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의 휴식을 뒤로 하고 다시 복귀한다. 쉰다고는 했지만, 일상생활에서 따로 '휴가'를 가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순수하게 하루에 서재일에 투자했던 한두 시간(때론 두어 시간)을 쉴 수 있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름 휴식이었고 자유시간이었으니 다시 복귀하는 일요일이 마치 월요일 같다!   

아침에 의외로 방문자가 많은 것으로 보아 휴식 이후에 무얼 갖고 돌아올 것인가 궁금해하신 분들이 많은 듯싶다. 흠, 대단한 걸 내놓기엔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먼저 실토해야 할까? 다만 지난 화요일에 처음 휴식을 공지하고,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 한편 정도는 '공유'하고 싶다.    



7명의 감독들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 <텐 미티츠: 트럼펫>(2002) 편에서 내가 본 건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개들에겐 지옥이 없다(Dogs have no hell>이다(http://www.dailymotion.com/video/x6ifim_aki-kaurismaki-dogs-have-no-hell_shortfilms).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의 한 사람이다(우연찮게도 그는 <죄와 벌>(1883)로 데뷔했다. '로쟈'와 인연이 없지 않다). 이 단편영화는 앞뒤에 나오는 트럼펫 연주까지 포함하여 12분이니까 내가 얻은 휴식만큼이나 짧다. 영화에서 흘러가는 시간도 짧다.   

"유치장에서 한 남자가 나온다. 시베리아로 떠나고 싶어하는 그에게 남은 시간은 30분. 그는 주어진 시간 안에 자기가 원하는 것들을 이루려 한다."는 게 그 줄거리다(개들에겐 천국만 있다?). 그 시간에 그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한 여인에게 찾아가 구혼을 하고 결혼반지를 사고 모스크바행 기차를 탄다!  

이 영화의 재미는 카우리스마키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남녀 배우를 볼 수 있다는 점과 무엇보다도 마르코 하비스토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마르코 하비스토의 노래는 영화에 3분 남짓 포함돼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piVzI5q81y0). 특이하게도 핀란드어가 아닌 영어로 부르는데, 노래의 제목은 '천둥과 번개'.     

 

지난 휴식기간에 나는 매일같이 마르코 하비스토의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밴드명은 'Marko Haavisto & Poutahaukat'이다). 찾아보니 마르코 하비스토의 노래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과거가 없는 남자>(2002)에서도 콘서트 장면에서 들은 적이 있다. '파하 바니'란 노래다(http://www.youtube.com/watch?v=fn7wsxGZltM). 대체로 나는 이런 노래를 좋아한다(가사는 "매일 악마에게 쫓기고 있으니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식으로 돼 있다. 하비스토의 또 다른 베스트로 꼽을 만한 노래는 '룸푸 소이'(http://www.youtube.com/watch?v=R9yukbhrrI0&feature=related). 가사는 전혀 대중할 수 없지만 길거리에서의 연주 장면은 흥겹고 재미있다.     

흠, 대략 이런 식으로 나는 휴기기간 동안에 잠시 '핀란드'에 다녀온 걸로 치고 싶다(그의 최근작 <황혼의 빛>(2006)도 조만간 봐야겠다). 책? 카우리스마키에 관한 책을 찾아봤지만(물론 핀란드어 책은 제외하고) 영어권에는 거의 읽을 만한 책이 나와 있지 않다(그나마 한권 눈에 띄는 건 도서관에 주문을 해놓았다).  

Андрей Плахов, Елена Плахова Аки Каурисмяки. Последний романтикКоллекция Аки Каурисмяки. Том 1 (3 DVD) Гамлет идет в бизнес / П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 / Жизнь богемы 

이미 카우리스카미 컬렉션까지 출시돼 있는 러시아에서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마지막 낭만주의자>(2006)란 책이 나와 있다(러시아에서는 '아키 카우리스먀키'라고 표기한다. 핀란드어로는 '아키 카우리스매키' 정도로 발음한다). 그의 영화에 대한 비평과 함께 감독 인터뷰와 시나리오, 산문까지 모아놓은 자료집 형태의 책이다. 다음번 휴가때는 이 책을 읽어야겠다!.. 

