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새벽녘에야 구상을 해서 낮에 써보낸 원고인데, 마침 폭설이 내렸기에 아귀를 맞추었다. 칼럼의 제목도 그렇게 나갔다. 원고를 보내고 아이와 30분 동안 눈사람을 만들어보려고 애쎴지만, 어찌된 일인지 잘 뭉쳐지지 않았다. 눈의 성분도 예전과는 다른 모양이다.  

 

경향신문(10. 01. 05)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포틀래치’라는 게 있다. 북미 원주민의 말로 ‘선물’이란 뜻인데, 보통은 선물을 주면서 크게 벌인 잔치를 가리킨다. 많은 손님을 초대해 생선과 고기, 모피와 담요 따위를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더 큰 포틀래치를 열어서 자기도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면 예의에 어긋날뿐더러 선물을 준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걸 뜻하기에 과도한 잔치를 경쟁적으로 벌였다고도 한다.

선물 교환양식이긴 하지만, 포틀래치는 선물이나 교환과 구별된다. 선물은 정의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관대한 행위이다. 반면에 교환은 반드시 뭔가를 반대급부로 기대하면서 주는 호혜적 행위이다. 포틀래치는 이 두 가지 행위의 교집합 같다. 즉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한 턱을 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받는 쪽에서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턱을 내야만 한다. ‘자발적 의무’를 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자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인류학자 모스는 이 수수께끼 같은 교환방식 속에서 뭔가 신비로운 것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 핵심을 호혜적 교환 자체에서 찾았다.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상호교환의 의미라고 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까지 가세해서는 포틀래치의 핵심이 선물과 답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라고 주장했다.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지만 대칭적인 두 행동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누군가 선물을 받은 즉시 상대방에게 답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물을 거절한다는 인상을 줄 테니까. 모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포틀래치는 호혜적 교환처럼 비치면 안된다.

교환의 호혜성은 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까? 또 다른 인류학자 살린스에 의하면, 교환은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며 받은 대로 되갚는 보복의 논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각각의 선물주기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척해야 한다. 그것이 포틀래치라는 선물경제의 특징이라면, 이와 대조적인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다. 화폐를 매개로 한 등가교환 말이다. 거기엔 관대함도 베풂의 호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선물이 주인의 행위이고 포틀래치가 주인들 사이의 행위라면, 교환은 노예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오래 전 일화가 떠오른다. 대학 1학년생이던 나는 서울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의 부모님께 다녀오곤 했다. 하루는 늦은 저녁 그렇게 돌아오던 길에 세탁소에 들렀다. 양복 상의에 떨어진 단추를 달기 위해서였다. 세탁소 주인이 특이한 요구라는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는 동안 나는 이 품값을 어떻게 치러야 할까 꽤 고민했다. ‘무상의 호의’일 수도 있는 일을 두고 “얼마예요?”라고 묻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인 듯싶었다. 결국 옷을 받아들고 엉거주춤하게 목례를 하고 나서려다가 그냥 가느냐는 타박을 받았다. 품값으로 500원을 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속내를 말하진 못했다. 대신 나의 짧은 생각을 자책했고, ‘서울 인심’에 대한 씁쓸함을 곱씹었다. 그런 등가교환을 통해서 그날 세탁소 주인과 나는 서로에게 노예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호의를 베푸는 대신에 노동을 했고 나는 고마운 마음 대신에 돈을 지불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돈이 모든 걸 대신할 수 있는 세상은 노예들의 세상이다.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10. 01. 04. 

 

P.S. 포틀래치에 대해서는 이상의 책들을 참고했다. 물론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지젝의 정리이다. 한데, 지젝이 말하는 선물경제의 주인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것 없이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짧은 글에 그런 내막까지 자세히 적을 수는 없어서 약간 비튼 결과가 됐지만, 또 비튼 대로 말은 통하는 듯싶다. 저녁에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기행 첫 강의를 하러 외출했다가 들어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강의실 분위기도 좋았고 귀가길도 무난했다. 폭설이 내린 날 치고는 뒷끝이 좋은 하루다...


댓글(2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꼼미 2010-01-05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말과 연초를 보내며 읽는 좋은 글이네요. 특히나 이맘때면 무상으로 받았던 수많은 호의에 어떻게 보답을 해야하나 고민 아닌 고민을 하거든요. 사람이란 또 표현을 하지 않으면 그 속마음을 알기 어려운 법이니까요. '무상의 친절로' 보내주신 책을 너무나 잘 보고 있는데 마음으로만 그걸 담고 있으면 제 마음이 어떤건지 과연 제대로 아실까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천냥 빚이지만 말로라도 가늠을 하는게 나을지... 정중하게 다시, "정성스레 친필을 더해 보내주신 책, 제게는 정말 좋은 선물이었답니다. 올 한해 로쟈님 마음이 폭설만큼 풍요롭길 바라겠습니다. 꾸벅~"

로쟈 2010-01-05 08:51   좋아요 0 | URL
잘 받아보셨다니 다행입니다. 그곳도 폭설은 자주 내리죠?^^

2010-01-05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08: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10-01-05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옵니다. 눈이 내리고 난 뒤 몇 시간 지나서 대량의 눈을(무게의 힘으로)
뭉치다 보면...저처럼 거대한 눈사람이 탄생되옵니다.ㅎㅎㅎ (인증샷까지 올렸는걸요)

로쟈 2010-01-05 08:48   좋아요 0 | URL
지역이 다를지도 모릅니다.^^

sasac 2010-01-05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눈이 내리고 나서 표면이 약간 녹았을때 잘 뭉쳐진답니다.
그러니까 내리고 있는 눈보다는 쌓인 눈...
시골에 살다보니...경험으로 아는 거예요^^

로쟈 2010-01-05 14:26   좋아요 0 | URL
시골 눈은 아무래도 다를 듯해요. 저도 작년에는 눈사람을 만들었으니 어제 내린 눈만 좀 이상합니다...

다크아이즈 2010-01-0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고, 로쟈님 너무 꾀가 없으셨네요. 떨어진 단추는 기숙사 옆동 여학생에게 부탁해야 무상의 의미에다 덤으로 데이트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지(이렇게 되면 무상 아닌가?), 영업하는 세탁소 가서 부탁해 놓고 '무상의 호의'나 '인심'을 바라면 어떡해요? ㅋㅋ 제가 세탁소 주인이라도 로쟈님의 깊은 뜻을 오해했을 것 같아요.

로쟈 2010-01-05 14:27   좋아요 0 | URL
남학생만 있는 기숙사였어요. 그리고 오는 길에 단추가 흘러내렸는데, 양복 상의는 바지랑 다르잖아요.^^;

2010-01-05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5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0-01-0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는 호의를 베푸는 대신에 노동을 했고 나는 고마운 마음 대신에 돈을 지불했다"-좋은 글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뒤돌아보게 만듭니다. 욕을 먹지 않으려면 선의로써 행하는 도움마저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해야 하는 세상은 씁슬하게 느껴지네요. 살면서 인간으로서의 처신이 쉽지 않음을 가끔 깨닫습니다. 어떤 경우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잘 모를 때가 있어요. 무엇을 받는 행위도 간단치 않습니다. 답례를 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섭섭하게 생각할 것 같고, 그렇다고 매번 답례를 한다면 '너도 받으면 꼭 답례를 해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은연중 주는 것 같고... 그 적절함이란 어느 쯤인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결국 중요한 건 상대방에 대한 파악이겠죠. 어떤 인간인가, 즉 어떻게 해 줘야 상대방은 기분 좋은가, 하는 것이 관건. 정보란 이럴 때도 중요하네요.

