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의 '문화와 세상' 칼럼을 옮겨놓는다. 새벽녘에야 구상을 해서 낮에 써보낸 원고인데, 마침 폭설이 내렸기에 아귀를 맞추었다. 칼럼의 제목도 그렇게 나갔다. 원고를 보내고 아이와 30분 동안 눈사람을 만들어보려고 애쎴지만, 어찌된 일인지 잘 뭉쳐지지 않았다. 눈의 성분도 예전과는 다른 모양이다.
경향신문(10. 01. 05)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포틀래치’라는 게 있다. 북미 원주민의 말로 ‘선물’이란 뜻인데, 보통은 선물을 주면서 크게 벌인 잔치를 가리킨다. 많은 손님을 초대해 생선과 고기, 모피와 담요 따위를 나누어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과시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또 더 큰 포틀래치를 열어서 자기도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어야 했다.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면 예의에 어긋날뿐더러 선물을 준 사람에게 예속된다는 걸 뜻하기에 과도한 잔치를 경쟁적으로 벌였다고도 한다.
선물 교환양식이긴 하지만, 포틀래치는 선물이나 교환과 구별된다. 선물은 정의상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관대한 행위이다. 반면에 교환은 반드시 뭔가를 반대급부로 기대하면서 주는 호혜적 행위이다. 포틀래치는 이 두 가지 행위의 교집합 같다. 즉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발적으로 한 턱을 내는 것이지만 동시에 받는 쪽에서도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한 턱을 내야만 한다. ‘자발적 의무’를 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철학자 지젝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인류학자 모스는 이 수수께끼 같은 교환방식 속에서 뭔가 신비로운 것이 순환한다고 보았다. 레비 스트로스는 그 핵심을 호혜적 교환 자체에서 찾았다.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상호교환의 의미라고 했다. 사회학자 부르디외까지 가세해서는 포틀래치의 핵심이 선물과 답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이라고 주장했다. 적당한 간격이 있어야지만 대칭적인 두 행동이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누군가 선물을 받은 즉시 상대방에게 답례를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선물을 거절한다는 인상을 줄 테니까. 모욕적인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포틀래치는 호혜적 교환처럼 비치면 안된다.
교환의 호혜성은 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까? 또 다른 인류학자 살린스에 의하면, 교환은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며 받은 대로 되갚는 보복의 논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각각의 선물주기는 자유롭고 자발적인 척해야 한다. 그것이 포틀래치라는 선물경제의 특징이라면, 이와 대조적인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다. 화폐를 매개로 한 등가교환 말이다. 거기엔 관대함도 베풂의 호의도 관여하지 않는다. 선물이 주인의 행위이고 포틀래치가 주인들 사이의 행위라면, 교환은 노예에게 속하는 행위이다.
오래 전 일화가 떠오른다. 대학 1학년생이던 나는 서울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한 달에 한 번씩 지방의 부모님께 다녀오곤 했다. 하루는 늦은 저녁 그렇게 돌아오던 길에 세탁소에 들렀다. 양복 상의에 떨어진 단추를 달기 위해서였다. 세탁소 주인이 특이한 요구라는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는 동안 나는 이 품값을 어떻게 치러야 할까 꽤 고민했다. ‘무상의 호의’일 수도 있는 일을 두고 “얼마예요?”라고 묻는 것은 너무 무례한 일인 듯싶었다. 결국 옷을 받아들고 엉거주춤하게 목례를 하고 나서려다가 그냥 가느냐는 타박을 받았다. 품값으로 500원을 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속내를 말하진 못했다. 대신 나의 짧은 생각을 자책했고, ‘서울 인심’에 대한 씁쓸함을 곱씹었다. 그런 등가교환을 통해서 그날 세탁소 주인과 나는 서로에게 노예처럼 행동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호의를 베푸는 대신에 노동을 했고 나는 고마운 마음 대신에 돈을 지불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돈이 모든 걸 대신할 수 있는 세상은 노예들의 세상이다. 무상으로 내린 폭설이 반갑다.
10. 01. 04.


P.S. 포틀래치에 대해서는 이상의 책들을 참고했다. 물론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지젝의 정리이다. 한데, 지젝이 말하는 선물경제의 주인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것 없이 받는 사람을 가리킨다. 짧은 글에 그런 내막까지 자세히 적을 수는 없어서 약간 비튼 결과가 됐지만, 또 비튼 대로 말은 통하는 듯싶다. 저녁에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기행 첫 강의를 하러 외출했다가 들어왔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강의실 분위기도 좋았고 귀가길도 무난했다. 폭설이 내린 날 치고는 뒷끝이 좋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