09.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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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4-12 00:37 
    어제 접한 가장 좋은 뉴스는 핀란드의 영화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전' 소식이다.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시네마테크KOFA에서 진행된다고.내겐 칸느영화제 부럽지 않은 '선물'이다. 비록 몇 편을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이번 기획전에서는 국내에 소개 되었던 <성냥공장소녀>, <과거가 없는 남자>, <황혼의 빛> 외에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연작, 감독의 보헤미안 정신을 가장 잘 대표하는 <보헤미안
 
 
펠릭스 2009-11-29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영화나 단편소설에서 느끼는 까칠함은 입안 침샘이 말라버린 건조함 같아요.

로쟈 2009-11-29 21:36   좋아요 0 | URL
카우리스마키의 초기작이 '프롤레타리아 3부작'인데, 이런 건 좀 출시되면 좋겠어요...
 

오늘부터 28일(토)까지 한시적으로 서재일을 쉬려고 합니다. 서재를 닫아놓는 건 아니고, 다만 며칠간이나마 제가 글을 쓰거나 댓글을 달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용히 혼자 쉬면 될 일이지만, 공연한 오해나 걱정을 살 수도 있을 듯해서 공지를 달아놓습니다(이 공지는 토요일 자정에 삭제하겠습니다->댓글이 많이 붙어서 보존해놓습니다). 일년간 휴가가 전혀 없었는데, 12월은 또 연말이라 바쁠 듯싶어서 따로 쉴 시간도 없을 것 같단 생각이 오늘 아침에 들었습니다. 서재를 즐겨찾으셨던 분들도 이번주는 같이 쉬시면 좋겠습니다.^^ 12월엔 방문자가 1백만명을 넘어서게 될 듯해서 조촐한 이벤트도 열 계획입니다. 며칠간 이런저런 구상을 하겠거니 하고 생각해주시길... 그럼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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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11-24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이라도 좀 다녀오시죠...

로쟈 2009-11-29 12:07   좋아요 0 | URL
책 속의 여행입니다.^^;

마노아 2009-11-24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고양이 표정 너무 흡족스러운데요. 로쟈님도 저런 표정으로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9-11-29 12:07   좋아요 0 | URL
아직은 고양이 팔자가 못되구요.^^;

펠릭스 2009-11-24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좋은 시간 되십시오.

로쟈 2009-11-29 12:08   좋아요 0 | URL
감사...

무해한모리군 2009-11-24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한 휴식되세요 로쟈님 ^^

로쟈 2009-11-29 12:08   좋아요 0 | URL
서재일만 쉬었을 뿐이에요.^^;

반딧불이 2009-11-24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시간이지만 푸~~욱 쉬세요. 덕분에 제 마우스도 좀 쉴것 같으네요.

로쟈 2009-11-29 12:08   좋아요 0 | URL
너무 일찍 돌아왔나요?^^;

twoshot 2009-11-24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푹 좀 쉬세요^^

로쟈 2009-11-29 12:09   좋아요 0 | URL
흠, 다른 의미는 없으신 거죠?^^;

sophie 2009-11-25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푸욱~ 쉬세요에 한 표 ^^

로쟈 2009-11-29 12:09   좋아요 0 | URL
일년 뒤에 컴백할 걸 그랬나 봅니다.^^;

philocinema 2009-11-25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은 휴식이 필요해요! 정말이지~

로쟈 2009-11-29 12:09   좋아요 0 | URL
네, 누구에게나 그렇습니다!..

헛헛헛헛 2009-11-25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이팅~ 'ㅁ'

로쟈 2009-11-29 12:10   좋아요 0 | URL
전투적으로 쉬라는 말씀인가요?^^

비로그인 2009-11-26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충전 후 좋은글 기대해 봅니다

로쟈 2009-11-29 12:10   좋아요 0 | URL
재충전까지는 아니어서 좋은글은 나중에...^^;

토탈리콜 2009-11-29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세 그런대 작장인은 쉬고 싶어도,,,,,
 
아감벤과 도래해야 할 정치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을 다루고 있다.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란 부제대로 책은 저자가 발전시켜나가게 되는 철학적 구상의 노트이면서 독자에겐 아감벤의 전체적인 철학적 기획을 일별하게 해주는 조감도이다. 병렬적인 구성이긴 하나 '기 드보르를 추모하며'란 헌사가 시사해주듯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같은 글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글에 대해서는 두 역자가 자세한 해제(간주곡)를 붙이고 있어서, 나로선 '삶-의-형태'와 ''인권을 넘어서', 정치에 관한 노트' 등의 장을 중심으로 리뷰를 작성했다.   

