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수능시험도 끝났고 이제 연말도 멀지 않았다. 여러 지면에 서평을 쓰고 있는 탓에 이맘때가 되면 '올해의 책'을 추천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대략 어림하고는 있지만 막판 기대주들이 또 있기 마련이다. 역사분야에서라면 계승범 교수의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 2009)가 단연 돋보이는 신간이다. 정부가 아프간 파병을 다시 결정한 상황이라 시의성도 있다. 소개를 보니, "해외파병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의 역사를 추적했다. 이 책은 1392년부터 1876년까지 480여 년간 명, 청의 파병 요구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 군대를 파견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의를 다루고 있다. 2009년 우수저작 및 출판지원사업(한국간행물위원회 주최) 당선작." 저자 인터뷰기사에 있기에 미리 챙겨놓는다. 부제인 '조선 지배계층의 중국 인식'은 오늘날 '한국 지배계층의 대미 인식'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다.    



한겨레(09. 11. 13) 명나라의 파병요청…조선은 실리를 택했다 

1479년(성종 10년) 명으로부터 건주여진에 대한 협공을 요청 받은 조선은 파병 여부를 두고 신료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찬성론자는 ‘대국을 섬기는 예의상 거절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고, 반대론자는 어려운 경제사정과 패전 가능성을 들어 불가함을 역설했다. 판세를 가른 것은 때마침 올라온 정효종이란 하급관리의 상소였다.  

“맹자께서 말씀하시길 이웃 마을에 싸움이 있으면 문을 닫아걸어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혹 황제의 명을 중히 여겨 부득이 (파병 요청에) 응해야 한다면 봄날의 화창한 때를 기일로 삼을 것을 청하고, 중국이 기일에 앞서 단독으로 정벌에 나선다면 우리 백성은 전쟁에 나가는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조정이 마련한 최종안은 이랬다. 병력 요청에는 응하되 최대한 시간을 끌고, 군대가 가더라도 충돌은 가능한 한 피한다는 것. 사실상의 ‘면피용 파병’이었다. “당시 논쟁을 보면 ‘남의 싸움에 끼어들어 피해 볼 이유가 뭐냐’는 신중론과 ‘어차피 보낼 거 화끈하게 결행해 명의 환심이라도 사 두자’는 적극적 파병론이 충돌합니다. 심지어 ‘유림과 백성의 반대 여론을 내세워 파병 규모를 줄여보자’는 협상론 등 나올 수 있는 논리가 다 나와요. 어떻습니까, 참여정부 시절 이라크 파병을 두고 벌어진 논쟁 구도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계승범 고려대 연구교수(민족문화연구원)가 쓴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푸른역사)는 파병 논쟁이란 프리즘을 통해 조선의 대외관계, 나아가 지배 엘리트의 대중(對中)의식이 겪은 변화상을 추적한 책이다. 파병이라는 단일 이슈를 매개로 조선의 외교관계와 대외인식에 통사적으로 접근한 첫 시도인 셈이다.

“17세기 나선정벌에 관해 논문을 쓴 것을 계기 삼아 실록에 나온 해외파병 논쟁을 정리해 봤더니 무려 열다섯 차례나 되는 겁니다. 첫 번째가 1449년(세종 31년) 명의 몽골 원정 요구였고, 마지막이 1658년(효종 9년)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기 위한 청의 출병 요청입니다.” 

계 교수의 분석으로는 이 가운데 거절한 것이 5차례, 파병한 게 9차례였고, 취소가 1차례다. 중요한 사실은 16세기를 분수령으로 논쟁의 양상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는 점이다. “성종 때까지만 해도 중원 제국(명)에서 파병 요청이 들어오면, 신료들끼리 모여 주판알을 튕깁니다. ‘대체 이 전쟁에 참여해 얻을 수 있는 게 뭐냐’를 따지는 거죠. 그래서 별 볼 일 없으면 거절해 버리고, 그게 어려우면 마지못해 생색내기 차원에서 군대를 보냅니다. 적어도 ‘국익’과 ‘사대’를 동일시하진 않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16세기를 지나면서 두 가지가 동일시됩니다. 명의 요청을 따르는 것 자체가 국익으로 둔갑하는 것이죠.” 

대체 16세기에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계 교수는 쿠데타를 통해 옹립된 중종이 명에 대한 사대를 통해 정통성을 획득하려 했던 점, 이 시기 주자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점과 함께 더욱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중원의 주인이 100년을 주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는 200년이 다 되도록 안 무너지는 겁니다. 그러니 명의 헤게모니 질서가 영속할 것처럼 여겨지고, 그 질서 아래서 2인자 자리를 유지하는 게 조선의 국익이란 인식이 생겨납니다. 여기에 주자학의 배타적 화이관의 영향으로 조선과 명의 관계는 과거의 군신관계에 부자관계의 요소가 더해지는데, 이 상황에선 명을 배신하는 게 ‘천륜’을 어기는 게 돼 버립니다.”

