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선림, 어느 지식인의 죽음

모처럼 장마다운 비가 내린 하루였다. 그래도 중년의 빗줄기였는지 오후로 접어들면서는 빗발이 약해졌고 끊기기도 했다. 잠시 끊긴 틈을 타서 동네도서관에 가 진화심리학 관련서 두 권과 함께(강의용이다) 계선림의 <우붕잡억>(미다스북스, 2004)를 대출했다. 딸기님의 '계선림,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란 페이퍼를 읽은 탓이다. 계선림, 혹은 지셴린은 어제 세상을 떠난 중국의 석학이다. 저자에 대해 내가 과문했던 건 이 책이 2004년에 나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모스크바 체류시절 국내에서 나온 책들이 내겐 생소할 수밖에 없고, 어림잡아 내가 모르는 책의 8할이 2004년에 나온 책이다.  

 

그때 '모스크바 통신'을 이 서재에에 연재하면서 수년 전 일기를 올려놓기도 했는데, 다시 찾아보니 이젠 '10년 전 일기'가 돼버렸다. 낮에 올린 카프카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된 대목도 있기에 한번 더 옮겨놓는다(어차피 한번 공개한 것이기도 하고). 잠시 10년 전 책 구경을 해보는 의미도 있고(하지만, 이런 내용을 갖고서 '자서전'을 쓴다?). 짐작엔 아직 알라디너로 활동하기 이전이었다...   

 

99. 9. 27
월요일.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일과처럼 메일을 확인하고 도서관을 찾아 자료복사와 도서대출을 한다. 신착 잡지에 도스토예프스키 특집이 있어서 복사했고, 스탈린에 관한 책 두 권을 대출했다. 젠장, 대학에 들어온 지 12년이 넘었건만, 레닌이나 스탈린의 전기 한 권 읽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잠시 나를 놀라게 하고 또 부끄럽게 했다. 아무래도 전공이 ‘러시아’는 아닌 모양이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위선의 태양>과 그의 형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이너 써클>이 모두 스탈린 시대를 다루고 있어서 비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정작 아는 바가 없어서 부랴부랴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은 것. 여기에도 뭔가 글감이 있어 보인다.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연구서도 찾았지만 대출중인지 서가에는 꽂혀 있지 않았다. 카프카를 다시 얘기하는 건 그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가 번역돼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침에 고골과 카프카에 관한 유리 만의 논문을 복사하면서 다시금 생각이 그에게 미쳤기 때문이다. 디스커버리 총서의 <카프카 - 변신의 고통>을 대신 손에 들었다. 그와 함께 송희복의 신작 영화평론집 <영화 - 뮤즈의 언어>를 골랐는데, 전작으로 미루어 볼 때 신뢰할 만한 책은 아니지만, 강의와 관련된 정보들이 있어서 얼마 안되는 이달치 도서구입비를 마저 사용했다.  



서점가에 새로 나온 책들이 있다. 린 마굴리스가 쓴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이건 그녀의 전작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 책들을 마음껏 읽던 시절이 새삼 그립다! 그리고 이정우의 <삶-죽음-운명>은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이어지는 것인데, ‘들뢰즈와 禪’을 다루고 있다(아침에 복사한 논문 한편이 <푸슈킨과 禪>이다). 고종석의 <국어의 풍경>은 한겨레에 연재된 것. 홍성욱의 과학기술론집도 언젠가는 읽고 싶고, 홍준기의 <라캉과 현대철학>은 프로이트와 맞물려서 규모가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한다. 이런 책들은 내가 이 모든 것을 전공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신간 소설들과 잡지들은 이제 더 이상 손댈 수 없다.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되어 있을 때는, 그리고 자극과 고무를 받을 때는 이런 책들과 함께 있을 때이다. 도서관과 서점들을 순례하면서, 생각건대 나는 가장 행복했었다…  



점심을 먹고, 다시 몇 자 적는다. 연휴 기간에, 정확히는 지난 토요일에 고대하던 영화를 봤다. 에밀 쿠스투리차의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아침에 이 영화에 대한 주진숙의 비평문을 보고, 자동차를 꿀꿀대며 뜯어먹는 돼지의 이미지에 대해서 좀더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가 그려내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곧 집시들의 삶이란 현대문명(=자동차)을 집요하게 꿀꿀대며 뜯어먹는 바로 그 돼지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전작들에 비해서 두드러진 예술적 성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이 영화는 자기-확인에 가깝다), 이 돼지의 이미지는 똥 묻은 자신의 몸을 거위로 닦는 건달 다단의 이미지와 함께 기억해 둘 만하다.

