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선림, 어느 지식인의 죽음

모처럼 장마다운 비가 내린 하루였다. 그래도 중년의 빗줄기였는지 오후로 접어들면서는 빗발이 약해졌고 끊기기도 했다. 잠시 끊긴 틈을 타서 동네도서관에 가 진화심리학 관련서 두 권과 함께(강의용이다) 계선림의 <우붕잡억>(미다스북스, 2004)를 대출했다. 딸기님의 '계선림,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란 페이퍼를 읽은 탓이다. 계선림, 혹은 지셴린은 어제 세상을 떠난 중국의 석학이다. 저자에 대해 내가 과문했던 건 이 책이 2004년에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모스크바 체류시절 국내에서 나온 책들이 내겐 생소할 수밖에 없고, 어림잡아 내가 모르는 책의 8할이 2004년에 나온 책이다.  

 

그때 '모스크바 통신'을 이 서재에에 연재하면서 수년 전 일기를 올려놓기도 했는데, 다시 찾아보니 이젠 '10년 전 일기'가 돼버렸다. 낮에 올린 카프카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된 대목도 있기에 한번 더 옮겨놓는다(어차피 한번 공개한 것이기도 하고). 잠시 10년 전 책 구경을 해보는 의미도 있고(하지만, 이런 내용을 갖고서 '자서전'을 쓴다?). 짐작엔 아직 알라디너로 활동하기 이전이었다...   

 

99. 9. 27
월요일.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일과처럼 메일을 확인하고 도서관을 찾아 자료복사와 도서대출을 한다. 신착 잡지에 도스토예프스키 특집이 있어서 복사했고, 스탈린에 관한 책 두 권을 대출했다. 젠장, 대학에 들어온 지 12년이 넘었건만, 레닌이나 스탈린의 전기 한 권 읽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잠시 나를 놀라게 하고 또 부끄럽게 했다. 아무래도 전공이 ‘러시아’는 아닌 모양이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위선의 태양>과 그의 형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이너 써클>이 모두 스탈린 시대를 다루고 있어서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정작 아는 바가 없어서 부랴부랴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은 것. 여기에도 뭔가 글감이 있어 보인다.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연구서도 찾았지만 대출중인지 서가에는 꽂혀 있지 않았다. 카프카를 다시 얘기하는 건 그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가 번역돼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침에 고골과 카프카에 관한 유리 만의 논문을 복사하면서 다시금 생각이 그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디스커버리 총서의 <카프카 - 변신의 고통>을 대신 손에 들었다. 그와 함께 송희복의 신작 영화평론집 <영화 - 뮤즈의 언어>를 골랐는데, 전작으로 미루어 볼 때 신뢰할 만한 책은 아니지만, 강의와 관련된 정보들이 있어서 얼마 안되는 이달치 도서구입비를 마저 사용했다.  



서점가에 새로 나온 책들이 있다. 린 마굴리스가 쓴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이건 그녀의 전작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책들을 마음껏 읽던 시절이 새삼 그립다! 그리고 이정우의 <삶-죽음-운명>은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이어지는 것인데, ‘들뢰즈와 禪’을 다루고 있다(아침에 복사한 논문 한편이 <푸슈킨과 禪>이다). 고종석의 <국어의 풍경>은 한겨레에 연재된 것. 홍성욱의 과학기술론집도 언젠가는 읽고 싶고,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은 프로이트와 맞물려서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한다. 이런 책들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전공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신간 소설들과 잡지들은 이제 더 이상 손댈 수 없다.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 그리고 자극과 고무를 받을 때는 이런 책들과 함께 있을 때이다. 도서관과 서점들을 순례하면서, 생각건대 나는 가장 행복했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몇 자 적는다. 연휴 기간에, 정확히는 지난 토요일에 고대하던 영화를 봤다. 에밀 쿠스투리차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아침에 이 영화에 대한 주진숙의 비평문을 보고, 자동차를 꿀꿀대며 뜯어먹는 돼지의 이미지에 대해서 좀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가 그려내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곧 집시들의 삶이란 현대문명(=자동차)을 집요하게 꿀꿀대며 뜯어먹는 바로 그 돼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전작들에 비해서 두드러진 예술적 성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이 영화는 자기-확인에 가깝다), 이 돼지의 이미지는 똥 묻은 자신의 몸을 거위로 닦는 건달 다단의 이미지와 함께 기억해 둘 만하다.