페크pek0501 2010-01-06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라는 제목이 참 좋습니다. 글과 어울리는, 탁월하게 뽑은 제목임.

로쟈 2010-01-06 21:12   좋아요 0 | URL
제목은 편집부에서 정합니다.^^

펠릭스 2010-01-08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물과 노동(수고)의 댓가를 분명히 구별하게 된 나이가 되면 현명(지혜)하게되는 나이입니다. 지젝도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지만, '대부'에서도 적과 아군에 대한 분명한 구별의 지혜는 경험의 세월만이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로쟈 2010-01-08 12:48   좋아요 0 | URL
그게 상호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니 미묘한 것이고, 미묘한 것을 아는 게 지혜일 수 있겠습니다...

펠릭스 2010-01-08 17:31   좋아요 0 | URL
예,,
 

작년 가을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하나는 칼 포퍼의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영림카디널, 2009)이다. '만물유전'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와 비교하여 흔히 '만물부동'을 제창한 고대철학자로 알려진 이가 파르메니데스다. 짐작에 포퍼의 책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가장 자세한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소개 논문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전공자가 아니라면 선뜻 손에 들기는 어려울 듯싶고, 그런 사정은 나도 마찬가지다. 마침 공역자인 이한구 교수의 소개글이 있기에 대략적인 어림만 해둔다. 러시아문학 강의자료를 찾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서 읽은 기사다.    

 

교수신문(09. 12. 29) 파르메니데스는 서양철학사의 K2봉이다  

이 책은 칼 포퍼의 The World of Parmenides: Essays on the Presocratic Enlightment(ed. Arne F. Petersen. London&New york: Routledge. 1998)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칼 포퍼가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해 쓴 열 편의 논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논문이 이 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도 함께 논의 하고 있다.

열 편의 논문 중에서 ‘논문7: 불변자에 대한 탐구를 넘어서‘가 가장 길고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포퍼의 해석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헤라클레이토스(모든 것은 변화한다. everything changes)와 파르메니데스(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 nothing changes)가 현대 과학에서 화해되고 결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말하자면, 이 논문은 현대의 물리학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만물유전 속에서 파르메니데스적인 불변자를 추구한다는 교설을 주장한다.

플라톤이 서양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에 비유한다면, 파르메니데스는 K2봉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K2봉은 히말라야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보다는 낮은 두 번째 봉우리이지만, 등반하기는 에베레스트보다도 힘든 봉우리이다. 히말라야 산맥이 자랑하는 8천미터 이상의 14개 봉우리 중에서 가장 험난한 봉우리이다. 산악인들은 보통 히말라야 등반의 가장 마지막에 K2봉을 오르며, K2봉을 올라야 히말라야를 오른 것으로 평가된다. 파르메니데스를 히말라야의 K2봉에 비유한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그만큼 어려우면서, 파르메니데스를 충분히 이해한 연후에야 서양철학의 진수를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시는 제일 앞부분의 서시와 두 영역으로 나누어지는 본시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첫째 부분은 진리의 길이고, 두 번째 부분은 의견의 길, 추측의 길이다. 서시에서는 파르메니데스가 기쁨에 차서 여신을 찾아 여행길에 오르는 모습과 여신의 친절한 환영을 기술한다. 그 다음에 진리의 길이 전개된다. 여기서 여신은 앎에 관한 이론과 실재 세계에 관한 이론을 파르메니데스에게 가르쳐 주는 데,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는 너무나도 놀랍고 충격적이다.  

ⅰ)있는 것만이 있다. ⅱ)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 ⅲ)어떤 빈 공간도 있을 수 없다. ⅳ)세계는 꽉차있다. ⅴ)세계는 꽉차있기 때문에 운동이 존재하기 위한 어떤 여지도 없다. ⅵ)운동과 변화는 불가능하다. 

파르메니데스에 관해 논하면서 포퍼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던진다.
1)파르메니데스는 왜 반감각주의적 주장을 펼쳤는가.
2)파르메니데스의 명백한 시대착오적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실재세계와 환상의 세계간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포퍼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해 현대 물리학과 수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적어도 세가지 항구적인 공로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ⅰ)그는 논증과 관련하여 연역적 방법의 발명가였고, 우리가 가설연역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의 발명가였다.
ⅱ)그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의 출발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강조는 에너지나 운동량 보존의 법칙과 같은 탐구를 이끌었다.
ⅲ)그는 물질의 연속성 이론을 주장하는 우주론학파의 최초의 제창자이다. 물질이론에서 원자론 학파와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있는 이 학파는 슈뢰딩거에 이르기까지 물질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극히 효과적이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 ‘존재’라는 말은 86번 등장한다. 그는 철학사상 최초로 존재를 철학의 중심주제로 등장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의 후예인 게오르크 헤겔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파르메니데스를 해석하는 대표적인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우주론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의 길이다. 전자의 길은 칼 포퍼가 대변하고, 후자의 길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대표한다. 이들이 갈라진 결정적인 이유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철학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반해, 하이데거는 자연의 존재를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자 했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근대의 자연과학은 다르다고 본다.

포퍼의 이 책은 파르메니데스를 존재론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주론으로 해석하는 새롭고 탁월한 시각을 보여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일관되게 해결하고, 파르메니데스가 오늘날까지 우주론에 끼치고 있는 엄청난 영향을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이한구 성균관대·철학)   

10. 01. 04.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10-01-04 08:56   좋아요 0 | URL
저서는 생각을 담는 곳이며 번역은 생각을 연결시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새해에도 좋은 번역서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로쟈 2010-01-04 23:54   좋아요 0 | URL
네, 독서가들의 즐거움이란 게 별것 아니죠.^^

이네파벨 2010-01-04 11:12   좋아요 0 | URL
파르메니데스....
이 생소한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따지고 보면 유일하게 접한 것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죠.

파르메니데스는 세상 모든 것이 대립된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빛-어둠, 섬세-난삽, 따뜻함-차가움, 존재-비존재 등........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어떤 것이 양일까? 무거운 것이? 아니면 가벼운 것이?

(그렇담...파르메니데스는 동양의 음양철학과도 닿아있다는 얘기??ㅎㅎㅎ)

아무튼.쿤대라의 이 소설과 사랑에 빠졌던 저에게....파르메니데스는..이 소설의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메시지를 대표하는...손에 잡히지 않는....아름다운 비밀 세계로 통하는 문과 같은 느낌으로 기억됩니다....

그렇지만...아마 그 문을 열고 탐험해볼라치면....좌절과 분노만이 저를 기다릴 듯^^ (모든 철학책은 저ㅔ겐 정말이지 난공불락이더군요.)

로쟈 2010-01-04 23:53   좋아요 0 | URL
과학철학도 그러신가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책 많이 소개해주세요.^^

레테 2010-01-04 15:45   좋아요 0 | URL
항상 로쟈님의 서재에 들락날락 거리며, 좋은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맨날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을 남기네요.

화이트헤드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갈파하였지만,
혹자들은 비슷한 시각에서 바로 그 플라톤의 철학이
파르메니데스 철학에 대한 일련의 주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퍼의 이 책은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만으로도
꼭 읽고 싶다는 의욕을 들게 만드네요..

로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_____^

로쟈 2010-01-04 23: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읽으시거든 꼭 정리해주세요.^^

2010-01-04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1840)은 작가가 재판에 붙인 서문으로도 유명한 소설이다. 그는 1841년에 결투로 세상을 떠났다.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 페초린이 결투로 동료인 그루슈니츠키를 죽게 만들지만 정작 현실의 결투에서 사관학교 동창의 총탄에 쓰러진 것은 레르몬토프 자신이었다.

