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주중에 인터넷 카페 '비평고원'의 신년모임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알라딘에 서재가 생기기 전까지 주로 활동하던 공간이다. 주인장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 활동하고 있는 멤버이기도 하고. 전체모임은 아니고 '핵심들'만 모이는 자리였는데, 사실 전체 모임을 갖는다고 해서 더 많이 모이는 것도 아니다. 늦게 합석한 탓에 몇 마디 거들기만 하고 아래 사진에는 끼지 못했다. 오프라인에서 아주 가끔씩밖에 보지 못하지만 친숙한 얼굴들이어서 반갑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대안적 비평공간으로 자리매김한 인터넷 비평카페 ‘비평고원’의 핵심 회원들이 신년회를 겸해 오랜만에 지난 21일 저녁 서울 신촌에 모였다

경향신문(09. 01. 28) [2009 문화가 희망이다](7) 인터넷 비평공간 ‘비평고원’

계급장 떼고 실력으로 논하자. 인터넷 비평카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은 인터넷 무림의 고수들이 학벌이나 나이 등에 구애받지 않고 오로지 필력으로만 자웅을 겨루는 공간이다.

“온라인이기에 오히려 적나라하게 자신을 보이는 논쟁이 가능합니다. 학교에서는 체면을 따지느라 선배를 대놓고 비판하기는 어렵죠. 하지만 여기서는 15살 차이나는 사람들이 피 튀기는 논쟁을 벌입니다. 이력을 가린 채 오디션을 보듯, 글로써만 승부합니다.”(ID 아이온)

인터넷 비평 공간에서 ‘오피니언 리더’로 꼽히는 비평고원은 2000년 4월 문을 연 이후 이제 10년째를 맞았다. 그간 회원수도 75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인문학도라면 비평고원에 대해 대부분 알고 있을 정도로, 웬만한 학회나 문예지 못지 않은 수준 높은 비평과 담론이 만들어지는 곳이다. 서양 철학 서적부터 황석영·신경숙 등의 베스트셀러 소설, 영화에 이르기까지 인문학 전반이 이들의 ‘안주거리’. 기존 학계나 문단에서 담아내지 못하는 비판적이며 새로운 담론이 게시판 속에서 펄떡거린다.

“재작년 말에 보고 2년 만이네요.” 비평고원을 이끌어가는 핵심 멤버인 ‘불멸회원’ 등이 신년회를 겸해 지난 21일 한자리에 모였다. 카페장 조영일씨(ID ‘소조’), ‘로쟈’ ‘폭주기관차’ ‘로카드’ ‘ensoph’ ‘K’ ‘n-69’ 등은 “항상 글을 통해 만나다 보니 어제에도 본 것 같다”고 말한다.

이들이 생각하는 비평고원의 매력은 무엇일까. “글의 저자가 글 뒤에 바로 있다는 게 가장 큰 매력입니다. 글에 댓글을 달면 바로 반응이 오죠. 논쟁이 뜨겁게 붙으면 잠이 안 올 지경입니다.”(아이온)

회원들은 아무래도 대학 강사, 대학원생 등 인문학 전공자들이 많지만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들 가운데는 약사·회사원·군인 등 ‘비전공자’도 수두룩하다. ‘폭주기관차’는 전라도 광주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고, ‘K’는 식품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러나 비평고원 공간에서만은 이들은 누구보다 진지한 학자이자, 토론가다. ‘폭주기관차’는 “인문학 전공자뿐 아니라 노동자 등 누구나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책읽기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인생을 되돌아 볼 수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해외파’ 회원들의 참여도 활발하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중 비평고원에 가입해 활동하다 귀국한 대학 연구교수 ‘아이온’은 “외국에서 국내 학계의 동향에 대해서 가장 잘 알 수 있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라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10살 먹은 비평고원과 함께 고원의 회원들도 성장했다. 카페장 조씨는 제도권 문단에 대해 가차없이 쓴소리를 내뱉는 소장파 문학평론가로 자리잡았고, 인터넷 서평꾼 ‘로쟈’는 인터넷 서점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며 네티즌 사이에 가장 권위있는 서평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쌍수대인’ 복도훈씨는 문학평론가로 문단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왕성한 활동을 하던 회원들이 각자의 영역을 찾아 나가면서 종전보다 활발한 논쟁이 뜸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회원들은 비평고원의 앞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다. ‘로쟈’는 “아고라, 블로그로 인터넷 공간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며 “기존 회원들을 대체할 신인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씨는 “비평고원의 그간 성과를 정리하기 위해 동인지 ‘비평고원 프로젝트’를 올 봄에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프로젝트의 주제는 ‘가라타니 고진’으로,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쓴 새로운 글들로 채워질 예정이다. ‘로쟈’는 “비평고원이 대표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에 학술 커뮤니티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며 “이런 공간이 여기저기에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이영경기자)  

09. 01. 27. 

P.S. "이런 공간이 여기저기에 만들어져야 할 것"이라는 전언은 한 단계 해석을 거친 것인데, 내 기억엔 비평고원 같은 카페가 대표적인 대중지성적 공간으로 주목받는다는 것은 한편으론 한국사회에 변변한 학술 커뮤니티가 없다는 뜻도 되기에 좀 씁쓸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건 '로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가장 권위있는 서평꾼'이라는 말이 좀 우스운데, 사실 알라딘에 서재가 만들어지던 2004년쯤에 내겐 '블로그'란 말조차도 생소했다. 어쩌다가 이후에 몇 년간 소위 '인터넷 서평꾼' 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주목'을 받을 줄은 미처 몰랐다. 이 또한 생각하면 씁쓸하다. 나는 더 많은 동료들을 만나게 될 줄 알았고 자연스레 발을 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무엇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것일까? 하긴 이런 게 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걸 '그들은' 진작에 알아챘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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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평고원의 10년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6-30 21:00 
    다음 카페 '비평고원'이 개설 10주년을 맞아 기념문집을 냈다. 출판사쪽 표현으론 씨북(Cbook)이다. "블로그북(Blook)의 경우 기본적으로 단일저자로 이루어진 출판물인 데 반해, Cbook(카페북, 커뮤니티북)은 엄청나게 많은 복수의 저자로 이루어진다"는 게 차이점이라고. 비평고원의 '원년 멤버'이자 '핵심 멤버'(카페에서는 '불멸회원'이라고 칭한다)로서 나도 그 '복수의 저자'로 참여하고 있으니
 
 
마늘빵 2009-01-27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회원이지만 잘 들어가보진 않는데, 학업을 계속 하시는 분만 계셨던건 아니었군요. ^^

로쟈 2009-01-27 23:21   좋아요 0 | URL
사진에서도 1/3은 비전공자이거나 직장인입니다...