단, <언더그라운드> 이후(<아리조나 드림>은 보지 못했다) 그의 영화세계가 다소 자폐적인 성향을 띠어가는 점은 우려된다. <아빠는 출장중>이나 <집시의 시간>(그 자폐성의 단초를 이 영화에서부터 읽을 수 있지만)에서의 몽유병/판타지는 그것이 가혹한 현실과 대비되어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집시들’만의 축제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난다면, 그건 민속학적 자료나 구경거리에서 멀지 않으리라. 그의 재능이 현실과 좀더 밀착되기를 기대해본다. 내가 감독론을 쓰고 싶은 작가들. 예컨대, 타르코프스키, 키에슬롭스키, 쿠스투리차, 알모도바르, 홍상수, 우디 알렌, 왕가위, 타란티노, 그리고? 더 많이 봐야겠다.  

카프카 영화관에 가다

<카프카 - 변신의 고통> 끄트머리에는 '당신의 책을 출간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란 에코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박식하면서 재치있는 에코는 그 글에서 현대 편집자들의 기준에 근거해 볼 때 <심판>과 <오디세이>, <돈키호테>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고 모두가 거절 당하리라고 추정한다. 이 또한 좋은 얘깃거리다. 카프카에 대해서, 그의 변신에 대해서, 그의 영화관람에 대해서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99. 9. 28
당연한 말인 듯한데, 어제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달라진 건 없다.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글을 두 시간 동안 작성해서 후배에게 건네준 것이 그나마 오늘 한 일인 듯싶다. 루소의 <고백록>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나의 공부가 참으로 미진하다는 생각을 했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가 출간됐지만, 살 돈도 읽을 시간도 지금 나에겐 없다. 체코 친구에게서 메일과 함께 편지가 왔다. 9월초에 찍은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참선을 하기로 했다고.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자살자, ‘최초의 자살자’에 대한 공상으로 잠시 재미있어 했지만, 강의실에서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나온 <세계영화감독사전>에서 타르코프스키는 타란티노 다음이다. 이 우연한 배열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99. 9. 29
언제나 머리를 짓누르는 건 내가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 할 책들’의 목록이다. 그건 시간과의 싸움이고, 돈과의 싸움이며 나 자신의 게으름과의 싸움이다. 또한 삶의 절대적 무의미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청소부가 된 성자들의 세상('청소부가 된 성자'란 글도 준비를 하자)을 꿈꾼다고? 나는 성자도, 청소부도 되지 못할까봐 두렵다. 이건 나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하는 말이다…  

09. 07. 12. 

P.S. 10년 전 일기여도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만,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글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어디선가 찾게 되면, 요즘의 생각과 비교해볼 수도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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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7-1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의 모스크바 통신을 읽었던 몇 안되는 알라디너였다는...!^^


로쟈 2009-07-13 23:01   좋아요 0 | URL
이른바 '원조' 알라디너의 한 증표죠...^^;

비로그인 2009-07-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붕잡억> 정말 사고 싶은 책이었는데 파는 곳이 없더군요.ㅜㅜ

로쟈 2009-07-13 23:01   좋아요 0 | URL
네, 절판되었기에 저는 도서관에서 대출했어요...

2009-07-14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3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4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4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9-07-1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전 일기인데요... 뭔가 풋풋함 같은것 느껴지네요^^, 진솔하기도 하고

로쟈 2009-07-14 22:42   좋아요 0 | URL
그때만 해도!..^^;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텍스트) 2차분이 출간됐다(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PublisherSearch=%c5%d8%bd%ba%c6%ae@32997&BranchType=1). 이 시리즈의 필자로 일찌감치 낙점된 터여서 나도 비슷한 형식(분량)의 자서전을 조만간 쓰게 될지 모른다('젊은 만인보'의 유효기한이 내 경우는 올해까지라 한다). 사실 시집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과거에 자전적인 단장을 책으로 여러 차례 묶은 적이 있지만(이 서재에도 그 흔적이 일부 옮겨져 있다) 정색하고 '자서전'을 쓰는 건 내키지 않을 뿐더러 흥미로운 일도 아니어서(나는 '흥미로운 삶'을 살지 않았다, 혹은 살고 있지 않다!) 주로 내가 읽은 책, 내지는 나를 만든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했다. 적어도 그쪽으로는 나도 어떤 책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얼추 윤곽은 잡고 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는 얘기). 