  

스스로도 불행한 인간이자 다른 사람들까지도 불행하게 만든 낭만적 환멸의 주인공 페초린을 두고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고 칭한 데 대해 의견이 분분하자 따로 서문을 붙인 것인데, 특별히 마지막 구절이 유명하다.  

저자는 단지 그가 이해하는 방식대로 이 동시대인을 그려가는 일에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이러한 종류의 인간은 아주 자주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저자의 몫이라면 이 질병의 존재를 알리는 것일 뿐,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는 신만이 아시는 것이다! 

서문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1830-40년대 독자를 겨냥한 것으로 당대 독자들의 오독과 오해를 유감스러워 하는 내용이다.  

우리의 대중은 아직도 너무나 미숙하고 순박하기만 해서, 마지막에 교훈을 찾을 수 없는 우화라면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농담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풍자를 눈치 채지도 못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형편없는 교육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고상한 사교계나 책 속에는 노골적인 욕설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동시대 교육이 보이지는 않지만 더욱 날카롭고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어냈다는 점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이 무기는 아첨하는 척하다가 피해갈 수 없는 지점을 향해 정확한 공격을 날린다.

새로 나온 <우리 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에서 인용했는데, '풍자'라고 옮겨진 것은 원래 '아이러니'이다. 종종 그렇게 번역되지만 나는 '아이러니'는 '아이러니'로 옮겨지는 게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요는 독자들이 농담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이러니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독서 대중을 레르몬토프는 순박한 시골 사람에 비유한다. 

우리의 대중은 마치 전쟁 중인 양 진영으로부터 온 외교 사절들의 대화를 엿듣는 시골 사람과도 같다. 즉, 그들이 서로 간의 연약한 우정을 위해 각자의 정부를 배신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피터 싱어를 인용하면 '당신은 공리주의자로군!'이라고 혀를 차는 현학자의 태도에서 나는 '우리 시대의 조롱'을 본다. 레르몬토프는 자신의 소설에 쏟아진 비판에 이렇게 응수했다.  

불행히도 최근에 이 책은 낱말 그대로의 의미를 믿어 버리는 독자들이나 심지어 잡지들의 질타로 인해 애를 먹었다. 그들 중 몇몇은 '우리 시대의 영웅' 같이 부도덕한 인물을 한 전형으로 제시한 점에 대해 정말로 몹시 화를 냈다. 다른 몇몇은 이 인물이 작가 자신이거나 작가가 아는 다른 사람의 초상일 거라는 애매한 지적만 남겼다... 이 얼마나 낡아 빠지고 가여운 농담이란 말인가! 

타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는 자유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수준의 것만을 본다. 그런 수작에서 '낡아 빠지고 가여운 농담'만을 읽는 것이 나의 수준이고 나의 불행이다...  

10. 01. 03.


댓글(2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0-01-03 1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 2010-01-03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여전히 내 눈에 사람들을 혼란시키는 착한 신부는 '윤리적 소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윤리적인 척 하는 알라딘으로 보이는 걸 어쩌나요. 그리고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윤리적인 척 하는 노무현/김대중 씨는 옹호를 하면서, 윤리적일 것을 주장하는 알라디너들에게는 철퇴를 아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저도 윤리적 소비라는 전략은 효과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때로 맞는 말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로쟈 씨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문제제기를 했던 것은 아니죠. 이 싸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전략이 올바른가의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로쟈씨는 왜 문제제기를 하냐고 문제제기를 했어요. 그리고 그게 제가 불쾌한 이유입니다.

한마디로 너무 거만해요.

로쟈 2010-01-03 22:10   좋아요 0 | URL
"왜 문제제기를 하냐고 문제제기를 했어요"가 핵심인가요? 거만한 독법이 어떤 건지 시범적으로 보여주는군요.

NA 2010-01-03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맑스는 파리 코뮌 대중 봉기가 일어나기 전에 봉기 전략에 대해서 효과적이지 못하며 무모하다는 비판을 했지만, 막상 대중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는 함께 가서 싸웠습니다. 로쟈씨는 확실히 너무 거만하다는 겁니다.

푸하 2010-01-03 21:41   좋아요 0 | URL
으아... 최원님... 저도 님의 견해와 많은 부분 접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상대가 거만하다는 지칭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는 말씀인가요???

최원님은 이번 댓글에서 분명 '글을 통한 실천'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도하시는 바는 분명 '알라딘불매운동'이 효과적이고 그것을 옹호하는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님의 댓글은 알라딘불매운동에 도움이 되려는 의도(맞나요?)와는 정반대의 실천적 효과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상대의 태도가 거만하다고 느껴지시나요? 그래서 싫은 거세요? 그럼 님이 거만하게 이야기하지마시길 바래요. 님의 언급이 다시 '안티로쟈'(저는 단연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의 존재를 많은 분들에게 확증하는 역할을 하게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주장을 하시려거든 최대한 예의바르게 공격성을 눅여서 깔끔하게 이야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물론 아닐때도 있구요.) 지금이 그럴 때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글을 쓰실 때(하다못해 댓글을 다실때) 전략적으로 의도한 바에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쓰시길 바랍니다.

NA 2010-01-03 21:47   좋아요 0 | URL
이 정도의 공격성을 죽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모든 공격성이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어떤 공격성은 필요하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푸하 2010-01-03 22:12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논의를 보셨는지는 모르지만 제가 기억하는 논쟁이 불필요하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억에 의존하여 쓰겠습니다.)당초 로쟈님의 페이퍼에 대한 볼빨간님, 판다님, 정군님 등...이 문제를 제기했지요. 로쟈님의 인터뷰에서 나타난 "불매운동에 대한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는 지칭-표현"순수한 가장"-에 대해 로쟈님에게 댓글로 따져 물었습니다. 더불어 바슈타님(지금은 볼빨간님과 바슈타님이 서재를 접었습니다.)이 페이퍼로 로쟈님에 대한 '강한풍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식의 의문제기가 과도하였는지 로쟈님은 서재를 잠시 쉬신다는 포스트를 올리셨지요. 아마도 그때 남기셨던 포스트의 내용엔 로쟈님이 (이것도 제 기억입니다. 틀릴 수 있지만 쓸께요.) 관망조차 '기회주의'매도되고 로쟈에 대한 격문도 나오니 자숙하는 의미에서 좀 쉬겠습니다.'의 요지로 글을 남기시고 서재를 접으셨지요.

......

제가 파악한 상황을 전제하고
제가 논쟁에서 많이 아쉬웠던 부분은 로쟈님이 평소에는 자신에 대한 '오독'(로쟈님의 관점에서는)에 유연하게 대처하며 로쟈님이 느끼시는 것과 주장을 간단히 핵심만 짚어서잘 이야기 하셨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진술의 참과 거짓을 떠나) 평소처럼 로쟈님은 볼빨간님과 바슈타님 판다님 등에게 자신이 느끼는 것을 잘 이야기 하셨을 수도 있는데 이 때는 과민반응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로쟈님의 반응이 이해가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래 댓글에서도 남아있지만 로쟈님의 인터뷰에 대한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내용과는 다르게 공격성을 담고 있고 또한 재차 하시는 질문들이 마치 취조하듯이 이루어진 감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로쟈님이 그렇게 반응을 보이신 것 같기도 하구요.(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여기서도 로쟈님 정도면 가볍게 넘기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공격성을 드러내는 분은 상대적으로 소수이고, 또 공격성을 드러내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그분들의 주장은 분명 생각하고 논의해야 할 여지가 다분하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로쟈님의 입장에 온전히 설 수 없기 때문에 '안티로쟈'의 존재를 느끼시는 로쟈님의 견해에 반박하기가 어렵습니다만, 나름 알라딘의 공기에 익숙한 한 사람으로서는 저는 '알라딘불매운동'과정에서 로쟈님이나 혹은 다른 블로거들에 대한 무작정 안티, 밑도 끝도 없는 안티는 없거나 매우 적다고 생각합니다.