비로그인 2009-01-2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 좋은 개살구... 라는 걸 알아챘는지도 모르고요... 그렇지 않다면 자아에 대한 불안감 혹은 견고하지 않은 자신감, 혹은 외부적 조건에 대한 불신감인지도 모르지요... 혹은....

제가 즐겨 읽는 NYT 기자/칼럼니스트인 니콜라스 크리스토프Nicholas Kristof는 신문의 블로그를 통해 왕성한 블로그 활동을 합니다. 심지어는 FACEBOOK 에까지 '진출'해서 독자와, 그리고 사회와 적극적으로 연동하여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자 중 한 사람입니다. 전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고, 마음이 열려 있는 데다가 특히 글쓰기의 전범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호감이 가는 사람입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한국에서, 자신에 대한 부족감, 불안감, 혹은 심리적이 아닌 물리적인 조건의 걸림돌이 있더라도, 혹은 자신의 실력의 모자른 면까지 드러날(뽀록날) '위험'이 있더라도, 사회 일반, 그리고 특정 독자와 왕성하게 연동할 수 있는 장치로 블로그가 훌륭한데, 아쉽다는 생각을 간혹 하곤 합니다.

이 포스트를 보니 평소에 갖고 있던 그런 감상이 다시 고개를 드네요...^^ 그런 사람들이나 현상을 탓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요 다만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을 뿐입니다.


로쟈 2009-01-27 23:25   좋아요 0 | URL
미네르바 사태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실 온라인의 힘이란 게 공권력을 오버하게 만들 정도니까 무시할 수 없지요. 대중지성적 공간으로서도 좋은 교제공간이면서 교육공간이 될 수 있을 터인데, 가능성이 아직은 많이 묻히는 것 같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관한 포스트를 올린 김에 <시학>의 주된 분석대상인 그리스 비극 전집에 관한 서평도 챙겨놓는다. 지난 가을에 천병희 교수의 전집 가운데 두 권이 출간됐고, 서평은 이에 관한 것이다(출간 소식은 '소포클레스 비극 결정판'(http://blog.aladin.co.kr/mramor/2358339)이란 페이퍼에서 전한 바 있다). 천교수의 <오이디푸스왕> 번역에 대해 한두 마디 적을 일이 있어서 옮겨놓는 걸 미뤄두었는데, 책이 또 얼른 눈에 띄지 않는다. 일단은 서평만이라도 자리를 마련해둔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1. 12) 그리스비극 전집, 완간을 앞두다  

천병희 선생이 옮긴 희랍비극 전집 중 첫 두 권이 나왔다. 그동안 우리나라엔 희랍비극 전집이 없었다. 현대까지 전해진 희랍비극 전체 33편 중 우리말로 옮겨진 것은 18편뿐으로, 사실 이것도 모두 천병희 선생이 옮긴 것이다. 단국대학교출판부에서 나왔던 그 번역들을 고치고, 나머지 15편을 새로 옮겨 더한 것이 이번 번역이다. 이번에 국내에 새로 소개된 작품은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이 3편, 소포클레스의 작품이 2편으로, 내년 초에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까지 나오면 희랍비극 전집이 완결되는 것이다. 그쪽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우울하던 요즘 분위기를 일신할 만한 쾌거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 선물을 찬찬히 살펴보자. 이 글에선 희랍비극의 ‘대표’격인 <오이디푸스 왕>만 보겠다. 이 작품은 이번에 새로 옮긴 것은 아니고 이전 번역을 조금 고친 것이다. 옮긴이가 서문에 밝힌 것처럼, 어색한 표현을 줄이고 가독성을 높인 것이 눈에 띈다. 한데 번역사업 지침에 자주 등장하는 이 ‘가독성’이란 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지금부터 2천5백여 년 전 지구 거의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의 글을 옮기는데, 그것이 술술 읽히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기대 아닌가? 중요한 내용을 다 보존하고서도 매끄럽게 만든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테베 탈출, Les Exiles de Thebes>, 테오발드 샤르트랑(Theobald Chartran) 作, 1871.

‘정확성’에서 아쉬움 남긴 번역
희랍사람들은 높은 사람을 부를 때, ‘아무개의 머리여’, 또는 ‘아무개의 힘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는 자기 아내 이오카스테를 향해 “누구보다 사랑하는 나의 아내 이오카스테의 머리여”(단국대판, 950행)라고 부른다. 사실 이것도 약간 부드럽게 한 것으로, 희랍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내 아내 이오카스테의 가장 사랑스런 머리여’가 될 것이다. 한데 이번 번역에서는 이 구절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내 이오카스테여”가 되었다. ‘머리’가 사라지고 대신 원문에 없는 ‘세상에서’가 새로 붙은 것이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나로서는 이전 번역이 더 마음에 든다. 낯선 것은 낯설게 옮기고, 없던 것은 되도록 덧붙이지 말자는 것이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길 때 문제되는 것 중 하나가 존대법이다. 나는 서양말에 원래 존대법이 없으니 번역에서도 존대법이 너무 두드러지게 쓰지는 말자는 쪽이고, 옮긴이도 이전 번역에서 그 원칙을 대체로 지키는 듯했다. 그런데 새 번역에서는 그것도 달라졌다. 예를 들어 옛날에 어린 오이디푸스를 구해줬던 노인이 그를 찾아와 대화하는 장면에서 극존대가 새로 도입되었다. 한데 어찌 된 일인지, 노인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은 극존대법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그 분께서는 그대를 내 손에서 선물로 받으셨사옵니다.”(1022행) 이 역시 내게는 원문에 충실한 이전 번역(“내 손에서 받으셨습니다”)이 나아 보인다. 

