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라님의 "불매운동과 지젝"

과민반응은 오히려 로쟈님이 아닐까요? 먼저 반칙을 했잖우. 관망한다고 해 놓고 왜 중대신문*한겨레21*경향신문 같은 공식매체에 불매에 관한 폄하를 하고 다니는 걸까요? 불매운동 하시는 분들이 로쟈님의 관망을 존중했어요. 먼저 이 룰을 어기고 선빵치고 나간 사람은 로쟈님이오. 공식매체에 부정적인 의견을 개진한 로쟈님께 제대로 된 해명을 해라, 사과를 요구해도 대답 대신 엉뚱한 글을 퍼와 논점을 흐리고 안티니, 뭐니 씨부렁거리는 사람이 바로 로쟈씨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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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님의 "우리 시대의 조롱"

푸하님, 최원님과 로쟈씨가 논쟁하고 있잖습니까. 그걸 좀 지켜보려 했는데, 푸하님이 끼어들어 마치 자신이 불매진영을 대표하는 사람처럼 최원님의 말을 저지하면 어떻게 합니까? 참고로 저는 불매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불매 관련 푸하님의 입장도 매우 모호해 보입니다)입니다만, 최원님이 언급하신 '공격성'에 크게 공감합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이 푸하님이 줄곧 외치는 '예의'에 해당한다고 보십니까? 푸하님이 마치 토론장의 사회자 역할을 하는 꼴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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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스모커님의 "로쟈님앞 < 전상서> "

스모커님의 의견에 절대 공감합니다. 제가 로쟈님에게 공개질의를 하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스모커님께서 이미 완료해 주셨군요. 언젠가 로쟈님은 용산 참사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람이 불타면, 사람이 어이없이 죽으면, 사람들은 자기가 그 사람이 아닌 것을 다행으로만 여길 것이다. 그러고는 내일이라도 자신이 그 사람이 될까봐 저마다 몸서리치며 잠자리에 누울 것이다. 그것을 정의라고, 평화라고 부르는 세상이 올 것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3263609) 이것은 로쟈님의 어떤 포지셔닝일까요? 이 발언은 정의에 대한 로쟈님의 역설(?)로 미화될 순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로쟈님 자신의 내면심리를 정직하게 표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산 참사에 대해 얼마나 말하기 좋습니까? 로쟈님의 발언은 이미 다 끝난 싸움에 그 자신도 숟가락 하나 더 얹겠다는 심사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언제나 사태가 끝난 뒤에야 경찰이 달려와서 말합니다. 정의는 바로 서야 한다고. 목숨을 버리고 싸운 사람들은 그냥 뻘줌히 서 있거나 심한 상처로 괴로워할 뿐이죠. 로쟈님이 진정 지식인이라면 불매 운동자들에 대한 비난은 삼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이 무엇입니까? 고등교육 받았다고, 책이나 좀 읽었다고 지식인 됩니까? 최소한 지식인이라면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정의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연구하며 사회에 다시 정의의 목소리를 환원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김 모 씨 사태에서는 로쟈님 스스로 김 모씨 사태에 대해 고민조차 없었다는 정황이 드러납니다. 사회의 고통에 대해 고민조차 하지 않은 사람이 김종호 씨 사태에 대해선 시급할 것 없다 단정 짓고, 불매 운동 측에 대해 순수한 가장이라느니, 떠들고 있어요. 또 어떤 분껜 법대로 하면 될 것 아니냐고 되레 따지더군요. 이때 저도 로쟈님 서재에 들어가려다 보니, 벌써 서재 문을 닫았더군요. 로쟈님의 발언에 대해 불매 운동 당사자들은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묻고, 발언자 로쟈님 또한 반드시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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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

알라딘에서 책을 사지 않앗기 때문에

나는 불매선언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좀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다.

떠나간 두 사람(?)에게 쏟아지는 비난이 합당한 것일까.

불매운동에 지쳐 나가떨어졌다면 그렇게 만든 상황과 사람들이 분명 있다.

이 두 사람은 탈퇴하더라도 분명 끝까지 김 모씨와 함께 한다고 선언했던 걸로 기억한다.

알라디너 A님은 

함께 불매운동하면서 불매자 두 사람이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각을 세웠던(가?) 사람들과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눈다. 

볼썽사납다.  

내가 보기엔 떠난 사람에 대한, 떠나게 만든 원인을 본인이 제공했던 것 같다. 

거리낄 게 없나보다.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나 무섭다. 

최근 벌어진 이번 사태의 원인제공자가 ㄹ님 같은데, 

그 분 스스로도 예의를 저버리는 행위 를 한 듯하다. 

사회적 발언을 했으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질 일이다.

유명한 파워블로거 ㅂ님은 

자신도 불매를 선언하고 사람들을 모았으면서 

떠나간 사람들을 비난하는 

알라디너의 글에 동감한다며 맞장구를 치고 있다. 