 

원래 이 얘기를 꺼내려던 것은 아닌데, 오래전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김용익의 <프란츠 카프카 연구>(삼영사, 1984)를 읽으면서 적은 메모가 눈에 띄기에 덩달아 적어보았다. 카프카에게서 내가 가장 흥미를 갖는 부분이 바로 '자서전으로서의 소설', 혹은 '자서전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소설이고, 나의 이야기는 곧 나다.Der Roman bin ich, meine Geschichten sind ich”(<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나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적은 대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가 카프카를 읽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추 10년쯤 전에 읽은 <프란츠 카프카 연구>도 그런 관점에서 읽었고, 내게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 몇 대목을 옮겨적었는데,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 수수께끼같은 신비한 표현세계에 압도된 나머지, 카프카를 필요 이상으로 지고한 차원의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확대 해석하는 일은 오류이기 쉽다. 카프카는 제시의 작가이지 해결의 작가가 아니다. 해석이 해석을 낳는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그는 개인적으로 제한된 유태인적 사고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본 적이 없는 작가일 수도 있으며, 부친과의 갈등, 직업과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를 초탈하지 못한 채 폐결핵으로 쓰러진 가련한 인간일 수도 있다. 다만 그에게 문학이 있었을 뿐이다...  

-카프카의 평자들은 항상 작품 위주의 비평이냐 아니면 작품과 더불어 작가 자신의 생의 기록물(일기, 서간)을 비평의 증거로 제시하느냐의 기본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러나 카프카만큼 문학과 삶을 만족할 만한 동시에 수용하여, 양자의 의미를 진지하게 구명하려던 작가도 드물다. 그는 약혼자에게 “소설은 곧 나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전기적 평자들은 카프카의 문학을 “자기분석과 자기판결로서의 예술”로 판정한다. 카프카를 자서전적 작가로 규정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우리는 그의 일기문과 서간문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카프카는 작품활동 초기부터 그의 문학이 자기에게로 방향이 고정되어 있음을 천명한다. “매일같이 최소한 한줄의 글이 나에게로 향해 쓰여져야 한다. 마치 망원경이 혜성에로 향해지듯이”(1911) 확실히 카프카의 모든 기록은 “그로부터 나오고” “그 자신에게 말을 걸고” “그를 세계의 모든 방향으로 확장하고” “그를 위해 하소연하고” “그와 만나야만 하는” 그의 전체이다.  

-요컨대 저술은 카프카에게 있어 자기 반영과 자기성찰로서의 행위이며 자기(das Selbst)는 저술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이와 같이 자서전적이고 자기분석적인 저술은 카프카의 자기인식인 바, 이때 카프카의 삶은 그의 문학을 위한 인식의 수단이 되어 준다.(pp.17-19)    

-카프카의 작품은 다만 자서전이 아닌 자서전소설일 뿐이다. 자서전은 저술자 자신의 체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서전소설에서는 예술지향적인 순수한 창조로서의 허구성에 작가의 실제 경험이 가미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자서전소설은 자서전과 순수예술로부터 구분된다. 그의 자서전적인 기록은 그의 자기묘사와 자기성찰의 결과이다. 자기묘사와 자기성찰의 욕구는 어디까지나 자기인식을 목표로 한다...  

-카프카가 직업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전념코자한 욕구도 실은 자기인식 내지 자기확인의 시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그가 펠리체 양에게 “나의 장단편 소설은 바로 나다”라고 작품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도 자기인식을 위한 집념의 표현인 것이다.(p.27) 

09.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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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7-12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아 의식이나 업등이 의식은 성장과정에서 격게 되는 내면의 상처에 다름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받게 되는 절망과 좌절, 주변으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와 고통이 결국 현실 바깥에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게 만드는 것이다. 절망이 없다면 어떻게 희망의 개념을 알고, 슬픔이 없다면 어떻게 기쁨의 개념을 알겠는가. 인간이기 때문에 대체상황을 꿈꿀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승화시켜 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상처 속에서 진주가 자라는 이치와 하등 다를 게 없다. - 작가(박상우,시작), 26쪽 -

