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텍스트) 2차분이 출간됐다(http://www.aladin.co.kr/search/wsearchresult.aspx?PublisherSearch=%c5%d8%bd%ba%c6%ae@32997&BranchType=1). 이 시리즈의 필자로 일찌감치 낙점된 터여서 나도 비슷한 형식(분량)의 자서전을 조만간 쓰게 될지 모른다('젊은 만인보'의 유효기한이 내 경우는 올해까지라 한다). 사실 시집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과거에 자전적인 단장을 책으로 여러 차례 묶은 적이 있지만(이 서재에도 그 흔적이 일부 옮겨져 있다) 정색하고 '자서전'을 쓰는 건 내키지 않을 뿐더러 흥미로운 일도 아니어서(나는 '흥미로운 삶'을 살지 않았다, 혹은 살고 있지 않다!) 주로 내가 읽은 책, 내지는 나를 만든 책들에 관한 이야기를 써보겠다고 했다. 적어도 그쪽으로는 나도 어떤 책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얼추 윤곽은 잡고 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는 얘기). 

 

원래 이 얘기를 꺼내려던 것은 아닌데, 오래전 파일들을 뒤적이다가 김용익의 <프란츠 카프카 연구>(삼영사, 1984)를 읽으면서 적은 메모가 눈에 띄기에 덩달아 적어보았다. 카프카에게서 내가 가장 흥미를 갖는 부분이 바로 '자서전으로서의 소설', 혹은 '자서전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곧 소설이고, 나의 이야기는 곧 나다.Der Roman bin ich, meine Geschichten sind ich”(<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 혹은 “나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적은 대로,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가 카프카를 읽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얼추 10년쯤 전에 읽은 <프란츠 카프카 연구>도 그런 관점에서 읽었고, 내게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 몇 대목을 옮겨적었는데, 여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 수수께끼같은 신비한 표현세계에 압도된 나머지, 카프카를 필요 이상으로 지고한 차원의 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확대 해석하는 일은 오류이기 쉽다. 카프카는 제시의 작가이지 해결의 작가가 아니다. 해석이 해석을 낳는 일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다. 그는 개인적으로 제한된 유태인적 사고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본 적이 없는 작가일 수도 있으며, 부친과의 갈등, 직업과 가정이라는 좁은 세계를 초탈하지 못한 채 폐결핵으로 쓰러진 가련한 인간일 수도 있다. 다만 그에게 문학이 있었을 뿐이다...  

-카프카의 평자들은 항상 작품 위주의 비평이냐 아니면 작품과 더불어 작가 자신의 생의 기록물(일기, 서간)을 비평의 증거로 제시하느냐의 기본 문제에 부닥치게 된다. 그러나 카프카만큼 문학과 삶을 만족할 만한 동시에 수용하여, 양자의 의미를 진지하게 구명하려던 작가도 드물다. 그는 약혼자에게 “소설은 곧 나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전기적 평자들은 카프카의 문학을 “자기분석과 자기판결로서의 예술”로 판정한다. 카프카를 자서전적 작가로 규정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를 우리는 그의 일기문과 서간문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카프카는 작품활동 초기부터 그의 문학이 자기에게로 방향이 고정되어 있음을 천명한다. “매일같이 최소한 한줄의 글이 나에게로 향해 쓰여져야 한다. 마치 망원경이 혜성에로 향해지듯이”(1911) 확실히 카프카의 모든 기록은 “그로부터 나오고” “그 자신에게 말을 걸고” “그를 세계의 모든 방향으로 확장하고” “그를 위해 하소연하고” “그와 만나야만 하는” 그의 전체이다.  

-요컨대 저술은 카프카에게 있어 자기 반영과 자기성찰로서의 행위이며 자기(das Selbst)는 저술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이와 같이 자서전적이고 자기분석적인 저술은 카프카의 자기인식인 바, 이때 카프카의 삶은 그의 문학을 위한 인식의 수단이 되어 준다.(pp.17-19)    

-카프카의 작품은 다만 자서전이 아닌 자서전소설일 뿐이다. 자서전은 저술자 자신의 체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서전소설에서는 예술지향적인 순수한 창조로서의 허구성에 작가의 실제 경험이 가미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자서전소설은 자서전과 순수예술로부터 구분된다. 그의 자서전적인 기록은 그의 자기묘사와 자기성찰의 결과이다. 자기묘사와 자기성찰의 욕구는 어디까지나 자기인식을 목표로 한다...  

-카프카가 직업을 포기하고 창작에만 전념코자한 욕구도 실은 자기인식 내지 자기확인의 시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다. 그가 펠리체 양에게 “나의 장단편 소설은 바로 나다”라고 작품과 자신을 동일시한 것도 자기인식을 위한 집념의 표현인 것이다.(p.27) 

09. 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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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07-12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아 의식이나 업등이 의식은 성장과정에서 격게 되는 내면의 상처에 다름 아니다. 가족으로부터 받게 되는 절망과 좌절, 주변으로부터 받게 되는 상처와 고통이 결국 현실 바깥에 또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게 만드는 것이다. 절망이 없다면 어떻게 희망의 개념을 알고, 슬픔이 없다면 어떻게 기쁨의 개념을 알겠는가. 인간이기 때문에 대체상황을 꿈꿀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현실의 고통과 절망을 승화시켜 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상처 속에서 진주가 자라는 이치와 하등 다를 게 없다. - 작가(박상우,시작), 26쪽 -

이 세상에 완벽한 픽션, 완벽한 허구란 없다.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상상 사이의 미묘한 화학작용과 삼투작용이 모든 걸 결정한다. 그것을 분해했다는 학자를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 작가(박상우,시작), 111쪽 -

로쟈 2009-07-12 21:15   좋아요 0 | URL
요즘 나온 뇌과학서인 <세컨드 네이처>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stella.K 2009-07-12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들이 보통은 습작 시절이나 작가 초기 시절에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한 소설을 많이
쓰잖아요. 저도 경험삼아 시도를 해 보곤하는데 할 때마다 좌절을 많이하게 되더라구요.
너무 힘들어서...ㅠ
자기 속 얘기 소설로 쓴다는 건 확실히 힘든 일 같아요. 신내림이라도 받아야하는 건 아닌지.

펠릭스 2009-07-12 19:28   좋아요 0 | URL
음~ 저는 풍경이나 사물을 사진처럼 글로 옮기려는 습관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독자의 상상력를 뺏는 경우가 있더군요.

로쟈 2009-07-12 21:15   좋아요 0 | URL
그게 이야기에 적합한 형식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