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내내 강의와 서평 원고에 매달리다 보니 말 그대로 '부지하세월'이다. 딱히 그런 사정 때문은 아니지만 어제는 큼직한 탁상용 달력을 얻어다 책상맡에 놓았다. 알라딘 달력이 있지만 작년의 고급스런 달력에 비하면 너무 볼품이 없고 일정을 적어두기에는 바탕색도 너무 어두워서 갖다버리려고 한다(아이러니컬하지만, 작년 달력은 사진들이 너무 좋아서 모셔두고 있다!). 원고를 쓰다가 간간이 읽은 기사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뉴레프트리뷰>(길, 2009)에 실린 데이비드 하비의 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정리해주고 있다(책은 지난주에 나왔지만 판권면에는 발행일자가 작년 12월 31일로 돼 있다).  

    

한겨레(10. 01. 21) 도시는 꿈꾼다…‘착한 개발’의 꿈을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니 창조는 파괴를, 건설은 폐허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폭력과 추방과 강탈의 잔혹극이다. 대체 생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도시의 재개발 폭력은 왜 끝없이 재연되는가. 이 강탈과 축적의 악무한적 연쇄를 끊어낼 대안적 도시화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자본의 한계> 등의 저작으로 친숙한 데이비드 하비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이번주 출간된 <뉴레프트리뷰> 한국어판(2호)의 ‘도시에 대한 권리’란 글에서 이 문제를 짚었다.  

그가 볼 때 도시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시킨 결과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도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형성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이 투입된 생산물에 대해 권리를 갖듯 그들이 만든 삶의 터전인 도시에 대해서도 권리를 갖는데, 하비에 따르면 그것은 “도시를 변화시키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권리”다.

문제는 오늘날의 도시화가 자본주의적 잉여의 생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도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과잉축적의 위기를 공간의 부단한 생산과 파괴를 통해 잠정적으로 해소하는 공간이기 때문인데, 이런 사실은 자본주의 도시화의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제2제정기 조르주 외젠 오스만(1809~1891)이 주도한 파리 개조다. 당시 오스만의 작업은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잉여자본과 실업 상태의 노동력을 흡수하는 한편, 도처에 소비와 쾌락의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노동계급의 급진적 열망을 잠재우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시공간의 개조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하비는 오스만의 파리 개조가 “새로운 신용과 금융체계를 마련해 타인자본을 조달함으로써 도시의 기반설비를 개선하는 가장 원초적인 케인스주의 체계를 구축했다”고 평가한다.  



이 오스만 모델은 1940년대 미국의 대도시에서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다. 당시 미국은 과잉축적의 산물인 잉여자본과 노동력이 세계대전의 특수 덕에 일시적으로 해소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엔 상황을 낙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그들에게 오스만의 선례는 축복이었다. 신용규제를 풀어 유휴자본이 도시공간에 투입되게 함으로써 전후 자본주의를 전지구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도시 개조는 1990년대 다시 한번 경제의 핵심적인 안정화 기제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부동산시장은 도심과 교외주택, 사무빌딩 등을 건축하면서 막대한 잉여자본을 흡수했고, 이를 다시 첨단 금융기법(부채의 증권화)과 결합시켜 소비재·서비스 부문의 소비를 폭발적으로 확대시켰다. 이런 도시화는 세계적 현상이었다. 뭄바이, 서울, 볼티모어, 요하네스버그, 타이베이, 모스크바, 두바이 등 세계 곳곳의 대도시가 거센 건설붐에 휩싸였다. 이런 ‘글로벌 오스만주의’는 대중들에 대한 순치라는 또다른 효과를 낳았다.

“재산가치를 지키는 일이 최대의 정치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최신 부티크와 쇼핑몰, 안온한 커피매장이 선사하는 신기루 같은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도시공간의 재구조화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파괴와 건설이, 인간적 삶의 확보가 아닌 잉여자본의 흡수라는 체제 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한,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린 자들의 저항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갈등과 폭력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사회운동은 어떤 요구를 내걸어야 하는가. 하비는 “잉여의 생산과 활용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확립”을 제안한다. 도시화가 잉여를 해소하는 주요 통로이므로, 그 잉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민주적 관리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희망적인 것은 세계 각지에서 야만적 도시화에 저항하는 사회운동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비는 이 투쟁들을 단일한 전선으로 결집하기 위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실천 슬로건이자 정치적 이상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엔 물론 ‘강탈에 의한 축적’의 배후에 자리잡은 세계화된 금융자본과의 투쟁 역시 포함된다.  

책에는 이밖에도 미셸 아글리에타, 마이크 데이비스, 프레드릭 제임슨 등 ‘좌파 석학’들의 예리한 현실진단이 담긴 16편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피터 고언과 수전 왓킨스의 글들 역시 핵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이세영 기자) 

10. 01. 22.  