이 세상에 완벽한 픽션, 완벽한 허구란 없다.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상상 사이의 미묘한 화학작용과 삼투작용이 모든 걸 결정한다. 그것을 분해했다는 학자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 작가(박상우,시작), 111쪽 -

로쟈 2009-07-12 21:15   좋아요 0 | URL
요즘 나온 뇌과학서인 <세컨드 네이처>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stella.K 2009-07-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이 보통은 습작 시절이나 작가 초기 시절에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한 소설을 많이
쓰잖아요. 저도 경험삼아 시도를 해 보곤하는데 할 때마다 좌절을 많이하게 되더라구요.
너무 힘들어서...ㅠ
자기 속 얘기 소설로 쓴다는 건 확실히 힘든 일 같아요. 신내림이라도 받아야하는 건 아닌지.

목동 2009-07-12 19:28   좋아요 0 | URL
음~ 저는 풍경이나 사물을 사진처럼 글로 옮기려는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독자의 상상력를 뺏는 경우가 있더군요.

로쟈 2009-07-12 21:15   좋아요 0 | URL
그게 이야기에 적합한 형식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듯해요...
 

지난주에 출간된 책 가운데 빼먹은 것이 하나 있다. 요네하라 마리의 <미식견문록>(마음산책, 2009). 추천사를 쓰기 위해서 미리 읽어본 책인데(<올가의 반어법>에 이어 두번째다), 처음 제목은 '여행자의 아침식사'였다. 출간본의 제목이 <미식견문록>이고 부제가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이다. 러시아어 전문 통역사였던 까닭에 러시아 관련 읽을 거리가 풍부하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그녀의 글을 즐겨 읽게 되는 이유이지만(더불어 고유명사 표기 등의 '감수'도 맡는 이유이지만), 그녀의 글은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유익하다. '영양가'가 있다. 이미 '요네하라 마리의 모든 책'이라고 진작에 못박아놓은 만큼 군말은 필요없을 터이고, 내가 이 책에 대해 적은 추천사는 이렇다.  

'요네하라 마리 컬렉션’에 한 권을 더 추가하게 됐다. ‘프라하 생활’이나 ‘통역사 생활’에 더하여 이번에는 이 재치 넘치고 다정다감한 문필가가 자신의 ‘식생활’을 다루었다. 속담과 유머에 대한 책도 낸 만큼 놀랍진 않다. 하지만 그녀가 튼튼한 위를 가진 ‘냠냠공주’이기도 했다는 건 이번에 알았다. 자신을 ‘먹기 위해 사는 타입’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식도락가나 푸드파이터는 아니다. 일용할 빵과 감자와 무와 양배추, 그리고 보드카 따위에 대한 그녀의 애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게 마음에 든다. ‘읽기 위해 사는 타입’인 나로선 ‘먹는 것과 산다는 것’에 대한 이 유머러스한 성찰의 기록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서가에 바로 올려놓는다. 

학교가 공사중이어서 출판사에서 보내온 택배 꾸러미를 열어보지 못해 책의 실물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일단은 소개기사만이라도 늦게나마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9. 07. 04) 배꼽잡는 유머로 감칠맛 나는 세계음식 기행 

요네하라 마리(1950~2006)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제법 많을 테지만, 그 기억은 제각각일 가능성이 높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로 그를 만났다면 빼어난 논픽션 작가로, <올가의 반어법>에 반했다면 재능있는 소설가로, <대단한 책>을 읽고 감탄했다면 하루에 7권씩 읽어치우는 '독서 폭식가'로 그를 떠올릴 것이다. 공산당 간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체코 프라하로 이주, 그곳의 국제학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 일급의 일본인 러시아어 통역사는 그 화려한 프로필에 또 하나의 이력을 추가했다. 바로 '미식 에세이스트'다.

<미식견문록>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갖가지 음식을 접해본 저자가 자신의 경험은 물론 동화, 민담, 전설, 문화사 등을 총동원해 음식에 관해 풀어놓은 37편의 유쾌한 음식론이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하며 풀어놓는 해박한 지식도 그만이지만, "맛있는 것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대식가 가문"의 적통다운 배꼽 빼는 유머가 새콤달콤한 소스처럼 읽는 이를 톡 쏜다.