 

한겨레21(09. 11. 30) 벌거벗은 난민의 생명에서 탈주하라 

“우리의 정치적 전통에서 핵심에 놓인 주권과 제헌권력이라는 개념을 버리든가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주장이다. ‘주권권력’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정치철학적 범주를 제시한 <호모 사케르>(새물결 펴냄, 2008)를 통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감벤은 현재 가장 문제적인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유의 ‘맹아적 저작’이라고 불리는 <목적 없는 수단>(난장 펴냄)은 비교적 가벼운 부피의 책이지만, 이 ‘사유의 거장’이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서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켜나가는지를 안내해주는 압축적인 저작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이란 무엇인가? 정치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명령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치철학의 전통적인 개념과 범주로는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제대로 포착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고 본다. 경제에서 제1차 산업혁명이 구체제의 사회적․정치적 구조에 ‘거대한 전환’을 가져왔다면, 근대 이후 특히 20세기에 경험한 현실은 그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를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오늘날 정치적 행위의 의미가 실종되고 또 망각되고 있다면, 그것은 주권과 법/권리, 국민/민족, 인민, 민주주의 같은 고루한 용어로 지시할 수 있는 현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용어들을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사용한다면 “문자 그대로 자신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감벤은 미셸 푸코를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된 것은 생명”이며 따라서 정치 또한 생명정치적인 것이 되었다고 본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서 그가 더 자세하게 발전시키게 되는 주제이지만, 이때의 생명은 ‘벌거벗은 생명’, 곧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생명이다. 우리말로는 ‘목숨’에 가깝다. 이 벌거벗은 생명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서 발표하는 신종플루 사망자 수나 백신접종 대상자 수처럼 통계적 ‘숫자’로서 존재하는 생명이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복속되는 한에서만 보호되며 관리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은 인간이나 시민이 아닌 난민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중심적 형상이라고 본다. 이런 구도에서 현실적 삶은 말 그대로 ‘생존’으로 환원된다.  

그럼 다른 의미의 생명이 또 있다는 것인가? 물론이다. 아감벤은 개인이나 집단에 고유한 살아가는 방식이나 형태를 의미했던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생명의 다른 의미를 길어올린다. 그것은 ‘삶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은 ‘삶-의-형태’라는 용어로 표현하지만 좀더 이해하기 편하게 말하면 ‘폼 나는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단순히 목숨을 부지하는 삶이 아니라 품위 있는 삶, 행복을 향유하는 삶, ‘더 나은 삶’이 새로운 정치철학의 기초가 돼야 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주장이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 단지 살아남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가 되는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가리켜 삶에 있어서 행복이 문제가 되는 유일한 존재라고 했다. 이때 행복은 동물적인 욕구의 충족을 가리키지 않는다. 인간에게 삶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역량을 실험하고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 가능한 공간이 바로 정치 공간이며, 정치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은 본래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질문해야 할 것은 현재의 삶이 과연 ‘삶-의-형태’에 합당한 삶인가 하는 것이다. 아감벤의 진단에 따르면, 정치권력은 항상 삶의 형태라는 맥락에서 벌거벗은 생명을 분리․추출해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인 삶은 그러한 일체의 주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탈출을 감행함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것은 달리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목적 없는 수단’으로서의 삶이기도 하다.  

09 11. 23.  

