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필자가 쓴 지젝론으로는 권택영 교수의 <잉여쾌락의 시대>(문예출판사, 2003) 이후 두번째 책이 얼마전에 나왔다. 독일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김현강 박사의 <슬라보예 지젝>(이룸, 2009)이 그것인데, '누구나 철학' 시리즈로는 상당히 오랜만이다. 책에 대한 서평기사가 좀 뒤늦게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이미 몇 권의 소개서가 나와 있어서 국내 필자(아니 독일에 체류중이니'국외 필자'라고 해야 할까?)의 저작이라는 점 외에 어떤 장점이 있을까 싶지만, 번역서가 아니어서 좀더 편하게(혹은 정확하게) 전달될 수는 있을 듯싶다.

한겨레(09. 01. 31) 지젝 “해체된 저항주체를 되살려라”
이룸출판사의 ‘누구나 철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김현강(독일 본대학 철학박사)씨의 <슬라보예 지젝>은 철학자 지젝에 관한 단출하지만 밀도 있는 안내서다. ‘레볼루션스’ 시리즈의 <로베스피에르> <트로츠키> <마오쩌둥> 서문의 배경을 이루는 지젝의 철학적 바탕과 정치적 지향이 일목요연하게 서술돼 있다.
이 책의 설명을 따르면, 지젝의 대결 상대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이다. 지젝은 이들의 철학이 주체를 해체함으로써 저항의 거점도 동시에 해체했다고 비판한다. 근대적 주체 이념이 인간을 해방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억압과 구속에 빠뜨렸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해체주의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지젝이 보기에 이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철학이 주체성을 해체한다면 이와 더불어 주체마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 지젝의 문제의식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해체주의자들의 작업을 모두 일소에 부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해체 작업이 이루어낸 성과는 성과대로 보존하면서 저항과 혁명의 주체를 되살리는 방안을 찾는 것이 지젝의 목표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지젝이 주체를 되살리는 작업에 동원하는 주요 사상으로 꼽히는 것이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독일 관념론의 종합인 헤겔 철학, 카를 마르크스의 이론이다. 이 책은 이 사상들을 차례로 답사함으로써 지젝 이론의 핵심으로 다가간다. 지은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지젝이 재구축하고자 하는 주체의 특성이다. 지젝은 근대 철학이 상정했던 자기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는 없다는 해체주의적 관점을 수용한다. 주체는 균열과 틈새와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주체가 말하자면, 지젝 저작의 제목이기도 한 ‘까다로운 주체’다. 이 주체는 그런 불완전성 속에서도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주체의 기능을 수행한다.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들인다.
더 나아가 지젝은 이 주체를 통해 정치를 다시 사유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의 문제는 진정한 정치적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고 지젝은 말한다. 그 이유를 지젝은 “경제의 탈정치화”에서 찾는다. 자본과 시장의 문제를 정치와는 무관한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문제라는 이야기다. 이 지점에서 지젝은 경제적 차원의 갈등, 다시 말해 계급갈등을 정치의 문제로 복권시키고 이 계급갈등을 다른 갈등보다 우위에 놓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든 사회적 갈등이 동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거쳐 그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만난다. 요약하자면, 주체를 복원하고 그 주체를 통해 계급갈등이라는 근본모순을 해결하는 정치를 실천하는 길을 찾는 것이 지젝의 관심사인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1. 30.



P.S. 저자가 독일에서 공부하고 있는 탓이겠지만 부록의 참고문헌이나 후주에서의 인용문헌에는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 먼저, 참고문헌에는 원서와 국역본이 병기돼 있는데, 실수인지 고의인지 일부 번역본이 누락됐다(사실 출간된 번역본이야 알라딘에서 '지젝'을 한번이라도 검색해보면 다 알 수 있다). 그래서 알렌카 주판치치의 <실재의 윤리>(도서출판b, 2004)가 <실재의 윤리학>으로, 미란 보조비치의 <암흑지점: 초기 근대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도서출판b, 2004)가 <완전히 까만 점: 현대 초기 철학에서의 응시와 신체>로 표기됐고,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는 <누가 전체주의를 말했는가?>로 표기됐다.


비록 원제와는 다른 제목이 붙여지긴 했지만 <죽은 신을 위하여: 기독교 비판 및 유물론과 신학의 문제>(길, 2007)는 <인형과 난장이: 기독교의 변태적 핵심>으로만 표기됐고, <지젝이 만난 레닌: 레닌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교양인, 2008)는 <혁명이 문전에 와 있다: 1917년 이후의 레닌 작품선>이라고 표기됐다. 정확하게 말하면 '1917년 이후'가 아니라 '1917년'의 레닌 문선이다. 그리고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는 <The Fright of Real Tears: Krzysztof Kieslowski between Theory and Post-Theory>를 옮긴 것인데, 부록에는 지젝 편저의 <The Fright of Real Tears: The Uses and Misuses of Lacaan in Film Theory>(2000)와 <The Fright of Real Tears, Kieslowski and the Future>(2001)라는 엉뚱한 책 이름이 두 권이나 들어가 있다. 저자나 편집자의 착오가 아닌가 싶다.
후주에서는 헤겔과 칸트, 니체, 비트겐슈타인의 인용 쪽수를 독어 원전을 근거로 표시해주고 있는데, 국역본을 이용하거나 국역본의 쪽수도 병기해주는 것이 '입문서'의 에티켓 아닐까(게다가 저작명도 독어만을 써주고 있다). 이것도 원칙이 있는 건 아니어서 프로이트는 영역본과 독어본을 왔다갔다하고, 라캉의 경우엔 <에크리>는 불어본을 <세미나>는 영어본을 참조해야 한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우리말로 번역돼 있지만 독역본을 참고해야 하고, 울리히 벡은 독어본으로 읽어야 한다. 아무래도 독자에 대한 고려나 감이 좀 부족하달 수밖에 없다.


참고로, 현재 국내에 소개돼 있는 지젝 입문서로는 토니 마이어스, 사라 케이, 이안 파커 세 사람의 책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초심자가 읽을 수 있는 건 마이어스 정도가 아닐까 싶고(사라 케이의 책은 번역도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그것도 지젝의 책을 한두 권은 읽은 뒤에야 흥미를 갖고 따라갈 수 있지 않나 싶다. 그 마이어스의 책에는 친절한 문헌 소개가 붙어 있는데, <믿음의 대하여>에 대해서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고 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는 그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이고, 예전에 지적한 대로 국역본은 최악의 번역이어서 거의 읽을 수가 없다. 이런 것이 한국(어)의 핸디캡이다.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책을, 읽다가 집어던져야 하는 나라에서 그래도 공부를 해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