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메이커에서 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의 독서일기를 옮겨놓는다. 강영안 교수의 <타인의 얼굴 - 레비나스의 철학>(문학과지성사, 2005)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과 레비나스에 대해서는 작년에 나도 여러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가령 http://blog.aladin.co.kr/mramor/816934). 다음 학기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강의할 예정인데, 다시금 레비나스와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생각도 해볼 겸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뉴스메이커 732호(07. 07. 10) [독서일기](20) 타인의 얼굴-레비나스의 철학

나는 곧 너다. 웬 뚱딴지 같은 소리냐구? 어느 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를 읽다가 노트 한쪽 여백에 끄적인 글귀다. 나의 레비나스 이해는 강영안과 서동욱의 이해에서 더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 그들을 통해 레비나스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타자의 존재론적 탐구를 평생 시의 주제로 삼았던 한용운도 “나는 곧 당신이어요”(한용운, ‘당신이 아니더면’)라고 썼다. 다른 맥락이지만 시인 랭보도 “나는 타자다”라고 쓴 바 있다. 스피노자는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며 자신을 통해 파악되는 것”을 나의 실체라고 이해했는데, 근대 독일의 관념철학은 이걸 주체로 바꾸었다. 나는 항상적으로 나 자신인 바, 신체를 가진 또 다른 존재로 환원할 수 없는 존재다. 홀로 나일 수 없고, 타자와 맺는 관계의 맥락 속에서 나로 태어난다. 수없이 많은 너 속에서 발견되며, 거꾸로 말하자면 너는 타자의 자리에 놓인 나다. 그렇다고 나와 너는 존재의 위상학에서 동일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나와 너는 떨어져 있다. 나는 너의 부재 속에서 비로소 나다. 나는 너에게로 향함으로써 이타적 실존을 산다. “당신과 나의 거리가 멀면 사랑의 양이 많고, 거리가 가까우면 사랑의 양이 적을 것입니다.”(한용운, ‘사랑의 측량’)

사랑은 나의 자기됨과 내 존재의 확장을 포기함으로써, 더 적극적으로는 나를 너에게 줌으로써 살아지는 이타적 실존이다. 너와 사랑에 빠진 나는 자발적으로 너에게 갇힌 자요, 너의 볼모가 된 자다. 사랑에 빠진 나는 사랑을 가능케 한 호르몬이 작동하는 동안이지만 너를 위해 산다. 이는 “존재 안에서는 결손이고 시듦이며 어리석음이지만 존재를 넘어서는 탁월이며 높음”이다. 나는 너를 환대해야 할 뿐만 아니라 너에 대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레비나스는 “나의 자발성을 타인의 현존으로 문제삼는 일을 우리는 윤리라 부른다”라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나에게 법이며 명령이다.

레비나스의 중요 저작들의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그의 철학은 대부분 일반 독자에게는 생소할 게 틀림없다. 레비나스는 1906년 1월 12일 리투아니아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프랑스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집안에서는 러시아 말을 사용하고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자라났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정통한 현상학자였다. 아울러 당대 최고의 탈무드 선생이자 유대교에 정통한 학자이고 프랑스 철학의 큰 흐름 속에서 사유한 철학자다. 레비나스는 반유대주의에서 비롯한 폭력과 인종주의가 널리 퍼진 서유럽에서 학대받는 유대인으로 산 경험과, 경험을 넘어서서 타자 및 그 타자에 대한 책임을 보여주는 현상학의 맥락에서 자아와 타자 문제를 중심 주제로 삼는 사유를 발전시켰다.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철학에 이어지는 주제다.

‘타인의 얼굴’은 레비나스의 나와 자기성, 타자와 고통을 통한 주체와 윤리학, 신과 종교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이를테면 “타인의 얼굴은 나의 자발적인 존재 확립과 무한한 자기 보존의 욕구에 도덕적 한계를 설정한다. 타인은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이 세계에서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을 추구하는 나의 이기심을 꾸짖고 윤리적 존재로서, 타인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나 자신을 세우도록 요구한다”와 같은 구절은 매우 압축적으로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을 드러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들 각자는 각 사람에 대해서 각 사람에 앞서 잘못이 있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 잘못이 더 많다”고 썼다. 주체성이란 타자와의 윤리적인 관계를 통해서 정립되는 그 무엇이다. 나는 타자를 위한 존재, 타자의 필요에 대해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존재다. 레비나스는 도스트예프스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앞서,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있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책임이 더 많다”. 레비나스가 주체의 철학이라는 토대 위에 세운 타자의 윤리학은 나를 “타인의 고통을 짊어진, 고통받는 의인”, 즉 대속자 그리스도에까지 밀고 올라간다.

타자의 맞은편에 서 있는 나, 주체라고 부르는 이 존재는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내가 생각하는 한, 그 생각함이 곧 나의 존재함의 증거다. 나는 사유하는 실체이고, 사유하는 실체를 대상화하며 자기 앞에 세우는 존재가 바로 나다. 내가 생각함을 생각하는 존재라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을 니체는 부정한다. 니체에 따르자면 “주체는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만들어져 첨가된 것, 그 뒤에 숨겨진 것”이며, 그 본질은 “허구”다. 니체는 “‘정신’도, 이성도, 사고도, 의식도, 영혼도, 의지도, 진리도 없다. 이들은 모두 쓸모없는 허구다”라고 말한다. 니체의 철학은 과격한 주체 부정의 철학이다.

나를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자기됨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나타난다. 나의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은 타자가 대신할 수 없는 행위다. 레비나스는 이것을 향유라고 한다. 향유는 나와 세계가 관계하는 방식, 신체를 매개로 한 생물적 교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혼자 무언가를 먹고 마실 때, 물과 공기와 햇볕 등을 즐기고 있을 때 무리에서 저를 분리해서 오롯한 ‘자기’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향유는 개체에 작용하는 개별화의 원리다. 나는 향유를 통해서 자기로 거듭난다. 즉 “즐김과 누림”은 우리가 하나의 개체로서 자기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레비나스는 잠, 불면, 음식, 노동, 거주, 타자, 여자, 아이와 같은 일상성과 밀접한 것들이 우리 존재를 규정하는 요소들이라고 강조한 철학자다.

타자란 누구인가? 타자는 낯선 이다. 그 낯섦은 차라리 타자의 본질이다. 낯선 것은 끔찍하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지옥이다”라고 했다. 타자는 언제나 내 앞에, 지금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알 수 없는, “내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무한성”으로 서 있다. 타자는 “나에 대해서 완전한 초월과 외재성”을 가진 존재다. 타자는 내 앞에서 감추어진 그 무엇인데, 그것을 찾는 몸짓이 에로스다. 애무는 에로스의 현실태다. 애무는 손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지는 것을 만지는 행위다. 감추어진 것이란 무엇인가? 아이가 출산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난다.

아이는 “타자가 된 나”다. 아이의 출산으로 나는 비로소 나에게로의 영원한 회귀 운동에서 벗어나고, 타자와 타자의 미래 속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타자란 모두 잠재적 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적대하고 죽이는 일을 정당화하고, 결국은 전쟁, 폭력, 인종청소와 같은 20세기의 비극은 나의 존재를 앞세우고 나의 존재 유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데서 나온 것이다. 타자를 거부하고 배제하는 것은 근본 악이다.

서양철학은 히틀러와 국가사회주의의 등장이라는 근본 악을 막지 못했다. 세 형제의 맏이인 레비나스는 두 동생이 나치에 의해 희생되는 아픔을 겪었다. 그가 서양 철학을 비판하면서 타자에 대해 다르게 사유함을 하나의 철학 체계로 완성해낸 것은 이 근본 악을 넘어서기 위해서였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타자를 받아들이고 환대하며 타자에게 선을 행함으로써만 이 근본 악을 넘어설 수 있다.(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

07. 07. 06.

