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플친님 몇 분의 서재에서 우연히 이 시집의 제목을 보았을 때는 시집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시를 잘 몰라 시집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좀 오해했다.
시집의 제목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끌려는 깜찍함이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속으로 답한다.
‘네. 키스할 땐 눈을 감는 쪽...‘
그러니까 시를 잘 모르는 나는 인용의 시를 읽어 보아도 잘 와닿지 않았고, 시집의 제목도 오독하여 <당신은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가.>라고 읽어버려 혼자 즉답을 했다는 것이다.
잊고 지냈었는데 어느 날, 김혜리 기자의 <조용한 생활>에서 이슬아 작가랑 구독자 사연 편지를 읽는 낭독 코너에서 잠깐 귀가 번쩍했다. 8월호에선 <아기와 나>란 소재로 네 개정도의 사연이 뽑혔다. 그 중 한 청취자의 사연에 고명재 시인의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나 보다. 그래서 시인의 시가 낭독되었고, 이슬아 작가가 이 시인에 대해 잠깐 언급을 해줬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응?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또 바로 그날, 유튜브를 보는데(요즘 유튭 중독자ㅜ) 편집자 k님의 영상에서 본인이 이 시집을 직접 편집했다며 시집을 소개하는 장면이 눈에 확 들어왔고, 그러다 보니 얼른 읽고 싶어져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시집이다.
하 구구절절...
시집을 읽기 전에 이미 시인의 배경 지식을 접하다 보니 첫 장을 펴 읽은 시인의 말에서 이미 심장이 쿵...마음이 습해졌다.
어느 여름 날, 나를 키우던 아픈 사람이
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온 세상이 멸하고 다 무너져내려도
풀 한 포기 서 있으면 있는 거란다.
있는 거란다. 사랑과 마음과 진리의 열차가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거란다.
2022년 12월
고명재
시인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식당일로 바쁘셔서 비구니 스님이 계신 절에서 자랐다고 한다. 내 마음을 끌었던 시인의 이력 중 비구니 스님 손에서 자랐다는 대목이 남다르게 다가왔기에 시집을 선택하여 읽게 되었다.
‘나를 키우던 아픈 사람‘은 노스님이셨던 것이다.
시인의 말에서 느끼게 되는 이 습함은 신파와는 조금 다른 마음이 정제되는 느낌이 든다. 절로 고요해진다.
습함과 정제, 고요와는 맥락이 이어지진 않지만 내 마음에 젖어드는 습함은 여기 저기 난분분 흩뿌려지지 않는 한 곳에 착하게 가라앉은, 고요한 습함이란 생각이 들게 한다.
책을 받아들고 시집의 제목을 다시 정확하게 읽었다.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시집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까불었던 부끄러움을 뒤로 하며 시의 제목이 깃든 시를 읽어보았다.
............
가장 투명한 부위로 시가 되는 것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미래가 빛나서
눈 밟는 소리에 개들은 심장이 커지고
그건 낯선 이가 오고 있는 간격이니까
대문은 집의 입술, 벨을 누를 때
세계는 온다 날갯짓을 대신하여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미래가 빛나서, 그 빛을 차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시기에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이란다.
좋은 일이 생겨 마음이 붕 떠오를 때 눈을 잠깐 감아보는 것도 좋은 습관이겠단 생각이 든다. 빛나는 다음의 시간을 조용히 기다려 보는 것. 물론 눈을 떴을 때 기대 이하인 현실이 눈 앞에 딱 나타난다손 치더라도....가장 투명한 부위, 가장 섬세한 부위인 우리의 입술에 세계가 날갯짓을 대신하여 날아온다고 상상한다면 키스보다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시인은 엄마의 손길을 떠나 비구니 스님들 곁에서 자란 시간이 많았다는데 사랑의 결핍이 아닌 올바른 사랑을 잘 받은 사람의 손길로 글을 꾹꾹 눌러 놓았다.
어쩌면 종교적인 사랑이 합해져 일반적인 사랑보다는 좀 더 투명한 색을 띄는 사랑처럼 읽힌다.
시집에선 엄마와 가족의 사랑도 읽히고 비구니 스님의 사랑도 읽힌다.
문득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너무나 진부한 질문이라 누군가 답하기 전에 미리 질문을 다시 우겨넣고 싶을 정도로 사랑에 대해 생각해보려다가도 뻔한 답에 그냥 접게 되는 단어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좀 다른 세상의 단어처럼 들리고 읽힌다.
‘1.사랑은 볕 안에서 되살아난다 그래서 뿌리식물은 뱃속을 태우는 것이다.
........