이번 새 번역에서는 대체로 문장들이 이전보다 짧아졌다. 너무 단어 대 단어로 옮기다보니 문장이 늘어지는 걸 피하자는 의도일 텐데, 때때로 이런 노력 때문에 ‘시’가 사라지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비극 작품은 전체가 운문이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나 다 시라 할 수 있지만, 특히 합창단의 노래 부분이 더욱 그렇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혈통을 알아내기 직전, 합창단은 자기들의 왕이 혹시 신의 아들이 아닐까 노래한다. “내 아들이여, 대체 누가 …… 그대를 낳았는가?”(1097~1101행) 그런데 이 구절에는 원래 반복법이 쓰였다. 단국대판에는 “누가, 내 아들이여, …… 누가 …… 그대를 낳았는가?”라고 해서 원뜻을 약간 살려놓았고, 희랍어 원문은 ‘누가 그대를, 누가 그대를’로 되어 있다.   

의미 있는 국내 첫 원전 완역
요약하자면 상당히 뻣뻣한 희랍어 원문을 약간 누그러뜨린 게 지난번 번역이었고, 새 번역에서는 그게 더 부드럽게 고쳐졌다. 하지만 나로서는 ‘가독성’을 위해 ‘정확성’을 희생한다고 할 때, 그 한계가 이전 번역본(단국대판)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개선된 점도 없지 않다. 서양말들은 보통 종속문을 뒤에 자꾸 붙여가는 꼴을 취하는데, 우리말로 옮길 때는 그것들을 앞으로 옮겨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다가 때로 문장 뜻을 엉뚱한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생기는데, 이번 번역에서는 이전에 잘못 옮겨졌던 종속문을 원래 자리로 옮겨 바로 잡은 것도 있었다. 또 하나 칭찬할 것은 편집과 책의 물성이다. 글자 간격을 좁히고 행 배치를 효율적으로 해서 쪽수가 적어졌고, 종이를 가벼운 걸 써서 책 무게가 의외로 가볍다. 독자와 환경을 많이 배려한 셈이다. 

세부적으로 흠을 좀 잡았지만, 전체를 보자면 한량없이 기쁘고 옮긴이가 존경스럽다. 이제 드디어 우리도 희랍비극 전집을 갖게 되었다. 서양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손닿는 곳에 두고서 수시로 읽고 확인할 큰 보물이다. 정말 큰일을 해내신 천병희 선생에게 문화훈장이라도 드렸으면 싶다.(강대진/ 본교 문예창작학과 강사) 

09.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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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9-01-27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책을 읽었었는데...이렇게 다시 나와주니 반갑네요^^

로쟈 2009-01-27 23:19   좋아요 0 | URL
좀 저렴한 판본으로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얼마전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대해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강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략적인 요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좀 특이한 점이라면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아우라, 2008)을 같이 읽었다는 것(이 책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2369587 참조). 책의 부제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라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 입문서이자 <시학>에 대한 대중적인 입문서로도 활용할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책의 취지를 이렇게 적어놓았다. 

  

"이 책은 학술적인 연구서가 아니다. 이 책은 시나리오를 잘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학> 입문서이며, 찬란하게 빛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많은 개념을 분석하여 극적인 이야기 구조에 관한 그의 테크닉이 현대 영화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할 뿐이다."(17쪽)   

이 점이 국내에 이미 소개돼 있는 몇 권의 시나리오 작법 책들과의 변별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오이디푸스 왕> 분석에서 발견해내고 있는 이야기구조를 오늘날의 영화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착안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왕>과 같은 연극을 면밀하게 살펴 극적인 스토리텔링에 관한 불변의 진리를 밝혀냈다. 나는 <록키>나 <아메리칸 뷰티>와 같은 좋은 영화들을 분석하면서, 이 영화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밝힌 이야기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8쪽)   

그러니 시나리오를 쓰려거든 먼저 <시학>을 면밀하게 읽어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그 <시학>의 핵심으로 그가 지적하는 것은 '플롯'이고 플롯을 끌고 가는 '액션 아이디어'다. 무릇 "훌륭한 작가는 이야기를 위해 일하고, 시원찮은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기 위해 일한다"는 지적에서도 강조되는 것이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사람이 아니라 행동(액션)이며, 이 행동이야말로 이야기의 '아이디어'다. 그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가의 작업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잘 구축된 이야기는 하나의 '액션 아이디어'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의 단순한 '액션 아이디어'를 갖지고, 그 아이디어의 고유한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한 편의 온전한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것이다."(27쪽)   

이어지는 내용 자체는 평이하기 때문에(이 책 자체가 드라마틱한 구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책은 영화에 좀 안면이 있는 독자라면 두어 시간 이내로 독파할 수 있다. 해서 따로 요지를 간추릴 필요는 느끼지 않는데, 그럼에도 페이퍼를 올려두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모방론에 대해 한 가지 주석이 필요하지 않나 싶어서다. 모방의 대상에 관한 주석이다.   

이번에 <시학>을 다시 읽으면서 교재로 사용한 것은 영문학자 이상섭 교수의 번역본 <시학>(문학과지성사, 2005)이다. 문고본으로 나온 이상섭본은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도 있고, 한편으론 천병희 교수의 원전 번역 <시학>(문예출판사, 1999)은 수년 전 강의 때 한번 교재로 사용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다른 번역본으로 읽어보자는 계산이었다.    