로쟈님이 자신에 대한 안티가 있다고 주장하는 핵심에 자신을 향한 공격성, 그것이 전제하는 로쟈님에 대한 '오독', 소통불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저는 다르게 생각하지만요.)

이와 같이
제가 파악한 맥락에서 최원님의 '공격성'이 담뿍 담긴 댓글은 로쟈님에게 그리고 지금 알라딘에 안티가 적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실제로 안티가 있음을 '확증'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큽니다. 그러니 댓글을 쓰시려거든 댓글이 파급하게 될 효과나 상황을 고려해서 쓰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파악한 상황이 정답이라고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키릴 2010-01-04 12:26   좋아요 0 | URL
푸하님, 최원님과 로쟈씨가 논쟁하고 있잖습니까. 그걸 좀 지켜보려 했는데, 푸하님이 끼어들어 마치 자신이 불매진영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최원님의 말을 저지하면 어떻게 합니까? 참고로 저는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불매 관련 푸하님의 입장도 매우 모호해 보입니다)입니다만, 최원님이 언급하신 '공격성'에 크게 공감합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이 푸하님이 줄곧 외치는 '예의'에 해당한다고 보십니까? 푸하님이 마치 토론장의 사회자 역할을 하는 꼴이군요.

푸하 2010-01-04 13:51   좋아요 0 | URL
제가 월권(부당하게 사회자처럼 행동한 점)을 했네요.
나중에 로쟈님에 대한 제 생각을 따로 포스팅하려고 했는데 최원님의 글에 대해 쓰다보니 혼재되었네요. 분리해서 쓸수도 있었는데 어찌되었는지 그리 못했어요. 키릴님의 지적 감사합니다.
적절한 방식으로 제 의견을 밝히지 못한점 (로쟈님) 죄송합니다.

키릴님, 키릴님은 최원님의 공격성에 공감하셔서... 그리고 최원님과 로쟈님이 논쟁하려는 상황에서 제가 불매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끼어들어 흐트려놓았다고 저를 비판하시는 건가요? 제가 개입하든 하지 않든 최원님은 본인이 가진 생각대로 계속이야기 하실 수 있는 것이구요. 제 언급은 최원님에 대한 것이고 그걸 수용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최원님의 몫입니다. 행동의 최종 책임은 행동의 당사자가 지지만 그 전에 의견교환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 아닌가요? 그점에서 님의 언급-푸하가 최원님의 말을 저지한다는-은 적절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나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를 제약합니다. 키릴님도 저에게 하는 말씀이 사회자 역할을 하지말라는 언급이기도 하시니까요. 그리고 제가 불매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시는데 그런식으로 글을 쓰진 않았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지닌 생각에 충실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키릴님도 제 입장이 모호하다고 말씀하셨잖아요. .... 다른 이야기이지만 입장이 모호한 것은 나쁜 것인가요?

2010-01-03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3 2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phie 2010-01-04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도 아이러니라고 번역한 것이 더 이해하기가 쉽네요. 서문에 나온 유명한 구절도 흥미롭고요. 어설픈 해법을 찾으려다 작품성이 떨어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 꼽아놔야겠네요. 그런데 어째 러시아에서 쓸만한 작가는 다 결투로 목숨을 잃는 것 같네요... 거 참.

로쟈 2010-01-04 23:55   좋아요 0 | URL
푸슈킨과 레르몬토프가 대표적인데, 그 다음엔 다행히도 드뭅니다.^^

빵가게재습격 2010-01-05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거실바닥에 붙여놓은 껌을 낑낑거리며 떼고는, 눈내리는 출근길도 조금 걱정하며, 소박하게 새해인사도 드릴겸해서 서재에 들렸다가...이런, 깜짝 놀랐습니다. 태풍이 지나가는 것 같네요.-너무 소심한가요?^^- '알라딘 불매 운동'에 관련되어 이렇게 놀라운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모든 논란을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불만감을 털어 놓으시는 분들의 출발지점에 그리 큰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민주적인 가치를 옹호해 왔던 로쟈님의 이 무덤덤한 반응(혹은 약간의 빈정같은?)이라니' 정도 아닐까요.-그 문제는 로쟈님이 이미 답하셨고, 저도 그 답변에 공감합니다.- 그것에 '안티로쟈'나 '6년간의 블로거 생활로 무슨 덕을 쌓은 것인지 심각하게 회의' 하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순이 있다면 해소되겠죠. 의지가 필요하겠지만요. 새해 인사를 하러 와서 엉뚱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건강하셔야 합니다.^^

로쟈 2010-01-04 23:57   좋아요 0 | URL
정치적 입장은 마치 최종심급처럼 인간을 규정하는 것 같습니다. 자초지종은 저도 적었지만 본의 아니게 무슨 원흉처럼 돼버려서 씁쓸하네요...
 
로쟈님께

피터 싱어의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산책자, 2009) 인용을 놓고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접했다. '전업 블로거'가 아닌 나로서는 모든 이견에 답하고 해명할 여유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간단하게 보충 설명을 해본다. 내가 이해하는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대해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사례를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로만 환원하게 되면 사안은 단순하다. "매일 수천 명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을 사는 데 돈을 쓴다. 이것은 부도덕한 일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책임을 져야 할까?"가 싱어의 문제의식이고, 그는 적정 수준의 이타심을 발휘함으로써, 구체적으론 기부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얼마간 '책임'을 떠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의의 많은 부분은 그 '적정 수준'을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지에 할애된다.   

대략 그 정도의 주장이라면 별로 새로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다. 우리의 도덕적 직관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바지가 젖고 지각하는 것 정도의 '비용'으로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윤리적 행위란 게 '참 쉽죠'라고 말할 수 있다(불매운동도 바지가 젖는 걸 감수하는 것 정도에 비유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연못에 빠진 아이 구하기'가 아니라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아이 구하기'나 '철로에 떨어진 아이 구하기'라면 사정은 좀 달라진다(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분도 계실 테지만, 양의 다소나 일의 경중에 대한 판단은 기본 판단이다). 이런 경우엔 계상되는 '비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선택'의 문제가 대두된다. 특히나 문제적인 것은 그러한 선택이 제로섬 상황에서의 선택일 경우다(이 글 또한 다른 원고를 써야 할 시간을 빚내서 쓰고 있다).  

싱어는 <이 시대에 윤리적으로 살아가기>(철학과현실사, 2008)에서 윤리적 선택/결정의 표준적 모델로서 '활차의 문제'를 소개한다. 그의 공리주의적 윤리학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기에 참고해볼 만하다. '활차의 문제'의 표준형과 그 변형은 각각 이렇다.  