계 교수는 광해군을 폐위시킨 반정세력의 최대 명분이 광해군의 배명(背明) 행위였던 사실이나,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이 무력으로는 청을 결코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청의 침공을 초래해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것, 이후로도 북벌이니 대명의리니 조선중화니 하며 과거의 기억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간과해선 안 될 점은 이런 조선 지배층의 태도가 단순한 명분론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뭔가 실익이 있었다는 얘긴데, 계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삼전도의 굴욕이 뭡니까. 아버지(명)가 위험에 처했는데 나 하나 살겠다며 원수(청)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부자의 연을 끊기로 약속한 사건입니다. 당시 기준으론 배반이자 패륜이지요. 만약 이것이 상황논리로 허용된다면, 피지배층에게 왕조와 양반에 대한 복종을 요구할 명분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 절박감이 ‘소중화’를 자처하며 망해버린 명 제국에 대한 의리와 충성을 강조하는 집단적 자기최면으로 나타난 겁니다.”

하지만 조선이 대명의리적 조선중화 의식에 집착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확고한 통치기반을 확립한 청이 내정 간섭을 중단한 덕분에 가능했다. 그런 점에서 계 교수는 조선중화론이 “청 질서의 보호막 안에서 외친 ‘수족관 안의 자부심’이었다”고 일축한다.

“명-청 교체기의 역사는 오늘날의 동아시아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중국의 부상이 가시화되는 지금 상황은, 굳이 비유하자면 누르하치가 만주를 실질적으로 장악했지만 명과의 대결에는 나서지 않은 17세기 초반의 정세와 유사하다고 할까요. 정치하는 사람이라면 정파를 떠나 어느 것이 한국을 위한 길인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세영 기자) 

09.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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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1-13 11:04   좋아요 0 | URL
예나 지금이나 약소국의 비애내요.아프간 파병 요청에 냉큼 응하는 명박정부의 행태를 보면서 조선 성종새대의 관료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것은 왜일까요?

로쟈 2009-11-14 10:41   좋아요 0 | URL
관료들이 많이 읽어볼 만한 책이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11-13 20:35   좋아요 0 | URL
제임스 팔레(워싱턴 주립대) 마지막 제자 계승범씨가 드디어! 하하하...재밌겠습니다.저는 이런 소재 다룬 책이 좋아요.한명기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를 의식하고 쓴 부분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올해엔 동아시아 외교 분야 다룬 책들이 꽤 나오는데요.올봄에는 이삼성,한명기가 그리고 연말에 계승범까지...식단이 풍성하군요.

로쟈 2009-11-14 10:4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제일 반가워하시네요.^^

펠릭스 2009-11-14 21:35   좋아요 0 | URL
당나라 또한 신라에게 파병한 꼴인가요?

로쟈 2009-11-15 12:26   좋아요 0 | URL
미국이 이라크에 파병한 것 비슷하지 않을까요?..

mirror 2009-11-15 20:37   좋아요 0 | URL
당시 고구려는 당나라에게 냉전시대 미국에 대해서 소련이 지니는 지위, 또는 소련에게 미국이 지니고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을 듯 합니다. ^^ 당나라가 신라와 함께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억압했다는 관점으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을 것 같네요.
 

귀가길에 읽은 칼럼 하나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의 '육상효의 유씨씨' 란이다. '유씨씨'는 'You See Culture'를 뜻하는 걸로 돼 있다. 이 칼럼란을 읽은 건 오늘이 처음인데, 한류에 대해 던지고 있는 질문들이 이모저모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준다. 소제목을 따서 말하자면, '한류 열풍의 실체는 무엇일까?' '아시아적 삶이란 무엇일까?' 등이 그 생각해볼 거리이다. 답도 누가 적어주면 좋겠지만...  

한국일보(09. 11. 12) 한류에 관한 질문

혹시 일본에서의 한류(韓流) 열풍이 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내재된 식민지에 대한 향수로부터 기인한다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일본 한류 팬의 대부분이 중년 이상의 어른들이고, 한류의 시작이 된 드라마들이 <겨울연가> 같은 노스탤지어를 기본 정서로 하는 드라마들이었던 것은 아닌가?

한류 열풍의 실체는?
아니면 혹시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한류 열풍의 정체가 우리가 재빨리 복사하고 습득한 서구식, 아니 더 정확히는 미국식 생활방식과 문화의 대리 전달이라면 어쩌겠는가? 그래서 그들의 한류는 한국의 아이돌 가수들이나 도시적 감수성이 과도하게 치장된 드라마들에 대한 열광인 것은 아닌가?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서 미국이나 서구로 진출하지 못하는 것도 그쪽 나라들에서는 자신들의 복제품을 굳이 다시 볼 이유가 없어서인 것은 아닌가?

한류라는 단어와 현상이 생겨난 지 10년이 지나가는 지금 한류는 무엇인가? 문화인가, 산업인가? 혹은 그 둘을 다 포괄하는 문화 산업인가? 문화 산업이라는 말은 결국은 산업이라는 말 아닌가? 그래서 그 동안에 그렇게 한류의 경제적 효과를 증명하는 각종 통계 수치들이 난무했던 것인가? 그런데 그 수치들을 동반한 주장들이 그려왔던 장밋빛 전망대로라면 한류는 지금 우리가 보는 것보다는 훨씬 더 엄청난 현상이어야 하지 않는가?