P.S. 옮겨놓고 나서 읽어보니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리뷰이다. 게다가 '나는 곧 너다'? 이보다 反레비나스적인 구호도 없는데, 아무래도 필자가 자아도취적인 읽기/일기를 적은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비공개로 돌렸다가 들인 품이 아까워 열어놓는다. 겸사겸사 이남인 교수의 서평도 자료삼아 옮겨놓는다. 서평은 전적으로 후설주의자의 입장에서 씌어졌다(아래 책에는 후설과 레비나스를 비교하는 논문도 포함돼 있다).  

교수신문(06. 01. 27) 레비나스의 철학적 주제 해명…"무비판적 수용은 아쉽다"

이 책은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 개념인 주체 개념이 “그의 초기 철학에서 중기 철학 그리고 후기 철학에 이르기까지 어떤 방식으로 변화, 발전하는지를”(15쪽) 해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우선 1장은 레비나스의 삶과 철학을, 2장은 주체 문제가 서양근대철학에서 논의되어온 과정을 정리한다. 거기에 이어 3장은 『존재에서 존재자로』, 『시간과 타자』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익명적 존재사건에서 주체가 출현하는 과정, 주체의 출현에서 타자와의 만남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을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초기 철학을 다루고 있고, 4장은 『전체성과 무한』을 중심으로 향유, 거주, 노동, 타인의 얼굴 등의 문제를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중기 철학을 다루고 있으며, 5장은 『존재와 다르게 또는 존재 사건 저편에』 등을 비롯한 몇몇 작품들을 토대로 대속적 책임의 문제 등을 해명하면서 레비나스의 후기 철학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6장은 고통 현상을 분석하면서 주체와 윤리 문제의 관계를 다시 검토하고 7장은 서양철학에서 레비나스가 이룩한 공헌을 정리한다.
절대적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는 레비나스의 철학은 인간존엄성이 땅에 떨어진 현대에 대해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현재 레비나스의 철학은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으며 국내 학계에서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그에 대한 관심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으나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비나스의 철학 전체를 조망하고 있는 이 책의 출간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20여 년 동안의 오랜 기간에 걸쳐 수행된 연구를 토대로 출간된 이 책은 앞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연구를 위한 필독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레비나스의 여러 작품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 및 그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주체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서 레비나스 철학을 해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분석되고 있는 레비나스의 작품들은 모두 아주 난해하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올바로 이해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저자는 이 모든 작품을 섭렵하고 철저히 분석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체 개념을 중심으로 그들 사이의 관계까지 해명하고 있다. 그를 통해 익명적 존재사건, 향유, 거주, 노동, 얼굴, 책임, 대속 등 레비나스 철학의 여러 가지 어려운 주제들이 해명되었고, 주체 개념과 관련해 레비나스 철학의 전체적인 모습도 밝혀졌다.

이 책은 앞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레비나스 철학 연구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이 책에는 “레비나스의 저작과 2차 문헌” 등 두 개의 부록이 붙어 있는데, 이 부록은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주체의 문제를 중심으로 레비나스 철학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저자도 밝히고 있듯이, 시간, 역사, 신체, 언어, 여성성, 예술, 종교, 신 등 레비나스 철학의 여타의 중요한 주제들, 그리고 레비나스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레비나스로부터 영향을 받은 철학자와 레비나스의 관계도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은데,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 이처럼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름대로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지니고 있다. 첫째, 저자는 “나의 관점”, “나의 방식”(16쪽)에 따라 원전을 읽고 논의를 전개해 나갔다고 밝히고 있으나, 자신의 관점, 자신의 방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고 있지 않다. “나의 관점”, “나의 방식”을 밝히기 위해서는 다른 연구자들과의 비판적 대결이 필요한데, 다른 연구자들과의 비판적 대결이 이 책에 거의 나타나 있지 않은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둘째, 저자는 레비나스와 아무런 거리도 취하지 않은 채 레비나스가 표명하는 모든 견해를 옹호하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독자들이 레비나스 철학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레비나스 철학을 올바로 이해한다 함은 그것이 지닌 의의와 더불어 한계 및 문제점까지도 이해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뒤에서도 부분적으로 지적되겠지만 레비나스 철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 및 문제점은 그동안 국내외 학계에서 많이 논의되어 왔는데, 저자는 그에 대해 거의 침묵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록 자세히 논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때그때 간단히 짚고 넘어갔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셋째, 필자는 레비나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현상학자였다”(292)는 견해를 피력하면서 여기저기서 레비나스의 현상학적 분석을 소개한다. 평소 레비나스의 철학을 현상학으로 해석해온 평자로서는 아주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현상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논하고 있지 않으며 현상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모호하다. 저자는 레비나스가 현상학자였다고 주장하면서도 레비나스를 따라 “얼굴은 현상이 아니다”(179)라고 주장한다. 이 경우 “현상”은 후설을 비롯한 레비나스 이전의 현상학자들의 “현상”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후설의 입장에서 볼 때 얼굴이 “현상”이 아니며 따라서 후설의 현상학은 얼굴을 다룰 수 없는 것일까? 후설에 의하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를 수 있는 것, 즉 넓은 의미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은 모두 “현상”이다. 레비나스도 얼굴에 대한 경험, “절대적 경험” 등을 말하고 있듯이 “얼굴”이 후설의 현상학의 관점에서 볼 때 현상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만일 얼굴이 “현상”이 아니라서 전혀 경험될 수 없다면 레비나스는 “얼굴”이라는 “현상”을 분석하면서 “얼굴의 현상학”을 전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레비나스가 후설, 하이데거 등 이전의 현상학자들에 대해 가하는 비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저자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초개인성이나 익명성”(78)을 지향하는 “탈인격적” 사유로 규정하는데, 현존재의 “개별화” 현상을 분석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탈인격적 사유”로 규정함은 무리일 것이다. 또 저자는 후설의 현상학에 대해서도 그것이 의식의 “객관화하는 작용”(240)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관념론”(117)이며 후설의 “초월론적 주체”는 “주체의 절대화”(46)의 산물이라든가, 또는 후설의 초월론적 주체가 “역사성과 상황성”(257)과는 무관한 주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견해는, 필자가 『현상학과 해석학』(서울대출판부, 2004)에서 밝혔듯이, 후설의 현상학에 대한 일면적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넷째, 책의 구성과 관련된 문제가 있다. 6장은 “고통과 윤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미 3~5장의 논의를 통해 발전사적 분석이 이미 끝난 상태에서 6장에서 고통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 궁금하다. 6장은 발전사적 논의와 무관하며 고통의 문제는 초기 철학을 다루는 3장에서도 논의되었다. 또 결론으로 제시된 7장은 레비나스 철학과 관련된 일반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것이 비록 나름대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발전사적 연구의 결론으로 제시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지도 의심스럽다. 책 전체의 구성을 고려하면 6장과 7장은 사족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두 장을 빼든지 부록으로 처리하고 3장, 4장, 5장의 논의를 확장시키면서 그를 토대로 어떤 결론을 도출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이남인/ 서울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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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athema 2007-07-07 00:21   좋아요 0 | URL
장석주는 그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똑똑한 전문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7-07-07 11:22   좋아요 0 | URL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이죠. 다만 철학에 대해선 좋아하는 만큼의 식견을 보여주지 못하는 거 같습니다...

눈팅 2007-07-07 18:11   좋아요 0 | URL
주체와 대상에서 타자와 주체로 말을 바꿔봐야 뭐 새로운 사상이 나올까요. 사르트르의 '타자는 지옥'이란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지금 세상에는 순진한 사람을 사기쳐 먹으려는 범죄자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나에게 타자는 법이자 밥이고 명령이자 망령입니다. 악마적인 타자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드러낸다 해도 천개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레비나스를 읽어보려 시도는 해봤는데 아무래도 저와는 맞지 않더군요.쓸데없이 모호한 관념론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로쟈 2007-07-07 22:43   좋아요 0 | URL
"주체와 대상에서 타자와 주체로 말을 바"꾸는 것은 레비나스와 무관합니다. "쓸데없이 모호한 관념론자"도 레비나스에겐 다소 억울한 레테르 같습니다. 그의 철학(윤리학)은 포로수용소에서 나온 것이라...

schizolyric 2007-07-09 12: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강영안 선생님과 이남인 선생님의 강의를 둘 다 들을 수 있었던 운 좋은 사람인데요... 이 선생님이 후설주의자이듯이 강 선생님은 (칸트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레비나스주의자이신 듯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관점'이 잘 드러나지 않고 레비나스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듯한 분위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듯... ^^;;

로쟈 2007-07-09 19:20   좋아요 0 | URL
이남인 교수도 후설에 대해서는 '예리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제가 읽은 몇몇 논문의 요지는 '후설 안에 다 있다'여서요...

mravinsky 2007-07-09 20:5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후썰 안에 다 있다.
이런 식의 주장이라면
철학은 플라톤 안에 다 있다.
이것도 되네요.
 