P.S. 개인적으론 나도 어제 <뉴레프트리뷰> 제2권에 대한 서평을 써서 보냈다. 하비의 글은 아직 읽지 못했고, 내가 초점은 맞춘 건 주로 NPT에 관한 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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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23 09:37   좋아요 0 | URL
최근 정부는 행정구역 개편 추진으로 도시(지역 간) 통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개조 및 개보수와 합병은 인구 100만을 기준으로 광역도시권을 만드는 작업인데요. 전 정부의 마스트플랜을 뒤엎은 세종시 문제도 생각해볼만 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TV속의 도시'는 희망을 꿈꾸게 하지만 그 도시속에 들어가 보면 인간성과 관계의 틀은 여전합니다. 미국 정보국이(?) 취하는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개의 계란을 깨뜨려야 한다'는 고전적인 논리는 어느 도시 공간에도 유효한 듯합니다.
 
레르몬토프의 고독

아트앤스터디의 러시아문학 강의에서 어제(라고는 하지만 몇 시간 전이다)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민음사, 2009)을 다루었다. 책이 절판되어서 한동안 다루지 못하다가 작년 가을에 새 번역판이 나온 덕분에 강의 커리에 포함시키고 있고, 어제는 두 번째 강의였다(아무래도 푸슈킨보다는 입에 덜 익었다). 내가 강조한 건 소설의 주인공 페초린이 자의식을 가진 근대적 개인의 원형이라는 점이다(레르몬토프가 없었다면 도스토예프스키 문학도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실 레르몬토프(1814-1841)는 내가 20대 시절에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가장 좋아한 작가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곧 늙어가면서 그의 고독과 낭만적 환멸에 얼마간 거리를 두게 됐지만, 엊그제 안나 게르만의 목소리로 레르몬토프의 시 '나 홀로 길을 나선다'에 곡을 붙인 노래를 들으려니까 다시금 뭔가 아련한 감상 같은 것에 젖게 되었다(http://www.youtube.com/watch?v=Bl9VDbRwOxo). 그녀의 노래는 국내에서 언젠가 TV드라마의 주제가로도 쓰인 적이 있다. 오랜만에 찾아보니 <우리시대의 영웅>의 새 영화 버전도 유튜브에는 올라와 있다(영화는 1966년판, 1975년판, 2006년판 등이 있다). 겸사겸사 어제 강의 자료의 일부와 함께 이미지들을 올려놓는다. 아래 자료는 박사학위논문의 일부이기도 한데(학위논문인지라 말은 좀 어렵게 써놓았다), 논문은 올 하반기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푸슈킨이 결정적인 장면에서 오네긴과 작별을 고하는 데 반해서, 레르몬토프는 그의 분신적 형상인 페초린과 보다 긴밀한 유대를 보여준다. 이것은 그가 1인칭 시점하에 페초린의 내밀한 언어로 보다 밀착된 페초린의 형상을 묘사하고 있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레르몬토프는 <우리시대의 영웅>(1840)에서 (남편에 대한 지조를 맹세한 타치야나와는 달리) 남편에게 페초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떠나가 버린  베라를 (벼락을 맞은 듯이 서 있던 오네긴과는 달리) 있는 힘을 다해 뒤쫓아 가는 페초린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일 내 말이 10분만 더 달릴 힘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그마한 계곡에서 올라와 산에서 벗어나 가파른 모퉁이에 이르자, 말은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뛰어내려, 말을 일으키려고 고삐를 잡아당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겨우 들릴 듯한 신음소리가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몇 분 후에 말은 숨을 거두었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린 채 홀로 초원에 남았다. 걸어서 가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낮의 불안감과 간밤의 불면 때문에 기진맥진한 나는 축축한 풀밭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어린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민음사판으론 217쪽) 

그렇게 울기 시작한 페초린은 한참동안 통곡을 하며, 그의 성격을 특징짓는 ‘의연함’과 ‘냉정함’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리고 만다. 즉 인용한 대목에서는 페초린의 가장 약한 모습이, 그의 ‘성격갑옷’이 일시적으로 제거된 채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본모습이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어린아이’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 요구는 현실에서 좌절되기 마련이며, 이에 대한 정서적인 상관물이 어린아이 같은 울음이다. 그것은 페초린 자신이 곧 자인하듯이, 대타자의 시선으로 볼 때에는 경멸적으로 외면할 만한 모습이다. 때문에 평소의 페초린이라면, 철저하게 가장했을 터인데, 이 문제의 장면에서는 그것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 