한국에서조차 막장 드라마라고 비난 받던 드라마들이 한류의 위세로 수출돼 나가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한국에서조차 가창력이 문제되던 아이돌 가수들이 아시아 각국으로 진출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일본의 성인들이 자신들의 노스탤지어를 위로 받는 방법을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찾아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서구화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이 그들 스스로 서구의 경험을 문화적으로 복제해내는 방법을 찾아내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시 한류는 지금 아시아 각국에서 생겨난 하드웨어적 인프라와 그 하드웨어를 채울 소프트웨어적인 인프라 사이의 간극을 채우는 일시적인 문화현상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방송국 설비와 송출의 시스템은 있으나 그 안을 채울 자국의 콘텐츠가 없을 때 일시적으로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은 아닌가? 과거 우리 TV의 황금시간 대를 채우던 <타잔> <6백만 불의 사나이> 등의 미국 드라마와 우리의 극장들을 채우던 홍콩 영화들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우리의 콘텐츠로 대체된 것처럼 한류도 어느 날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러면 지금은 한류의 대중문화 작품들 속에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될 때는 아닌가? 일방적 산업 논리에서 벗어나서 한류 드라마와 노래와 영화 들 속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될 때는 아닌가? 과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까? 아니면 가장 서구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일까? <선덕여왕>과 <아이리스>를 오가는 이 질문들 속에 도사린 함정은 무엇일까? 



아시아적 삶과 정체성
한류가 아시아적 현상이라면 아시아적 삶이란 무엇일까? 최근에 부쩍 활발한 동아시아 논의들이 겨냥하는 곳이 '서구의 학습이 곧 근대화'라는 패러다임이 지배해왔던 20 세기를 극복하고 아시아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지점이라면, 한류라는 아시아적 현상이 담아야 할 것은 아시아적인 그 어떤 것은 아닐까?

한국도 아니고, 보편이라는 이름 속에 음험하게 도사린 서구도 아닌, 아시아적 감수성으로 아시아적인 휴머너티을 담아내는 것이 한류의 몫이 아닐까? 그것만이 이데올로기와 정치가 빠르게 해체되고 다시 생성되는 21 세기의 아시아에서 한류라는 피상적인 문화적 현상이 진정하게 내면화하는 길이 아닐까?(육상효 인하대 교수·영화감독) 

09. 11. 12.  

P.S. 파주 어딘가 세워진다는 '한류우드'는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2000년대 이후의 한류 열풍 탓에 한류에  대한 책들도 많이 출간돼 있다(돈이 모이는 곳에 책도 넘치기 마련이다). 배용준 사진집을 갖추고 있지 못하지만, 한류에 대한 책 몇 권 정도는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용의도 있다. 그 후보 몇 권을 골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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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11-12 23:32   좋아요 0 | URL
요즘 가는 데마다 선덕여왕과 아이리스 얘기더라구요. 저는 덕만이가 남주인줄 알았는데... 로쟈님도 보세요? ^^ 미실어록도 나올 듯...

로쟈 2009-11-12 23:56   좋아요 0 | URL
저는 보지 않는데, 아이가 즐겨봅니다.^^

딸기 2009-11-13 02:48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엔 참 이상한 글이로군요.

"그들의 무의식 속에 깊이 내재된 식민지에 대한 향수"가 뭘까요?
그들은 무의식 속에도 식민지에 대한 향수가 내재돼 있다는 거, 확실한가요?

한국에서조차 가창력이 문제되던 아이돌 가수들이라...
그럼 저 사람은 한류 컨텐츠의 '수준'을 말하고 있는 건가요?
아니면 기본적으로 한류 컨텐츠는, 일본인들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내용들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걸까요?

"한국에서조차 막장 드라마라고 비난 받던 드라마들이 한류의 위세로 수출돼 나가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한국에서조차 가창력이 문제되던 아이돌 가수들이 아시아 각국으로 진출해서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일본의 성인들이 자신들의 노스탤지어를 위로 받는 방법을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찾아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보다 훨씬 맹렬한 속도로 서구화하고 있는 아시아 각국이 그들 스스로 서구의 경험을 문화적으로 복제해내는 방법을 찾아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건 궤변으로 들리는데요?

1. 일본인들에겐 식민지에 대한 향수가 내재돼 있다.
2. 그래서 그들은 노스탤지아를 위로받아야/위로받고자 한다.
3. 그런데 일본 문화에는 그런 컨텐츠가 아직 없다.
4. 그래서 한국 것을 보면서 좋아한다.
5. 한류 문화상품은 일본인들의 식민지 노스탤지아를 충족시켜주는 종류의 것들이다.

좀 어이가 없는데요.

현대적인 것, 도시적인 것=서구화 지향
이 도식으로 아시아 한류 전체를 설명하는 것도 웃기고요.

"보편이라는 이름 속에 음험하게 도사린 서구"라...
뭐, 그런 것도 많지요.
그런데 사례와 근거는 없이 추측과 단정과 자극적이고 오만한 표현 뿐이네요.

로쟈 2009-11-13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한류의 실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읽었는데요.^^ 일본내 한류의 실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전에 TV에서 다뤄진 걸 보니 노스텔지어보다는 배용준 같은 배우들의 이미지가 어필하는 것 같더군요. 동남아 한류에 대해서 한시적인 콘텐츠 채우기일 수 있다는 시각은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딸기 2009-11-16 15:5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대로, 한류의 실체에 대한 문제제기이고, 동남아 한류는 한시적인 컨텐츠 채우기일 수 있다는 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은, '일본'이라는 존재에 대해 편협하게 해석하고 국수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저 글에도 그대로 드러나있는 듯 싶어서예요. 우리가 반드시 '아시아적인 것'을 담아야 한다는 발상도 그렇고... '한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에서도 문화적인 편협함이 드러난다는 거죠.
이집트와 브라질에서도 겨울연가가 유행한다는데... 그럼 앞으론 한류에 중동적인 것과 중남미적인 것까지 담아야 하나요(농담임다) 차라리 '보편적인 인류의 고민을 담자'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ㅎㅎ