7, 8월의 사회적 독서 목록에 인문학/인문주의 관련서들을 올려놓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문지성으로 꼽히는 김우창 교수 관련기사가 나란히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우리시대의 명저로 소개되고 있는 김우창 전집은 한번쯤 완독해볼 만하다(나는 이전에 두어 권을 사두었는데, 절판되고 새 판본이 출간돼 좀 난감하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만 일단 사두었다). 그 아래는 가장 최근에 실린 그의 칼럼기사이다.   

한국일보(07. 07. 05) [우리 시대의 명저 50]<26>김우창 전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 등 5권

'김우창 전집’은 인문주의가 현실을 끌어 안을 때, 귀납돼 나오는 사유의 풍경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증명하는 전거다. 김우창(71) 고려대 명예 교수는 밝혔다. “(내 글쓰기의)지향점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고 주어진다. 시대에 대해 촉발된 느낌이 (글을) 쓰게 한다.” 글쓰기와 사유의 지향점에 대한 질문에 들려 준 답변은 다섯 권의 책에 모범적으로 적용된다.

평소 이런 저런 지면을 통해 실어 오던 그의 평론을 주목해 오던 박맹호 당시 민음사 사장이 “책으로 만들자”며 강권하다시피 했고, 어느새 진짜 책이 돼 있었다. 1977년 첫 권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빛을 보고 2권 <지상의 척도>, 3권 <시인의 보석>, 4권 <법 없는 길>을 거쳐 1993년 마지막 권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가 나오기까지, 자칫 비연속적 사유의 기록으로 치부되고 말았을 일련의 글은 출판인의 안목 덕에 전집으로 묶였다.

그러나 저자 자신으로서는 아직도 결벽증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다. “문학사상, 창작과비평 등 잡지에 수록된 글이라 체계가 없어 유감이에요. 그러나 당시 현안에 민감히 반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저널적이라는 자평이다. “박 사장이 출판을 제의했을 때 체계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거부했으나, 강권에 못 이긴 거죠.” 결과적으로 일련의 책은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갈망하는 한 인문주의자의 내면을 절절하게 증거하고 있다.

생활 주변의 모든 것이 인문학적 텍스트였다. 예를 들어 1972년 12월 9일자 한국일보의 칼럼 ‘천자춘추’(유치진 씀)는 당시 미국 사회가 직면한 변화를 주제로 한 ‘자유의 논리’에서 도입부로 쓰였다(2권 <지상의 척도>). 첨단의 편의와 번다함이 공존하는 국제 공항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상황에 대한 명상의 계기로 전용된다(4권 <법 없는 길>).

책은 우리 문화의 정통을 이야기한다. “조선 자기, 수묵의 산수화, 조촐한 전원 생활의 낙을 이야기하는 시조, 일상적 사건들에 대한 담담한 관찰을 기록한 시화, 수필, 잡기 등은 자연과 인간의 절제된 균형을 목표로 하는 조화의 이상”과 닿아 있다는 것.(3권 <시인의 보석>) 북한의 예술 또는 예술적 현상에 대해서는 같은 책 중 ‘이념과 표현’이란 제하로 사유를 전개한다. 북한에서 서사시적 충동이 강한 이유, 개인과 사회의 충돌이 혁명적 낭만주의라는 대전제 속으로 복속돼 가는 기제 등이 북한 예술가들의 작품에 근거해 언급된다. 그 모든 논의는 마르크스주의의 예술 혹은 문화관에 대한 갖가지 현상을 전제한 후에 나온다. 하나의 체계 아래 유기체적으로 꽉 짜인 글이다.

예술과 세계, 실존과 현상에 대해 그는 포괄적 입장을 취한다. 글의 설득력은 그 같은 배려의 결과다. 그는 문학은 결국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현존하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관념적 당위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영역에서 비롯돼야 한다는 믿음이다. 그 인문학적 지평의 방대함은 특유의 유연성과 공존한다. 문학이란, 제도 안에 있으며 있어야 할 것은 있는 것의 잠재적 부분으로부터 나온다는 입장이다. 그의 글은 그래서 지상에 발 디디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설득력을 갖고 접근한다.

이 시대의 화두라 할 페미니즘 역시 사유의 그물에 이미 포착됐다. 여성 문제의 의식과 그 현실적 표현을 반성하고 그 성쇠의 요인을 검토하면서,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의 상황을 점검하는 대목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까지 든다. 책은 “오늘날의 여성이 매우 불행한 상황에 있는 것은 사실”이라 전제, 여성 운동의 성패는 다른 사회적 투쟁과 연결돼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근대화, 경제 성장, 대중 문화 시대, 민족 분단의 시대, 민족주의 시대, 민족 중흥기, 민중 시대 등을 포괄하는 당시의 핵심적 개념은 ‘산업화’였다.

문화에 대한 통찰은 시대를 초월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특히 언어의 타락에 크게 기여하는 것은 정치적 또는 상업적 선전을 위한 언어의 사용”이라는 지적은 날로 정치적 대립이 격화돼 가는 지금 한국이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책은 곳곳에 인문주의에 대한 신뢰의 보루를 쌓아 두고 있다. “적어도 고급 문화의 표현으로는”이라는 유보 조항을 달긴 했으나, 문화는 “한 사회의 인문적 전통의 전부 이외의 다른 것은 아니다”라고 책은 단언한다. “인문적 전통을 통한 교양은 지식의 훈련과 함께 지식으로부터 또는 모든 외적인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마음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3권은 저자의 본령을 확인시켜 준다. 황석영 이문구 등 소설가, 황동규 김광규 등 시인을 중점적으로 논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책은 자유에 대한 여러 차원의 참고서로 읽힌다. 그에 대한 사유의 흔적은 전집 곳곳에 배어 있다. 저자에 의하면 세 가지 차원의 자유가 필요하다. 동료와 신뢰ㆍ공감할 수 있는 자유, 자연과 조화하며 사는 심미적ㆍ생태학적 자유, 그리고 스스로의 깨우침으로 도달하는 자유. “세 번째가 바로 인문 과학이 필요한 대목이죠.”

4권 <법 없는 길>에서는 오래 음미하고픈 명구가 눈을 붙든다. 근원을 사유케 하는 글이다. “마음의 실체는 고요함이다. 이것이 우리를 자아로서 지속하게 하며, 또 세계를 있는 대로 드러내주게 된다.”(‘고요함에 대하여’) 책의 초입은 이맘때가 제격이다. “장마가 끝나고 밝은 해가 비치고 태평양으로부터 올라온다는 태풍의 영향인지 맑은 바람이 분다.…(중략)…반드시 실제적이 아니고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순간을 넘어서는 영원 아니면 지속에 대한 우리의 갈구는 삶의 근원적인 지향인지 모른다.”

