨닫는다그러나 그렇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가 쇼를 하고 있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게 만든다. '그의 조건에 이렇게 눈을 감고, 이렇게 나 자신에게만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어떻게 나는 계속 내부로만, 나 자신의 삶으로만 고개를 돌렸던 것일까?'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일이 옳은가에 대해서까지 묻는다



아직도 절규가 들리지 않는다면 당신의 인간됨을 돌아볼 것

이를 말하기 위해 도발레 G는 병든 몸을 이끌고 자신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다정신을 바짝 타들어게 할 언어도 몹시 익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도발레의 쇼에 사람들은 내내 웃는다. 술 한잔과 머리가 띵해질 이야기를 얻기 위해 앉은 자리에서 홀로코스트 이후의 삶을 엿보게 되었다


그러나 도발레는 검은 주머니에 사람들을 가두기 위해서 쇼를 한 것은 아니다. 홀로코스트 밖의 인간이, 그러니까 다른 종류의 인간이, 이 검은 주머니 안쪽을 잡고 입구로 나가 뒤집어주기를 바랐다자신이 도저히 끌고 나올 수 없는 고통받는 영혼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마침내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나오기를 말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내가 겪지 않은 슬픔을 생각만으로 아파하게 되는 거라고. 내가 겪은 슬픔도 아니면서 점점 더 아파하게 되는 내 모습을 보는 거라고. 그런데 피해자들이 코미디 쇼에 가야지만 귀에 이 환난이 들리는 세계가 얼마나 잘못된 거냐고, ? 어떻게 웃지 않을수가 있느냐고 말이다. 이 소설을 덮고 돌아봐야 할 것은 당신의 주위이다.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의 인간됨을 돌아보는 것이 좋겠다. 인간적으로 안내한 순서이나 뒤집어 살피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읽기 굉장히 고통스러운 소설이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에 대 다수가 아직 들을만 한 것은 당사자에게서 비롯된 언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울만한 이야기들은 아직도 이 이야기가 얼마나 피해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늠하게 도와줄 뿐이다. 정말로 고통에서 비롯된 언어는 울 수도 없게 만든다.  

*이 소설에는 여성 혐오가 끝없이 나온다. 정확히 9쪽부터 나온다. (책은 7쪽부터 시작한다조롱과 비난의 대상이 언제나 여성으로 희화화되며 동성애, 병을 조롱하는 놀라운 표현이 끝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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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과 진실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2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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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현실이 꿈이 될 때가 있다.



마주쳤던 상황 하나, 지나온 거리 몇 개, 아는 사람 몇 명만으로도 꿈은 이야기를 만든다. 그 속에서 나는 제법 마음대로 있을 것 같지만 오직 나만이 현실의 나를 벗어나지 않아서, 어렵게 마련된 꿈을 깨뜨린다. 이런 꿈이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꿈조차 현실적으로 깨지는 슬픔'이랄까. 작게 행복하려고 했던 꿈이 끝나고 나면 현실로 편입되어 더 큰 불행의 자리로 오는 상황에 마주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꿈의 제인>에서 소현의 몇 개의 현실과 몇 개의 꿈을 반복해 보여준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사이 주변의 인물은 상황에 맞게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단, 소현만 변하지 않는다. 소현은 어떤 사람인가. '저를 받아주는 곳이 이곳 뿐이어서 왔어요.' 병욱의 팸에 들어온 이유를 지수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다.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비단 소현뿐만이 아닌데 그녀는 유독 두드러진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는 모두 가출 청소년이다. 집을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 그 속에서의 나를 견딜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또래들로 이뤄진 공동체에서도 사는 건 쉽지 않다. 팸의 대장을 아빠 혹은 엄마로 불러야 하거나, 말도 안되는 신고식을 치러야 하거나, 술과 담배의 날들, 바에가서 돈을 벌거나, 사회의 법칙에 부스러지는 아이들은 이 얄팍한 법칙에 살아남느라 비참하다. 이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어디에 가야할지 모른다... 하나의 세상을 택했다면 그 안에 소급되는 규칙도 하나. 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 안의 법칙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있다. 이중고를 치르고 중에 소현은 내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 정호가 떠난 탓이다. 생각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자신과 똑같이 닮은 다른 사람 찾기