로쟈 2009-11-16 20:55   좋아요 0 | URL
필자가 질문들만 나열해놓았는데, 딸기님이 답변을 쓰셔도 좋을 것 같아요.^^

카스피 2009-11-13 13:32   좋아요 0 | URL
뭐 일본내 한류에 대해서 식민지 시대의 향수때문이라는 것은 무척 오버스럽습니다.사실 배용준에 의해서 촉발된 이른바 한류 열풍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주로 30~50대의 주부층이지요.이들이 식민지 시대의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수긍하기 힘들지요.좀 간단히 생각하자면 일본 아줌마들 구미에 맞는 드라마가 그간 없다가 겨울연가가 그녀들의 마음에 맞았다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뭐 동남아 한류는 로쟈님 말씀이 맞는것 같네요.우리가 한때 홍콩영화,일본가요에 심취했다가 이를 벗어났듯,동남아도 자국 문화가 발전하면 더이상 한류를 찾지 않겠지요

로쟈 2009-11-14 10:38   좋아요 0 | URL
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펠릭스 2009-11-14 22:05   좋아요 0 | URL
우리안으로 동남아 사람이 들어오는(국제결혼,코리아드림)것과 관련하여 한류열풍이 한 몫을 한다면 그것은 문화적 피드백 속성을 지니고 있겠지요.

로쟈 2009-11-15 12:27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부분도 있는데, 양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에 도달한 것인지 조사가 좀 필요해 보입니다...
 
블룩과 출판권력의 재편

올 한해 출판계를 결산하는 한국일보의 연재기사에서 '블룩(blook)'을 다룬 꼭지를 옮겨놓는다. 블록에 대해서는 나도 한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인데, 기사에서도 언급이 되고 있다. 더불어, 자세히 보니 관련이미지가 '로쟈의 저공비행'이기도 하다. 다시금 바닥이 좁구나란 생각이 드는데, 내년에는 더 많은 블로거들의 더 풍성한 '블룩'이 햇빛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흠, 나부터도 어서 2, 3탄을 준비해야 할까...

 

한국일보(09. 11. 12) [책의 풍경, 2009] <4> 블룩(blook)의 시대

"아이템은 풍부한데, 마땅한 필자가 없다." 풍부한 자본력과 인적 네트워크를 갖춘 일부 대형 출판사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 출판사들의 고민거리다. 쓰기만 하면 몇만부가 팔리는 일급 필자는 언감생심, 5,000~1만부 정도를 꾸준히 팔 수 있는 작가군의 확보가 이들의 과제다. 전문성과 필력, 취재력을 갖춘 '재야의 고수'는 과연 어디에 숨어있을까? 2003~2004년께부터 누구에게나 친숙해진 블로그가 그 시름을 크게 덜어줬다. 블로그 콘텐츠를 책으로 출간한 '블룩'(blookㆍblog와 book의 합성어)이 베스트셀러의 2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미국처럼, 국내 출판계도 인기 블로거들을 필자로 활용함으로써 '블룩의 시대'를 열었다. 온라인의 대중성ㆍ개방성ㆍ정보공유성에 기반한 '블룩의 시대'는 대중이 더 이상 '책'으로 상징되는 지식의 소극적 수용자가 아니라, 그 적극적 생산자이자 유통자가 됐다는 문화사적 의미를 지닌다. 



스타 블로거들, 출판계 스타로
인기 블로그의 콘텐츠를 책으로 출판하는 시도는 요리ㆍ육아ㆍ화장ㆍ여행 등 실용ㆍ취미 분야에서 시작됐다. 주부 김은주(33)씨가 2004년부터 싸이월드에서 운영하던 인기 육아블로그의 내용을 책으로 묶은 <예성맘의 우리아이 10년 밥상>(2006), <예성맘의 우리아이 평생밥상>(2008)은 6만부 이상 판매됐다. 평범한 주부였던 김씨는 TV 광고에도 출연했고 3~4권의 새 책 출간이 예약된 '귀하신 필자'가 됐다. 