자유는 이 전집의 모태이기도 하다. 저자는 “학문적 계보란 내게 없는 것 같다”며 “바로 계보가 없었던 덕에, 즉 요구하는 바가 없어서, 너무 자유로워서, 쓸 수 있었던 것”이라며 돌이켰다. 저자는 자신의 전집이 ‘좋은 사회’에 대한 인문 과학적 이해와, 그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 내는 데 쓰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랬다. 김우창 전집은 인문학에 대한 드높은 애정의 결과다. 어느 한 곳에 편재됨 없이, 그 근원적인 지향점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내면 풍경을 요약한 지도이면서 후세를 위한 솟대이다.(장병욱기자)

경향신문(07. 07. 05) [시대의 흐름에 서서]큰 생각, 작은 생각, 인간성

정치는 사회가 하나의 체제로 기능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떠한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인가, 사회주의인가, 또는 공산주의 체제인가를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념이 정치 전체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책도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사회를 전제로 한다. 하나의 정책으로 크고 작은 일체의 것들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 아니라면 교육, 의료 또는 사회 복지 제도는 물론 경제, 사회, 외교 등의 정책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체제적 발상에 위험과 착각이 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구소련이 보여주는 것은 이데올로기로 굳어진 체제적 사고와 정책의 실패이다. 그럼에도 사회적인 삶을 생각하는 데에는 체제적 전제는 불가피하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정책들이 논의되고 대통령 선거에서 정책이 주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 된다. 정책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회가 하나의 체제라고 할 때, 정책은 체제를 움직이는 데에 중요한 전략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기준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은 일의 바른 추진을 위하여 필수적인 요건의 하나이다. 또 그것은 현실 자원의 제한 속에서 여러 정책들로 하여금 상호모순에 빠지지 않게 하는 데에 중요한 원리가 된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답을 제공하겠다는 잡다한 단편적인 정책들이 가장 큰 득표 효과를 갖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일관성은 사회적 삶의 근본에 대한 깊은 인식에서 나온다.

-대선,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미국 클린턴 전 대통령의 1992년 선거 유세에서 유명하게 된 말에,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하는 것이 있지만, 경제는 어디에서나 오늘의 정치적, 사회적 과제로서 기본이 될 수밖에 없다. 자명한 일이지만, 경제는 사람의 삶의 경영에서 기본이 된다. 여기에서 삶이란 최소한의 존명(存命)이 될 수도 있고, 보다 활달한 삶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앞의 필요가 우선한다. 이 점이 문명된 사회에서 고용이나 사회 안전망 그리고 의료, 교육, 연금 등의 제도가 정책적 대상으로 크게 부상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길고 넓게 보면, 건강하고 훈련된 노동력이 없이 또 사회적 평화가 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도 잘 되어 갈 수가 없다. 완전고용이나 완전한 사회복지 제도가 결국은 경제 전체에 지나친 부담을 주어 당초의 사회적 목적을 실패에 이르게 한다는 생각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절한 조정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치는, 사회 전체의 행복과 번영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이 경제만으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선진사회는 이제 ‘탈물질주의’ 단계로 들어서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이 단계에서 사람들의 관심은 부의 확대보다 삶의 질에 있고, 그것이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 환경 문제가 이슈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로 설명된다. 이것은 ‘부유한 다수자’로 인하여 일어나는 변화라는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은 부보다 복합적 요소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자연은 이 이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부유한 다수’가 이제 이것을 다시 발견한 것은 경제발전이 가져온 환경 파괴 속에서 살아남는 데에 자연 보존이 절실한 과제가 된 때문이다. 어느 쪽으로나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에서, 환경의 문제는 최종적인 심급이 된다.

환경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의 환경-멀고 가까운 나라들이 이루는 세계적 국가 공동체제라는 환경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외에 우선적으로 생각되어야 할 남북 문제가 있다. 우리의 삶을 더욱 만족스럽게 영위하는 정책은 이 모든 것을 상호 관계 또 일관성 속에서 생각하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비친 바와 같이 삶의 큰 테두리를 다스리는 것만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기약할 수는 없다. 사회주의 체제의 기본은 계획경제였다. 자원 발굴, 생산, 분배 등을 전체적인 합리적 계획으로 다스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프라를 구축하고 체제의 토대를 정비하는 데에 있어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후의 유연한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다. 사회적 삶의 다른 부문에서도 사회에 대한 체제적 접근은 체제의 기초적 정비와 확립을 위해서 효과적인 수단일 수 있었으나, 행복과 사회 평화의 자발적 근원을 봉쇄해버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책의 일관성이나 전체성이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고 수많은 작은 사실에 밀착하여 스스로를 수정할 수 있게 하는 유연성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도 정책의 빈곤보다도 현실에서 들어오는 결과를 입력하고 조율하지 못한 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빈부 격차 해소나 부동산 투기 억제의 정책들은 모두 목표에 반대되는 결과를 냈다. 작금에 논의의 대상이 된 대학 입시제도의 문제에 있어서도 정부의 정책은, 모순은 아니라도, 정책 수행방식의 불균형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게 한다.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목표는 정당하다하더라도 그 목표와 관련해서 고교 내신 성적의 일정한 처리를, 무리를 무릅쓰고 대학에 강요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일 것 같지는 않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로 표현되는 교육 철학 자체도 문제라 할 수 있다. 참다운 교육의 목표는 용이 못되는 사람에게도 자아실현의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용이 나온다면, 그 한 열매일 뿐이다. 물론 국가는 용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것은 상치되는 목표들을 수용하는 더 복잡한 정책 대안이다.)

-제도와 현실 조율능력 살펴야-

제도가 참으로 인간적인 내용을 가진 것이 되게 하려면, 끊임없는 점검과 수정과 정밀화가 있어야 한다. 의료제도를 비롯한 여러 복지제도의 현재 운영 상태는 구소련에서의 어떤 생산 체제, 가령, 구두 생산체제를 생각하게 한다. 체제 붕괴 후 터져 나온 이야기의 하나는, 소련에 구두는 많았지만, 발에 맞는 구두를 찾기가 지극히 어려웠다는 것이었다. 구두를 한 가지 크기로 제조하는 것이 할당량에 맞추는 쉬운 방법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정책은 있어도, 현실과의 조율이 없는 곳에서, 관료기구의 확대와 통계 숫자는 구체적 현실을 대신한다. 참여정부는 무수한 정책 로드맵을 내 놓았다. 또 수없이 위원회를 만들고 행정기구를 증설했다. 정책 입안자들은 거기에서 성취감을 가졌을 것이다. 정책을 현실에 맞추어 섬세하게 조율할 수 있는 능력만이 정책을 현실이 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율에 바탕이 되는 것은 현장에 움직이는 인간적 감성이다. 지도자의 자질에서도 근본이 되는 것은 그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정책의 고안과 수행에는 포괄적이고 유연한 지적 능력, 강한 실천적 의지가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느낌에서 나온다. 정책의 여러 함의 그리고 예산 문제를 포함한 현실성에 대한 평가가 쉽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인간적 측면의 평가는 더욱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인간됨이 정책, 그 설명의 현장, 그리고 이런저런 기회에서의 언동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지도자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정책, 현실적 유연성, 인간성-정치지도자의 자격과 관련하여, 이러한 항목들을 평가의 기준으로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07. 07. 05-07.

P.S. 개인적으로는 가장 좋은 김우창 입문서로 <행동과 사유 - 김우창과의 대화>(생각의나무, 2004)를 꼽는다. 육성 대담을 녹취한 것이기에 따라가기 쉽고 무엇보다도 '김우창 인문주의'의 기원 같은 것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그의 생각의 아웃라인을 잡는 데에도 적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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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2007-07-06 10:04   좋아요 0 | URL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느낌에서 나온다.' 과연 인문학자 답습니다.
로쟈님 덕분에 찾는 수고 없이 늘 잘 읽고 있습니다.

로쟈 2007-07-07 11:15   좋아요 0 | URL
수고를 덜어드린다니 제가 헛수고를 하고 있는 건 아니네요.^^
 

오늘의 기사라고 할 만한 걸 한참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영화잡지 필름2.0까지 뒤져서야 찾아낸 기사가 그나마 성에 차기에 옮겨놓는다. 거장들의 영화 세 편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인데(라스 폰 트리에와 두 데이비드의 영화이다), 나로선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는 꼭 극장에서 보고 싶다(린치에 관한 책이 국내에 한권도 소개돼 있지 않다는 것도 그의 영화들만큼이나 미스테리하다). 로라 던의 모습도 오랜만에 보겠군...