여기서 페초린 자신의 분신이자 그의 신체의 연장(extension)으로서의 말은 가파른 모퉁이에서 쓰러지는데(이 말이 쓰러지자 페초린은 더 걷지 못한다), 모퉁이란 두 공간이 서로 이접되는 지점을 말한다. 그것은 시간의 모퉁이, 즉 전환점에서 시간이 이접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간축 상의 전환점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계와 상징계의 이접이다. 그것은 어린아이와 (예비)어른의 경계이다. 하지만, 페초린의 ‘어린아이’는 이러한 상징계적 차이의 질서를 수용하지 못하며/않으며 상상계적 자아상에만 집착한다.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왜소함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 연후에만, 전능함에 대한 자신의 꿈을 단념한 연후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요구에는 이러한 인정/단념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는 전부에 대한 요구를 계속적으로 고집하며 불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우리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은 바로 그러한 ‘어린아이’이며, 그런 점에서 작가 레르몬토프의 형상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페초린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억압돼 있으며, 카프카즈에서 ‘아버지’를 대신하는 인물인 막심 막시므이치는 너무 나약한 권위의 ‘아버지’인데(페초린에게 권위적인 아버지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타만>에서의 얀코가 유일한다), 이것은 레르몬토프적 상황과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레르몬토프적 상황이란 것은 2자적 관계에서 동일시의 대상이었던 ‘어머니’를 상실하고 3자적 관계에서 그가 이상적-자아로서 지향해야 할 ‘아버지’는 약화/결여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낳은 원인은 어머니의 이른 죽음이기도 했고, 너무 이른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부부간의 불화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러한 결과로 그는 상상계와의 이접 이후에 상징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제대로 할당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선 ‘상징적 아버지’를 ‘상상적 아버지’와 궁극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팔루스적인 어머니’ 혹은 ‘남근을-가진-어머니’가 대신한다.  

‘남근을-가진-어머니’란, 성교 중에 아버지의 음경을 ‘잘라내어’ 자기 것으로 만든 어머니, 혹은 아버지로부터 팔루스의 상징을 ‘거세’한 어머니이다. 레르몬토프에게서 이러한 팔루스적인 어머니상과 일치하는 것은 외조모 아르세니예바 부인이다. 이러한 어머니상은 자신 속에 ‘나’를 다시 집어넣은, ‘나’를 다시 흡수한, 그래서 ‘나’를 자신의 팔루스로, 혹은 무(無)로 환원시켜버리는 ‘어머니’이며, 그것은 행복과 죽음의 현혹이다. 이에 대한 레르몬토프적인 공포는 페초린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반영돼 있다. 그에게 결혼이란 말은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는데, 불가피한 결혼에 대한 연상은 모든 열정에 종말을 가져오며, 그의 마음을 돌처럼 굳어버리게 만든다. <공작의 딸 메리>에서의 그의 고백을 직접 들어보자.  

나는 이 결혼만 아니라면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 스무 번이라도 내 생명을, 심지어 명예까지도 내기에 걸겠다... 하지만 나의 자유는 팔아넘길 수 없다. 무엇 때문에 나는 그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가? 그 속에 있는 무엇이 내게 필요하단 말인가? 나는 무엇이 되려는가? 나는 미래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사실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이것은 어떤 타고난 공포이며 설명할 수 없는 예감이다. 거미나 바퀴벌레나 쥐들을 본능적으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고백해야할까?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한 노파가 어머니에게 나의 대한 점을 쳐준 일이 있다. 그때 노파는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고 내게 예언했다. 그 말은 나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나의 마음에는 결혼에 대한 극복하기 힘든 혐오감이 생겨났다... 그러는 사이에 뭔가가 노파의 예언이 실현될 거라고 내게 말해주곤 한다. 적어도 나는 그것이 늦춰지도록 노력할 것이다.(민음사판으론 186-7쪽)

여기서 페초린은 자신의 결혼에 대한 공포에 대해서 두 가지 이유를 댄다. 하나는 사람들이 거미나 바퀴벌레, 쥐를 무서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타고난 공포’라는 것이고, ‘악한 아내 때문에 죽게 될 것’이라는 점쟁이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하지만, 결혼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란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각인될 수 없는 것이며, 이 ‘타고난 공포’는 노파의 예언 때문이라는 두 번째 이유와 양립되지 않는다. 또한 노파의 예언이 두려워서 결혼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됐다는 것도 사실 <운명론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보는 페초린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순적인 것이다. 페초린적인 태도는 결혼이 두려워서 회피하기보다는 정말로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가를 확인해 보기 위해서 결혼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나보코프는 페초린의 죽음이 페르시아에서 돌아오는 도중의 불행한 결혼과 연관되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이 두 가지 이유는 페초린의 제2의 본성(second nature)으로서 결혼에 대한 공포의 직접적인 원인을 가장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에게서 억압되어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란 무엇일까? 레르몬토프의 전기와 관련하여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남근을-가진-어머니’에 대한 공포, 즉 거세 공포이다. ‘본능적으로’란 말은 현대적인 관점에선 ‘무의식적으로’란 의미인데, 거미나 바퀴벌레 등 다리가 많은 동물들의 무의식적인 상징 또한 거세공포이다(다리가 많은 것은 자신의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까라는 불안 심리의 반영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으로서 ‘남근을-가진-어머니’는 자궁회귀본능의 대상이 되는 어머니와는 다른 어머니이며, 이 ‘팔루스적인 어머니’로의 회귀가 ‘어린아이’로서는 죽음에의 현혹이면서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페초린의 경우에 노파의 예언이 실제로 있었다면, 그것은 이 거세 공포에 대한 상징적인 명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노파의 예언은 그의 거세공포에 대한 사후적인 승인에 해당한다.   