취미ㆍ실용 분야 스타 블로거들의 성공 이후 다양한 분야의 블로거들이 스타 필자로 각광받게 됐다. 젊은 미술인들에 주목하며 미술계의 숨은 이야기를 전하는 '문화의 제국'이라는 블로그로 온라인 스타가 된 김홍기(37)씨의 블룩 <샤넬, 미술관에 가다>(2008), <하하 미술관>(2009)도 각각 1만부 이상 팔렸다. 인터넷 논객으로 불리는 한윤형(26)씨는 정치ㆍ사회 분야의 스타 블로거. 그의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2009)는 6개월 만에 2쇄를 찍었다. 지성사의 흐름을 짚고 인문학 신간을 소개하는 인기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의 운영자 이현우(41)씨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2009)도 그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책이다. 고양이, 편의점, 팝업북, 골목, 장난감 등 소소한 소재에 대한 전문 블로거들을 주목한 출판사 갤리온의 '작은 탐닉' 시리즈는 모두 20권으로 출간돼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출판사로 들어온 원고를 보고 필자를 구하는 고답적인 방식에서 신문이나 잡지 등으로 알려진 필자 찾기, 인맥 동원하기 등 기존 방식과 달리 블로그는 이처럼 묻혀있던 저자군을 발굴하는 수원지로 자리매김했다. 배영진(40) 갤리온 주간은 "'작은 탐닉' 시리즈의 경우 1~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우연히 찾아낸 필자들"이라며 "블로그는 가장 손쉽게 예비 저자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자 저자와 출판사를 연결해주는 새로운 채널"이라고 말했다. <하하 미술관>을 기획한 미래인 출판사의 황인석(39) 편집장은 "블로거들은 정보가 공개돼 있으며 이메일 연락도 수월해 섭외도 용이하다. 중소 규모 출판사들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획ㆍ편집 중요성 더 높아져
블로그가 출판의 새로운 콘텐츠 공급원으로 각광받는 이유는 콘텐츠 내용이 소비자ㆍ독자 친화적이기 때문. 주로 취미ㆍ실용 분야의 블로거들이 초기부터 성공한 점이 이를 증명한다. 하루 수백~수천명에 이르는 블로그 방문자 수에서 시장성도 어느 정도 검증되는 점, 블로거들이 대부분 사진 판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작단가도 낮출 수 있다는 점, 기존 필자에 비해 선인세 등 초기 자금을 적게 투입해도 된다는 점도 블룩의 매력이다.

그러나 블로그의 인기나 블로거의 스타성이 곧장 출판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온라인과 활자라는 매체의 형식이 다르기 때문에 블로그의 콘텐츠를 가공하는 정교한 편집ㆍ기획력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기획한 산책자 김수한(39) 주간은 "책은 전체 블로그 내용의 5%도 소화하지 못했다"며 "어떤 식으로 텍스트를 재배치할 것인가, 사진 숫자는 얼마나 줄일 것인가, 문체는 어떤 식으로 바꿀 것인가 등 컨셉을 가다듬는 데 1년 가량 걸렸다"고 말했다.

블로거 네트워크가 책 구매로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도 회의적 시각이 있다. 황인석 미래인 편집장은 "온라인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노는 데 길들여진 블로그 방문자들을 전통적인 활자매체로 유도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콘텐츠의 내용보다는 방문자 수에 집착하거나, 기존 지식과 정보의 짜깁기에 불과한 블로그가 태반인 만큼 이를 선별하는 출판기획자들의 섬세한 시각과 치밀한 기획, 마케팅 전략이 요구된다"고 덧붙였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연구부장은 "1인 미디어 시대를 대변하는 블로그는 콘텐츠의 전시장이자 재야의 고수를 발굴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라며 "그러나 아직까지는 블룩이 주로 실용서 범주에 머무르고 있으며 비실용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느냐가 향후의 과제"라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9. 11. 12.  

P.S. 블룩 얘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알라딘 리뷰계의 지존이라 할 파란여우님의 블룩 <깐깐한 독서본능>(21세기북스, 2009)이 내주에 출간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바야흐로 개봉박두다! 기회가 닿아서 책의 몇 꼭지를 미리 읽어볼 수 있었는데, 알라딘마을의 수준(독서본능!)을 대변하고 있는 듯싶어서 정겹고 부듯했다(우리동네 사람이 '깐깐한' 건 자랑거리다). 자칭 '알라디너'라면 고대할 일이며, 필독해마지 않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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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09-11-12 15:52   좋아요 0 | URL
정말 좋은 블로거들의 블로그들이 많은데 저는 역시 종이책이 좋은지라 이런 현상이 매우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게속 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로쟈님도 2,3탄 준비하셔야죠?ㅎㅎ

로쟈 2009-11-13 00:20   좋아요 0 | URL
블로거 천만시대라고도 하므로, 블로거가 책을 내는 일이 조만간 뉴스거리에서 빠지게 되지 않을까 해요. 저야 준비는 하고 있지만 마음보다 손은 언제나 더딘 편이어서...^^;

빵가게재습격 2009-11-12 21: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로쟈님. 체일요양(?)중에 잠시 들렀습니다. 로쟈님 책은 쟁여놓고 다 읽지 못했는데, -<차라투스트라...>와 <누가 슬라예보 지젝을...>사이에 끼워 놓았습니다. 앞 뒤 두 권을 겨우 읽고 나서 로쟈님 책을 열어보야지...하고있는데, 게을러서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파란여우님의 책이 필독! 이라면 과제가 하나 더 늡니다. 건강하세요.^^

로쟈 2009-11-13 00:21   좋아요 0 | URL
네, 건강의 안 좋으신 것 같던데, 요양 잘 하시길. 사실 '요양객'은 저의 로망 중의 하나인데요.^^;

빵가게재습격 2009-11-13 14:49   좋아요 0 | URL
생각만큼 즐겁지 않습니다...오히려 괴롭다(?)고 하는 편이 진실에 좀 더 가깝습니다.--;;;;

로쟈 2009-11-14 10:37   좋아요 0 | URL
빨리 쾌유되시길 바랍니다.^^;

펠릭스 2009-11-14 22:24   좋아요 0 | URL
들리는데 길들려진 블로거지만 덕분에 이런저런 책들을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로쟈 2009-11-15 12:28   좋아요 0 | URL
부수효과죠.^^
 
'수레바퀴 밑에서'와 '데미안'의 차이

이번달 '출판저널'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루고 있으며, 지난달에 읽은 <데미안>의 한 장면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다. 지면에는 첫문단과 끝에서 두번째 문단이 누락됐는데, 여기서는 되살려놓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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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저널(09년 11월호)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니체의 가장 난해한 책 