필름2.0(07. 07. 04) 거장들의 영화가 온다

소문으로만 듣던 거장들의 쟁쟁한 영화들이 7월 중 잇달아 개봉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와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 라스 폰 트리에의 <만덜레이>가 그 작품들. <폭력의 역사>와 <만덜레이>는 2005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며, <인랜드 엠파이어>는 2006년 베니스영화제에 공개돼 'Future Film Festival Digital Award'를 수상했다. 세 영화 모두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거장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살아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폭력의 역사>(7월 19일 개봉)는 <플라이> <비디오드롬> <엑시스텐즈> 등을 통해 생물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기괴한 공포의 세계를 묘사해왔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색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영화다. 평범한 가장 톰(비고 모텐슨)이 어느 날 가게에 들이닥친 강도를 죽이고 손님을 구한 뒤 영웅대접을 받지만 거대 갱단 두목 포가티(에드 해리스)의 위협을 받으면서 점차 폭력자로 변해간다는 내용이다. 평범한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분노와 폭력성을 이끌어낸 탁월한 솜씨로 2005년 해외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만덜레이>(7월 19일 개봉)는 2003년 개봉한 니콜 키드먼 주연의 <도그빌>, 그리고 우도 키에가 캐스팅된 2009년 개봉 예정작 <워싱턴>과 더불어 라스 폰 트리에의 '미국-기회의 땅'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이다. 여주인공 그레이스(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도그빌을 떠나 노예제도가 있는 미국 남부 마을 '만덜레이'에 도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레이스는 주인들에게 억압당하는 흑인들을 보고 그들이 노예가 아님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예상치 못한 혼란과 마주한다는 내용이다.

'CinDi 2007' 개막작인 <인랜드 엠파이어>(7월 26일 개봉)는 데이비드 린치가 <멀홀랜드 드라이브>(2001) 이후 6년 만에 선보인 장편 신작이다. 새 영화를 앞둔 배우 니키(로라 던)가 감독 킹슬리(제레미 아이언스)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불길한 소식을 듣는데, 이후 영화 촬영이 진행될수록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불륜, 살인, 도망, 추적, 복수 등 갖가지 꺼림칙한 사건들을 다루지만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이야기의 파편과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복잡한 이미지들로 '역시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답다'는 평을 들었다.(이수빈 기자) 

07. 07. 04.

P.S. 개인적으론 데이비드 린치에 관한 연구서를 하나 갖고 있는데, 좀 오래전에 나온 것이고 이번에 다시 검색해보니 새로운 책들이, 탐나는 책들이 여럿 나와 있다. 일순위로 꼽고 싶은 책은 <린치가 말하는 린치>(개정판 2005). 그밖에 다른 책 몇 권은 도서관에 주문을 해놓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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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인간 2007-07-05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의 역사>가 드디어 개봉하는군요! 데이비드 린치의 신작까지!! 신나는 소식, 감사합니다.

로쟈 2007-07-05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름이 대목이라고들 하니까요.^^

라주미힌 2007-07-05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의 역사... 참 재미있게 봤어요. (어둠의 경로로..)
만덜레이는 자막이 없어서 못보고 ㅡ..ㅡ;
저는 어둠의 자식인가봐요 :-)
 

올 여름에 읽을 이론서 가운데 하나로 최근 번역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을 꼽아두고 있고, 현재는 영역본이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다(1장까지는 도서관에 있는 책을 복사했다).

 

 

 

 

그러면서 미리 읽어두려고 한 것이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문예출판사, 1994)에서 루만에 관한 장이다. 그것은 열두번째 강의의 '부언설명'으로 붙어 있는데, 제목이 '니클라스 루만: 체계이론에 의한 주체철학적 유산의 전유'이다. 하버마스는 사회학의 계보가 아닌 주체철학의 연장선상에서 루만의 체계이론을 읽겠다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독해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독어판 <사회쳬계이론>(1984)이다. 그를 조금만 따라가본다(많이 따라갈 수도 없다). 내가 더불어 참조한 건 영역본(1987)과 아래의 러시아어본(2003)이다.

Философский дискурс о модерне

"루만은 일반적 사회이론의 '개요'를 제시하였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이론적 기획을 개관할 수 있도록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점차 확장되는 이론 팽창의 중간결산을 한다."(424쪽) 그러니까 루만의 <사회체계이론>은 그의 이론적 중간결산이며 이로써 독자들은 루만의 전체이론을 개관해볼 수 있다는 것.

"루만의 시도는 콩트로부터 파슨즈에 이르는 사회이론의 학제적 전통과의 연결보다는 오히려 칸트로부터 후설에 이르는 의식철학의 문제사와의 접속을 찾는다.(...) 이 이론은 주체철학의 근본 개념과 문제설정들을 물려받으려고 하며, 동시에 주체철학의 문제해결 능력을 능가하고자 한다."

루만의 체계이론은 '결별한 철학의 후계자'로 제시된다고 하는데, '결별한 철학'의 영역은 'abandoned philosophy'이다. 짐작에는 (구조주의 이후) '주체철학의 종언'이 회자되던 시점에서, 체계이론은 말 그대로 이 '버려진 철학'으로부터 용어들과 문제틀을 가져와서 주체철학이 풀고자 했던 문제들을 더 잘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읽힌다.   

"이 과정에서 실행되는 체계이론의 시각전환은 자기자신과 분열관계에 있는 현대성의 자기비판을 대상없이 만든다. 자기자신에 적용된 사회의 체계이론은 현대사회의 복잡성 증가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벌써부터 하버마스의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 대목이 그 비판의 개요이자 핵심적인 착안으로 보인다. 체계이론은 현대성(modernity)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 

여기서 '시각전환'은 '주체철학으로의 시각전환'이겠고, '자기자신과 분열관계에 있는 현대성'은 앞 부분의 내용을 참조해야 알 듯싶다. 그런데, 그런 현대성의 자기비판을 체계이론은 무력화한다는 얘기. 왜냐하면, 스스로에게 적용된 사회이론은 현대사회의 복잡성 증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복잡성의 증가를 어떤 진화의 척도로 간주한다면 자연스레 이러한 결과가 도출될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체철학적 유산을 변형시킴으로써 헤겔의 사망 이래로 현대성의 원리인 주체중심적 이성에 대해 제기된 의심들로 말미암아 노출된 유증자(遺贈者)의 문제들이 과연 체계이론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관심이다."(424-5쪽)

물론 원문을 직역한 형태이긴 할 텐데, 이런 번역문은 독자를 기운 빠지게 할 뿐더러 짜증나게 한다(형용사절이 너무 길어서 하버마스의 관심에 이르기도 전에 지쳐버린다). 이 대목의 영역은 이렇다:

"What interests me is whether, together with this distantiated reinscription of philosophy of the subject, systems theory also ends up with the kinds of problems that beset those who left us this inheritance - problems that, ever since Hegel's death, have given rise to the very doubts concerning subject-centered reason as the priciple of modernity that I have discussed in these lectures."(368쪽) 

독어본이 어떻게 씌어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략 영역본과 맞추어보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체철학적 유산을 변형시킴으로써"는 "distantiated reinscription of philosophy of the subject"에 해당하겠다. '변형' 대신에 영역자가 선택한 단어는 '재기입(reinscription)'이다. 내 식으로 자유롭게 이해하자면 "오래된 주체철학을 새롭게 호명함으로써" 정도라고 본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관심거리는 주체철학의 변형/부활로서의 루만의 체계이론 또한 주체철학이 봉착했던 문제들(혹은 그 한계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노출된 유증자(遺贈者)의 문제들이 과연 체계이론으로 옮겨가는가 하는 물음이 나의 관심이다"에 해당하는 건 "systems theory also ends up with the kinds of problems that beset those who left us this inheritance"이겠다. '유증자의 문제들' 같은 건 너무 불친절한 번역이다. 나대로 자유롭게 옮기면, "체계이론 역시 이러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준 철학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과 함께 막다른 골목에 이르는 게 아닌가" 하는 게 나(하버마스)의 관심사이다.