P.S. '인권을 넘어서'란 노트에서 아감벤이 주장하는 바를 좀더 적으면 이렇다. "이제 멈출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국민국가의 쇠퇴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난민은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이다. 그리고 적어도 국민국가와 그 주권이 와해과정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상, 난민은 오늘날 도래하는 정치공동체의 형태와 그 한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범주이다. 만일 우리가 맞닥뜨린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처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정치적인 것의 주제를 대표해온 근본 개념들(인간, 권리를 가진 시민들, 또한 주권자로서의 인민, 노동자 등)을 지체 없이 포기하고, 난민이라는 이 둘도 없는 형상에서 우리의 정치철학을 재구축해야 할 것이다."(25-26쪽) 아감벤의 '난민'은 우리의 '철거민'으로 다시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치철학' 또한 철거민에서 바로 재구축되어야만 하리라. 그러한 정치철학이 우리에게 도래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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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24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인 일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영전을 들고 한 발 한 발 걷는 모습은 참답합니다. 주검을 넘고 저 검은 구름사이를 향할때,,아이들(자식)은 어찌 마음을 다 잡겠습니까!

2009-11-24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4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상 위에 가득 놓여 있는 책들 가운데, 파란여우님의 <깐깐한 독서본능>(21세기북스, 2009)을 잠시 손에 들었다가 추천사를 쓰기 위해 읽은 대목 중 하나를 다시 읽었다. '파란여우가 생각하는 책'이란 꼭지다. 저자가 자주(?) '우려먹는 이야기'이지만, 펼칠 때마다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건 이 책이 저자의 '실존을 말하는 책'이기도 하다는 걸 시사해주는 대목이기도 해서다. 알라딘에는 이 책의 '미리보기'가 뜨지 않아서, 한 독자의 재량으로 (저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내가 읽은 대목을 옮겨놓는다. 저자의 말대로, "고향을 잃은 사람, 고향의 정적들로부터 떠나온 사람, 진정성을 의심받고 마음을 다한 기도가 하늘에 닿지 못해 부서진 사람, 세상의 바깥으로 홀로 던져진 사람"에게, 혹은 "종종 심허증으로 앓아눕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분들에게 책을 권한다. <깐깐한 독서본능>을 권한다...  

 

“가련한 넋이여! 짐을 꾸려 토르네오로 떠나자. 어쩌면 더욱 멀리라도 가자. 발틱해의 맨 끝까지라도. 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더욱 더 멀리. 북극에 가서 살자. 거기 태양은 비스듬히 땅을 비추고, 낮과 밤의 느린 교대는 변화를 없애고 허무의 반쪽인 단조로움을 북돋아 준다. 거기서 우리 오래도록 어둠의 미역을 감을 수 있을 것이요. 그동안,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극광은 때때로 우리에게 지옥 불꽃의 반사광처럼 그 장밋빛 햇살 다발을 보내 주리라! 마침내 내 넋의 말문이 터지더니만 슬기롭게도 내게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어딘들 상관없어! 다만 그곳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
_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 



자, 이제 내 얘기를 좀 하자.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빗대면 나에게도 책의 역사가 있다. 나도 이거 언젠가는 쓸 테지만(모르죠, 카프카의 유언처럼 모두 불태워 버려! 이런 변덕이 없으란 법도) 내 삶에서의 책은 곧 세상이다. 그것도 그냥 세상이 아니고 새 세상이다. 또 우려먹는 이야긴데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 시기는 마흔 살이 된 어느 날부터였다. 남들 마흔과 내 마흔은 다르다. 나는 마흔 살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은 싱글이었고 직장생활도 변변치 못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객(客) 노릇을 했으니 절친도 없었다. 마흔이 되니까 허무했다. 나는 읽지 않는 책을 사들였다. 단지 샀을 뿐이다. 내겐 장식용이라도 뭔가가 곁에 필요했다. 하필이면 그것이 책이었다. 사들인 책을 책상 위에 쌓아놓고 스위트콘과 양송이와 양파, 피망과 소시지, 블랙 올리브와 피자치즈 등의 토핑이 풍부한 책의 화려한 표지를 눈요기하며 영혼의 허기를 채웠다.   