그러나 소현은 자신이 찾는 이가 정호가 아니라 소현 자신임을 모른다. 헤어짐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나쁨이 끼어들겠으나, 나의 질량과 부피를 다시 확인하고 채우거나 덜어내는 과정이 있다. 기꺼이 나의 자리를 소중한 이에게 내어주었다. 아니면 저기까지, 나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다. 내것이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 다시 나만의 어떤 것으로 채워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계가 서서히 닫히고 열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현은 거의 없어지고 희미해진 자신의 자리를 오로지 정호의 부재로만 생각한다. 얼마나 힘이들까. 소현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정호를 찾느라 힘들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습니다

그래서 소현이 갈구하는 공동체를 만나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현은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질량이 거의 없다. 그곳에 들어갈 '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수도 없다. 완벽하게 죽어버리는 지수처럼, 소현은 죽어지지도 않는다. 그런 소현이 다른 사람을 찾을 때, 나와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을 때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영혼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합니다. 43


<파레시아>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 '발언의 자유'등으로 번역된다. (파레시아는 푸코의 후기 사유의 핵심이 되는 말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찰을 위한 전략적 도구인데) 작게는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할 것 같았다. 소현을 넣어 위의 문장을 다시 쓸 수있다. '소현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소현의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한다.' 여기서 읽어야 할 것은 다음 구절까지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자, 그래서 파레시아를 가진 타인, 즉 파레시아스트를 필요로 하는 자는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 역시 파레시아스트가 자기에게 말하게 될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파레시아스트에게 보내야 합니다. 64


제인은 파레시아가 될 수 있을까
<꿈의 제인>은 소현이 자신의 파레시아스트(진실을 말하는 사람)를 찾는 여정이다. 동시에 진실을 들을 용기를 키워 '꿈의' 제인에게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시간이다. 제인은 몇 가지 중요한 진실을 소현에게 말해준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이야.' 그건 케익을 먹는 중에 일어났다. 인간은 케익 한 조각에도 시시해질 수 있으니까 언제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인간은 불행이 지속되는 중에 드문 드문 행복하다는 것. 이런 말을 하는 제인은 어떤 사람인가. 태어나면서 거짓말쟁이가 되어 자신을 부정당했던 이다. 내가 나의 진실을 말하려고 애써왔지만 세상은 들어주질 않는다. 제인의 파레시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로 무대에 서는 제인. 제인 역시 소현처럼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헤맸으나. 이제는 자신이 거둘 수 있는 더 약자인 이들에게 파레시아스트가 되어준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된다.

소현은 영화 내내 편지를 쓴다. 천장을 열어 편지를 놓는데, 너무 깊숙히 밀어놓으면 보이지 않을 것 같고, 바깥으로 너무 나오면 누구나 쉽게 볼까봐 적당히 삐져나오도록 편지의 자리를 고심한다. 그러나 받는 이가 없으므로 그 편지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알고 있을까. 그녀가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던 그 말들은 우선 자신에게 한 번씩 읽혔다는 것을.



밀쳐지는 살의 모양

영화 마지막에 정호와 소현이 함께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호가 일하는 바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소현. 정호는 사이다 한 캔을 앞에 놓으며 소현에게 그만 가라고 말한다. 일 끝날 때까지 그냥 있을게. 정호는 소현을 밀어내고, 무기력하게 소현은 그곳에 있고 싶다. 소용없이 밀쳐지고 밖으로 나가게 되는 소현. 내가 이 영화에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 장면은 이쯤이었다. 느리게, 소현이 밀쳐지는 뭉근한 모양의 살을 안다. 나는 이렇게 밀쳐지는 사람이었고, 이렇게 밀어낸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잘 보이던 거울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게 없어지고 나면 수만가지로 비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보이는 거울을 마주해야 한다.



나는 (진실을 들을)용기가 있는가. (진실을 말해 줄)타인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전에, (진실을)말할 용기가 내게 역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는 그걸 암울하게도 창문 밖으로 보여준다. 그 자리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채워진 사슬 속에서 자유로 뚫린 구멍이 그 밖에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저것 뿐이라고 할때. 더 이상 시시해질 수 없는 몇몇은 창문 밖의 자리를 택했다.



그는 살아 있기 보다는 진실을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106





+
한 번 더 봐야 이해할 수 있을텐데 아쉽다. 한 번 더 보기에는 마음의 쓰임이 큰 영화.

<담론과 진실>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인용 출처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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