헤세가 13살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들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저는 니체의 추종자가 아닙니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말하자면 도덕의 살해인데요, 그것은 저에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관점은, 제 종교는 경건하지만 도덕으로부터는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저는 니체가 철학자로서 결코 오래 갈 것 같지 않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 듯하다. 그의 자전적 소설 <데미안>에는 대학생이 된 싱클레어가 니체를 탐독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대학에서의 ‘공장식’ 강의에 실망한 싱클레어는 교외의 낡은 집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모든 시간을 쓰기로 한다. “내 책상 위에는 니체가 몇 권 놓여 있었다.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다. 그를 그침없이 몰아간 운명의 냄새를 맡았다.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그토록 가차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이 존재했다는 것이 행복했다.”  

여기서 싱클레어-헤세가 느낀 행복은 니체의 운명에서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개인주의자’를 발견한 행복이 아닐까? 어떤 개인주의인가? 그가 <데미안>의 서문에 적은 놓은 의미에서의 개인주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하지만, 니체의 교훈이 과연 그렇게만 정리될 수 있을까?      

싱클레어의 책상에도 놓여있었을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그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세 단계로 묘사했다. 낙타와 사자와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크게 고무되었지만 종의 진화라는 관점, 곧 하나의 종으로서 다수의 인간 무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아무런 목표점 없이 진화한다는 다윈의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진화는 선택된 개인의 진화였고 그 목표는 인간의 자기극복으로서의 초인(위버멘쉬)이어야 했다. 그 초인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것이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는 정신의 세 단계 변화다.  

낙타란 짐을 지는 정신이다. 무거운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총총히 사막으로 들어간다. 낙타는 “너는 해야 한다”는 주인의 명령에 순응하는 정신이다. 반면에 사자는 “나는 하고자 한다”라고 말하는 정신이다. 비록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지는 못하지만 사자는 그러한 창조를 위한 자유는 쟁취해낸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아이. 어린아이는 순진함이자 망각이고, 새로운 시작이자 놀이이며 저절로 굴러가는 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여기서 니체는 신성한 긍정이야말로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긍정인가? 운명에 대한 긍정이고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이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니체의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면서 동시에 가장 난해한 책이다. 그 난해함은 니체가 ‘모든 사람을 위한, 그러나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라는 부제를 통해서 스스로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특히나 초인 사상과 함께 이 책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구성하는 영원회귀 사상은 많은 독자를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차라투스트라 자신에게도 수수께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3부의 두 번째 장인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중력의 영(靈)인 난쟁이가 “진리는 모두 곡선이며 시간 그 자체는 원을 이루고 있다”는 순환론적 시간관을 먼저 들먹이자 그가 너무 쉽게 생각한다고 화를 낸다. 난쟁이는 그런 시간의 순환이 함축하는 영원회귀의 심오한 의미에 대해서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고 본 것이다. 영원회귀란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이미 존재했었으며, 이제 또 시간의 오솔길을 달려가서 다시금 영원히 되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러한 자신의 사상 자체에 대해 섬뜩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서 그는 까마득한 어린 시절에 들었던 개 짖는 소리를 상기해낸다. 그리고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무서운 환영을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황량한 달밤에 험한 절벽 사이에 서 있다가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걸 본다. 곁에서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개가 울부짖고 있다. 젊은 양치기는 구역질을 하면서 크고 묵직한 검은 뱀을 입에 물고 있고, 역겨움과 공포에 질린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손으로 뱀을 잡아당기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그때 그의 안에서 “물어뜯어라! 대가리를 물어뜯어라!”라는 외침소리를 듣는다. “나의 두려움, 나의 미움, 나의 구역질, 나의 연민, 나의 선과 악이 한꺼번에 내 안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양치기는 그가 일러준 대로 뱀을 물어뜯어서 뱀 대가리를 멀찌감치 뱉어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는 이제 더이상 양치기도 인간도 아닌 자, 변화된 자, 빛에 둘러싸인 자로 웃고 있었다! 지금껏 지상에서 그처럼 웃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본 환영의 내용이다. 그것은 환영이면서 동시에 예견이다. 그럼 수수께끼는 무엇인가? 차라투스트라는 ‘더없이 고독한 자’가 본 환영에 대해서 설명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대 비유 속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그리고 언젠가 오고야 말 그 자는 누구인가? 뱀이 입속으로 들어간 양치기는 누구인가? 그러니까 가장 무겁고 가장 검은 것이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갈 인간은 누구인가?” 이것이 그가 묻는 수수께끼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3부의 후반부에 들어 있는 ‘건강을 회복하고 있는 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더 없이 깊은 심연의 사상”이라고 부른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구역질 때문에 쓰러진 차라투스트라는 일주일 동안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면서 앓아눕는다. 마치 젊은 양치기가 목구멍을 문 뱀 때문에 공포감에 질려 쓰러져 누워있었던 것처럼. 일주일 후에야 기운을 차린 차라투스트라는 목구멍으로 기어 들어와 자신을 질식시킨 괴물의 머리를 물었다가 뱉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구제하느라 지쳐서 병이 났다고. 이제 병상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차라투스트라에게 그의 동물들은 이렇게 예찬한다. “보라, 그대는 영원회귀를 가르치는 자다. 그것이 이제 그대의 운명이다. 그대가 최초로 이 가르침을 행해야 한다는 것, 이 크나큰 운명이 어떻게 그대의 가장 커다란 위험이자 병이 아닐 수 있겠는가!”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다섯 번째 복음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원’이라면, 차라투스트라의 복음은 ‘초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이 차라투스트라에게선 영원회귀가 아닐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면, 영원회귀에 대한 긍정은 초인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턱이다.   