책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대부분 그가 어린시절 경험했던 것들이다. 표트르 바일과 알렉산드르 게니스의 <망명 러시아 요리>에 따르면, "사람을 고향과 이어주는 끈에는 참으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질긴 끈은 위(胃)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우메보시(매실장아찌)가 들어간 주먹밥. 어린 입맛에 제 존재를 강렬하게 새겨넣은 이 고향의 음식에서 그는 "몇 번이나 절망을 추슬러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우메보시와 쌀밥은 저자가 1986년 라식 수술을 받기 위해 러시아로 온 일본인 여성을 통역했을 때도 괴력을 발휘했다. 수술 후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하던 그 여성은 저자가 마련한 우메보시를 먹은 후 "어머, 중학교 이후 이렇게 잘 보이긴 처음이네" 하며 번쩍 눈을 떴다고.

고국의 맛을 잊지 못한 병사들로 인해 전력 약화로 고전했던 전쟁들의 역사를 훑으면서는 "맛없는 음식을 인내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에 오래 주둔하려면 본국 음식이 매력 없을수록 유리하기 때문. 오늘날 세계사의 비극은 고로 영국과 미국의 음식이 맛이 없는 탓이기도 하다.

저자는 "최근 지구의 급속한 인구증가와 함께 식량위기가 문제가 되어도 괜한 걱정이 아닐까 싶다"고 낙관하는데 그 근거가 재미나다. "먹을거리의 범위를 넓혀가는 인간의 능력은 그리 얕볼 게 아니"기 때문. 저자는 "바퀴벌레나 까마귀, 쥐새끼 같은 걸 맛있게 먹을 수만 있다면 식량문제는 단번에 해소될 것"이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안한다. 서양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자가 악마의 식량으로 배척되다가 18세기 이후에야 '시민권'을 얻었다는 문화사적 추적이 덧붙는 걸 보면 진담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리지만.(박선영기자)  

09.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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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1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1 2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09-07-12 11:35   좋아요 0 | URL
이 사람 유명한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한 권도 읽은 책이 없네요.
하루에 7권이라! 정말 독서 폭식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겠군요.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7-12 13:59   좋아요 0 | URL
고종석 씨도 열혈 독자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7-12 14:44   좋아요 0 | URL
로쟈 님이 좋아하겠군요.요네하라 누나의 책이 계속 나오니까요...살아 있었으면 왕성하게 활동할텐데,아쉽죠...

로쟈 2009-07-12 21:13   좋아요 0 | URL
일본에 번역된 러시아책들 정보에 대해서는 거의 독보적이에요...

베토벤 2009-07-12 15:37   좋아요 0 | URL
ㄴ 60이 안되어서 '요절'하셨더군요. 책 잘 읽고 있다가 다음을 기다리던 기억이 나네요.

로쟈 2009-07-12 21:12   좋아요 0 | URL
네, 암으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죠. 유머가 아주 풍부한 분인데...

2009-07-12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2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바다 2009-07-14 01:45   좋아요 0 | URL
저도 여기 저기 많이 다니게 되다 보니 다양한 음식에 접하게 되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과감한(?) 도전도 해보게 되는데 음식이라는 게 결국 습관이어서 어릴 때부터 익숙하던 음식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맛을 능가하는 새로운 음식은 맛보기 힘들더군요^^ 특히 한국 음식의 중독성은 좀 독특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7-14 08:04   좋아요 0 | URL
파리에서 돌아오셨나요?^^

2009-07-15 0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6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브뤼노 라투르의 정치생태학

이번주 관심도서의 하나는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인데, 서평을 쓰게 될 수도 있어서 리뷰기사를 찾아보았다. 참고삼아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07. 11) "근대성의 큰 문제는 비대칭성 '우리는 근대인' 관념을 버려야" 

근대인은 전근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끝없는 단절을 시도했다. 그 일정한 성과를 바탕으로 태동한 용어가 ‘근대성’이다. 근대성은 사실과 가치, 주체와 대상, 자연과 사회, 야만과 문명을 분리하며 전 시대와 차별을 이뤄냈다.

학계를 중심으로 반성의 계기가 작동된 때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일련의 국제환경회의 등이 열리면서 근대성에 대한 재고의 시각이 싹텄다. 사회의 단절적 진보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 등으로 근대성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하면서 나타난 흐름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근대성의 내용을 전면 부정하는 반근대주의적 입장과 근대성의 위기를 냉소적 관점에서 관조하는 탈근대주의적 시각이 분출했다.