단, <언더그라운드> 이후(<아리조나 드림>은 보지 못했다) 그의 영화세계가 다소 자폐적인 성향을 띠어가는 점은 우려된다. <아빠는 출장중>이나 <집시의 시간>(그 자폐성의 단초를 이 영화에서부터 읽을 수 있지만)에서의 몽유병/판타지는 그것이 가혹한 현실과 대비되어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집시들’만의 축제가 그들만의 잔치로 끝난다면, 그건 민속학적 자료나 구경거리에서 멀지 않으리라. 그의 재능이 현실과 좀더 밀착되기를 기대해본다. 내가 감독론을 쓰고 싶은 작가들. 예컨대, 타르코프스키, 키에슬롭스키, 쿠스투리차, 알모도바르, 홍상수, 우디 알렌, 왕가위, 타란티노, 그리고? 더 많이 봐야겠다.  

카프카 영화관에 가다

<카프카 - 변신의 고통> 끄트머리에는 '당신의 책을 출간할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란 에코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박식하면서 재치있는 에코는 그 글에서 현대 편집자들의 기준에 근거해 볼 때 <심판>과 <오디세이>, <돈키호테>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원고 모두가 거절 당하리라고 추정한다. 이 또한 좋은 얘깃거리다. 카프카에 대해서, 그의 변신에 대해서, 그의 영화관람에 대해서 읽을 만한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99. 9. 28
당연한 말인 듯한데, 어제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달라진 건 없다.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글을 두 시간 동안 작성해서 후배에게 건네준 것이 그나마 오늘 한 일인 듯싶다. 루소의 <고백록>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나의 공부가 참으로 미진하다는 생각을 했다.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가 출간됐지만, 살 돈도 읽을 시간도 지금 나에겐 없다. 체코 친구에게서 메일과 함께 편지가 왔다. 9월초에 찍은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참선을 하기로 했다고.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자살자, ‘최초의 자살자’에 대한 공상으로 잠시 재미있어 했지만, 강의실에서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나온 <세계영화감독사전>에서 타르코프스키는 타란티노 다음이다. 이 우연한 배열은 재미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99. 9. 29
언제나 머리를 짓누르는 건 내가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 할 책들’의 목록이다. 그건 시간과의 싸움이고, 돈과의 싸움이며 나 자신의 게으름과의 싸움이다. 또한 삶의 절대적 무의미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청소부가 된 성자들의 세상('청소부가 된 성자'란 글도 준비를 하자)을 꿈꾼다고? 나는 성자도, 청소부도 되지 못할까봐 두렵다. 이건 나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하는 말이다…  

09. 07. 12. 

P.S. 10년 전 일기여도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만, '인문학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글은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어디선가 찾게 되면, 요즘의 생각과 비교해볼 수도 있을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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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9-07-13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로쟈님의 모스크바 통신을 읽었던 몇 안되는 알라디너였다는...!^^


로쟈 2009-07-13 23:01   좋아요 0 | URL
이른바 '원조' 알라디너의 한 증표죠...^^;

비로그인 2009-07-13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붕잡억> 정말 사고 싶은 책이었는데 파는 곳이 없더군요.ㅜㅜ

로쟈 2009-07-13 23:01   좋아요 0 | URL
네, 절판되었기에 저는 도서관에서 대출했어요...

2009-07-14 23: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3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4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7-14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9-07-14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전 일기인데요... 뭔가 풋풋함 같은것 느껴지네요^^, 진솔하기도 하고

로쟈 2009-07-14 22:42   좋아요 0 | URL
그때만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