결혼의 불가라는 예언의 지평 속에 놓여 있는 시간은 연속적이며 균질화된 시간이다. 그러한 지평에서는 시간의 질적인 비약이 가능하지 않다. 레르몬토프의 공간적 상상력이 대지와 하늘을 두 축으로 한 은유적인 상상력이었다면, 그의 시간적 상상력은 (페초린의 경우에 미루어서 말하자면) 예언에 속박된 환유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환유적 상상력 속에서 ‘나’는 세계 전체로 확장될 수 있지만, ‘너’라는 타자의 세계로의 비약은 가능하지 않다. 때문에 레르몬토프의 창작세계에서 ‘나’의 고독은 필연적이다... 

10. 01. 19. 



P.S. 2006년작 <우리시대의 영웅>의 하일라이트는 http://www.youtube.com/watch?v=UENblKYDTMY 참조. '공녀 메리'('공작의 딸 메리')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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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9 15: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9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馬)이라는 상징성에 남성상(男根)까지 비유하는 건 좀 무리겠죠?" -책도 안 읽어보고 페이퍼의 내용으로만 생각해보는 개인적인 의견-

로쟈 2010-01-19 23:24   좋아요 0 | URL
러시아문학에선 보통 여성을 상징합니다.^^

펠릭스 2010-01-19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 단락은 '페티시즘(Fetishism)'과 비슷한데요.

로쟈 2010-01-19 23:26   좋아요 0 | URL
연물주의란 뜻으로 하신 말씀인가요?^^

펠릭스 2010-01-20 08:11   좋아요 0 | URL
예,,신체의 특정부위나 특정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대리만족하는 경향인데요.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정신적인 왜곡현상중에 하나로 일본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작품들에서 뛰어나게 묘사되던데요.

카스피 2010-01-20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이 재간되었군요.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한번 읽어봐야 겠네요^^

로쟈 2010-01-21 07:29   좋아요 0 | URL
네, 고전은 정의상 다시 읽는 책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1-2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의 남자배우가 정말 미남이군요.여배우들보다 더 눈에 띕니다.특히 눈썹과 수염이 예술이네요.

펠릭스 2010-01-22 19:43   좋아요 0 | URL
권총든 얼굴이 로쟈님과 비슷(?)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22 23:50   좋아요 0 | URL
그건 좀...
 

<뉴레프트리뷰2>가 출간됐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소개기사는 물론 책 자체가 눈을 씻고 봐도 뜨지 않는다. 연간 체제로 나온다고 했고 작년 2월에 1권이 나왔으니까 '제때'이긴 하다. 어떤 볼륨으로 어떤 글들이 묶였을지 궁금하지만 확인은 하루이틀 더 기다려봐야 할 듯하다. 대신에 조지 오웰의 르포르타주 <위건 부두로 가는 길>(한겨레출판, 2010)에 대한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하루키의 <1Q84> 덕에 작년에 때아닌 <1984> 붐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 전체주의 비판 소설 탓에 많이 가려진 것이 '사회주의자 오웰'의 면모다(그렇지 않고서야 대한민국의 그 많은 학생들이 <동물농장>을 읽을 수가 있겠는가). 그에게 공정하자면 '동물농장'에만 들를 것이 아니라 '위건 부두'도 같이 둘러보아야겠다. 개인적으로는 <동물농장>과 <1984>밖에 읽지 못한지라 그의 르포르타주도 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웰이 사회주의자라는 건 알았지만 내가 대학에 들어온 1980년대에 대학가에서 오웰은 '얼치기 사회주의자'로 낙인 찍혀 있었다. 그게 어떤 의미였는지는 아래 기사를 읽으며 되새겨보게 된다...       

한겨레(10. 01. 16) 사회주의를 위한 사회주의자 비판 

그는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마흔일곱,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을 때까지 그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 믿었고 그 주의를 옹호했다. 조지 오웰(1903~1950). 그는 현대문학의 고전 <동물농장>(1945)과 <1984년>(1949)을 쓴 소설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무엇보다 그는 사회주의 정치평론가였고 직접 혁명전선에 나선 행동가다. 



한데 그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년>은 일종의 반공 우화 소설로, 사회주의의 ‘적자’로 군림했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흔히 소개되고 그렇게 읽힌다. 아이러니다. 아니, 반토막 진실이다. 그가 1937년에 발표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런 독해가 상당 부분 오독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1936년 초 오웰이 좌익 출판단체로부터 영국 북부 탄광지대의 대량 실업 문제에 관한 르포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글이다. 그는 편집자 빅터 골란츠의 부탁을 받고 두 달에 걸쳐 위건과 리버풀, 반즐리 등 탄광지대를 집중 취재했다. 그곳에서 그는 가난한 노동자와 실업자들이 묵는 하숙집과 탄광노동자의 가정에 머물며 제대로 입지도 먹지도 못하고, 집다운 집에서 살 권리도 박탈당한 노동계급의 삶을 체험했다. <위건 부두…>는 당시 대량 보급되며 반향을 일으켰는데, 오웰은 스스로 <위건 부두…>를 통해 전투적이며 정치적인 작가로 거듭났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훗날 <나는 왜 쓰는가>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진지한 작품들은 그 어느 한 줄이건 전체주의에 맞서기 위해,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쓴 것들이다.” 