다시 헤세로 돌아가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독일 청년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쓴 <차라투스트라의 귀환>에서 그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서 단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만 말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여러 가지 일을 보고 겪으며 힘에 부치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노력했고 그러다가 여러 번 상처를 입기도 했네. 하지만 그가 배운 것은 단 한가지뿐일세.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배웠네. 이 깨달음이 바로 그의 진리이며 긍지일세. 자네들이 그로부터 배워야 할 점도 바로 이러한 깨달음일세.” 요컨대, 헤세는 니체의 추종자가 아니었다. 

09.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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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 한 번뿐인 삶 VS 영원회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2-09 20:21 
    '출판저널'(12월호)에 실은 '로쟈가 읽은 책 속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뤘는데, 지난달에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쿤데라의 해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출판저널(09년 12월호) 인생의 매 순간이 반복된다면? “영원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
 
 
람혼 2009-11-11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컨대, 헤세가 니체에게서 배운 건 거의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읽고나니 헤세의 <싯다르타>를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쟈 2009-11-11 19:02   좋아요 0 | URL
두 사람 관계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나 자신이 되는 것과 초인이 되는 건 좀 다르다고 봐야겠어요...

람혼 2009-11-11 19:20   좋아요 0 | URL
네, 사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도 바로 그겁니다.^^

헤세가 니체한테 뭘 배우기만 할 군번(?)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헤세의 '니체 수용사'는 나름 편협한 측면이, 더 적확히 혹은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포퓰리즘적' 측면이 다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데미안> 또는 <차라투스트라의 귀환>(1919)의 경우도 흥미롭지만, 오히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와 헤세의 <싯다르타>(1922)를 비교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어쨌든 이래저래 독서의 욕망만 부채질해주고 계십니다...

로쟈 2009-11-11 19:31   좋아요 0 | URL
그건 람혼님 몫이예요.^^ 사실 불교와 니체 철학을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윤회와 영원회귀의 차이 정도...

2009-11-12 0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2 12: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년 여름 방한하기도 했던 미국의 고전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여서 더 많은 책들이 소개되길 바라지만 올해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유행하는 용어로 하자면 그녀야말로 '통섭형' 학자이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11. 04)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누스바움의 아카데미적 경력의 출발은 서양 고전 철학과 문학이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원전을 편집하고,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고, 해석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그리스 고전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활동과 국제적 활동을 펼쳤다. 페미니스트로서 누스바움은 한낱 고전학자로서 대학 울타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은 자신이 주장하는 내재적 실재론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인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함(philosophiern)’을 결국 공동체에 기초한 언어 사용과 관찰자의 공유된 경험에 한정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우리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현상으로 보지 않고 늘 관심과 배려를 보내는 태도가 오히려 세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이 그녀로 하여금 인문학적 범주를 넘어 사회과학적 관심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해서 여성문제, 경제발전, 법, 윤리, 교육, 인간발전, 성역할, 인권과 같은 폭넓은 사회문제 영역을 탐구하게 했던 것이다.  

공감에서 비롯하는 실천적 지혜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 사는 것(to eu zen)’을 바라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갈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 욕구에 따라서만 살지 않으며 일정한 합리적 원칙과 판단에 따라 행위하려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로고스적 동물’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이성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로고스’는 여러 측면의 인간의 정신 활동을 반영하는 말이다. 인간은 말을 하고, 말을 통해 타자와 의사소통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타자에게 내보인다.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는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은 로고스를 주고받으면서 복잡한 정치 사회인 폴리스를 구성해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로고스적 동물이라는 것은 또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감정 상태, 삶에 대한 이해, 동정과 공감, 연민과 같은 복잡한 감정 양태들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이런 감정적, 지각적 균형을 배우면서 도덕판단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 감수성, 통찰력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의식을 성장·강화해 나간다.

