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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근 두 어 달동안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첫 권을 읽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읽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구입한지는 5~6 년이 되어가는데 이렇게 책 속지가 누렇게 변색되어 가도록 계속 놔둘 수 없었고, 페넬로페 님이 읽으시니 자극을 받은 김에, 그 분을 길잡이로 삼아 조금씩 읽어나가면 되겠구나! 싶어 책장을 넘겨 읽긴 읽었다.
첫 시작이 어려운 법! 시작만 한다면 다음 번은 또 당연하게 읽어야 하나 보다~ 라고 읽게 되지 않겠는가! 라는 아둔하고도 거창한 계획을 세웠을 무렵, '나보코프 문학 강의'를 도서관에서 빌려 와 읽기 시작하였었다. 그 책에 프루스트의 '잃,시,찾'에 대한 평이 포함되어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일단 잃.시.찾을 읽었으니 프루스트 편을 찾아 자신있게 읽어내려 갔는데 내가 놓친 부분들이 많아 '나, 혹시 다른 책을 읽었던 것인가?' 자괴감마저 들기도 했지만, 역시 작가는 위대한 독자!
일반인 독자들이 놓쳤던 부분들을 상세하게 분석하여 주인공의 심리 흐름을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으니 나보코프 작가의 강의를 눈으로 읽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나보코프는 절대 등장인물들에게 독자인 나를 감정이입 시키지 말라고 강조한다.
문장을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예술적인 기지로 상상하길 권한다. 그것이 훌륭한 독자라고 누차 말하지만, 읽다 보면 이미 감정 이입되어 나만의 경험 세계로 고속 승차를 해 버리곤 하여 훌륭한 독자, 그저 말없이 내려 놓게 된다.
잃.시.찾 소설은 특히나 감각을 끌어들이는 문장들이 곳곳에서 튀어 나온다.
시각,후각,촉각,미각등 오감을 자극하는 문장들이 많아 감정이입 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맛'을 통해서 과거에 같은 맛을 느꼈던 때의 시각적인 기억을 또렷하게 떠올리려는 시도가 계속 이어지는 유명한 문장들이 있다.
나는 켈트족의 신앙이 아주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신앙에 따르면 우리가 잃어버린 영혼은 어떤 열등한 존재나 동물, 식물 혹은 무생물 속에 갇혀 있어, 우리가 우연히 나무 곁을 지나가거나, 그 영혼의 감옥인 물건을 손에 넣는 날까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그러다 그날이 오면 영혼은 전율하고 우리를 부르며, 우리가 그것을 알아보는 순간 마법이 풀린다고 한다. 우리 덕분에 해방되니 영혼은 죽음을 정복하고, 우리와 더불어 살기 위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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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콩브레에서 내 잠자리의 비극과 무대 외에 다른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지도 오랜 어느 겨울 날, 집에 돌아온 내가 추워하는 걸 본 어머니께서는 평소 내 습관과는 달리 홍차를 마시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왠지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는 사람을 시켜 생자크라는 조가비 모양의, 가느다란 홈이 팬 틀에 넣어 만든 '프티트 마들렌'이라는 짧고 통통한 과자를 사 오게 하셨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기계적으로 입술로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은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이 기쁨은 마치 사랑이 그러하듯 귀중한 본질로 나를 채우면서 삶의 변전에 무관심하게 만들었고, 삶의 재난을 무해한 것으로, 그 짧음을 착각으로 여기게 했다. 아니, 그 본질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도대체 이 강렬한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 기쁨이 홍차와 과자 맛과 관련 있으면서도 그 맛을 훨씬 넘어섰으므로 맛과는 같은 성질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어디서 그것을 포착해야 할까? 두 번째 모금을 마셨다. 첫 번째 모금이 가져다준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세 번째 모금은 두 번째보다 못했다. 멈춰야 할 때다. 차의 효력이 줄어든 것 같았다. 내가 찾는 진실은 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차가 내 속에 있는 진실을 일깨웠지만, 그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 채 점점 힘이 빠져 가면서 무한히 같은 증언만을 되풀이할 뿐이지만, 내가 지금은 이 증언을 해석할 줄 모르나 나중에 결정적인 해명을 위해 내가 요구하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적어도 온전한 상태로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권 85~87쪽)
그러다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일요일에는 미사 시간 전에 외출 할 수 없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실제로 프티트 마들렌을 맛보기 전 눈으로 보기만 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빵집 진열창에서 자주 보면서도 먹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미지가 콩브레에서 보낸 나날과 멀리 떠어져 보다 최근 날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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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도 훨씬 뒤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구겨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89~91쪽)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신 보리수 차에 적신 마들렌 한 조각을 입에 물자 어린시절 어머니가 준비해주신 홍차와 마들렌을 먹고 몸에서 일어나는 특별했던 기쁨의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들이 눈 앞에 펼쳐지는 반가움을 느낀다.