그럼 어떤 문제들인가? "헤겔의 사망 이래로 현대성의 원리인 주체중심적 이성에 대해 제기된 의심들"이다. "problems that, ever since Hegel's death, have given rise to the very doubts concerning subject-centered reason as the priciple of modernity"가 거기에 해당한다. "헤겔의 죽음 이래로 모더니티의 원리로서의 주체-중심적 이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해왔던 문제들". 간추리면, 주체철학의 유산으로서 '주체-중심적 이성'이 갖는 문제점과 한계를 주체철학의 다른 버전으로서 체계이론 또한 갖게 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이다(하버마스는 '의사소통적 이성'을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러니까 하버마스의 비판은 삼단논법을 따라 진행된다. (1)루만의 체계이론은 근대 주체철학의 계승이다. (2) 주체철학의 주체-중심적 이성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다. (3)따라서, 체계이론 역시 똑같은 한계에 봉착하는 것 아닌가. 어떤 의미에서는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하버마스 자신이 주석을 통해서 해명하고 있다.

"수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나는 물론, 이론을 오직 한 측면에서만 멋지게 서술한다면, 우리는 이론이 가지고 있는 풍요로움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이론의 이 측면만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425쪽)    

이 대목의 번역 역시 좀 서툴다는 인상을 준다. '수난에 익숙한 사람'이라니? 직역이더라도 문맥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영역본은 이렇게 돼 있다. "As one accustomed to the same treatment, I realize of course that one does not do justice to the richness of the theory when one single-mindedly broaches it from just one angle - but in out context, only this aspect is of interest."(421쪽) 

'수난에 익숙한 사람'은 영역본에 따르면 '이런 식의 취급에 익숙한 사람'이다. 하버마스 또한 이론의 일면만을 갖고서 평가/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한 가지 관점에서만 문제를 끄집어내어 평가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뿐더러 이론의 풍요로움을 훼손할 여지가 있다는 점을 스스로도 인정한다는 것('멋지게 서술한다면'은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하지만, '우리의 맥락'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인데, 그 맥락이란 이 책(강의)의 주제대로 '모더니티'에만 초점을 맞추어 현대 사상가들을 평가하려는 것과 관련된다. 이상이 그의 루만론의 전제와 사전 정지작업이다. 나머지 본론은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07. 07. 04.

P.S.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오늘 날아온 신간 안내 메일에는 우연찮게도 루만 연구서가 한 권 들어 있었다. <니클라스 루만: 영혼에서 체계로(Luhmann Explained: From Souls to Systems)>(2006)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책인데 분량도 두툼한 최근간 연구서이다. <사회체계이론>을 독파한다면 참고해볼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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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7-0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버마스의 독일어 원서는 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로 Suhrkamp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요, 말씀하신 원문의 해당부분을 보면, "Leidgewohnter"가 "수난에 익숙한 사람"으로, "forsch anschneidet"가 "멋지게 서술한다면"으로 번역된 경우입니다(모두 독일어본 p.426). 전자의 경우는 "이러한 대접[혹은 수모]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특정한 하나의 측면만을) 거칠게 재단하자면" 정도로 번역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독일어본과 비교했을 때 영역본도 그리 적확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문맥이 통하게 잘 '의역'했다는 점에는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요. 국역본의 번역이 '거칠게 재단'된 것만은 분명하긴 합니다.

로쟈 2007-07-06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어본의 경우도 그런데, 그들대로의 번역 관행이 있는 것이겠죠. 중요한 건 말이 되게 옮기는 것인데, 말이 안되는 번역본을 읽는 거야 말로 (익숙한 일이긴 하나) 분명 '수난'입니다.--;

람혼 2007-07-06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그런 반복되는 '수난' 속에서 이젠 아예 원문을 보지 않고도 대략적이나마 원문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같습니다. 물론 상당히 부정적인, 마치 귀류법과도 같은 방식을 통해서라는 게 더욱 큰 문제겠지만요^^; 그런 점에서 같은 인구어 계열의 번역에 있어서는 좀 더 작업이 수월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배가 아플 때도 '아주 가끔은' 있습니다.--;

로쟈 2007-07-0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그런 반복되는 '수난' 속에서 이젠 아예 원문을 보지 않고도 대략적이나마 원문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같습니다"는 정곡을 찌르신 말씀입니다. 제 경우엔 그런 예상에도 불구하고 원서까지 구해서 보기에 돈이 두 배로 든다는 것이 또한 문제입니다.--;

람혼 2007-07-07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백배 동감입니다, 특히 그 '비용'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더.^^;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로쟈님이 말씀하신 과정과 정확히 역을 이루는 과정 또한 존재하는데ㅡ아마도 이 역시 로쟈님도 느끼고 계시는 바가 아닐까 생각하지만ㅡ원서를 먼저 구입해 멀쩡하게 독해까지 다 마치고는, 그에 관한 '악명 높은' 번역본이 도대체 어떻게 번역되어 있나 하는, 마찬가지로 '악명 높은' 편집증적 궁금증에서, 그 번역본까지 사게 되는 과정이 바로 그것입니다.--;

로쟈 2007-07-07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증세가 비슷하시군요.^^;

마르 2007-08-01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독일어건 영어건 경제성이란 측면에서는 한글 번역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외국어를 읽는다는 것은 어떤 경우건 모국어를 읽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을 요하는 문제지요. 그런 면에서 번역본을 읽으면서 머리로 재번역 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지요.

로쟈 2007-08-01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번역본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불성실하고 부정확한 번역서를 읽는 건 '비교할 수 없는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를 얻을 수 없으니까요...
 

어제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집어든 몇 권의 책들 가운데 하나는 마루야마 마사오(1914-96)의 <일본의 사상>(한길사, 2003). 본래 1998년에 나온 책의 초판 3쇄였다. 요즘은 잘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어디선가 재고도서가 들어온 듯싶었다. 짐작에 마루야마의 다른 책들과 함께 박스에 보관돼 있는 책이지만 확인해볼 도리가 없는 데다가 당장 참고할 부분도 있어서 손에 들었다. 그리고는 아예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도 주문해버렸다(그의 사상을 개관하고 있는 <오스까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삼인, 2005)는 도서관에서 대출해야겠다).

 

 

 

 

역자는 두 권 모두 김석근 교수인데 사실 한국에서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소개는 거의 전적으로 그에게 빚지고 있다. 그 이전에 <일본의 현대사상>(종로서적, 1981) 등이 소개된 바 있지만 마루야마의 주요 저작들이 단기간에 한국어판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역자의 노고 덕분인 것이다. 물론 내가 마루야마의 이름을 처음 접한 건 도올 김용옥의 책들에서였지만.

그렇게 손에 든 책에서 '옮긴이의 말'과 마침 이 번역이 마무리될 즈음 세상을 떠난 마루야마 마사오의 부음에 부쳐진 '마루야마 마사오의 삶과 사상을 생각함'을 읽었다. 역자로서의 소회를 밝히고 있는 '옮긴이의 말'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서 따라가본다. 어느새 10년도 더 전의 사정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일본의 사상'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반성하도록 해준다.

역자가 마루먀아를 처음 접한 건 대학원 석사과정 3학기 때라고 하는데, 본래 정치외교학 전공인 저자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기 위한 방책으로 철학과를 기웃거리다가 맞닥뜨리게 된 에피소드. 마침 대학원 철학과에 '일본철학사'라는 과목이 개설되었었는데, '대학원의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의 이견으로("일본에 무슨 철학이 있냐?") 과목명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 해서 '일본사상사'로 바꾸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일본에는 사상도 없다!") 결국엔 '일본문화사'로 낙착되었다는 것(철학과에서 웬 문화사?).

 

 

 

 

비슷한 사례가 될 만한 또다른 일화는 "주체적인 학문의 길을 주장"한 '어떤 선생님'과 관련된 것인데, 저자와 저서명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짐작에 조동일 교수의 <우리 학문의 길>(지식산업사, 1993)의 내용이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일본에 철학사가 있는가' 하는 재미난 화두를 하나 던지고 있습니다. 그 분의 논지를 여기로 다 끌어올 수는 없겠습니다만, 요컨대 일본에는 '사상(사)'은 있지만 (보편성을 추구하는) '철학(사)'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시면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27쪽) 요컨대, 이러한 '부인'의 제스처가 알게 모르게 우리의 무의식을 잠식하고 있다는 게 필자의 문제의식이다.