 

<위건 부두…>는 성격이 다른 두 개의 글로 돼 있다. 1부 ‘탄광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은 오웰이 목도한 영국 노동계급의 궁핍한 생활상과 실업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기록한 르포다. 낱낱이 묘사되는 1930년대 영국 공업지대의 빈곤과 주택난, 도시재건축의 살풍경은 오늘 한국사회를 연상시킨다.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을 논한 2부는 에세이 형식으로 쓴 정치평론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논쟁적인 것은 바로 이 글이다. 1930년대 영국 좌파 사회주의 리더들을 직접 겨냥해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을 청탁한 편집자 빅터 골란츠는 오웰이 파시즘과 싸우러 스페인에 간 틈을 타서 오웰의 논지에 대해 반론하는 서문을 넣고 출판했다. 골란츠는 그 뒤 오웰의 스페인 내전 참전기 <카탈루냐 찬가>(1938)에 대한 출판도 거부한다.

1936년은 대공황이 세계를 휩쓴 때이자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세력을 키워가던 때다. 오웰의 말을 따르면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기가 불가능한 세상”이며 “사회주의가 후퇴”하던 때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에서 당시 영국의 주류 사회주의자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그가 보기에 “누구라도 사회주의에 공감하는” 때에 사회주의 세력이 힘을 더 못 받는 것은 바로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 그룹이 잘못된 전술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소책자에 글줄이나 쓰며 말끝마다 마르크스를 인용하며 나는 너희와 다르다는 태도로 무장한” 사회주의자들이다. 오웰의 비판 대상에는 평생 사회주의자로 산 버나드 쇼도 포함된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거품을 물고 부르주아 규탄에만 열을 올림으로써 사회주의엔 오직 증오만이 있는 것처럼 노동계급과 대중들에게 비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물질적인 유토피아를 사회주의의 목표로 선전하고 ‘미련한’ 러시아(스탈린) 숭배와 기계 숭배의 냄새를 풍김으로써 사회주의의 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평범하고 수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즘으로 돌아서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직직원 등 중산층을 사회주의로 끌어들여야 한다. 이것이 오웰의 주요 논지 중 하나다. 오웰의 사회주의자 비판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놓고 그 안에서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악마의 대변인’으로 나섰다고까지 오웰은 말한다.

그렇다면 오웰이 말하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일단 ‘반파시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체제의 산업사회와 그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파시즘을 아울러 ‘전체주의’라고 이해한다. 오웰은 민주적 사회주의의 요체를 ‘정의와 자유’, ‘압제에 대한 반대’라고 말한다. 그 사회주의의 구체적 상을 찾으려 하면 일순 모호해지는 감이 있다. 오웰이 보기에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는 꼴을 보기를 적극적으로 원하는 사람이다.

오웰이 반대했던 것은 파시즘이었다. 그 전체주의였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빚어내는 그 압제적 성격이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반대하는 시늉만 했을 뿐 그 전체주의적 성격에서 흡사한 면모를 보이며 사회주의를 오도했던 스탈린주의를 그토록 맹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당대의 파시즘 승리에 대한 오웰의 경고와 통찰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살 떨릴 만큼 현실적이다. “상황은 절박하다. 사회주의를 효과적으로 확산시키지 못한다면 파시즘을 타도할 가망은 없어진다. …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으로 여기는 파시스트 국가들이 서로 치고받다 망하는 일은 전혀 벌어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제 파시즘은 국제 운동이 되었으며 파시스트 국가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단결하고 있다. … 전체주의 세계라는 비전이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오웰이 비판하는 1930년대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오웰은 말한다.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목표로 삼고 단결할 수 있는 이상은 사회주의의 이상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정의와 자유다. 이 이상은 이론 일변도의 독선과 파벌 다툼과 설익은 진보주의에 층층이 묻혀 버렸다.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오웰이 던진 숙제는 오늘에도 유효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진보논객 박노자씨는 이 책의 추천글에서 이렇게 썼다. “오웰은 20세기 문학을 통틀어 가장 선명한 ‘비판적 개인’이다. 오웰이 죽을 때까지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하나의 희망이다. 그것은 ‘민주적 사회주의’와 ‘비판적 개인’의 독립성 사이에 어떤 적대적 모순도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는 21일은 오웰 사망 60주기가 되는 날이다.(허미경 기자) 

10. 01. 17.  