하버드 대학 교수를 지낸 브뤼노 라투르(62) 프랑스 파리정치대학 교수는 ‘인류의 근대성’에 대한 자부심에 의문을 품은 대표적인 학자다. 반근대주의와 탈근대주의 모두를 극복해 근대 세계와 비근대 세계의 입장 절충을 시도해 왔다. 그의 이론은 일명 ‘근대성 없는 계몽주의’나 ‘사물로 확장된 민주주의’라고 할 만하다. 



이런 시각이 담긴 그의 역서 ‘근대성에 관한 성찰과 비판’(갈무리)이 최근 국내에서 출간됐다. 1990년대 출간 이후 24개 나라에서 번역된 책이다. 근대성 관련 저서로는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것에 비하면 국내 번역은 꽤 늦었다.  

라투르 교수는 근대인의 성공을 이끌었던 ‘비대칭성’이 위기도 불렀다고 주장한다. 비대칭성은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말한다. 라투르 교수가 지적하는 ‘근대성의 비대칭성’의 문제점은 더 있다.

“이분법적인 사고도 물론 문제가 됩니다. 더 나아가 이분법이 분할한 세계의 두 부분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시도도 비대칭성으로 볼 수 있어요. 그 절정은 마르크스주의에서 경험했지요. 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념의 구분은 근대성 내부의 자연과 사회, 사실과 가치, 대상과 주체를 분할하면서 비대칭성을 드러냈지요.”

근대성의 문제는 자본주의나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잘 드러난다. 근대성의 문제는 전근대인(과거)과 근대인(현재)을 나누고, 근대 문명 외부의 ‘그들’과 ‘우리 현대인’을 나누는 데서도 확인된다. 인류학은 이런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학문분과이다. 전통사회와 현대사회를 연구할 때, 인류학자의 태도는 일관적이지 못하다.

“인류학자들이 전통사회를 연구할 때는 관습과 문화 등을 고려해 통합적으로 접근합니다. 근대사회를 연구할 때는 문화의 지엽적이고 주변적인 것에 중점을 두는 연구방법과는 차이가 있지요. 인류학자가 원시부족의 주술사를 연구하듯이, 똑같은 방식으로 현대사회 실험실의 공학자를 연구하는 인류학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근대와 비근대의 절충인 하이브리드 방식. 하이브리드 방식은 주체와 객체의 완전한 단절도 배격한다. 하이브리드 방식은 비대칭성 극복도 가능하게 한다. 하이브리드를 자유롭게 증식시킬 수 있는 근대인의 실천과 하이브리드의 연결망을 이용하는 비근대인의 실천이 결합할 때 가능하다. 그래서 라투르 교수는 선언한다.

“근대성의 가장 큰 문제인 비대칭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근대인이었다는 관념을 폐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박종현 기자) 

09. 0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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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우리는 근대인인가 중국인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20 01:21 
    저녁에 버스를 타고 전철역까지 가서 '한겨레21'을 사들고 왔다. 엊그제 퇴고도 못한 원고를 워낙에 황급하게 보낸 탓에 '오류'는 없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브뤼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갈무리, 2009)를 서평대상으로 삼았지만 코드를 잘 맞추지 못해서 독서에 애를 먹었다. 기사를 확인해보니 크게 '실수'한 대목은 눈에 띄지 않았지만, 필자가 담당인 구둘래기자의
 
 
노노바바 2009-07-11 10:13   좋아요 0 | URL
라투어 글은 프랑스 학자답지 않게(?) 어렵지 않고 영미식의 유머가 넘쳐서 재미잇게 읽엇던 걸로 생각합니다. 그의 사회학 입문서 Assembling the social도 번역된다고 소식 전해주셧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실 그는 사회학 sociology라는 개념에 반대하기 때문에 사회학 입문서라고 하면 좀 모순이긴 하죠. 대신 'i wish i could use the term associology' 같은 농담같은 문장이 잇엇는데, 그는 사회라는 개념을 부정하고 대신 무한한 '연결 association'만이 잇다고 주장합니다. 사회과학의 주체와 구조를 뒤집는 주장입니다 (이것도 역시 이분법에 대한 일관된 반대의 연장선상입니다). 따라서 공부도 설명하려고 하지 말고 끝없이 기술 description만 하라고 주장합니다. 구조와 인과관계 같은 개념에 반대하니 설명도 반대하고... 그래서 안 읽어봣지만 실험실에 대한 그의 인류학적 작업은 끝없는 기술이 이어져서 읽기가 곤혹스럽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9-07-12 11:31   좋아요 0 | URL
영어로는 '라투어'라고 읽겠군요. 'associology'란 말이 그럴 듯합니다.^^