 

참고로, 국내에서 제일 처음 나온 <시학> 번역본은 손명현 교수의 박영사판(1960)이다. 최근에 <니코마코스 윤리학/정치학/시학>(동서문화사, 2007)으로 다시 나왔기 때문에 아직도 시중에서 구해볼 수 있다. 천병희 교수의 번역은 문예출판사판이 1972년에 처음 나온 듯싶고, 이후에 몇 차례 개정판이 나왔다(옮긴이 서문에 별다른 언급이 없어서 번역상에 변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삼성출판사의 세계사상선집에 들어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시학>에서도 <시학> 부분은 천교수의 번역이다. 그리고 국문학자인 김재홍 교수 번역의 <시학>(고려대출판부, 1998)도 아직 절판되지 않은 책이다.  

 

보다 전문적인 교양이 필요한 독자라면 셰익스피어 전공자인 이경식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신고전주의>(서울대출판부, 1997) 같은 연구서나  레온 골든의 주석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예림기획, 2002), 그리고 이상섭 교수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연구>(문학과지성사, 2002)를 참고할 수 있다. 대부분의 연구/주석서들은 원문 번역을 포함하고 있다. 그밖에도 물론 다수의 영역본을 참고할 수 있으며, 이 중에서 몇 종은 온라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 내가 예전에 읽은 건 제임스 허튼(J. Hutton)의 노튼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1982)이었다. 얇고 저렴한 책이다.  

다시 모방의 문제로 돌아가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의 1장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예술을 '모방'(미메시스)의 양식으로 규정한다. 그 유명한 정의는 이렇다(따로 언급이 없으면 인용문의 쪽수는 이상섭본의 것이다).  

"서시사와 비국과 희극과 디튀람보스, 그리고 대부분의 피리나 현금을 위한 음악은 하나로 뭉뚱그려볼 때 모두 모방의 여러 형태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방의 수단, 대상, 방식 등 세 부분에서 서로 다르다."(15쪽)   

여기서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를 '모방'으로 옮기는 것이 딱 적절하지는 않다는 지적을 역자는 주석에 달아놓고 있다(올해 출간될 새 원전 번역은 짐작에 다른 번역어를 채택할 것으로 보인다). 음악 또한 모방의 한 형태로 보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은 '재현'뿐만 아니라 '표현'의 의미도 갖는, 상당히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여하튼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관점에서 통칭하여) 예술은 모방의 양식이며, 이 예술은 모방의 수단(무엇을 가지고 모방하느냐), 대상(무엇을 모방하느냐), 방식(어떻게 모방하느냐)에 따라 세분될 수 있다. 모방의 수단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1장의 나머지 절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2장에서는 모방의 대상을 다룬다. 앞에서 '한 가지 주석'이 필요하다고 말한 대목이다.   

"모방 기술자(시인)는 어떤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모방하는데, 사람은 고상하거나 또는 저열하거나 둘 중 하나이므로(사람의 성품 차이는 잘나든가 못난 정도에 따라 달라져서 그 두 부류로 나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보통보다 더 좋게 또는 더 나쁘게 또는 보통과 같게 모방하게 된다.(...) 희극은 사람들을 보통보다 못나게, 비극은 더 잘나게 나타낸다."(18-19쪽)  

이 대목은 다른 번역본들과 비교해서 읽을 때 그 차이를 확연하게 식별할 수 있다. 내가 나란히 펴놓고 있는 천병희본과 손명현본에서는 '잘난 사람'을 '선인', 그리고 '못난 사람'을 '악인'이라고 옮기고 있다. 두 번역본이 대동소이하므로 천병희본만 우선 옮기면 이렇다.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다."(문예출판사, 2002, 31-33쪽)    

여기서 '선인'과 '악인'이란 번역은 좀 어색하다. 이건 다른 번역을 참조할 필요도 없이 천교수의 번역 내에서도 지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인과 악인을 판별하는 근거로 인간의 성격은 '덕'과 '부덕'에 의해 나누어진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각주에서 천교수는 덕과 부덕의 원어가 아레테(arete)와 카키아(kakia)이며 이것은 "원래 사물이 그 고유한 기능을 잘 발휘하는 상태와 그렇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어떤 도덕적인 가치 기준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아레테와 카이아는 '잘하고 못함', '잘나고 못남'을 가리키는 범주이지 도덕적인 선악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는다(알다시피 이 그리스의 '잘남/못남'이란 범주가 기독교 도덕에 의해 '악/선'으로 뒤집혔다는 것이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가 주장하는 핵심이다).     

그리고 15장에서 천교수는 "비극은 보통 이상의 인간의 모방이므로 우리는 훌륭한 초상화가들을 본보기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옮기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보통 이상의 인간=선인'이 된다. 우리가 '착한 사람' 혹은 '선량한 사람'을 '보통 이상의 인간'이란 뜻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등식은 부적절하며 좀 어색하다. 이 점은 손명현 교수의 번역도 마찬가지인데, 짐작엔 천교수가 선행 번역을 참조하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다(일러두기에서 역자는 "현대어 번역 중에서는 Bywater의 영역과 Gigon의 독역과 손명현의 국역을 참고했다"고 했다). 각주에서 문제를 제기하고서도 번역어는 그대로 갖다쓰고 있는 것이다(손명현 교수는 일역본도 참고했을 개연성이 높아서, '선인'과 '악인'의 출처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역본일 가능성도 있다).  

참고로 손명현본에서 이 대목은 이렇게 옮겨졌다: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데 행동하는 인간은 때에 따라 선인, 아니면 악인이다. 인간의 성품이 거의 언제나 이 두 가지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덕과 부덕으로 그 성품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으로서 행동하는 인간은, 반드시 선인이든지, 악인이든지, 혹은 그 중간인 우리처럼 보통 사람이다.(...) 이렇듯 비극과 희극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희극은 보통 사람보다 못한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보통 사람보다 나은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동서문화사, 548쪽) 

그리고 천교수가 참고했다고 하는 바이워터의 대역본(1909)에는 이렇게 옮겨졌다: "The objects the imitator represents are actions, with a agents who are necessarily either good man or bad - the diversities of human character being nearly always derivative from this primary distinction, since the line between virtue and vice is one dividing the whole mankind. It follows therefore, that the agents represented must be either above our own level of goodness, or beneath it, or just such as we are (...) represent men either as better than in real life, or as worse, or as they are.(...) The difference it is that distinguishes Tragedy and Comedy also; the one would make its personages worse, and the other better, than the men of the present day." 