<표준형> 당신이 활차를 발견하였을 때 활차는 선로를 따라 다섯 명을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당신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철도 선로 옆에 서 있다. 만약 선로를 따라 활차가 계속 돌진할 경우 다섯 명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다. 이러한 다섯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활차가 옆 선로로 이동하도록 전철기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경우 활차는 오직 한 명의 목숨만을 앗아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변형> 활차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선로 근처에 서 있지 않고 선로 위의 인도교에 서 있다. 당신은 활차를 다른 선로로 이동시키지 못한다. 당신은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다리에서 활차 앞으로 뛰어내려 자신을 희생할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이 활차를 멈추기에는 너무 체중이 가벼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당신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몸무게가 매우 많이 나가는 사람이다. 활차가 다섯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은 몸무게 많이 나가는 모르는 사람을 활차 앞으로 밀어서 떨어뜨리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서 떨어뜨린다면 그는 죽게 되겠지만 다른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다소 억지스런 상황 설정이지만,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사례라고 하니까 각각의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답해보시길. 조사에 따르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두 가지 상황에 대해서 다르게 판단한다고 한다. 표준형에서는 비록 한 사람을 죽게 만들더라도 전철기를 움직여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는 반면에, 변형에서는 비록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람을 밀어 떨어뜨려 죽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를 요약하면 우리는 '선로상에서 전철기를 움직여서 모르는 사람의 죽음을 야기하는 관념'과 '우리의 손으로 누군가를 밀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관념'에 대해 서로  다른 정서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뇌 활동 부위에 대한 fMRI 영상 촬영을 통해서도 확증되었다. 이 반응 차이는 어째서 생겨났을까? 싱어의 설명은 이렇다.     

인도교의 경우 우리가 진화하고 있던 무한히 긴 시간 동안 있었을 법한 유형의 상황이다. 반면, 표준적인 활차의 경우는 오직 지난 세기 혹은 두 세기 동안에나 가능했던 누군가의 죽음을 초래하는 방식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물려받은 형태의 정서 반응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런데 오직 200년 전에야 가능했던 방식보다는 100만년 전에 가능했던 방식으로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도덕적인 중요성을 부과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답할 것이다. 

싱어의 공리주의적 입장은 단호하게 한 사람의 목숨보다 다섯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이 더 윤리적이라고 본다(이러한 윤리이론에 대한 강력한 도전은 나치 수용소에서 두 아이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했던 '소피의 선택'이다). 그러한 윤리적 판단이 계산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이 그의 실천윤리학을 떠받치고 있는 토대다(윤리적 판단의 계산가능성). 그리고 그러한 윤리의 실천은 인간의 진화적 본성 혹은 도덕적 직관과 때로 충돌할 수 있지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 또한 그의 핵심적인 주장이다(이 때문에 낙태와 안락사를 옹호하는 그의 입장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특히 독일에서는 그의 강연이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모든 사람을 돕는 게 되는 상황'(넌제로섬)인지, '한 사람을 돕는 것이 다른 사람에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선택적 상황'(제로섬)인지 판단해볼 필요가 있다. 싱어를 참조하자면, 이러한 판단에 우리의 도덕적 직관은 절대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 알라딘 불매운동이 단순하게 '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도움을 주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면 사안은 단순하다. 김종호씨 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은 그런 관점에서 가능할 수 있다. 알라딘 대신에 교보나 예스에서, 혹은 동네서점에서 구입하는 것, 혹은 아예 책을 구입하지 않는 것을 '바지 젖는 것'을 감수하는 선의의 행동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의 문제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부당해고가 불법행위라면 당사자가 법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듣기에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았다고 하는데, 어떤 법적 구제/ 보호가 가능한지 나로선 알지 못한다. 구두로 알라딘의 인사담당자가 '장기근무'를 약속했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면 이 또한 얼마만큼의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 당사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공개적으로 항의했기 때문에 대부분 묻혀진 다른 사건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다. 적어도 김종호씨는 이 사건에서 사회적 약자이지만 '말하는 주체'로서 행동했다. 외로운 투쟁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투쟁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그럴 능력도 갖추고 있다.  

알라딘측 해명은 3월과 9월 신학기 특수 때문에 한시적으로 인력 수요가 발생하며 이 때문에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적시 인력 수급이 어려워 인력 도급업체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고, 이것이 인터넷서점에서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 그러한 임시직 고용이 불가피하다면 문제는 그 사실(근무조건)을 피고용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거나 속인 것이다. 법적이건 도의적이건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알라딘측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어떤 방식으로 책임을 지느냐에 대해선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담당자나 대표가 이런 사정과 함께 개선의지를 밝혔다. 내가 '관망'이라고 표현한 건 그런 의사 표명이 앞으로 어떻게 이행될지 지켜보자는 것이었다. 그건 당장 올 3월 신학기가 되면 알 수 있을 터이다. 불매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그 이상의 구체적이고 확실한 조처를 요구하는 듯한데, 그것이 더 효과적인 방식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다른 예이지만, 지난해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은 나름의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지 못했다. 불매운동의 가장 심각한 타격을 소위 진보언론이라는 한겨레와 경향이 떠안게 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론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하지만 좋은 뜻으로 벌인 일이니까 결과는 할 수 없는 노릇일까? 뒤집어 말하면, 불매운동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이 아닐까? 광고 비중이 너무 큰 언론시장에서 바람직한 변화라면 광고의 비중을 약화시키고 대신에 구독자 비중는 늘리는 것이었을 터이다. 대안언론으로서 구독자 중심의 진보언론을 우리가 갖기 위해서는 신문 구독료가 최소 2-3배에서 최대 10배까지도 인상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런 비용을 부담할 용의가 있는가?       

한 대학신문의 대담 자리에서 불매운동에 대한 불만을 피력했지만, 나는 그런 견해를 노골적으로 밝히진 않았다. 그것은 나의 사적인 의견으로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대담의 모든 내용이 기사회되진 않는다. 그리고 나는 불매운동이 급진좌파적 포지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건 다른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상식적이지만, 불매운동은 리버럴한 포지션에 더 가깝다). 때문에 그 기사를 옮겨오면서 필자의 확인을 받지 않은 기사에 대해 우회적으로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그래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하지만 내친 김에 나의 '다른 생각'을 조금 더 분명히 해두고 싶다.  

무엇이 불매운동의 성공일까? 알라딘이 '악덕기업'으로 낙인 찍히고 불매운동 가담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알라딘이 손실을 더이상 감당하지 못해 백기를 드는 것일 테다. 그렇게 '알라딘 길들이기'가 성공한다면? 알라딘은 한 사람의 해고자도 없이 모든 직원이 정규직화되는 '이상적 기업'이 될 수도 있겠다(인간의 얼굴을 한 알라딘!). 인심을 쓰는 김에 임금도 동종 업계에선 최고 수준으로 대우해주기로 하자. 하지만 그 비용은? 조유식 대표가 사재를 다 털어서 마련해야 할까? 그것만으론 턱도 없을 터이고, 아마도 매출이 지금 두 배 정도 된다는 예스만큼 늘어나거나 그 이상이 돼야 할 터이다. 그건 거꾸로 우리가 현재의 두 배 이상 알라딘에서 책을 구매할 용의가 있느냐를 묻는 것과 같다.  

그게 다소 무리하다면, 현행 10%의 신간 할인율을 포기하고 정가대로 책을 구매할 의사가 우리에게 있는가? 그러니까 공정무역과 윤리적 소비 운동이 대개 그런 것처럼 다른 서점보다 더 비싸더라도 알라딘에서 구매할 용의가 있는가? 그렇게만 하더라도 마진률이 상당히 좋아질 것이고(내가 알기로 알라딘은 후발업체라서 출판사로부터 예스보다 2% 정도 더 높은 가격에 공급받는다), 직원들의 고용안정과 복지에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알라딘측과 이용자(알라딘너) 간에 대타협 같은 것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그 가능성에 대해선 물론 낙관하기 어렵다). '불매'라는 부정적 인센티브 대신에 긍정적 인센티브를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거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 현재로선 책을 두 배 더 구입하기 어렵지만, 10% 할인을 포기하고 구입할 용의는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나의 포지션은 불매운동에 반대한다기보다는 불매운동이 불충분하며 좋은 결과를 낳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그건 바람이 완력을 발휘했지만 나그네의 옷을 벗기지 못한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리고 덧붙이자면, 나는 알라디너로서, 꾸준히 플래티넘을 유지하고 있는 알라딘 고객으로서 나 스스로도 이번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느낀다. 그동안 할인 가격에 당일배송 등 알라딘의 서비스가 좋아지는 만큼 근무자들의 노동조건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더라도 이제 와서 "알라딘, 어떻게 그럴 수 있니?"라고 정색하긴 어렵다. "예스나 교보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알라딘은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우습다. 내가 '순수한 가장'이란 말로 가리키고 싶었던 뜻이다.  

