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출간된 책들 가운데 하나는 칼 포퍼의 <파르메니데스의 세계>(영림카디널, 2009)이다. '만물유전'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와 비교하여 흔히 '만물부동'을 제창한 고대철학자로 알려진 이가 파르메니데스다. 짐작에 포퍼의 책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가장 자세한 파르메니데스 철학의 소개 논문을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전공자가 아니라면 선뜻 손에 들기는 어려울 듯싶고, 그런 사정은 나도 마찬가지다. 마침 공역자인 이한구 교수의 소개글이 있기에 대략적인 어림만 해둔다. 러시아문학 강의자료를 찾다가 잠시 한눈을 팔면서 읽은 기사다.    

 

교수신문(09. 12. 29) 파르메니데스는 서양철학사의 K2봉이다  

이 책은 칼 포퍼의 The World of Parmenides: Essays on the Presocratic Enlightment(ed. Arne F. Petersen. London&New york: Routledge. 1998)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칼 포퍼가 파르메니데스를 중심으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에 관해 쓴 열 편의 논문과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관한 논문이 이 책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크세노파네스와 헤라클레이토스도 함께 논의 하고 있다.

열 편의 논문 중에서 ‘논문7: 불변자에 대한 탐구를 넘어서‘가 가장 길고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포퍼의 해석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논문은 헤라클레이토스(모든 것은 변화한다. everything changes)와 파르메니데스(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 nothing changes)가 현대 과학에서 화해되고 결합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이다. 말하자면, 이 논문은 현대의 물리학이 헤라클레이토스적인 만물유전 속에서 파르메니데스적인 불변자를 추구한다는 교설을 주장한다.

플라톤이 서양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에 비유한다면, 파르메니데스는 K2봉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K2봉은 히말라야의 최고봉 에베레스트보다는 낮은 두 번째 봉우리이지만, 등반하기는 에베레스트보다도 힘든 봉우리이다. 히말라야 산맥이 자랑하는 8천미터 이상의 14개 봉우리 중에서 가장 험난한 봉우리이다. 산악인들은 보통 히말라야 등반의 가장 마지막에 K2봉을 오르며, K2봉을 올라야 히말라야를 오른 것으로 평가된다. 파르메니데스를 히말라야의 K2봉에 비유한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그만큼 어려우면서, 파르메니데스를 충분히 이해한 연후에야 서양철학의 진수를 맛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의 시는 제일 앞부분의 서시와 두 영역으로 나누어지는 본시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첫째 부분은 진리의 길이고, 두 번째 부분은 의견의 길, 추측의 길이다. 서시에서는 파르메니데스가 기쁨에 차서 여신을 찾아 여행길에 오르는 모습과 여신의 친절한 환영을 기술한다. 그 다음에 진리의 길이 전개된다. 여기서 여신은 앎에 관한 이론과 실재 세계에 관한 이론을 파르메니데스에게 가르쳐 주는 데,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는 너무나도 놀랍고 충격적이다.  

ⅰ)있는 것만이 있다. ⅱ)없는 것은 있을 수 없다. ⅲ)어떤 빈 공간도 있을 수 없다. ⅳ)세계는 꽉차있다. ⅴ)세계는 꽉차있기 때문에 운동이 존재하기 위한 어떤 여지도 없다. ⅵ)운동과 변화는 불가능하다. 

파르메니데스에 관해 논하면서 포퍼는 다음과 같은 물음들을 던진다.
1)파르메니데스는 왜 반감각주의적 주장을 펼쳤는가.
2)파르메니데스의 명백한 시대착오적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실재세계와 환상의 세계간의 상호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포퍼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해 현대 물리학과 수학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적어도 세가지 항구적인 공로를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ⅰ)그는 논증과 관련하여 연역적 방법의 발명가였고, 우리가 가설연역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방법의 발명가였다.
ⅱ)그는 변화하지 않는 것을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설명의 출발점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강조는 에너지나 운동량 보존의 법칙과 같은 탐구를 이끌었다.
ⅲ)그는 물질의 연속성 이론을 주장하는 우주론학파의 최초의 제창자이다. 물질이론에서 원자론 학파와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있는 이 학파는 슈뢰딩거에 이르기까지 물질구조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지극히 효과적이었다.

파르메니데스의 시에서 ‘존재’라는 말은 86번 등장한다. 그는 철학사상 최초로 존재를 철학의 중심주제로 등장시켰다. 어떤 의미에서 파르메니데스의 후예인 게오르크 헤겔은 ‘고유한 의미에서의 철학은 파르메니데스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파르메니데스를 해석하는 대표적인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우주론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론의 길이다. 전자의 길은 칼 포퍼가 대변하고, 후자의 길은 마르틴 하이데거가 대표한다. 이들이 갈라진 결정적인 이유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 견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포퍼는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과 근대의 자연철학이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 반해, 하이데거는 자연의 존재를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자 했던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자연을 지배하고자 하는 근대의 자연과학은 다르다고 본다.

포퍼의 이 책은 파르메니데스를 존재론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주론으로 해석하는 새롭고 탁월한 시각을 보여주며, 그렇게 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에 대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일관되게 해결하고, 파르메니데스가 오늘날까지 우주론에 끼치고 있는 엄청난 영향을 극명하게 설명해 준다.(이한구 성균관대·철학)   

10. 0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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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04 08:56   좋아요 0 | URL
저서는 생각을 담는 곳이며 번역은 생각을 연결시키는 것이라 했습니다.
새해에도 좋은 번역서들이 나왔으면 합니다.

로쟈 2010-01-04 23:54   좋아요 0 | URL
네, 독서가들의 즐거움이란 게 별것 아니죠.^^

이네파벨 2010-01-04 11:12   좋아요 0 | URL
파르메니데스....
이 생소한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이(따지고 보면 유일하게 접한 것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죠.

파르메니데스는 세상 모든 것이 대립된 쌍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보았다. 빛-어둠, 섬세-난삽, 따뜻함-차가움, 존재-비존재 등........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어떤 것이 양일까? 무거운 것이? 아니면 가벼운 것이?

(그렇담...파르메니데스는 동양의 음양철학과도 닿아있다는 얘기??ㅎㅎㅎ)

아무튼.쿤대라의 이 소설과 사랑에 빠졌던 저에게....파르메니데스는..이 소설의 모호하고 신비스러운 메시지를 대표하는...손에 잡히지 않는....아름다운 비밀 세계로 통하는 문과 같은 느낌으로 기억됩니다....

그렇지만...아마 그 문을 열고 탐험해볼라치면....좌절과 분노만이 저를 기다릴 듯^^ (모든 철학책은 저ㅔ겐 정말이지 난공불락이더군요.)

로쟈 2010-01-04 23:53   좋아요 0 | URL
과학철학도 그러신가요?^^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좋은 책 많이 소개해주세요.^^

레테 2010-01-04 15:45   좋아요 0 | URL
항상 로쟈님의 서재에 들락날락 거리며, 좋은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맨날 눈팅만 하다가 처음으로 글을 남기네요.

화이트헤드는 '유럽의 철학적 전통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갈파하였지만,
혹자들은 비슷한 시각에서 바로 그 플라톤의 철학이
파르메니데스 철학에 대한 일련의 주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퍼의 이 책은 그것이 다루고 있는 주제만으로도
꼭 읽고 싶다는 의욕을 들게 만드네요..

로쟈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기대하겠습니다.
^_____^

로쟈 2010-01-04 23: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읽으시거든 꼭 정리해주세요.^^

2010-01-04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04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