같은 대목에 대해서 바이워터와 함께 예전에 명성을 날렸다는 부처(Butcher)의 번역은 이렇다: "Since the objects of imitation are men in action, and these men must be either of a higher or a lower type (for moral character mainly answers to these divisions, goodness and badness being the distinguishing marks of moral differences), it follows that we must represent men either as better than in real life, or as worse, or as they are.(...) for Comedy aims at representing men as worse, Tragedy as better than in actual life." 

그리고 이상섭 교수가 사용했다는 주요 번역본 중의 하나인 엘지(Else)본은 이렇게 옮긴다: "Since those who imitate man in action, and these must necessarily be either worthwhile or worthless people (for definite characters tend pretty much to develop in men of action), it follows that they imitate men either better or worse than average (...)  Finally, the difference between tragedy and comedy coincides exactly with the master-difference: namely the one tends to imitate people better, the other one people worse, than the average."  

이 세 종류의 영역본만 보더라도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보통의 평균적인 사람(상태)보다 잘나고 못난 것을 그린다는 점이 비극과 희극의 차이로 제시된다. 설령 'good man or bad'이라 옮기더라도 여기서 'good man'은 '착한 놈'이라기보다는 '좋은 놈'의 뜻이다. 요컨대, 인간의 행동에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세 가지 유형은 좋은 놈, 나쁜 놈, 어중간한 놈 정도가 되는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의 23장의 제목은 국역본에서 '선한 주인공, 악한 주인공, 그리고 그 중간에 놓인 주인공'이라고 돼 있는데, 원저에서의 제목은 'The Good, the Bad, and the Intermediate Hero'이다. 이건 물론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 <석양의 무법자>(1966)의 원제 '좋은 놈, 나쁜 놈, 어리석은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을 패러디한 것이겠다(나는 다시 보지 못했는데, <석양의 무법자>는 일요일밤에 설연휴 특집으로 방영되었다고). 김지운 감독이 이 원제를 패러디하여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The Good, the Bad, and the Weird)이란 제목을 붙였으니 이왕이면 그런 재미를 살려주는 게 좋겠다. 이 페이퍼의 제목은 그래서 '좋은 놈, 나쁜 놈, 어중간한 놈'이라고 붙였다. <시학>의 취지에 더 맞는 제목이라면 '잘난 놈, 못난 놈, 어중간한 놈'이 될 테지만.   

이미 무엇이 문제인가는 드러난 셈이지만, 이 'the Good'은 중의적이어서 '좋은 놈'도 되지만 '착한 놈' '잘난 놈'이란 뜻도 된다. 그리스어나 영어에서는 이러한 의미가 미분화돼 있는 듯싶은데, 이걸 한국어로 옮기자면 일면만을 부각시키게 되는 난점이 있다. <시학>의 15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 구현에서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이 도덕적으로 선량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이상섭 교수가 'it must be good'을 '선량해야 한다'고 옮긴 대목에서도 이 '난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도덕적으로'란 한정어가 붙긴 했지만, 같은 문단에서 "Even a woman may be good, and also a slave; though the woman may be said to be an inferior being, and the slave quite worthless"(Butcher)를 "일반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한 부류에 속하고 노예는 아주 못돼먹은 부류에 속하지만 좋은 여자, 좋은 노예가 있을 수도 있다."고 옮긴 것과는 잘 안 맞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량하다(be good)'를 '열등하다'나 '못돼먹다'의 상대어로 쓰고 있기에 그렇다. 일관성을 유지해주자면, 이 경우에도 '잘나다'란 뜻으로 옮겨줘야 하지 않을까. 그리스식 어법으로 '선량하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났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듯싶어서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의 역자는 <시학>의 2장 서두의 인용을 "시인은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며, 행동하는 인간은 반드시 선하거나 악하다. 인간의 성격이 항상 이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은 모든 인간이 도덕과 부도덕에 따라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인 인간은 우리보다 더 선하거나, 또는 우리보다 선하지 않거나, 또는 우리와 같다."(163쪽)라고 옮겼다. 하지만 이 번역은 천병희본과 마찬가지로, 15장 후반부를 옮긴 "비극은 보통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을 모방하므로, 우리는 나름대로 훌륭한 초상화가를 보기로 삼을 수 있다."(174쪽)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상섭본은 이 대목을 "비극은 우리 자신보다 잘난 사람들의 모방이므로 유능한 초상화가들의 예를 따라야 할 것이다."(54쪽)라고 옮긴다.

어떤 예인가? "훌륭한 초상화가는 어떤 사람의 형상을 재현할 때 실물과 유사하게 그리되, 실물보다 더 아름답게 그린다. 마찬가지로 시인도 성미가 급한 사람이나 느린 사람, 또는 이와 유사한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그릴 때, 그들을 그러한 특징을 가진 사람으로 그리되, 그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그려야 한다."(<스토리텔링의 비밀>, 174쪽)  

마이클 티어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주문을 잘 구현하고 있는 사례로 <록키>와 <아메리칸 뷰티> 등의 주인공을 든다. "록키는 건달세계에서 벗어나겠다며 이웃에게 허풍을 떨지만,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비친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레스터 번햄은 중년의 위기를 맞이한 남자지만 안젤라와 잠을 자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다. <대부>에서 아주 탁월한 마피아의 아들 마이클 꼴레오네도 기꺼이 가족을 보호하고 존중함으로써 가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고귀하게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이 세 인물은, 자신이 행한 극적 행동과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통하여 비극적 드라마가 갖추어야 할 리얼리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174-5쪽)     

 

이 경우 '진지한 드라마'(serious drama)란 뜻의 비극은 잘난 인물의 모방이면서 어떤 인물의 잘난 면에 대한 모방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록키는 건달이고, 레스터 번햄은 무능력한 중년의 가장이며 마이클은 마피아 두목일 따름이지만 이들은 어느 순간 자신의 처지를 넘어서 고귀하게 행동한다. 현대판 비극은 그런 고귀한 행동에 대한 모방이자 묘사이고 재현이다. 물론 이 행동의 모방은 잘 구축된 플롯에 의해서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미 <시학>을 읽은 독자라면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 특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마치 원작소설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읽을 때의 느낌이랄까. 다만 개인적으로 두 가지 정도의 지적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나는 <아메리칸 뷰티>의 모든 이야기를 묶어주는 '단일한 이야기'가 '하나밖에 모르는 마음'(one-track mind)으로 수렴된다는 점. 그리고 <엔젤 하트>에서 주인공(해리 엔젤)의 시점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플래시백이 그리스 비극에서의 코러스(합창) 역할을 대신한다는 점.   