나는 잔소리 듣는 걸 싫어하지만 남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도 어색한 상황을 만들기보다는 그냥 결별을 선택하는 편이다. 오래 참지만 미련은 두지 않는다. 나는 알라딘과 결별할 수순까지는 아직 아니라고 본다. 불매운동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알라딘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어느 만큼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 1/10 정도면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단, 그 경우엔 우리가 '바지가 젖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을 부담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로쟈님 문제'가 불거지는 바람에 두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나는 그래도 '파워 블로거'라는 사실. 방문자수가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 말고 내가 느끼는 '파워'는 추상적이었다. 한데 이번 일로 '안티 로쟈' 전선까지 생기는 걸 보고서, 또 거기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은 걸 보고서 비로소 그 '파워'란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게 다 '빛 좋은 개살구'라는 것. 그렇잖은가. 공연한 오해와 적대감도 만만찮으니 내가 6년간의 블로거 생활로 무슨 덕을 쌓은 것인지 심각하게 회의할 수밖에 없다. nobam님은 이렇게 적었다.  

보통 책 좀 읽었다 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가 부닥친 현실에서는 갈피를 못 잡는 모습을 많이 봅니다. 게다가 자기 사회적 위치에 대한 강박이나 뭐라도 써야 된다는 압박감 때문에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을 엉뚱하게 적용하여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가 많습니다.(...) 로쟈님의 이번 글을 읽다 보니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계시고 논리적으로도 너무 망가져 있는 게 눈에 띕니다.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저 사태와 동떨어진 푸념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중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갈피를 못 잡"고 헤매다 "빈축을 사는 딱한 경우"이고, "많이 위축되어" 있는 데다가 "논리적으로 너무 망가져 있는" 한심한 모습이 지금의 '로쟈'다. 그런 '로쟈의 푸념'을 한번 더 늘어놓는다. 짐작에, 이번엔 '입원가료 요망'이란 글들이 올라오지 않을까... 

10. 01. 02. 

P.S. 새해엔 알라딘 서재에 노출되지 않게 하겠다고 했지만, 이번 글은 '응답'의 성격이어서 예외로 해둔다...


댓글(14) 먼댓글(1)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로쟈님께 2
    from nobami 2010-01-02 19:52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별로 없으니 간단하게 쓰지요. 피터 싱어가 공리주의적 입장(공리주의적 근본주의라고 해야 할지)에 대한 부분은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거칠게 '한 명을 구하기보다는 다섯 명을 구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피터 싱어의 경우를 이번 사태에 적용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과연 이 상황이 제로섬 게임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로쟈님께서는 현재 알라딘 불매운동이 제로섬 상황
 
 
비로그인 2010-01-0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합니다. 저는 사실 책을 그리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고 피터 싱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아닙니다. 따라서 피터 싱어가 단호히 한 사람보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옳다라는 입장을 가진 학자라는 것은 로쟈님의 말씀이 옳으시겠지요, 하지만 로쟈님은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관해서는 잘 설명해주셨지만 본인이 인용하신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의 일부분이 왜곡되어 해석되었다는 제 의문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인용하신 부분 가운데 "하지만, 생각해보자. 국제아동기금 자료를 보면, 매년 거의 1천만 명에 달하는 5세 이하의 아동이 빈곤 때문에 죽는다." 라는 부분의 '하지만'은 앞의 간략한 사례에 비추어 우리는 당연히 위협에 처한 아이를 돕는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당연한 윤리적 의무를 너무나 간단히 도외시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빈곤으로 죽어가고 있다, 라는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로쟈님의 해석은 좀 다른 듯 합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피터 싱어의 윤리학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아, 기우에서 하나 덧붙입니다. 제 페이퍼를 안티 로쟈 공작의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하하. 제가 로쟈님의 페이퍼를 읽고 든 감정은 그냥 '의아함'이었으니까요.

로쟈 2010-01-03 14:21   좋아요 0 | URL
해석 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안티 로쟈'는 아니시라면 다행입니다.^^;

yoonta 2010-01-02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어보니 두 분 다 맞는 듯해요. 로쟈님은 물에 빠진 열 명의 아이를 구하는게 물에 빠진 한 명의 아이를 구하는 것이 한 명의 아이를 구하는것과 동일한 기회비용이 든다면 전자를 하는것이 낫다는 싱어의 윤리를 설명하기 위해 위 구절을 인용하신 것 같고(불매운동사례에 소급시켜보면 김종호씨 개인을 위한 불매운동을 경계한다는 의미겠지요. 싱어의 책에서는 물에빠진 한명과 열명을 비교하진 않네요) 님은 책의 문맥에서는 싱어의 물에 빠진 한 아이 사례는 구두 한 켤레 사는 비용이면 한 아이 생명을 구할수있는 "물에빠진 아이상황"에서는 당연히 나서면서 왜 비슷한 비용을 들여 저개발국가의 보다 많은 아이들을 위한 기부에 나서지 않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사례로 싱어가 그것을 예로 든 것이 아닌가 하는 것 같아요. 책의 문맥상 괴물님의 이해가 맞는 것 같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로쟈님 식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딱히 틀린것 같지도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싱어는 동일한 비용이 들었을때 최대한 다수에게 돌아가는 윤리에 대해서 말하고있으니까요.

로쟈 2010-01-03 14:22   좋아요 0 | URL
사실 싱어의 주장은 시혜적 차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현실적'이긴 하지만, '기만적'이기도 합니다...

마태우스 2010-01-02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가 누구든간에 비난을 들어먹을 때, 서재질을 확 때려치우고 싶어지지요.
저도 몇번이나 그런 적이 있었습니다.
"이딴 애한테 이딴 말 듣고 이짓을 계속해야 돼?"라는 생각이 마구 들었어요.
그때마다 전 '서재는 인생과 같다. 다시 태어날 수 없다'며 스스로를 달랬습니다.
하지만 서재를 인생과 같다고 보는 대신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 없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탈퇴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너무도 쉽게 서재를 그만둘 수 있지요.
로쟈님이야 어딜 가셔도 잘 사시겠지만,
저같이 배움에 목마른 중생들을 위해 이곳에 계셔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님을 공격하는 소위 '안티로쟈'들이 알라딘 마을의 주요 멤버들은 아니잖습니까?
그분들이 원하는 게 알라딘이 문을 닫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매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드는 걸 님을 공격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계속 응답을 해봤자 끝이 없을 듯하니,
이제 하시고 싶은 일을 하시길 권해 드립니다.