그것이 예의를 운운한 사람들의 예의인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결국 떠난 두 사람은 불매선언자들의 피로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고 떠난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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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도시에 정착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불량배와 가장 하층민들이 자리잡은 그 지역을 피했다 - 아무 특징도 배경도 없는, 도덕적 찌꺼기, 그런 하루살이 공동체에서 태어난 열등한 인종들. 그러나 일진이 나쁜 날, 도덕적으로 해이해지는 시간에는, 몇몇 시내 사람들이 반쯤은 우연히 그 의심스러운 구역으로 용기를 내어 들어와 보곤 했다. 가장 고결한 사람들조차 자발적인 타락, 위계 질서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 친구 관계의 얕은 진흙탕에 젖어드는 것, 손쉽게 사귀고, 더러운 사람들과 섞이는 일의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도덕을 저버린 그런 사람들에게 그 구역은 이상향이었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수상하고 불분명해 보였고, 모든 것이 비밀스러운 눈짓, 냉소적으로 과장된 몸짓, 치켜올린 눈썹으로 깨끗하지 못한 소망을 충족시킬 것을 보장했으며, 모든 것이 가장 하위의 본능을 족쇄에서 풀어놓는 것을 도왔다.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구역의 특이한 성격을 알아챘다. 그것은 치명적일 정도로 색깔이 없다는 점이다. 그 싸구려의, 빠르게 자라나는 지역은 그렇게 호화스러운 것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흑백 사진처럼, 아니면 싸구려 그림이 그려진 카탈로그처럼 회색이었다. 이런 유사성은 은유적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가끔 그곳을 돌아다닐 때면, 실제로 설계 취지서를 넘기고 있는 듯한, 혹은 수상한 안내문이 의심스러운 공지사항과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그림과 함께 사이사이에 기생충처럼 둥지를 틀고 있는 지루한 상업 광고의 칼럼을 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다닌 것은 포르노 사진 앨범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느끼는 흥분과 마찬가지로 아무 소득이 없고 무의미하다고 판명되는 것이다.(
p.113-114)

 

 우리의 언어에는 말하자면 현실의 등급을 재거나, 그 유연성을 정의할 단어가 없다. 대충 말해 보도록 하자. 그 지역의 불운이란 그곳에서는 아무 것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 아무 것도 엄밀한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몸짓은 공중에서 멈추고, 동작은 완성되기 전에 지쳐버리고 어떤 무중력의 지점을 극복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의도와 계획과 예상이 매우 화려하고 풍부하다는 것은 알아챘는데, 그것은 그 지역의 특징 중 하나이다. 그것은 사실 미성숙한 채 벌어져 무기력하고 공허하게 발효하는 욕망일 뿐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쉬운 분위기에서는, 변덕조차 거창해지고, 스쳐 가는 흥분도 부풀어올라 텅 빈 기생 생명이 된다. 그것은 복슬복슬한 잡초, 악몽과 대마초의 무게 없는 옷감으로 짜여진 싹을 틔워 나아가는 무색 양귀비의 옅은 회색 식물들이다. 지역 전체에 게으르고 방탕한 죄악의 냄새가 떠돌고, 집과 가게와 사람들은 가끔 열 오른 몸의 떨림, 열병이 든 꿈의 소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곳만큼 확실한 실현을 앞둔 즐거움에 창백해지고 현기증이 난 채, 가능성에 위협받고, 욕구의 충족이 너무 가까워서 동요되는 곳도 없다. 그리고 그것이 최대 한도이다.
 긴장의 어떤 한도를 넘어서면, 밀물은 멈추고 썰물이 되며, 분위기는 불투명하고 혼란스러워지고, 가능성은 엷어지고 공허하게 사라지며, 황홀경의 회색 양귀비들은 재가 되어 흩어진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약간 수상스러운 그 양장점을 나왔다는 사실을 언제나 후회할 것이다. 다시는 도로 찾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점의 간판에서 간판으로 돌아다니며 수천 번이나 실수할 것이다. 스무 개나 되는 가게들을 들어가 보고, 비슷한 곳을 찾아낼 것이다. 책으로 가득한 책장에서 책장으로 돌아다니고, 잡지와 인쇄물을 뒤적이고, 오랫동안 친근하게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화장도 피부색도 너무 짙은 젊은 여성과 의논하겠지만 그녀는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불필요한 노력을 하고 무익하게 추구하면서 모든 열기와 흥분이 사라질 때까지 수많은 오해를 받을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잘못된 것이었고, 건물과 점원의 수상쩍은 외양은 사기였으며, 옷감은 진짜 옷감이었고 판매원은 아무런 숨은 의도도 없었다.  악어 거리의 여자들은, 도덕적 편견과 평범한 진부함의 두꺼운 층에 숨이 막힌 채, 그저 조금쯤 타락했을 뿐이다. 인간을 재료로 한 그 싸구려 도시에서는 어떤 본능도 피어날 수 없고, 어떤 어둡고 유별난 열정도 깨어나지 못한다.
 악어 거리는 현대성과 도심의 타락에 우리 도시가 손을 들었다는 증거였다. 분명히 우리는 허물어져 가는 작년 신문에서 오려낸 그림 조각들을 잘라 붙인 종이 모형 외에는 더 좋은 것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p.125-126)

 









브루노 슐츠, [계피색 가게들] <악어 거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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