5. 늙은 사람의 손은 정말 효험이 있다 배가 돌고 장이 녹고
귓불이 펴지고 이 힘으로 만두를 빚곤 하던 때
6. 대추차를 마실 땐 꾹꾹 씹어야 한다
그래야 눈귀코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나온다
7.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급하다고, 다짜고짜 가게에 쓸 재료를
부르기 시작했다 멸치 마늘 양파 홍합 갈치 순두부 갑자기 꽃을
하나 사달라 했다
8. 꽃을 사서 엄마 손에 쥐여주었다
9. 해바라기유를 잘못 알아들었다
........‘ (환, 12~13쪽)
‘매일 사랑하는 사람의 유골을 반죽에 섞고
언덕이 부풀 때까지 기다렸어요
물려받은 빵집이거든요
무르고 싶은 일들이 많아서
사람이 강물이죠 눈빛이 일렁이죠
사랑은 사람 속에서 흐르고 굴러야 사랑인 거죠‘
(페이스트리, 32쪽)
‘아주 늙은 개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
어쩐지 걷는 게 불편해 보여
옳지 그렇게 천천히 괜찮으니까
올라가서 이렇게 기다리면 돼
어느 쪽이 아픈지 알지 못한 채
둘만 걸을 수 있도록
길이 칼이 되도록
귤을 밟고 사랑이 칸칸이 불 밝히도록
여섯 개의 발바닥이 흠뻑 젖도록‘
(둘, 43쪽)
그때 나는 잔혹했다 동생과 새에게
그때 나는 학교에서 학대당했고
그때 나는 모른 채로 사랑을 해냈다
동생 손을 쥐면 함께 고귀해졌다
(소보로, 46쪽)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등불을 켜야지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56쪽)
사랑은 어쩌면 주고 받으며 나누는 것이 아닌 사람 속에서 흐르고 구르는 생활의 달인처럼 생생한 그 어떤 무엇인가, 라고 사랑의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사람들 속에서 흐르고 구르다 보면 언젠간 절로 익어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어설프게 익어서 익자마자 물러터져 있는 사랑일지라도, 귤을 밟으면 사랑이 칸칸이 불을 밝혀지는 것, 헛물을 켜는 것도 사랑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고 하니 어설픈 사랑도 사랑일 수 있겠다.
해바라기유를 잘못 알아듣고 해바라기꽃을 사다 주는 그 마음도 분명 어설프지만 예쁜 사랑일테고...
시집엔 유난히 엄마 이야기도 많고, 음식 이야기도 많다.
가게문을 닫고 우선 엄마를 구하자 단골이고 매상이고 그냥 다 버리자 엄마도 이젠 남의 밥 좀 그만 차리고 귀해져 보자 리듬을 엎자 금(金)을 마시자 손잡고 나랑 콩국수 가게로 달려나가자 과격하게 차를 몰자 소낙비 내리고 엄마는 자꾸 속이 시원하다며 창을 내리고 엄마 엄마 왜 자꾸 나는 반복을 해댈까 엄마라는 솥과 번개 아름다운 갈증 엄마 엄마 왜 자꾸 웃어 바깥이 환한데 이 집은 대박, 콩이 진짜야 백사장 같아 면발이 아기 손가락처럼 말캉하더라 아주 낡은 콩국숫집에 나란히 앉아서 엄마는 자꾸 돌아간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고 오이고추는 섬덕섬덕하고 입안은 푸르고 나는 방금 떠난 시인의 구절을 훔쳤다 너무 사랑해서 반복하는 입술의 윤기, 얼음을 띄운 콩국수가 두 접시 나오고 우리는 일본인처럼 고개를 박고 국수를 당긴다 후루룩후루룩 당장이라도 이륙할 것처럼 푸르륵 말들이 달리고 금빛 폭포가 치솟고 거꾸러지는 면발에 죽죽 흥이 오르고 고소한 콩물이 윗입술을 흠뻑 스칠 때 엄마가 웃으며 앞니로 면발을 끊는다 나도 너처럼, 뭐라고? 나도, 나도 너처럼, 엄마랑 나란히 국수 말아먹고 싶다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등불을 켜야지 예민하게 코끝을 국화에 처박고 싶어 다음 생엔 꽃집 같은 거 하고 싶다고 겁 없이 살 때 소나기 그칠 때 구름이 뚫릴 때 엄마랑 샛노란 빛의 입자를 후루룩 삼키며
(사랑을 줘야지 헛물을 켜야지, 56쪽)
시를 읽는데 그리움이 솟는다.
내 엄마도 병원을 찾아가는 버스 창 밖으로 나타난 바다를 바라보며 속이 시원하다고 몇 번 얘기했었다.
엄마의 고향이 바닷가였었고 그래서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된 그 순간을 두고 두고 후회했다.
병원을 다니며 함께 먹었던 수제비, 녹두죽, 호박죽, 대추차가 차례로 떠올랐다. 더 좋은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엄마는 소화를 못시켰다. 그래서 훗날 엄마와 먹은 음식은 그닥 기억나는 게 많지 않다.
9월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슬펐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다.
시집을 지금 읽어서일까?
무뎌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시집은 은근하게 나를 습하게 만들어준다.
이 그리움의 습함도 결국 엄마를 사랑했었기에 기인된 것이리라. 생각하며 키스할 때처럼 눈을 감는다.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미래가 빛나기 때문이다.
나는 빛을 보면 눈이 시리기에 당연히 눈을 감아야만 한다.
그리고 세계가 날갯짓하며 날아오기를 바라본다.
잠깐 눈을 감으며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안구 건조증이 심했는데 시집 한 권으로도 예방 가능하겠구나.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