 

저자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시학>은 영원불멸의 시나리오 쓰기에 관한 비결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하나의 출발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원칙들을 가지고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분석해보고 그 원칙들이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살펴보라."(227쪽) 그리고 "내 생각에 <시학>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것은 행동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조건을 어떻게 그려낼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며, 그것은 지금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수사학을 내뱉는 것이 아닌, 삶의 진리를 '이야기하는' 강력한 방법에 관한 것이다."(230쪽)  

한갓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드라마를 통해서 '삶의 진리'를 말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에 '노하우'가 있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전해주는 비밀이자 놀라움이다. '수 세기 동안 단 1%만이 알았던 부와 성공의 비밀'은 별로 궁금하지 않지만, 이 이야기(뮈토스; 플롯)의 비밀은 정녕 놀라운 것이다. 당신이 한 방 얻어맞은 듯이 잠시 멍해질 정도의 비밀이라고 해도 좋다(당신이 멍해지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정신상태를 유지한다면 상당히 많은 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시학> 등속의 책은 안 읽어도 되는 것이다). 공부는 그런 놀라움에서 또 시작된다... 

09. 0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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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27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려주신 영역판 중에서 전 펭귄의 영역판이 좋더군요.^^

로쟈 2009-01-27 10:10   좋아요 0 | URL
영역판을 비교까지 해본 건 아니고, 제 경우 노튼판은 대학 구내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책이었어요...

비로그인 2009-01-2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트를 보니 티어노의 책이 어떤 책인 잘 알겠군요. 이것으로 그 책 읽는 것을 대신해도 되겠네요. ^^

로쟈 2009-01-27 23:20   좋아요 0 | URL
네, 실전적인 책이어서 시나리오 습작생들에겐 요긴할 듯해요. 교양서로서는 <시학>의 보조교재 정도...

노이에자이트 2009-01-2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만들고 얼마 안 있어서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요.석양의 무법자에서는 리 반 클립이 더 기억에 남아요.텔리비전에서 열번도 더 했을 거예요.

로쟈 2009-01-28 22:17   좋아요 0 | URL
네, 자주 했죠. <원스 어폰 어 타임>은 극장에서 본 때문에 더 인상에 남습니다...
 

한국 민족주의에 관한 책은 옹호서이건 비판서이건 그간에 적잖게 출간됐기에 또 새로운 책이 나온다고 하면 그다지 주목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신기욱 교수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창비, 2009)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몇 개의 리뷰를 읽어보았지만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한다는 게 결론이라면 별로 흥미를 끌지 않는다(설마 그게 전부일까?). 짐작엔 미국이나 영어권 독자들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지는 설 연휴인지라 민족주의란 주제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볼 만하다(사실 더 핵심적인 건 가족주의 아닌가? 왜 일제 때부터 있지 않았나. 있는 자들의 이데올로기. "우리 집안만 빼고 다 망해라!").  

 

경향신문(09. 01. 25) "한 핏줄 신화에 빠진 한국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한국의 민족주의는 ‘종족 민족주의’로, 서구의 민족주의 이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남한과 북한, 진보와 보수를 모두 지배하는 단일민족 신화에서 벗어나 열린 민족주의로 가야 합니다.” 

신기욱 미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의 저서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이진준 옮김·창비)가 번역, 출간됐다. 민족주의를 거시적으로 분석한 이 책은 2005년 [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란 제목으로 스탠퍼드대 출판부에서 먼저 나왔다.  

출간에 즈음해 방한한 신 교수는 “한국사회의 구성원리인 민족주의를 ‘신채호의 민족주의’ ‘안창호의 민족주의’와 같은 지성사의 관점이 아니라 사회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구조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신 교수에 따르면 서구에서는 민족(nation)·종족(ethnicity)·인종(race)을 구분해 사용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세 가지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다. 따라서 서구의 민족주의가 종족과 직결되지 않는 근대국가의 정치적 구성원리인 반면, 한국에서는 ‘한 핏줄이니까 한 국가를 이뤄야 한다’는 식의 종족 민족주의로 발전한다.

현재와 100년 전의 구도가 비슷해요. 현재 전지구화/민족주의/동아시아주의가 공존하는 것처럼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도 문명개화론/민족주의/아시아주의가 있었지요. 이 땅에 민족주의가 처음 도입될 당시에는 인권·시민의식이 강조됐는데 일본의 식민통치를 거치며 동질성과 집단의식을 강조하는 종족 민족주의가 강화됐습니다.”

이 같은 종족 민족주의는 식민통치, 전쟁, 분단체제, 통일문제 등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1920년대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나 이광수의 <조선민족론>은 한민족의 독특함과 순수성의 기원을 입증할 ‘과학적’ 토대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문화·유산을 연구했으며 해방 이후 이승만의 일민주의나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공통적으로 종족 민족주의에 호소한다. 70년대 박정희의 조국근대화론, 80년대 민주화세력의 반미 민중 민족주의 역시 민족주의적 수사를 차용한다.