 

폼 잡고 싶은 허영기를 선풍기 날개처럼 윙윙 돌리는 욕망으로 맨 처음 산 것이 ≪완당평전≫이었는데, 완당의 <세한도(歲寒圖)>가 내게 있어 세한도(歲閑渡)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보들레르가 이 세상 바깥의 그 어디로든 떠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한 절규, 난 그때 그런 심각한 상태였다. 돈도 없고 빽도 없이, 속된 말로 미모도 재산도 권력도 그리고 연인도 없이 시골 면사무소로 출근하는 늙은 여자에게 누가 애틋한 눈길을 주겠는가. 세상 인심이란 것이 내 주머니가 두둑하면 파리, 모기가 배고픈 상어 떼처럼 달려들고 빈 주머니가 되면 빈대까지 나가 버린다. 함께 술 먹을 상대로는 좋았는지 만날 술타령은 원 없이 했다. 변두리에 술집 하나 차릴 만한 돈이 내 지갑을 떠났다. 허무하고 허탈하여 허허로운 때에 책은 내게 왔다. 첫 책인 ≪완당평전≫ 세 권을 읽으면서 다른 건 잊고 완당의 <세한도>만 내게 남았다. 압축완당이다. 고향을 잃은 사람, 고향의 정적들로부터 떠나온 사람, 진정성을 의심받고 마음을 다한 기도가 하늘에 닿지 못해 부서진 사람, 세상의 바깥으로 홀로 던져진 사람. 책은 불면의 밤을 붉은 포도주처럼 흥건히 위로했다.  

 

그때 내가 잠시 근무했던 면사무소 앞마당에는 수령이 백 년이 넘은 고로쇠나무가 있었다. 여름이 가고 쓸쓸한 가을을 지나 무덤덤하게 겨울을 보내고는 다시 봄을 맞는 동안, 늙은 나무는 출퇴근을 서두르는 키 작은 나를 등 굽은 할머니처럼 마중하고 배웅했다. 경칩을 전후한 이른 봄이 되면 종이컵에 담긴 수액이 직원들의 책상으로 배달되었는데 그 맛이 무척 달콤했다. 늙은 나무가 제 몸의 혈액을 외롭고 신산한 세상의 빈혈에 시달린 나를 다독였다. 나는 한 모금씩 천천히 혀를 입 안에서 굴려가며 아껴 마셨다. 세상은 팍팍했고 나는 춥고 허기졌다. 종종 심허증으로 앓아눕기도 했다. 완당의 <세한도>에 나오는 나무가 고로쇠라고 착각했다. 면사무소 앞마당 늙은 고로쇠나무는 내가 잃은 꿈, 간직하고 싶은 꿈을 알고 있었다. 고로쇠나무 아래에서 독백으로 흘린 내 꿈의 파편들을 나무는 말없이 바람에 쓸려 보냈다. 나는 종종 화가 났고 괴로웠고 외로웠다. 검은 상복 같은 정장을 즐겨 입고 기형도처럼 세상을 증오한다고 발광했다. 면사무소의 늙은 고로쇠나무는 내 삶의 어느 한 시점의 완벽한 증인이다.  

그리고 책이 내게 왔다. 뻥쟁이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풍요로운 수다를 듣고 수잔 손택의 윤택한 지성도 만났다. 이탁오를 읽는 동안에는 그의 고독에 전염되어 밤마다 한 모금씩 소주를 마셨다. 책을 읽기 전 온몸으로 세상을 관통하느라 생긴 상처에 책은 빨간약을 발라줬다. 나는 한 차례 쩌릿쩌릿 아프고 나서 새 세상의 문이 쾅쾅 열리는 것을 봤다. 열려라 참깨 같은 주문은 없었지만 그것은 마법이었다. 황야에서 뒹굴던 여우는 널빤지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툴렀다. 삐뚤빼뚤.  



“결국 인생의 여러 가지 경험들, 이리저리 찢겨지고 갈래갈래 조각난 경험들을 숙고해보건대 내가 참으로 실존의 책상에 임하는 것은 차라리 백지 앞에서, 나의 램프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어 책상 위에 펼쳐진 흰 페이지 앞에서이다. 그렇다. 내가 최대한의 실존, 팽팽한 실존, 앞을 향하여, 보다 앞을 향하여, 또 그 위를 향하여 긴장되어 있는 실존을 알게 되는 것은 나의 실존의 책상에서이다.”
_가스통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중


바슐라르의 책상은 실존의 책상이다. 책상 앞의 나는 어둡고 습하고 아픈 곳을 한 번 더 응시한다. 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이 세상이라고 말한다. 책상 위에서 관념을 밝히는 촛불을 창밖으로 내던지고 실존을 밝히는 새 촛불을 켜라고 책은 일러준다. 팽팽한 스트레이트 미문 때문에 소설 말고 에세이를 쓰라고 권유받는 작가 김훈은 밥은 지엄하다고 말한다.   