P.S. 참고로 지난 2003년이 그의 탄생 100주년이어서 몇 권의 책이 나온 바 있다. 올해도 겸사겸사 몇 권 나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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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좋은 작가의 작품이라면 두 권 이상은 읽어야
    from 승주나무의 책가지 2010-01-17 13:43 
    단행본 단위로 책을 읽는 시기는 조금씩 끝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가의 저작이 1권만 소개되는 경우도 있지만, 좀 신경써서 봐야 하는 작가는 최소 2~3권 정도는 읽어야 그 사람의 사상이 드러나는 것 같다. 최초의 전작주의 시도는 도스또옙스끼였는데 후기 장편을 읽으면서 독서의 맛을 알았다. 그 다음은 김유정, 김수영... 작가 작품목록 단위로 읽으면 단편적으로 섭렵한 정보가 입체적으로 그려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펠릭스 2010-01-17 11:43   좋아요 0 | URL
19세기경 영국 수상들을 배출한 '이튼'칼리지 등은 '존로크'의 교육철학을 기본으로 교육이 진행되었죠. '이튼'을 졸업한 조지오웰은 다음 코스인 옥스퍼드를 진학할 정도의 성적이 못돼 경찰을 지원합니다. 요즘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해병대 등을 지원하는 고교졸업생 정도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식민지(버마)의 경찰관이 되면서 식민지에 대한 실태를 경험하게 되고, 급기야는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 생활을 합니다. 아마 그것은 어떤 속죄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식민지의 경찰관되어서부터 유럽의 경향에(파시즘) 대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듯합니다. 어쩌면 영국 교육의 효과(?)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오웰의 작품들은 <버마의 나날>의 아류일 가능성 높습니다. 우리의 일제강점기때 오웰같은 일본 경찰관은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1950년대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철도 노동자의 애환을 그린 영화 <철도원>이 생각납니다.

로쟈 2010-01-17 11:45   좋아요 0 | URL
네, <버마의 나날들>(1934)이 데뷔작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 다음이군요. 연보를 보니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다음이 바로 <카탈루냐 찬가>(1938)이구요. <1984>가 마지막 작품이란 걸 새삼 확인합니다...

주니다 2010-01-17 11:40   좋아요 0 | URL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상금도 꽤 되는군요. 책 구입에 많은 힘이 되시겠네요.^^ 올 한해도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빕니다.

로쟈 2010-01-17 11:47   좋아요 0 | URL
감사. 언제 한번 뵈야 할 텐데요. 다들 바쁘신가 봅니다.^^;

Mephistopheles 2010-01-17 13:52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것은 오웰이 비판하는 1930년대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의 모습은 오늘날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

진보가 꼭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이라고 말하기 주저스런 이유가 저것일지도 모르겠군요...^^

로쟈 2010-01-17 15:25   좋아요 0 | URL
오웰식으로 하면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은 바깥에만 있는 게 아니죠...

승주나무 2010-01-17 13:55   좋아요 0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오웰이 1903년생이니 100주년 아닌가 합니다. 200주년이라고 해서 깜놀했습니다^^;;

로쟈 2010-01-17 15:24   좋아요 0 | URL
오타가 있었네요.^^;

노이에자이트 2010-01-17 15:31   좋아요 0 | URL
저는 오웰 전기를 읽고 느낀 건데 오웰이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들 간의 살육전에 진저리가 났기 때문에 회의주의자가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물론 그런 자세를 성찰이 깊어졌다고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로쟈 2010-01-17 15:33   좋아요 0 | URL
<위건부두>는 참전 전에 쓴 거니까 이미 그런 단초는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mirror 2010-01-18 04:26   좋아요 0 | URL
박노자 얘기에서 뿜었습니다. 지금의 한국사회에 적용하면, 오웰은 박노자와 한겨레를 가장 비판했을 거예요. 가장 경직되고 엉뚱하며 비현실적인 소리만 해대는 관념좌파 박노자가 오웰의 이 책의 서문을 쓰다니, 오지랍도 넓습니다. 유럽좌파 지식인 운운하는 것도 한겨레 기자의 농담인 듯..

로쟈 2010-01-19 09:53   좋아요 0 | URL
'왼쪽으로'를 주장하지만, 박노자는 비교적 온건한 사민주의를 지지하는 걸로 아는데요. 박노자를 포함하여 그 '왼쪽'이 몽땅 비판대상이라면, '좌파'가 얼마 안 남을 거 같습니다...

mirror 2010-01-20 05:45   좋아요 0 | URL
이 기사에 따르면, 오웰은 당시 영국의 좌파를 과격하다고 비판한 것은 아니지요. 지금 과격과 온건의 여부가 비판의 초점이 아닙니다. 박노자가 온건한 사민주의를 주장하건, 과격한 공산주의를 주장하건, 이것은 저의 비판의 초점이 아닙니다.
 