나도 비슷한 경험들을 한 번씩 접하곤 하는데 나는 토마토를 한 입 베어물어 싱싱한 토마토 알갱이 과즙이 터지면서 토마토 특유의 신맛과 단맛이 느껴질 때면, 어린 시절 한 여름 마당 텃밭에서 토마토를 따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여름 오후 나절이 되면 배가 고파 엄마한테 배가 고프다고 징징거리면 엄마는 꼭 텃밭에서 토마토를 따 먹으라고 하셨다. 나는 몇 번 따먹어 봤기에 그 뜨뜻 미지근한 토마토가 먹기 싫어 못들은 척 하면 엄마는 직접 따다가 수돗가에서 씻어 기어코 한 입 베어물게 만드셨는데, 뜨뜻 미지근한 느낌 속에서도 탱탱하게 씹히는 신선한 식감과 그 토마토 향이 오랫동안 잊혀지질 않아, 지금도 한 번씩 싱싱한 토마토를 한 입 베어물어 그 식감과 향이 올라올 무렵이면 이미 내 눈 앞에는 어린 시절 마당 한 곁에 토마토가 심겨져 초록색, 빨간색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토마토 줄기 풍경과 마당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큰 대나무 장대 왼쪽과 오른쪽 빨랫줄에 매달려 나폴거리는 여름 옷들과 저녁 준비하기 분주한 엄마가 수돗가로, 장독대로, 부엌으로 왔다 갔다 보였다, 안 보였다....상상하다 보니 나는 훌륭한 독자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마들렌 이야기에 이미 나는 어린 시절 앞마당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암튼, 프루스트 만연체 꽃밭(알라딘 미미님의 표현)에 빠져야 하는데, 나는야 그 만연체 미각에 빠지고, 후각에 빠져 마들렌을 사러 온 동네를 휘젓다가 홍차랑 마들렌을 사다가 잃시찾을 읽으면서 홀로 만족했다.
마들렌을 먹으며 잃어버린 시간들의 기억들을 떠올린 마르셸은 '그 기억이 왜 그토록 반가웠는지 그때 알지 못했으며, 그 답을 알아내는 일 또한 한참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한다. 과거의 기억들은 계속해서 책에서 튀어나오곤 하여 마르셸에게 반가움과 기쁨을 안겨주곤 하는데, 그들의 의미는 놀랍게도 맨 마지막 권에서 화자의 감각과 기억을 연달아 강타하는 충격들이 융합되어 하나의 위대한 깨달음이 된 뒤에야 비로소 이해가 된다고 한다. 화자는 자신의 경험이 지닌 예술적 중요성을 의기양양하게 깨닫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간다고 나보코프는 설명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1906 년 가을에 파리에서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해서 1912 년에 초고를 완성했습니다. 그러고는 원고를 대부분 다시 쓰다시피 하면서 192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퇴고를 거듭했습니다. 작품 전체는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보물은 시간이고, 보물이 감춰진 곳은 과거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제목에 숨어 있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감각이 감정으로 변환되는 것, 밀려왔다 밀려가는 기억, 욕망이나 질투나 예술적인 도취감 같은 감정의 파도, 이런 것들이 방대하면서도 유난히 가볍고 반투명한 이 작품의 소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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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프리즘입니다. 그의 , 또는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빛을 굴절시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굴절을 통해 회상 속의 세계를 재창조하는 것입니다.(나보코픔의 문학강의 377~378쪽)
잃시찾은 어쩌면 제목처럼(잃어버린 시간을 찾는다.)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 그 감각으로 화자를 줄곧 예술적 감정을 증폭시킨다. 때로는 기쁨과 반가움일 수도 있고, 때로는 질투와 연민, 후회의 감정이 일 수도 있다.
인물의 세밀한 감정의 변화를 길게, 아주 길게 엿가락처럼 늘여 놓아 한 번씩 문장의 끝을 읽음과 동시에 문장의 첫 부분의 기억을 놓치게 되지만, 사물의 기억 만큼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도 예술적이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 준다.
내용들이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중후반부의 콩브레의 두 길, 스완의 집 쪽 메제글리즈 방향과,
게르망트의 시골 저택 방향의 두 길이 나오는데 그곳으로의 산책길에서 나타나는 흰색과 분홍의 산사나무꽃이며 비단향꽃무(스톡), 수련,수레 국화,쟈스민,제비꽃과 종소리와 첨탑의 모습등은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너무 아름다운 퐁경들이라 산사꽃나무를 네이버에 찾아보니 아름답긴 하더라.