실존을 말하지 않는 책은 사이비고, 상상력으로 위로해주지 않는 책은 관 속에 넣어야 하고, 최후의 질문조차 남기지 않는 책은 불쏘시개로 끝나야 한다. 밥 먹고 똥 싸고 욕하고 웃고 우는 조촐하고 소박한 꿈을 가진 사람들이 책이 열어준 새 세상에서 좀 더 많이, 더 많이, 더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09. 11. 22.  

P.S. 덧붙여, <깐깐한 독서본능>의 초고를 읽고 내가 쓴 추천사의 초안은 이랬다. 굵은 글씨가 뒷표지에 실렸다.

내가 거주하는 알라딘 마을은 책 마을이어서 모두가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수다를 떤다. ‘고수’도 많고 ‘강자’도 득실거린다. 하지만 이 마을의 ‘면장’이라면 단연 파란여우님이다. 염소치기 면장님이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마을 사람들은 늘 궁금해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바로 그 면장님이 드디어 책을 내신다! 당신은 마흔에서야 ‘지각독서인생’을 시작한 ‘종잡을 수 없는 독서가’가 내놓은 ‘뻥 과자’라고 부르지만, 그건 ‘뻥’이다. 책상물림이 아닌 ‘칼을 찬 독서가’의 용맹정진 독서기가 당차게 펼쳐진다. 도저하며 거침없다. 어서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여기 한 독서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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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from 뻥 Magazine 2009-11-23 15:49 
    “세상이란 도대체 무얼 말하는 걸까요. 인간들의 집단을 말하는 걸까요. 어디에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가 있는 걸까요. 그 실체가 뭐가 됐든, 강하고 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나였지만, 호리키에게서 그런 소릴 듣고 나니 문득 ‘세상이란 건 널 두고 하는 말 아니야?’ 라는 말이 혀끝까지 튀어 나왔습니다.”            
 
 
2009-11-22 2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23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phie 2009-11-22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이루어지는 독서를 하시고 난 평이라 그런 것 같아요. 파란 여우님의 <깐깐한 독서본능> 꼽아놓겠습니다. 읽고 나니 왠지 흐뭇해요. ^^*

로쟈 2009-11-23 00:03   좋아요 0 | URL
네, 어떤 분위기의 책인지 소개가 좀 필요할 듯해서 옮겨놓았어요...

수유 2009-11-2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부러운 책이네요^^

로쟈 2009-11-23 16:12   좋아요 0 | URL
이 참에 저자 대열에 참여하심은?^^

펠릭스 2009-11-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은 늘 궁금합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독서가)

치유 2009-11-25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경사가 왠지 우리 가족 경사처럼 행복합니다.
아이들 불러서 자랑시켜주고 흐뭇합니다.
여우님의 깐깐한 독서본능 대박기원~!