신 교수는 “앤더슨, 홉스봄 등 서구학자들이 민족주의는 근대의 발명품이란 걸 밝혀냈지만 한국의 민족주의는 중세 이후 안정된 영토에서 응집력 있는 정치공동체를 유지해왔다는 특수성이 있다”면서 “서구의 민족주의 이론과 맞지 않는 한국사회를 제시하는 것이 학자로서 도전하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가 약화됐다고 하지만 ‘붉은악마’ 현상, 촛불시위, 독도문제에 대한 대응,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차이가 대북·대미관계란 점에서 아직 강력합니다. 특히 저처럼 바깥에 있는 사람이나 외국인이 보기에는 한국의 종족 민족주의는 독특하지요.”

그의 제안은 종족 민족주의를 벗어나자는 것이다. “민족주의는 현대사회의 정치제도로서 폐기의 대상이 아니지만 한 세기 전처럼 폐쇄적 형태로 가서는 안 되고 전지구화나 동아시아주의 등 다른 항들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인 신 교수는 미국의 대표적인 북한문제 전문가이자 서울과 워싱턴의 정치인들과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다. 이회창 창조한국당 총재,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 김형오 국회의장,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박원순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등이 스탠퍼드대 방문학자로 머물렀다. 양국 정치인들을 연결하는 게 자신의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신 교수는 1992~2004년 한·미관계를 분석한 저서를 올해 말쯤 낼 계획이다. 이 저서의 주장은 “과거에는 미국이 일방적으로 한국을 주도했는데 지금은 한국도 미국을 보는 렌즈가 있다. 단 한국의 렌즈는 여러 개로 갈라져 있다. 그리고 미국의 렌즈는 너무 흐리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한윤정기자)  

09. 01. 25. 

 

P.S. 미국쪽 한국 학자들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민족주의'보다 더 흥미를 끄는 주제는 '근대성' 혹은 '근대화'이다. 신기욱 교수와 마이클 로빈슨 등이 엮은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삼인, 2006)이 그 성과를 묶어낸 책이다.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넘어서'라는 부제가 소위 '제3의 시각'을 집약해준다. 개인적으로는 마이클 신의 '내면 풍경: 이광수의 <무정>과 근대문학의 기원' 같은 글에 흥미를 느낀다(원문도 복사해놓았지만 아직 들여다보진 못했다). 마이클 신의 연구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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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9-01-25 10:51   좋아요 0 | URL
짐작하신대로 거의 정확하게 서구에서 먹힐만한 방식의 한국 (그리고 특히 북한)과 민족주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요즘처럼 논의가 진전된 상황에서 신기욱 교수 얘기는 정말 '그저 그렇다'는 느낌입니다. 사회과학 방법론을 사용햇다는게 고작 서베이 몇개 돌리고 통계 자료 몇개 사용한 정도더군요.

로쟈 2009-01-25 13:54   좋아요 0 | URL
사실 논의가 좀더 생산적이려면 민족주의에 대한 비교연구가 좀더 정교하게 이루어져야 할 듯싶은데, 거기까진 다루지 않나 보군요...

2009-01-26 0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6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9-01-26 23:39   좋아요 0 | URL
먼댓글로 링크시키라고 하시지만.... 음,그런데 지금 보니 제가 쓰는 블로거는 먼댓글을 지원하지 않는군요... 그냥 두죠 뭐. ^^

로쟈 2009-01-26 23:45   좋아요 0 | URL
제가 '아서 단토의 책 논쟁'(http://blog.aladdin.co.kr/mramor/2144892)에 덧붙여놓았습니다...
 

다른 때보다 좀 일찍 귀가해서 저녁을 때우고 주말 북리뷰들을 잠시 둘러본다. 이 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딱 두 권만 손에 들 수 있다면 나로선 별다른 주저없이 마이클 월저의 <정치철학 에세이>(모티브북, 2009)와 함께 닉 레인의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 2009)를 고르고 싶다('월저' '왈저' '왈쩌' 등의 표기는 하나로 좀 정리되면 좋겠다).   

개인적인 독서 취향에 맞기 때문인데, 거기에 덧붙여 일단 둘 다 두껍다. 월저의 책은 600쪽이고, 레인의 책도 530쪽이 넘는다. 이 정도면 넉넉한 시간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일주일은 꼬박 읽어야 할 분량이다. 장바구니에 넣어두긴 했지만 연휴가 긴 탓에 직접 읽어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겠다(하지만 정말로 읽을 시간이 있을까?). 그래서 리뷰라도 챙겨놓는데, <정치철학 에세이>에 관해서는 아직 읽을 만한 리뷰가 올라오지 않았다. <미토콘드리아>만 일단 갈무리해놓는다. 사실 미토콘드리아가 '인간 생명의 비밀'을 쥐고 있다고 하므로 한 살 더 먹게 되는 설날과도 잘 어울리는 책이다. 한편으로 미토콘드리아, 하면 세포내 공생진화설의 주창자인 린 마굴리스 여사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녀의 <공생자 행성>(사이언스북스, 2007)까지 같이 읽어주면 더 좋겠다.

 

한겨레(09. 01. 24) '인간생명의 비밀’ 미토콘드리아가 쥐고 있다

대장균은 환경이 좋으면 20분마다 한 번꼴로 분열한다. 대장균 한 마리의 무게는 약 1조분의 1그램. 대장균 한 마리가 하루 72번 분열하면 그 수는 2의 72제곱, 곧 10의 21.6제곱 마리가 된다. 그 무게는 4000톤. 단 이틀 만에 5.977×10의 21제곱 톤인 지구의 질량을 능가하게 된다. 이런 놀라운 번식력을 지닌 세균은 지구 나이와 거의 같은 세월 동안 극한의 환경에도 적응하면서 번성해왔다.