특히 분홍색 산사꽃나무를 축제 분위기가 풍기는 것이 인공적 기교가 아닌 자연에 의해서라고 하여 어떤 꽃인가 싶어 살펴보니 대충 이런 꽃이다.
하얀 산사나무꽃 - 네이버
오솔길에는 산사나무 향기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울타리는 임시 제단 위에 쌓아 놓은 산더미 같은 산사 꽃들로 칸막이가 보이지 않는, 쭉 늘어서 있는 노천 제단 같은 모습이었다. 그 제단 밑으로 햇빛은 방금 채색 유리를 통과한 듯, 바둑판무늬 빛을 땅바닥에 그렸다. 산사 꽃 향기는 마치 내가 성모마리아 제단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이, 그 형태 안에 뚜렷이 드러나며 촉촉하게 내 주위를 감돌았고, 장식된 꽃들 역시 마치 성당의 붉은 복도 난간이나 채색 유리 창살 대에 투조 세공을 한 딸기 꽃의 하얀 살로 피어난 꽃들처럼, 저마다 방심한 표정으로 섬세하고도 눈부시게 빛나는 불꽃 양식 잎맥 무늬 수술 다발을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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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 꽃은 무한히 고갈되지 않는 풍요로움과 더불어 똑같은 매력을 주기는 했지만, 마치 백 번이나 연이어 되풀이 연주되어도 더 이상 그 비밀에 접근하지 못하는 맬로디처럼, 내게 그 매력이 무엇인지 더 깊이 알도록 해 주지 않았다. 나는 보다 신선한 힘으로 산사나무에 접근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잃시찾 1권 243~244 쪽)
분홍 산사나무꽃 - 네이버
그러나 흰색 산사 꽃보다 더 아름다운 분홍색이었다. 분홍색 산사 꽃 역시 축제 치장을 - 유일하게 진정한 축제라고 할 수있는 종교적인 축제로 치장했는데, 세속적인 축제란 것이 특별히 예정된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축제적인 것도 전혀 없는, 그저 어떤 날에 우연히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정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 그보다 더 풍요롭게 치장하고 있었다. 가지에 매달린 꽃들은 마치 로코코식 올레트를 장식하는 명주 술처럼 장식되지 않은 빈틈이 하나도 없도록 겹겹이 포개져서는 '천연색' 꽃들을 연출했으며, 따라서 콩브레식 미학에 따라 값을 매기고 평가해 본다면 성당 앞 광장 '상점'이나 카뮈네 가게에서 분홍색 비스킷이 가장 비싼 것처럼, 가장 좋은 품질이었다.
(잃시찾 1권 245~246 쪽)
비단향꽃무(스톡) - 핀터레스트
울타리 사이로 정원에 있는 재스민,제비꽃,마편초로 둘러싸인 오솔길이 보였고, 꽃들 사이로 비단향꽃무가 오래된 코르도바산 가죽처럼 향기롭고 빛 바랜 산뜻한 분홍빛 지갑을 열고 있는가 하면, 조약돌 위에서는 둥그렇게 감겨 있던 긴 초록색 분무기 호스가 풀리면서, 그 호스 구멍 사이로 수직 무지갯빛 부채가 꽃 위로 솟아오르며 다채로운 물방울로 꽃 향기를 적셨다.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잃시찾 1 247~248쪽)
자연의 풍굥 묘사가 압권이다. 프루스트식 만연체의 꽃밭 속이 알맞다.
비록 문장의 귀결에서 문장의 첫머리를 잊게 만드는 신비함이 있다는 것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문체는 작가의 버릇, 즉 그를 다른 작가와 구분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특정한 버릇이라고 나보코프는 말하고 있다. 아마도 잃시찾 독자들은 프루스트의 문체에 익숙하여 다른 작가들의 문체 속에서 금방 발견해 낼 수 있을만큼 독특한 문체이지만, 개인적으로 나 같은 경우엔 읽기에 쉽지 않은 문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섬세한 묘사만큼은 여러 작가들보다 압권이 아닐까 싶다.
프루스트는 인상의 세 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 의도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기억.
2. 과거의 어떤 감각을 현재에 다시 느끼면서 살아난 옛 기억.
3. 간접적으로 획득한,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한 지식.
여기서 다시 지적할 것은 과거를 재현할 때 단순한 기억은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나보고프 문학강의 422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읽고 나서, '나보코프 문학강의' 책을 읽게 된다면 아마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시 읽어야 될 듯 싶다. 책을 허투루 읽은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암튼 현재 읽은 책보다(이제 겨우 1 권 읽었으니) 남아 있는 책들이 너무 많기에 대충 읽더라도 일단은 앞으로 전진이다. 다 읽고 훗날 다시 읽어봐야겠다.
마들렌과 홍차를 마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