책읽는나무 2009-11-27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파란여우님이 '이장'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단계가 더 높았었군요.^^
님의 글에서 이미 여우성님의 책을 읽은 듯하고,
좀 뭐랄까,
여우님의 모습이 눈에 잡히는 듯하여
마음이 좀 애틋하게 느껴지네요.
실은 내가 사는 이작은 동네 면사무소 한 켠에 여우성님이
고로쇠를 홀짝이고 계실 듯하여 확인하고픈 욕구도 생기구요.
암튼 얼른 사봐야겠어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예외상태>(새물결, 2009)와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이 최근에 출간됐지만, 리뷰기사는 아주 드물게 뜨고 있다. 이번주 대학신문의 서평란에 실린 '조르지오 아감벤의 신간을 읽는다'를 옮겨놓는다. 그 드문 서평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대학신문(09. 11. 21) 행복한 삶의 패러다임으로 도래해야 할 정치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다 보니 정치에는 다들 관심이 없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긴급조치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사유를 무화시키면서 오히려 우리의 삶을 한갓 생존에 지나지 않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이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며 행복한 삶인가? 행복한 삶이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사진)은 우리가 더 이상 묻지 못하고 있던 이 궁극적인 삶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진정한 정치적 행위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호모 사케르」 연작을 통해 혜성처럼 등장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아감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사건들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면서 정치적 사유의 기존 개념들을 전복적으로 재해석하며 새로운 정치철학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는 철학자다. 그의 독창적인 사유의 배경에는 푸코, 데리다, 낭시, 바디우, 네그리를 비롯해 하이데거, 벤야민, 슈미트,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는 방대한 사유의 교류와 깊이가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최근 번역·출간된 『예외상태』(2003)는 「호모 사케르」 연작 중 Ⅱ-1권에 해당한다. Ⅰ권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에서는 삶을 포획하는 권력 장치가 감옥에서 수용소로 이행하면서 ‘호모 사케르’와 같은 벌거벗은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 주권의 본질임을 밝혔다면, 『예외상태』에서는 법과 폭력의 관계 속에서 삶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시키는 ‘예외상태’라는 장치야말로 국가주권과 법치의 통치 패러다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대외전쟁이나 내전 같은 비상시국에서의 긴급조치나 계엄령처럼, 예외상태란 정상시에 작동하던 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살아있는 자들을 아노미적 공간 속에 놓으면서 동시에 법의 힘에 포획시키는 주권권력의 정치적 장치다. 법 안에 법의 공백을 놓는 예외상태의 역설적 구조에 포획된 생명은 법질서 바깥으로 배제된 채로 법의 힘 안에 포섭되는 벌거벗은 생명이다. 주권권력은 벌거벗은 생명과의 이런 배제적 포함 관계 속에서 삶을 통치하는 생명정치를 실행한다. 문제는 이런 예외상태가 더 이상 잠정적인 예외조치가 아니라는 데 있다.  

나치 독일의 전체주의 국가든 부시 정권의 민주주의 국가든 예외상태는 사실상 모든 국민국가의 정상적인 통치 패러다임으로 작동한다는 것이 아감벤의 분석이다. 예외와 정상규칙의 식별불가능성은 아노미를 창출해 법질서를 확정하려던 예외상태의 기능을 멈추게 하고, 결국 최종적인 법질서의 작동을 무화시켜 순수한 폭력의 아노미 지대로 들어서게 한다. 국가의 법이 폭력으로부터 삶을 보호한다는 것은 허구인 셈이다. 아감벤은 마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 듯, 삶을 헐벗게 만드는 주권권력의 기계 장치(예외상태)가 작동 정지되는 곳에서 오히려 ‘진정한 예외상태’에 돌입할 수 있는 전회(轉回)의 가능성을 본다.  

진정한 예외상태란 법이 삶 자체와 구별되지 않고, 법과 삶의 배제적 포함 관계 자체가 무화되며, 거꾸로 법이 단지 삶의 사용 방식에 지나지 않게 되는 상태, 즉 법 바깥으로의 자발적인 내버려짐과 더불어 삶이 자기 고유의 잠재성을 회복하는 상태다. 이는 법을 정립하거나 보존하려는 목적에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순수한 수단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법과 삶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 ‘목적 없는 수단’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아감벤의 정치철학적 사유 전체를 압축해 놓은 짧은 논문들의 모음집 『목적 없는 수단』(1996)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예외상태』 보다 훨씬 이전에, 『호모 사케르』Ⅰ권(1995)과 거의 동시에 출간된 이 저서는 현재 진행형인 「호모 사케르」 연작의 주제들과 공명하면서 그 전체적인 기획을 예견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장차 도래할 공동체를 위한 아감벤의 새로운 정치패러다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난민’, ‘수용소’, ‘인민’, ‘경찰’, ‘스펙터클 사회’ 등은 국가-국민-영토의 삼위일체에 근거하는 국가주권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도래할 정치공동체의 가능성을 여는 요소들이다. 국민국가체계에서 수용할 수 없는 무국적 비시민들의 전세계적인 양산이나 이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용소의 확산은 결국 안정적인 예외상태의 실현 지대를 확장시킬 뿐이다. 특히 국가형태의 최종 단계라 할 수 있는 스펙터클 국가에서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불가능하게 하며 소통 가능성으로서의 언어활동 자체가 소통을 가로막는 결과를 산출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생명과 정치적 실존, 소통 불가능한 것과 소통 가능한 것, 규칙과 예외, 난민과 시민이 더 이상 식별불가능하게 되는 어두운 지대의 확장 속에서, 아감벤은 국가주권으로 표시되는 어떤 역사적 시대의 마감을 예감하며 동시에 새로운 삶의 비국가적 정치의 가능성을 본다. ‘자연스런 몸짓’, ‘순수한 언어활동’, ‘삶-의-형태’. 이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의 영역인 ‘목적 없는 수단’의 요소들로서 회복돼야 할 것들이다.  