물론 이후에 '일본의 철학'을 다룬 책들이 여러 권 버젓이 나오게 됐으므로 그러한 문제제기가 여전히 유효한 듯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역자가 체험한 한 시절의 풍경은 그러하다. 이것이 다소 넌센스인 것은 "애초에 '哲學'이란 단어 자체가 일본인 니시 아마네가 영어의 Philosophy를 번역하여 한자로 새로이 만들어낸 조어(造語)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동아시아문화권에서는 '철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재했던 것이다."(28쪽) 말하자면 '철학'이란 말 자체는 근대 일본의 발명이고 고안이다. 하지만 "니들에게 철학은 없다"?

여기서 필자가 인용하고 있는 건 <일본정치사상사연구>(통나무, 1995)에 붙인 김용옥의 해제의 한 대목인데, 예전에 읽은 기억이 나지만 여전히 흥미롭다.

"그것은 매우 거칠게 말해서 '한국철학'과 '일본사상'의 성격을 유비적으로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사상', '일본철학'이라는 말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학문을 연구하는 시각이나 방법의 성격상 한국에서는 '한국철학'이라는 말을 즐겨쓰고, 일본에서는 '일본사상'이라는 말을 즐겨 쓴다. 한국에서는 '한국사상'이라고 하면, 그것은 철학에 못 미치는 좀 엉성한 체계, 그리고 철학의 소양이 부족한 2류의 학인들이 자신없이 내거는 명칭으로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 하나 일본에서는 '일본철학'이라고 하면, 역시 좀 학문적 가치가 떨어지는 국수주의자들의 사변체계, 군국주의시대의 '코쿠타이'(國體)를 연상시키는 '미기'(右翼) 사상가들의 억지주장 냄새가 난다."

해서 요컨대, "한국에서의 사상은 좀 처지는 놈들의 엉성한 논변이요, 일본에서의 '철학'은 항상 우익의 냄새를 피울 우려가 도사리고 있다."(김용옥의 해제 28-29쪽) 그러니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국에서 '사상'은 좀 모자란 것이고 일본에서 '철학'은 좀 덜 떨어진 것이다.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실제로 '한국철학'이란 표현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사상은 '실학사상'이나 '계몽사상' 등의 표현으로나 쓰인다). 혹은 '철학사상'. '일본의 사상'이란 표현이 낯설게 여겨지지 않는 데 비해서 '한국의 사상'이 왠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렇게 서로 다른 관행 탓인 듯싶다(거의 개와 고양이 수준 아닌가? 똑같은 꼬리 흔들기가 각각 반가움과 경계심의 표시라는).

잠시 옆길로 갔는데, 다시 필자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저는 그것을 '철학'이라 부르느냐 아니면 '사상'이라 부르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또 다른 제3의 이름으로 부른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겠습니까. 그리고 철학이나 사상이 없다든가, 사상은 있으나 철학은 없다는 식의 논지와 일본은 '있다' '없다'라는 식의 주장 사이에는, 그 성격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왠지 사물을 보는 시각 내지 생각하는 방식과 패턴 같은 것에서는 너무나도 닮아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저로서는 쉽게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29-30쪽)

"졸렌(Solen)을 말하기 전에 먼저 자인(Sein)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필자의 주장에 기대면, 그가 비판하는 우리의 관행적 시각 내지 생각하는 방식은 일본이란 '존재'를 정확하게 알기 전에 일본은 이렇다, 저렇다고 당위적으로/선험적으로 규정하는 태도를 가리키겠다. 그걸 경계하자는 얘기이고, 그때 필요한 건 일단은 읽는 것이다. 물론 일본사상인지 철학인지가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고(마루야마가 평생 사투했다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오규 소라이(1666-1728)나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책을 한국어로 얼마나 읽을 수 있는가?). 

한편, 책의 후기를 대신하여 쓰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삶과 사상을 생각함'에는 지난 1996년 마루야마의 타계 이후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모 열기를 소개하는 기사를 인용하고 있다. 한 유력 일간지의 도쿄 특파원이 작성했다는 기사는 가관이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평가받으면서 이미 70년대 그의 저작들이 영문으로 번역돼나오기 시작했지만 한국에서의 소개는 약간 늦은 편이어서 1981년 <일본의 현대사상>을 시작으로 <현대일본정치론>(1988), <중국근대혁명사상>(1989), <섹스원죄 어디까지인가>(1995), <섹스법정>(1996) 등이 출판됐을 뿐이다..." 

필자의 지적대로 앞의 두 권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책이지만 <중국근대혁명사상>(예전사, 1989)은 마루야마 마쓰유키의 저작이며, 전혀 난데 없이 들어가 있는 <섹스> 어쩌구 하는 책들은 마루야마 마사야의 책으로 보인다. 같은 마루야마 집안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신문기사가 '장난'이 아닌 이상 이런 무식하고도 무책임한 내용이 아무런 여과없이 일간지에 게재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이런 게 우리의 평균적인 현실이라면 희비극적인 일이다). '일본은 없다'고 말하기 이전에 한국에는 입만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볼 문제이다(과연 우리에겐 '한국의 마루야마'가 있는가?).

 

 

 

 

이러한 한일 철학/사상에 관한 몰이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관련서들이 더 많이 소개되고 읽힐 필요가 있겠다(찾아보니 금장태 교수의 <도와 덕>(이끌리오, 2004)이 다산과 오규 소라이를 비교한 연구서이다). 최근에 출간된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는 그래서 눈에 띄는 책인데, 한겨레의 서평(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19266.html)은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에서는 무인들이 상급 무사인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따라야 하는 도라 할 수 있는 ‘무사도’가 있다. 충과 효의 덕목에, 스스로에게 엄해야 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인자해야 한다. 사적 욕심을 버려야 하고 부귀보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 조항들 가운데 ‘패배한 적에게 연민을 베풀어야 한다’는 내용만 제외하면 ‘선비의 도’라 불러도 별 무리가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은이는 이런 동질성의 계기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성리학의 일본 전파를 꼽았다. 임진왜란 이전만 해도 일본 무사들은 주군에 대한 윤리적 충성의식이 높지 않았다. 주군과 가신들의 주종관계가 의리나 신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계약관계였기 때문이다. 무사에게는 주군을 바꿔 다른 주군을 모실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유학자 강항과의 교류를 통해 일본에 성리학의 계통이 학립됐다. 이를 계기로 유교적 윤리인 인(仁)·충(忠)·효(孝)가 무사들에게 요구되는 규범이 되었다는 것이다. 강항에게 성리학을 배운 일본 근대 성리학의 시조 후지와라 세이카는 존왕론 주창으로 나아갔다. 천황의 역사를 성리학적으로 해석한 ‘미토학’ 태동의 지반도 성리학이었다. 미토학은 에도 막부 말기에 새로운 ‘천황중심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이념적 지주가 되었다고 지은이는 본다. 무사들이 ‘천황’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막부를 타도하겠다고 나선 메이지 유신은 “성리학의 명분론을 빌린 혁명”이었다. 이전까지 무사정권 교체는 명분론과는 무관한 패권다툼의 결과였다. 

기사에서 언급된 사무라이들의 반란 혹은 '혁명'은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2003)의 소재이기도 한데, 이 영화에서 그려진 사무라이상에 대한 유익한 비평은 아래 기사에서 읽을 수 있다.   

영화에서 주장하는 ‘사무라이 반란’은 일본에서는 ‘세이난(西南)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이고, 가쓰모토의 모델은 그 반란의 주모자였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입니다. 여러분 사이고 다카모리가 누구인지를 아십니까. 그는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사쓰마, 조슈, 도사 3개 한(藩)의 하급 사무라이 중 사쓰마를 대표하는 이였습니다. 메이지유신은 폐쇄적 쇄국을 진취적 개국으로, 쇼군(將軍)중심의 봉건적 막부 정치체제를 천황 중심의 한 서양적 의회민주제로 개혁을 이룬 것을 말합니다. 그런 메이지유신의 핵심인물이 서양 문물의 홍수에 맞서서 일본의 전통을 지키려고 목숨을 받쳤다? 왠지 어색하지 않습니까.