루쉰 연구자인 유세종 교수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특이하게도 만해 한용운과 루쉰을 비교한 <화엄의 세계와 혁명>(차이나하우스, 2010)이 그것인데, 아직 알라딘에는 입고되지 않은 듯하지만 소개기사가 흥미를 끌기에 옮겨놓는다. 봄에는 일본 작가 몇 사람에 대한 강의도 해야 하지만, 개인적으론 올해 중국 관련서들을 챙기기 시작한지라 루쉰에 관해서도 모아놓은 책들을 좀 읽어보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 나온 책도 리스트에 넣어두어야겠다.   

  

경향신문(10. 01. 15) '불교적 깨달음’으로 연결된 루쉰과 한용운 

“절망은 허망한 것, 희망이 그러하듯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루쉰(1881~1936)과 한용운(1879~1944)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다. 시기뿐만 아니라 처한 상황도 비슷했다. 둘 다 나라를 잃고 수배와 감시의 망 안에서, 고독과 부자유, 고통을 느끼며 살았던 식민지 지식인이다. 인용한 두 문구는 각각 두 사람의 대표적 작품집인 <들풀>과 <님의 침묵>에 나온다. 조국이 서구 근대의 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자신들이 서양과 똑같은 강자가 되는 것 또한 궁극적인 해답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았던 두 사람으로서 허무와 절망을 피할 길이 있었을까. 하지만 이들이 이 허무와 절망을 극복한 방식은 지금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루쉰 문학을 전공한 유세종 한신대 교수는 최근 저서 <화엄의 세계와 혁명>(차이나하우스)에서 두 사람 작품을 하나의 선상에 놓고 분석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아우르는 사상의 공통점을 불교적 깨달음, 즉 화엄(華嚴)의 세계관으로 보았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것은 아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현실을 보고 겪으며, 머물러 있는 듯한 자신들의 전통을 비판했고, 그래서 강자가 되기 위해 일본 유학을 가거나 러시아를 시작으로 세계를 돌아볼 필요를 느끼기도 했던 두 사람은 서구의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들이 근대가 가진 폭력성까지 수용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 사이에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서구적 근대도 아니고 전통도 아닌 중간 지점에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 자신들을 자리매김했다는 것이 유 교수의 설명이다. 

작가이면서 승려였던 한용운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 해도 그것은 모두 무한의 시간과 무변의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화엄의 진리에 처음부터 비교적 가까이 있었다. 그래서 어느 한 곳에 머무름 없이 끊임없이 속세와 법계를 넘나들며 혁명을 꿈꾸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루쉰은 구복(求福)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현실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자기 안의 화엄적 세계관까지 부인할 수는 없었다. 1914년 10월4일 일기에 “오후에 <화엄경>을 다 읽다”는 구절이 나온다든지 “인간의 일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깊은 곳에 그 근본이 있다”고 쓴 <문화편지론>의 구절은 표면적인 증거일 뿐이다. 신해혁명의 실패 후 민중의 열악한 정신 수준에 절망한 그가 말한 ‘혁명의 일상성’은 ‘지금 이곳에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한 혁명적 대응이 대안이라는 깨달음이다.

이는 한용운이 말한 “사람이 다 각기 그 마음을 가진 동시에 그 마음이 곧 불(佛)인 사람은 오직 자기 마음, 즉 자아를 통해서만 불을 성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이나 물(物)을 떠나서 하는 말은 아니다”라는 깨달음과도 만난다. 그러니까 “근대가 가져온 물질문명의 각종 폐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힘과 신자유주의의 폐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동력, 평등과 자유를 향한 꿈꾸기, 그리고 일상 속에서 실천하기” 등 지금 사람들이 처한 난제는 루쉰과 한용운을 읽음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손제민 기자) 

10. 0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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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16 09:43   좋아요 0 | URL
지식인들과 역사의 인물들이 꾸준히 주장했던 것은 일상속의 변화임을 역설했습니다(도산의 4대 정신을 비롯하여). 사회가 발전할 수록 개인부터가 아닌 사회적 시스템이 개인이 원하는 쪽으로 변해주었으면 하는 수동성이 있지만 지난 촛불광장처럼 개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변화(표현 등)를 이끌어 내는 분야별 리더의 스토리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로쟈 2010-01-16 20:41   좋아요 0 | URL
네, 변화는 같이 일어나야죠...

펠릭스 2010-01-16 23:58   좋아요 0 | URL
예,,찔리네요.(저는 관리도 아닌데)
 
'로쟈의 인문학 서재'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오후에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이 있었다. 수년 전 박사학위 수여식이 있던 날 이후로 가족들의 꽃다발을 받아본 게 처음이지 싶다. 자주 있는 일도 아닌데,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몇 사람 언급하지 못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이 블로그를 아끼시는 분들과 <로쟈의 인문학 서재> 독자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한국일보(10. 01. 15) "안팎 어려움 속 출판계 격려… 사회적 자랑" 

"제 56년 출판 인생의 고비마다 한국출판문화상이 힘이 돼 줬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출판인들의 용기를 북돋는 상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윤형두 범우사 대표ㆍ백상특별상 수상소감에서)

출범 50년을 맞은 한국출판문화상의 영예의 수상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한국일보가 주최하고 ㈜두산이 후원한 제50회 한국출판문화상 시상식이 14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한진해운센터빌딩 본관 26층에서 열렸다.