국가주권과 법에 의해 정해진 목적(내용, 코드, 문법)을 실현하는 수단이기 이전에, 그 어떤 목적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용’을 주장할 수 있는 순수한 상태의 몸짓과 언어활동은 ‘공통적인 것’으로서 소통가능성 그 자체이기에 장차 도래할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정해진 동일성과 정체성이 없는 순수 잠재성의 존재다. ‘삶-의-형태’는 자신의 형태와 분리될 수 없는 삶으로서 벌거벗은 생명이 아닌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삶, 목적 없는 순수 수단으로서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할 수 있는 삶이다. 이 삶의 역량을 완성하고 소통하는 데 도달하는 삶.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충족한 삶이고 행복한 삶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정치적 행위는 법을 정립하고 보존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나 국가주권을 구성하는 폭력과 법의 연결을 해체하고 국가주권이 분리시킨 다양한 형태의 벌거벗은 생명들을 다시 묶어 ‘삶-의-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도래할 정치 역시 국가의 정복이나 통제를 위한 싸움이 아니라, 인류의 잠재적인 역량을 목적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국가와 비국가(인류) 간의 투쟁이 된다. 그렇다면, 벌거벗은 생명으로부터 행복한 삶으로의 이행을 위해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시작돼야 할 곳은 거대한 국가의 통치 기계와 맞서고 있는 바로 우리의 용산, 거기가 아닐까.(김재희_대진대 학술연구교수)  

09. 11. 22. 

P.S. 마지막 멘트와 관련하여 '작가선언 69'에서 엮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가 근간 예정이라는 것도 적어둔다. 표지는 아래 두 가지 시안 가운데 하나로 결졍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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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벌거벗은 생명 VS 목적 없는 수단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1-23 20:45 
    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아감벤의 <목적 없는 수단>(난장, 2009)을 다루고 있다. '정치에 관한 11개의 노트'란 부제대로 책은 저자가 발전시켜나가게 되는 철학적 구상의 노트이면서 독자에겐 아감벤의 전체적인 철학적 기획을 일별하게 해주는 조감도이다. 병렬적인 구성이긴 하나 '기 드보르를 추모하며'란 헌사가 시사해주듯이 '<스펙터클의 사회에 관한 논평>에 부치는 난외주석' 같은 글이 큰
  2. "이것은 정말 거꾸로 된 세상"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06 08:00 
    '작가선언 6ㆍ9'에서 펴낸 용산참사 헌정문집이 출간됐다.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실천문학사, 2009). 근간예정이란 소식은 아감벤에 관한 페이퍼 말미에 적어둔 적이 있다. 표지는 검은색과 노란색, 두 가지 시안 가운데 노란색이 선택된 듯하다(나도 바라던 바다). 예상보다 두툼한 책이 출간됐는데, 2009년의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상처이자 사건으로 용산참사에 대한 기억과 분노가 책으로 엮어진 것을 다행
 
 
펠릭스 2009-11-2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노랑바탕이 더,,,

로쟈 2009-11-23 21:5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렇긴 한데, 첫번째 표지가 낫겠다는 분들이 더 많은 듯해요...

펠릭스 2009-11-23 22:09   좋아요 0 | URL
예,,첫 번째는 검정 상복을 입은 여자분의 심장을 드려다 보이는 상징성있어
강한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