사이고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의 핵심에는 ‘조선침략’이 놓여있습니다. 그는 일본이 서양열강과 맞서기 위해서는 문물이 뒤떨어진 한국을 공략해 식민지화해야한다는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다 같은 사쓰마 출신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조슈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등의 반대에 부딪히자 사쓰마로 낙향합니다. 그러나 그를 추종하는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 지도자로 나섰다가 패배해 자결한 인물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인격적 감화능력이 탁월해 당시 뿐 아니라 지금도 그를 존경하는 일본인들이 많습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문구를 좋아했고, 일체의 사욕을 버리고 공리를 쫓았던 면모도 분명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이라는 혁명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그는 시대착오적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메이지유신에 나섰던 이유는 ‘일본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쓰마인’을 위해서였고 ‘사쓰마’가 일본 최고의 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때문에 일생을 마치는 순간에는 ‘사쓰마파벌’의 영수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글처럼 사쓰마는 오늘날 일본 사무라이의 원형을 세계에 수출한 곳입니다. 사쓰마의 다이묘가문인 시마즈 가문은 도쿠가와 막부성립기 때 줄을 잘못 서서 반 도쿠가와 편에 섰습니다. 그렇지만 번 전체가 똘똘 뭉친 단결력과 외교수완의 결과로 번을 그대로 유지합니다. 또 일도필살의 전투력으로 인해 도쿠가와도 건드리기 싫어했던 고슴도치 같은 존재였습니다. 사쓰마는 도쿠가와 막부시절에도 다른 번, 심지어 막부의 중앙관료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을 만큼 폐쇄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함흥차사’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사쓰마로 떠난 파발’이라는 말까지 등장했을 정도입니다.

오늘날 서양인의 뇌리에 박힌 사무라이상도 이 사쓰마 산입니다. 사쓰마의 사무라이들은 1862년 에도(지금의 도쿄)를 방문중이던 주군의 행렬에 무례하게 끼어든 영국인 사업가 일행을 일본도로 참살했습니다. 격분한 영국이 사과를 요구하자 영국과 단독으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것이 ‘사영전쟁’입니다. 놀라운 것은 비록 일본의 한개 번으로 대영제국함대의 함포사격에 맞선 사쓰마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영국군에 유례없는 타격을 가했다는 점입니다. 영국군은 63명의 사상자가 난 반면 사쓰마측 피해는 1명 사망, 7명 부상이었다고 합니다. 영국신문들은 놀라서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고, 유럽인들에게 ‘일본 사무라이는 세다. 고로 잘못 건드리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라는 인상을 팍 심어줬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지막 사무라이’운운하며 사쓰마를 영화의 무대로 삼은 것은 핵심에 다가섰다고 평할만합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군국주의로 가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또한 이 사쓰마의 ‘주군이 죽으라 하면 죽는다’는 식의 돌쇠형 충성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군부를 장악한 것은 대부분 조슈와 사쓰마 출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메이지유신을 민주화와 개방화 혁명이 아니라 천황에 대해 충성을 다 받치는 배타적 군국주의 혁명으로 오도했습니다. 사이고야말로 이런 일본 골수우익의 세계관 형성에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동아일보 권재현 기자)

따라서 '성리학의 명분론을 빌린 혁명'이라고는 하지만 메이지 유신의 이면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 성리학과 무사도, 혹은 '선비 철학'과 '사무라이 사상' 간의 차이에 조응하는 것은 아닐까? 한겨레의 리뷰를 마저 읽어본다.  

하지만 두 세계의 차이도 명확하다. 가장 두드런 예가 교육이다. 조선 선비들은 성리학의 이상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외부에서 이물질만 들어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포교 개념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사들은 늘 적을 상정해 만반의 대비를 했다. 조선선비 교육의 근본이 ‘학예일치’였다면 사무라이에게 학문은 무예의 보조적 기능에 불과했다. 선비가 글을 읽고 시를 읊을 때 사무라이는 학습 시간의 70%를 무예로 채웠다. 이런 전통은 지금까지도 두 나라의 교육방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초등학교엔 반드시 수영장을 설치해야 하고 수영 교습도 필수다. 중·고교에선 스포츠 동아리가 매우 활발하다. 2006년 여름 일본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한 고등학교 수는 전체 5400개교 가운데 76%에 이르는 4112개교다. 한국의 3%와 비교할 때 엄청난 격차다.

지은이는 맺음말에서 일본이 성리학에서 받아들인 가장 큰 부분은 ‘명분 쌓기’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이런 명분을 군사 행동의 정당화에 활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성리학의 중심인 심성론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일본과 일본인이 인간 심성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 한국인들은 아시아와 세계평화에 대한 믿음을 비로소 가지게 될 것이다.”(강성만 기자)

 

 

 

   

한데, 우리에게 그런 심성론이 제대로 전수/학습되고 있는가, 란 의문을 문득 갖게 된다. 나부터도 퇴계의 <성학십도>나 율곡의 <성학집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조선 유학의 전통에 대해서도 교과서적 지식 외에 알고 있지 못하다. 이러면 공부가 '명분 쌓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사실 이런 깨달음을 전해주는 것은 일본이란 타자이다. 한국 철학의 자기인식이 일본 사상이란 타자를 경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퇴폐천국' 일본이란 이미지만으로는 부족하다...  

07. 07. 04.

P.S. 귀가길에 한 서점에 들러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김영사, 2007)을 손에 들었는데, 이 책이 맞느냐고 점원에게 물어볼 뻔했다. 알라딘에는 분량이 472쪽이라고 돼 있어서 9,900원이라는 정가가 꽤 저렴하다고 생각했었는데(그래서 부담없이 구입하려던 것이었고) 웬걸 고작 220쪽 짜리 책이었다. 입력자의 착오로 보이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뻥튀기'이다. 교정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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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4 12:49   좋아요 0 | URL
"마침 대학원 철학과에 '일본철학사'라는 과목이 개설되었었는데, '대학원의 높은 자리'에 있던 분의 이견으로("일본에 무슨 철학이 있냐?") 과목명이 바뀌게 되었다는 것. 해서 '일본사상사'로 바꾸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서("일본에는 사상도 없다!") 결국엔 '일본문화사'로 낙착되었다는 것(철학과에서 웬 문화사?)."

하핫. 재밌습니다. 사실 철학계에서도 그렇게 말하죠. 일본철학은 없다라고. 일본을 무시하거나 폄하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철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반면 한국의 경우는 세계적인 철학학회에서도 이미 '한국철학'이라고 지칭하고 있다고 하고요. 대부분은 중국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지만, 나름 독창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뭉뚱그려 중국철학이라 하지 않고, 한국철학을 그와 별개로 나누는 듯 합니다. 머머철학 앞에 나라이름을 붙일 수 있는 국가는 몇 안되지요. 이 점에서 자부심을 느껴도 될 듯 합니다.

최근 위에 올려놓으신 책들과 같이 한국철학에 대한 괜찮은 대중서들이 꽤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몇 권 구입해 살펴봤는데 재밌더군요. :)

로쟈 2007-07-04 13:09   좋아요 0 | URL
한국에서 하는 자화자찬이겠지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 'Japanese Philosophy' 항목이 버젓이 등재돼 있다고 합니다. 한데, 그렇게 대단한 걸(한국철학)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마루야마'도 변변찮은 한국철학사도 못 갖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마늘빵 2007-07-04 15:24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그렇담 있는걸 애써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는건가요. 음. 사실 일본철학이라고 할 만한 개론서나 어떤 것을 접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저 주변에서 듣고, 또 책에서 보고 저는 그리 알고 있을 뿐이지요. 정말 일본철학이라는게 체계가 잡혀있다면 한번 공부해보고 싶습니다. 아! 저 위에 일본근대철학사 라는 책이 눈에 띄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