시상식에서는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사계절 발행) 저자 김일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공동체론>(효형출판 발행) 저자 박호성 서강대 교수가 학술 부문 저술상을 공동 수상했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산책자 발행) 저자 이현우씨(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는 교양 부문 저술상을 받았다.

편집상은 <앤디 워홀 일기>(앤디 워홀 지음)를 발행한 미메시스 출판사, 번역상은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울 힐베르크 지음ㆍ개마고원 발행)를 번역한 김학이 동아대 교수가 각각 수상했다. 어린이ㆍ청소년 부문에서는 <열정세대>(김진아 지음ㆍ양철북 발행)를 기획한 참여연대 교육홍보팀이 수상했다.

이종승 한국일보 사장과 성낙양 두산동아 대표는 수상자들에게 각각 상금 500만원과 상패를 수여했다. 백상특별상 수상자인 윤형두 범우사 대표에게는 상금 300만원과 상패가 수여됐다.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도정일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은 축사에서 "출판계는 창조적인 생각을 유통시켜 우리 사회를 '사람이 살 수 있는 사람의 사회'로 만들어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안팎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출판계를 격려하는 한국출판문화상이 50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은 사회적 자랑거리이고 영광"이라고 말했다.

교양 부문 저술상 수상자 이현우씨는 수상 소감을 통해 "대학 사회에서는 논문을 쓰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과 무관한 글쓰기에 시간을 내는 데는 인색하다"며 "저의 수상은 척박한 풍토에서도 묵묵히 저술 활동을 하는 연구자들에게 긍정적 소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시상식에는 한승헌 전 감사원장, 이기웅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등 각계 인사와 수상자의 가족과 친지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유상호기자) 

10. 01. 14. 

P.S. 특별히 수상 소감이 인용돼 있는데, 절반 이상은 기자의 해석이 더해진 것이다. 요지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뻘짓'이란 얘기도 들었던 인터넷 글쓰기나 블로거 활동을 인정받게 돼 감사하다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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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4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4 2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10-01-1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멋지네요.

로쟈 2010-01-15 09:11   좋아요 0 | URL
감사.

leopard 2010-01-15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님 블로그 통해서 많은 점들을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로쟈 2010-01-15 09:1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이매지 2010-01-15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

로쟈 2010-01-15 09:11   좋아요 0 | URL
^^

루체오페르 2010-01-15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일과 해야하는 일,하고있는 일이 같을때 참 행복할것 같습니다.
축하합니다.^^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그게 민폐가 아니면 더 좋지요.^^;

Joule 2010-01-15 0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해요. 로쟈 님 키가 제일 커요. 유전자가 제일 우월한가 봐요.(.. )( '')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그래봐야 '루저'입니다...

starla 2010-01-15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기쁩니다. ^^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감사.

쉽싸리 2010-01-15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습니다.
올 해도 좋은 기운 이어가시길,,,

로쟈 2010-01-15 09:13   좋아요 0 | URL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그렇겠지요.^^;

시페루스 2010-01-15 0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유익하고 좋은 글 많이 부탁합니다.

로쟈 2010-01-15 09: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권진규샘이시군요.^^

수유 2010-01-1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1-16 20:41   좋아요 0 | URL
감사. 계속 못 뵙는군요.^^;

카스피 2010-01-15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1-16 20:41   좋아요 0 | URL
감사.

은도끼 2010-01-15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축하드립니다...어찌어찌하여 이 블로그를 알게되고 로쟈님을 알게되어 로쟈님의 책을 방금 다 읽었습니다(물론 한 반절은 좀처럼 무슨 말인지 힘들어 패스하구요^^) 저한테는 어려워도 정말 좋은 느낌과 한편의 존경과 기분좋은 독서 경험이었습니다.....천정환님의 발문을 인용하며 줄입니다~ "부디 로쟈의 빠른 뇌와 성실한 손이 오래오래, '눈물'없이 튼튼하기를."

로쟈 2010-01-16 20: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 대목이라도 맘에 드셨기를.^^;

노이에자이트 2010-01-15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저는 앞으로 무슨 상을 탈 수 있을까요? 용감한 시민상?

로쟈 2010-01-16 20:43   좋아요 0 | URL
저술상도 노리셔야죠!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1-16 21:16   좋아요 0 | URL
따뜻한 격려 감사합니다.하하하...

빵가게재습격 2010-01-15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로쟈 2010-01-16 20: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건강은 좋아지셨나요?

빵가게재습격 2010-01-17 02:22   좋아요 0 | URL
네,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종종 아프기도 하고, 의사는 늘 조심하라고 하고 있지만요. 직장도 나가고 있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 로쟈님도 건강하셔야 합니다.^^

토탈리콜 2010-01-1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많이 배우고있습니다. 새해 더욱 건필하세요^^

로쟈 2010-01-19 09: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