2010-01-0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01-02 23:48   좋아요 0 | URL
마태우스님.
마태우스님의 이와 같은 감정적인 발언이 서재 동네를 감정싸움으로 몰고 가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로쟈님에 대한 의견을 한꺼번에 '안티로쟈'라 지칭하는 표현도 지나치십니다. 또한 '알라딘 마을의 주요 멤버'라는 표현도 도대체 근거가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서재에서 눈에 띄게 잘 놀던 사람들을 '주요 멤버'라 지칭한다면, 말없이 알라딘에 좋은 콘텐츠를 보태주고 있거나 가끔이라도 나타나 좋은 말 해주는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알라딘이 그렇게 배타적인 공간이었던가요.
'불매운동의 불씨가 사그라드는 걸 님을 공격함으로써 만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불매운동 폄하 발언에 해당되십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요. 이렇게 서로를 폄하하고 배격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 과연 로쟈님에게 도움이 된다고 보시는지요. 제가 불매운동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이 댓글 역시 마태우스님께 감정적으로 시비 거는 걸로 생각하실까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만. 저는 알라디너들 간에 감정싸움 나는 게 가장 피곤하고 괴로운 사람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마태우스 2010-01-04 13:50   좋아요 0 | URL
blackone님, 님은 제 분류에의하면 주요멤버가 아닙니다. 궁금해하시기에 답변드립니다

꼼미 2010-01-03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글보다는 이번 글이 훨씬 더 명료하고 로쟈님의 의견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특히, "'불매'라는 부정적 인센티브 대신에 긍정적 인센티브를 통해서 변화를 유도하는 거라면 나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의사가 있다. 현재로선 책을 두 배 더 구입하기 어렵지만, 10% 할인을 포기하고 구입할 용의는 있다는 말이다"란 입장표명을 일찍 분명히 밝히신 후에 다른 이야기들을 해왔다면 어땠을까('기둥 뒤에 공간 있어요..'처럼 이미 수십번 말씀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예를 들어 로쟈님과 알라딘과 관계) 되면 한번에 내치기 어려운게 사람살이인 것 같습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부르조아의 한계니 계급성의 문제니 하는 걸 논하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겠지요. 로쟈님 책에 그런 말이 있던데, 러시아도 우리나라도 '적이 분명했던 시대에 드러나지 않았던 진보진영간의 차이가 시대가 변하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알력과 갈등들이 불거지는 거다' 이번 알라딘내 논쟁을 보면서 그 말이 떠오르더군요. 그 속에서도 길은 찾아야 하는 거니까. 로쟈님이 계속 고민하고 의견을 밝히는 모습 전 좋습니다.

꼼미 2010-01-03 04:32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마음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만, 그냥 해오시던 대로 들어오는 사람들 누구나 읽을 수 있게 하면 어떠신가요. 로쟈님도 알라딘도 글을 읽는 누구라도 부대끼며 조금씩 더 성숙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로쟈 2010-01-03 14:23   좋아요 0 | URL
당분간은 '조용히' 지내는 게 좋을 듯해서요.^^;

바밤바 2010-01-0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에 나오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고사가 생각나네요.
로쟈님은 지금 '덕'을 쌓은게 맞는지 고민하시는 듯 보이네요.
헌데 이렇듯 로쟈님을 아끼는 사람이 많으니 '덕'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듯 합니다.
계속 좋은 글 써주세요.^^ 화이팅이요!

로쟈 2010-01-03 14:2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네, 덕과 함께 부덕도 쌓은 듯해요.^^;

2010-01-03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올라오는 것인데, 2010년 출간예정 학술서의 트렌드를 미리 짚어보는 기사를 교수신문에서 옮겨놓는다. 관심저자들의 국내서들도 꽤 포함돼 있어서 기대가 된다.    

교수신문(09. 12. 29) 2010년 출간예정 학술서, 트렌드를 읽는다

2010년 경인년이다. 지난해 한국 출판계가 그 어느 때보다 불황에 苦戰했다면, 올해는 정체의 늪에서 벗어나는 전환점이 될 수 있을까. 출판계의 약진을 바라는 마음은, 이들 출판사들이 한국 학술서 생산기지 역할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외형적 규모보다 이들이 펴내는 양질의 도서가 한국 지성사회에 어느정도 영향을 미치는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0년 출간예정 학술서, 트렌드를 읽는다’를 준비하면서 출판사로부터 건네받은 자료를 보면, 여전히 의욕적이고, 담론의 생산과 유통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 출판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2009년 출간예정 계획을 훌쩍 넘겨버린 ‘이월 리스트’들 역시 꽤 많았는데, 이는 경기한파 속에 학술출판이 살얼음판을 걷고 있음을 거듭 확인해준다.

큰 그림을 그려보자. 2010년 올해 학술출판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역시 국내 저술보다 해외 저작들의 번역이 많다. 특히 일본 저작들이 꾸준히 번역되고 있다. 정치지리학으로부터 공간의 정치학, 공간의 사상사를 읽어내는 미즈우치 도시오 편 『공간의 정치지리』(심정보, 푸른길, 1월)가 곧 선보인다.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박유하, 3월)이 전면적인 개정 작업을 마친 정본판으로 재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 인터뷰를 수록한 『정치를 말하다』(조영일, 3월), 데리다에 관한 독창적 연구서인 아즈마 히로키의 『존재론적, 우편적』(조영일, 5월) 등이 도서출판b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일본의 역사의식을 해부한 역사비판서인 미야지마 히로시의 『일본의 역사의식 비판』(창비, 3월), 돈황 연구 입문서로 평가받는 나가사와 가즈토시의 『돈황의 역사와 문화』(민병훈, 사계절, 3월), 국민국가의 주권, 민주주의 문제를 조명한 우카이 사토시의 『주권의 너머에서』(신지영, 그린비, 3월)등이 흥미로울 것 같다. 

둘째, 번역서라 하더라도 특정 저자의 저작이 압도적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그렇다. 『불청객: 전쟁[원제는 Umbr(a): War]』(강수영, 인간사랑, 3월), 『이웃』( 정혁연, 도서출판b, 2월. 케네스 레이너드, 에릭 L.샌트너, 슬라보예 지젝이 정치신학에 관해 나눈 세 편의 에세이를 수록한 책) 『나눌 수 없는 잔여』(이재환, 도서출판b, 4월), 『지젝과의 대화』(주은우, 한울, 4월), 『처음은 비극으로 다음은 희극으로』(김성호, 창비, 5월),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쓴 『오페라의 두 번째 죽음』(이성민, 민음사) 등이 독자들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번역서 가운데 관심이 쏠릴 수 있는 부분은 프레드릭 제임슨의 『정치적 무의식』(이경덕, 민음사)이다. 난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이 책이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하다. 이와 함께 제임슨이 세계 여러 명사들과 나눈 대담을 엮은 『프레데릭 제임슨 대담집』(신현욱·안수진, 창비, 12월)도 곁들여 읽을 수 있다.

꾸준히 번역되고 있는 해외 저자들에는 펠릭스 가타리(『미시정치』, 윤수종, 도서출판b, 1월), 크리스 하먼(『부르주아 경제학의 위기』, 이정구, 책갈피, 1월. 『자본주의의 광기』, 심인숙, 책갈피, 1월.『마르크수주의 경제 위기론』, 이정구, 책갈피, 5월), 제임스 밀러(『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김만권, 개마고원, 2월), 폴 드 만(『독서의 알레고리』, 이창남, 문학과지성사, 2월), 에드먼드 버크(『숭고와 미의 관념』, 김혜련, 한길사, 3월), 테리 이글턴(『이론 이후』, 이재원, 길, 3월), 한나 아렌트(『맨 인 다크 타임즈』, 홍원표, 인간사랑, 3월), 울리히 벡(『글로벌 위험사회』, 박미애·이진우, 길, 4월.『세계화시대의 권력과 반대권력』, 홍찬숙, 길, 5월), 칼 폴라니(『인간의 살림살이』, 이병천, 후마니타스), 지그문트 바우만(『공포와 불안전』, 한상석, 후마니타스) 등이 보인다.