virtuepeak 2009-07-11 12:22   좋아요 0 | URL
소개 기사만 보니 언뜻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이라든가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같은 개념들이 떠오르네요.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쟈 2009-07-12 11:29   좋아요 0 | URL
저도 읽어봐야 알 듯합니다.^^;

코카추잉 2010-10-04 10:51   좋아요 0 | URL
나카자와 신이치는 <대칭성 인류학>의 '카이에 소바주에 대해서'라는 서문에 해당하는 글에서 라투르의 이 책이 끼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추구해온 것의 '이름'을 알게 되었노라면서. 그나저나 왜 이냐시오 마테-블랑코의 책이 번역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노노바바 2009-07-17 16:33   좋아요 0 | URL
제목이 Reassembling the social이군요. Re를 빼먹엇습니다 ㅋ
 

자작시 몇 편이 생각나서 옮겨놓는다. 모두 95년 여름에 쓴 것들이다. 아직 이파리였고 청춘이었다. 카뮈가 재혼을 하고 <이방인>을 쓴 나이였다. 나는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고 적었다. 지나고 보니 정말로 그렇다.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   

이파리들이 푸르다

이파리들이 이 여름 한껏 푸르다 한때는 모두 이파리였다 이파리 축에 끼여 한 시절이 좋았다 햇빛이 좋았고 꽃내음이 좋았고 바람둥이들이 좋았다 어디에 기대어도 모자람이 없어라 오죽하면 낯짝이 붉어지도록 지리멸렬하도록 죽어 백골난망(白骨難忘) 이 세상 거름이 되도록  

우리는 열매들이야

이 뙤약볕만으로 우리는 익어 더는 볼 것도 없이 오동나무 그늘이 아닌 데야 익어도 그만 아주 콱 익어버려 온통 열애의 날들이야 이렇듯 짱짱한 은총이야 낯뜨거움이야 더는 볼 것도 없이 눈먼 사랑이야 그리움의 허공이야 이 뙤약볕만으로 우리는 익어 바짝 마른 그리움이야 더는 태울 것도 없는 마음이야 아주 그만이야 


 
푸른 사과

나를 부드럽게 대해줘 푸른 사과는 꼭지를 따라 빙글빙글 돈다 빛과 그늘이 그렇게 세상을 싸고돈다 푸른 사과의 영토에 해가 뜨고 해가 지고 푸른 사과는 다만 그늘에서 익어간다 나를 부드럽게 안아줘 푸른 사과는 뛰어가고 싶고 날아가고 싶고 춤을 추고 싶다 푸른 사과는 당나귀가 되고 싶고 나팔꽃이 되고 싶다 나를 제발 부드럽게 대해줘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막연히 기다린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비는 마른 꽃을 본 적이 없다 꽃들은 언제나 종알댄다 비는 언제나 그친다 꽃들은 언제나 다그친다 비는 푼돈을 벌러 다시 빗속으로 나간다 비는 언제나 꽃을 들고 있다 꽃들이 비에 젖는다 

 

09.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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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7-12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매를 기대하기에는, 제 새순이 막 돋았거든요. 지금은 영토를 넓히는 중입니다. 가끔 종알대는 새들이 날아 들어 산만합니다. 저는 꽃을 향해 마음을 더 열어야 합니다.

로쟈 2009-07-11 09:01   좋아요 0 | URL
아직 한창이시군요.^^

콩세알 2009-07-1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좋으네요. 특히 첫번째 시가..이파리 사이로 바람이 선들하게 부는 듯한 리듬이 느껴져요.

로쟈 2009-07-12 11:29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시니 좋습니다.^^

Sati 2009-08-0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번째 사진 출처가 어딘가요? 훔쳐가도 되는 건지요?

로쟈 2009-08-04 23:08   좋아요 0 | URL
네, 저도 다 훔쳐온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