하지만 생화학적 능력에선 한계가 없을 정도로 진화한 세균들은 40억년이 지나도록 몸집을 불리거나 복잡하게 진화하진 못했다. 약 20억년 전 지구에서 진화의 빅뱅이 시작됐다. 그때 진핵세포 곧 핵을 지닌 세포가 출현했고, 이후 지금까지 지구를 지배해온 건 진핵 다세포 생물들이다. 사람은 물론 조류·균류·풀·나무 등 우리 눈에 띄는 지구상 거의 모든 생명체들의 직계 어버이는 20억년 전 기적과 같이 등장한 진핵세포다. 영국 과학저술가 닉 레인은 <미토콘드리아>(뿌리와이파리 펴냄)에서 이 진핵세포의 진화를 “우연한 사건이며, 지구에서만 단 한 차례 일어났던” 아주 특별한 일이라고 했다. 따라서 설사 우주가 수많은 생명체들로 넘쳐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균과 같은 형태로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왜? <미토콘드리아>는 세포학·진화론·고인류학·생화학·생리학·발생학·미생물학·의학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추리소설 쓰듯 그 이유와 의미를 추적해간다. 미토콘드리아를 통해서 본 지구생물역사 최신판이다.  

세균들은 왜 40억년 동안 본래의 단순구조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그 엄청난 번식 속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성장을 멈추고 죽은 듯이 기다리던 세균 개체군에 영양이 공급되고 폭발적인 분열이 시작되면, 유리한 쪽은 분열 속도가 빠른 세균. 가장 빨리 분열한 세균들이 개체군을 지배하고 상대적으로 느린 쪽은 설 자리를 잃는다. 세균의 분열 속도는 디엔에이(DNA, 유전체) 복제 속도가 결정한다. 유전체를 경쟁자들보다 더 빨리 복제하려면 유전체를 더 작게 만들고 몸집도 줄여 에너지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복제 속도에 방해가 된다면 당장 필요 없는 유전자들까지 버린다. 극한의 다이어트다.

또 하나는 이른바 ‘기하학의 걸림돌’. 생명체의 동력은 1929년 카를 로만이 발견한 아데노신삼인산(ATP)이다. 에이티피 끝에 붙은 인산기가 떨어져 나갈 때 많은 양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이 에이티피 합성 원동력이 산화환원 반응 중에 일어나는 양성자와 전자 이동(양성자 기울기)인데, 내부에 다른 동력원이 없는 세균은 외막을 통해 에너지를 빨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세균이 만약 크기를 두 배로 늘리면 표피면적은 네 배로 늘어나고 부피는 8배로 늘어난다. 이렇게 되면 단위 부피당 표피면적 비율은 현저히 떨어진다. 에너지 수입 통로인 표피면적이 줄어들면 생존이 위태로워진다.

20억년 전에 일어난 진핵세포 등장이라는 대이변은 이런 한계들을 돌파함으로써 가능했다. 그 핵심은 에너지를 세포 외막이 아니라 세포 안에서 조달하는 것. 세포 내 발전기만 있으면 된다. 미토콘드리아가 바로 그 구실을 했다. 본디 세균이었던 미토콘드리아가 메탄 생성 고세포와 공생하면서 그 내부로 들어가 앉는 순간 진핵세포 시대가 열렸다. 지은이는 미토콘드리아의 조상인 발효세균 알파프로테에박테리아가 옛날옛적 산소가 거의 없는 깊은 바다 속에서 메탄 생성 고세포를 만나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상보관계로 어울려 살다가 결국 고세포 몸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대이변이 시작된 사연을 온갖 가설들을 동원해가며 설명한다. 세포 내 에너지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세균처럼 세포 바깥을 싸고 있던 딱딱한 세포벽이 필요 없게 되고 유연한 세포막은 에너지 생산에서 해방돼 신호전달, 운동, 식세포 작용 등 다른 일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진핵세포의 출현과 미토콘드리아 등장은 선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진행됐다.

이에 따라 차원이 다른 기동성을 확보한 진핵세포는 환경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유전정보량도 대폭 늘리면서 세균보다 평균 1만~10만배나 몸을 불렸다. 에너지 문제를 해결한 세포들로 구성된 동물들의 체적은 대형화할수록(지탱할 수 있는 골격의 한계 등으로 제약을 받지만) 대사율에서 더욱 유리해져 몸이 커질 때마다 필요 에너지의 양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예컨대 쥐는 사람보다 체적 대비 7배나 더 많이 먹고 장기들을 가동해야 생존할 수 있다. 지구의 다세포생물들이 왜 ‘복잡성의 비탈’을 올라갔는지, 그 의문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도 결국 미토콘드리아다. “근래에 나온 그 어떤 학자의 추정보다도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내용을 담았다”는 지은이의 철저한 환원주의적 해석엔 창조주의 설계를 들먹이는 종교적 예정설 같은 건 들어설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에 따르면 왜 암·수컷 두 성으로 성이 분화됐는지, 그 비밀도 미토콘드리아에 있다. 호흡연쇄를 통한 에너지 획득 속도와 효율을 좌우하는 세포 내 핵과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들의 돌연변이 속도 차이로 인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미토콘드리아가 한쪽 부모에게서만 유전자를 물려받아, 유성생식으로 무작위적으로 뒤섞이는 핵 유전자와 한 벌의 짝을 이루게 하는 양성전략이 가장 안전하단다. 이 때문에 미토콘드리아 디엔에이는 모계를 통해서만 유전되는데, 이런 특성 때문에 모든 인류의 어머니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약 17만년 전 아프리카 대륙에 살았다는 것도 추정해낼 수 있었다.

늙음과 죽음 등 인간 생로병사 비밀도 미토콘드리아가 쥐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궁극의 의문까지, 미토콘드리아한테서 그 답을 들을 수 있다고 지은이는 첨단과학을 동원해 설명한다.(한승동 선임기자) 

09. 01. 23. 

 

P.S. 저자의 다른 책으론 <산소>(파스칼북스, 2004)가 먼저 소개됐었지만 이미 절판됐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은 <영하 상태의 생물>(2004)인데, 공저이고 600쪽이 넘는 분량이다. 단독 저작으로 근간 예정인 책은 <생명의 등정>(2009). '진화의 열 가지 위대한 발명'이 부제다. 이 역시 흥미를 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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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죠커의 생각
    from jokka's me2DAY 2009-01-29 15:39 
    미토콘드리아와 삶의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