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도 다가오는 김에 '배추꽃밭'이란 시를 옮겨놓는다. 역시나 오래전 시이다. 그래도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이후에 쓰인 것이다. 왜냐면 '배추 포기를 떠나며'란 구절은 그 제목을 염두에 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옮겨놓은 다른 시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론 '말장난'에 기대고 있다(이건 기본적인 트레이닝이기도 하다). 실상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 자족적인 시를 쓰는 게 젊은 날 나의 시작(詩作) 목표였다. 그건 불가불 언어유희적 성격을 띠게 된다. '나리 나리 개나리'하는 식이다. 영국의 계관시인이었던 테드 휴즈가 <시작법>에서 시쓰기를 사냥이나 낚시에 비유했던 듯하다. 내 생각도 그러했다...

 

배추꽃밭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이 피나
꽃밭, 흰나비들 날아다니고 배추
속잎 언저리에 미우나 고우나 배추벌레
삶은 벌레들의 벌레다운 의지
푸르게 푸르게 숨쉬는 의지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은 피지
속잎 언저리에 포개고 포개어진 배추벌레
푸르게 푸르게 갉아먹으며
배추 포기마다 단란한 벌레의 삶
기필코 나 이젠 벌레가 아니야, 아니야
꽃밭, 배추꽃밭, 백기를 들고 날아오른다
고름이 터지듯 환하게 화끈하게
한번은 그런 날이 오는 것이지
삶을 포기하듯 배추 포기를 떠나며
벌레 같은 삶을 떠나며
꽃밭, 배추꽃밭, 퍼렇게 멍든 사랑
속마음 언저리에 미우나 고우나 당신
맹세코 이젠 떠나며 자꾸 자꾸 떠나며
꽃밭, 배추꽃밭, 굵은 소금 뿌린다

꽃밭, 배추꽃밭, 배추에도 꽃이 피나
사무친 마음에도 배추 겉절이에도- 

07.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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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1-11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某씨의 '자족적인'시들이 자꾸 오르네요..^^ 저 한자 맞았나 몰겠네요.

로쟈 2007-11-12 00:16   좋아요 0 | URL
네, 자꾸자꾸 오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뭉실이 2007-11-12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장이라고 하시니 갑자기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

로쟈 2007-11-12 09:50   좋아요 0 | URL
어깨가 빠진다고들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