전집과 선집 출간 활발
셋째, 전집과 선집 간행이 눈에 띈다. 먼저 국내 저술을 보자. 국내 최초로 번역되는 초정 박제가의 전집 『정유각집(상·중·하)(정민 외, 돌베개)이 기대된다. 역사학자 이우성의 저작이 전8권으로 소개될 예정이다(『이우성 저작집』, 창비, 1월). 작고한 서동만 상지대 교수가 저술한 북한관계 논문집도 『서동만 저작집』(창비, 4월)으로 출간된다. 이 범주에는 회고록도 포함할 수 있는데, 『강만길 회고록』(강만길, 창비, 2월) 등이 예정돼 있다.

선집의 경우, 해외 저술 번역이 활발하다. 우선 『다케우치 요시미 선집』(윤여일 편역, 소명출판, 4월)과 이와나미의 ‘1920~30년대 근대일본의 문화사 시리즈’ 번역(『근대 지의 성립』,『감성의 근대』, 『편성되는 내셔널리즘』, 『총력전하의 지와 제도』, 『감정, 기억, 전쟁』)이 한국 독자를 찾아온다. 일본 대역사건의 주인공 고토쿠 슈스이의 삶과 글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고토쿠 슈스이 선집』(임경화, 돌베개)도 눈에 띈다.

넷째, 인문사회과학 고전들의 강세다. 역시 출판사들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고전’ 번역이다. 독일 역사학자 마이네케의 주저 『국가권력의 이념사』(이광주, 한길사, 1월)가 곧 나올 태세다. 사회심리학의 창시자인 J.허버트 미드의 『정신, 자아, 사회』(나은영, 한길사, 2월)도 예고돼 있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김덕영, 길, 2월)은 지난해 하반기에 출간을 예고했지만, 역자가 현지 독일에서 스승과 동료, 후배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좀더 완벽한 편집 작업을 하느라 늦어졌다. 책 분량은 700쪽이다(문예출판사판이 300여쪽이다). 레이몽 부동의 『사회변동과 사회학』(민문홍, 한길사, 3월) 역시 지난해 출간돼야 했지만 해를 넘긴 책이다. 이미 수차례 번역본이 출간됐어도 여전히 매력의 대상이 되는 박지원의 『열하일기』(심경호, 한길사, 6월)도 새 단장을 하고 있다. 120개가 넘는 역사 기본 개념을 정리한 코젤렉의 명저 『개념사 사전(전5권)』(한림과학원, 푸른역사, 6월)도 지적 갈증을 채워줄 것이다. 만프레드 슈미트의 『독일 정치사』(최재한·이선희, 후마니타스), 하이데거의 『사유의 경험으로부터』(신상희, 길, 6월) 등도 예정돼 있다.  

다섯째, 국내 저자들의 내공이 뒷받침된 학술 교양서의 확대다. ‘선비’의 DNA를 되살릴 것을 주문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의 선비문화』(지식산업사, 1월)는 지난해말 출간된 김기현 전남대 교수의 『선비』(민음사)와 겹쳐 읽을 수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수행해 온 현실 재해석 작업을 평가한 다소 도발적인 책 『더러운 직업, 철학』(김진석, 개마고원, 1월), 미국 외교사를 전천후로 훑어낸 『제국의 길-미국 외교의 역사』(권용립, 삼인, 1월), 백제의 사회사와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고찰한 『백제 사회사상사』(노중국, 지식산업사, 2월)도 눈길을 끈다.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화가들의 작품 세계를 분석, 프루스트의 예술을 조명한 『예술가의 시선』(유예진, 현암사, 3월), 라캉이 미술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했는지를 다룬 『라캉과 미술』(조선령, 경성대출판부, 3월), 조선시대 사진의 도입과 사진가들의 이야기를 다큐식으로 구성하고 근대풍경을 담은 『사진의 시대』(최인진·강응천, 학고재, 4월)도 출간을 앞두고 있다.  

특히 강신준 동아대 교수의 번역본 『자본2, 3』(길, 4월)이 출간됨으로써 마르크스의 대작 『자본』이 전 5권으로 완간된다. 임지현·백영서 등 한국 지식인을 인터뷰해 90년대 이후 한국 인문학의 지형과 지식인 문화를 고찰한 『세기말 한국 인문학의 지각변동』(김항·이혜령 외, 그린비, 4월), 『서양의 기원-인문정신의 힘』(김헌·안재원, 길, 5월)도 국내 저자들의 분투를 기대할 수 있는 책이다. 데리다와 들뢰즈의 사상을 비교 분석한 『데리다와 들뢰즈』(김상환, 창비, 7월), 1948년 분단체제와 1987년 두 체제를 분석한 『분단체제와 87년체제』(김종엽, 창비, 10월)도 지적인 고민이 기대된다.

국내 저술, 내공 늘고 주제 확대돼
한국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세계사적 흐름을 진단한 저술도 빠트릴 수 없다. 한국 사회의 임노동 현장을 탐사함으로써 임금이 얼마나 노동자의 일에 대해 공정하게 보상되고 있는지를 밝힌 『한국의 노동시장과 임금』(신광영 외, 한울, 2월), 한국자본주의의 병리현상을 진단하면서 대안을 모색한 『한국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서동진, 창비, 5월),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의 문제를 진단한 『금융세계화, 자본주의 모델 그리고 한국경제』(전창환, 후마니타스), 브라질의 신자유주의와 노동 운동을 주목한 『브라질 신자유주의와 노동운동 그리고 룰라』(조돈문, 후마니타스)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난해 관심을 끌었던 공화제논의는 올해 어떻게 반영될까. 공화제 논의는 『공화국을 위하여』(조승래, 길, 1월)와 『공화주의와 정치이론』(존 메이너·세실 라보르드 외 9인 지음, 곽준혁·조계원·홍승헌 옮김, 까치, 1월)에 스며들어 있다. 조승래의 책은 공화주의의 역사적 유래와 변천과정에 주목했다. 곽준혁 등의 번역서는 공화주의 정치이론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책으로, 공화주의의 역사적 가치, 개념적 일관성, 규범적 제안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이다.

한일강제병합 100주년을 성찰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할 것으로 보이는 책도 있다. 『그들이 꿈꾼 나라』(박찬승·최규진, 돌베개)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이들이 주체적으로 구상하고 준비했던 근대 국가의 모습을 정리하는 책이다. 중세 왕조로의 회귀가 아닌 자주적 근대 국민 국가를 꿈꿨던 이들의 비전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대한제국흥망사』(서영희, 돌베개)는 고종시기에 관한그간의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고 대한제국기에 관한 종합적인 상을 그려냄으로써, 병합 전후의 역사적 맥락을 제시하려 한다. 이 문맥 안에서 강제병합을 짚어낸다는 발상이다.(최익현 기자) 



09. 12. 31.


댓글(2) 먼댓글(1)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2010년의 출판시장 키워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1-22 20:30 
    이번주 한겨레21의 별책부록으로 실린 글을 옮겨놓는다. 아직 지면으론는 보지 못했는데, 2010년의 인문출판 트렌드에 관한 글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한데 지면 구성을 보니 초점은 '트렌드'가 아니라 '키워드'였다. 인문서부터 자기계발서까지 2010년의 '출판시장 키워드' 다섯 가지를 꼽고 있는데, 결과적으론 '역사와 그 반복'이 내가 고른 키워드가 되었다. 다른 필자들과 달리 출간예정 리스트를 잔뜩 나열한 건 이미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리스트를 알고 있
 
 
L.SHIN 2010-01-01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다행이다.
맛있는 책들에 대한 소개가 아니구나.

베토벤 2010-01-02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크리, 친족의 기본구조, 앙띠외디푸스(재번역)는 아직도 요원한 것인가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