전통적 합리주의자들은 객관주의, 탈맥락주의, 이성중심적 사고를 도덕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반면 현대에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의 학자들은 맥락을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도덕판단, 공감, 상상력, 언어 등을 더 중시해서 인간의 내재적 감정의 영역을 인간의 이성(로고스)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감정과 이성, 욕구와 윤리가 서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감정이 오히려 이성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판단, 상상력의 토대가 인간의 지각 영역에 놓여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가치판단으로서의 감정의 역할이 인간의 실천적 합리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한낱 몽매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한 영역의 어두침침한 내면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한 구체화된 믿음과 느낌의 혼합’으로 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자와 달리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누스바움은 감정이 가치판단에서 중요한 인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위 영역 안에 이성의 지배를 받는 욕구의 영역이 있음을 밝히고, 인간의 적절한 행위를 판단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강조한 바 있다. 감정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적 지혜는 마땅한 때에,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사람에 대해, 마땅한 목적으로 적절하게 응답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격을 갖출 때 인간은 탁월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을 바탕으로 적절한 반응을 하는 인간의 감정의 능력을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극도의 이기적인 합리성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 타자에 대해 공감과 연민과 같은 공속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맥락에 따라 그 상황을 숙고하는 과정을 거쳐 판단하게 된다. 타자의 존재 양식을 인정하는 것도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정서적 공감을 바탕으로 적절한 행동 양식을 찾아낸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을 갖춘 사람을 ‘예술적 지각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술적 지각과 상상력은 도덕적 판단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과 개별성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요구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지각적 균형을 가진 삶’이란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 철학
누스바움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윤리적 비평이 예술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엄격한 규범적 잣대로만 작품을 평가해 왔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그녀는 미학적 관심이 실천적 관심인 윤리적 관심과 별개라는 철학적 순수주의를 포기한다.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윤리교육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상상력과 지적 지각, 감성적 지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윤리적 사유와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만일 철학이란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혜를 탐구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문학”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이미 <자연의 거울>을 쓴 로티에 의해, 합리성을 강조하는 전통 철학은 문학과 해석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해진 바 있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비춰볼 때 누스바움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에 선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푸코나 데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역사적으로 정확한 근거나 논리적 뒷받침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푸코에 대해선 그의 철학적 문제 제기가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진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그가 내세운 현대의 ‘성적 범주’에 대한 분석은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왜소화되고 또 경제적 이유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다양한 정신적 질병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감정은 메말라가고 서로에 대한 공감보다는 미움과 시기 속에서 고독이라는 질병의 늪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누스바움은 철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고 치료하는 철학은 인간을 불안정한 정신적 혼란의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철학은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합리성, 보편성, 절대성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감정이 가진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문학, 예술적 상상력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잘 사는 삶’의 목적이 아니겠는가.(김재홍/ 관동대 교양과 교수)    

09. 11. 10.  

P.S. 개인적으로 누스바움에 대한 관심은 아감벤에 대한 관심과 겹쳐 있다. 그건 <뉴레프트 리뷰>(길, 2009)에 실린 맬컴 볼의 글 '생명정치적인 것의 벡터들' 덕분인데,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정치학>)을 제사로 삼은 글의 서두는 이런 것이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문장에서 주목을 끄는 21세기의 두 가지 이론적 담론이 유래한다. 조르조 아감벤이 주권과 신체의 관계에 입각해 도발적으로 재정식화하는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 그리고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이 발전, 정의와 자유를 평가하고 증진하는 수단으로서 전개하는 능력 접근이 그것이다.(...) 둘 다 일정한 의미에서 생명정치적이며, 동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 인간과 동물, 정치와 자연-을 교차시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두 담론은 1960년대 이후 인문과학에서 개시된 분할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것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각, 그들의 통찰을 통합하거나 비교할 길은 지금 없는 것처럼 보인다."(410쪽)  

그러니까 똑같이 생명정치에 해당하는 담론을 펼치고 있지만 푸코-아감벤과 센-누스바움이 각기 다른 벡터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 이 '태그매치'를 감상하고 정리하고픈 생각을 작년부터 갖고 있었지만 여러 사정상 실현시키지 못했다(맬컴 볼의 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적하고픈 게 있었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누스바움의 저작들이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것. 아마티아 센과 누스바움이 같이 편집한 <삶의 질>(1993)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보기도 했지만, 읽을 시간을 따로 낼 수 없었다(누가 대신 정리해줘도 좋으련만).   

다행히 그 사이에 아감벤의 책은 세 권 더 출간됐고, 앞으로도 10여 권은 더 나올 예정이다. 그에 상응하여 누스바움의 다수 저작 가운데 <정의의 프론티어>(2007)이나 <인간성에서 숨기>(2006) 등 뭐라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오웰의 <1984년>을 다룬 공저로 <'1984년'에 대하여>(2005)도 <1984년> 붐이 이는 김에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싶고. 그걸 기다리느니 그냥 원서를 구해 읽는 게 빠를 듯싶지만, '삶의 질' 문제를 생각하여 독자의 바람을 그냥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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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를 위한 인문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07 10:30 
    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저자가 2008년 방한한 적이 있고, 그때 한 차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인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여성 학자인데(고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로 철학과 법학, 윤리학까지 강의하고 있다)국내에는그간에 단독 저작이 소개되지 않았다(공저만 두 권 나와 있는 듯싶다). 사실은 더 무게 있는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문학과 시
 
 
hikrad 2009-11-11 22:53   좋아요 0 | URL
저는 'Love's knowledge'가 빨리 번역됐으면 좋겠네요. 도서관에 주문했던 책을 빌려 놓고 보니 묵직한 분량의 압박이...^^ 로쟈님이 좋아하신다던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겠네요^^

로쟈 2009-11-13 01:23   좋아요 0 | URL
네, 번역되면 좋을 타이틀이 꽤 많지요. 로스쿨 교양서로도 요긴할 듯싶은데, 아직 별다른 기미가 없는 듯합니다...

Jun 2009-11-12 01: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누스바움은 제가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는 철학자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녀의 학문적 명성과 국제적인 활동에 비해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붐'이 일고 있는 랑시에르나 아감벤과 같은 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그 불균형이 더 뚜렷해지는데요,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이에 대한 로쟈님의 견해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9-11-13 01:27   좋아요 0 | URL
영미 철학자들이 아무래도 덜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듯해요. 푸코, 들뢰즈 같은 '화려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고. 누스바움은 다루는 분야가 넓은 학자여서 얼핏 엄두들을 못내는 듯도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