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내내 강의와 서평 원고에 매달리다 보니 말 그대로 '부지하세월'이다. 딱히 그런 사정 때문은 아니지만 어제는 큼직한 탁상용 달력을 얻어다 책상맡에 놓았다. 알라딘 달력이 있지만 작년의 고급스런 달력에 비하면 너무 볼품이 없고 일정을 적어두기에는 바탕색도 너무 어두워서 갖다버리려고 한다(아이러니컬하지만, 작년 달력은 사진들이 너무 좋아서 모셔두고 있다!). 원고를 쓰다가 간간이 읽은 기사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어서 옮겨놓는다. 최근에 나온 <뉴레프트리뷰>(길, 2009)에 실린 데이비드 하비의 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정리해주고 있다(책은 지난주에 나왔지만 판권면에는 발행일자가 작년 12월 31일로 돼 있다).  

    

한겨레(10. 01. 21) 도시는 꿈꾼다…‘착한 개발’의 꿈을 

계란을 깨뜨리지 않고 오믈렛을 만들 순 없는 노릇이니 창조는 파괴를, 건설은 폐허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폭력과 추방과 강탈의 잔혹극이다. 대체 생사람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도시의 재개발 폭력은 왜 끝없이 재연되는가. 이 강탈과 축적의 악무한적 연쇄를 끊어낼 대안적 도시화의 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 <자본의 한계> 등의 저작으로 친숙한 데이비드 하비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이번주 출간된 <뉴레프트리뷰> 한국어판(2호)의 ‘도시에 대한 권리’란 글에서 이 문제를 짚었다.  

그가 볼 때 도시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세계를 변형시킨 결과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도시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형성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노동력이 투입된 생산물에 대해 권리를 갖듯 그들이 만든 삶의 터전인 도시에 대해서도 권리를 갖는데, 하비에 따르면 그것은 “도시를 변화시키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권리”다.

문제는 오늘날의 도시화가 자본주의적 잉여의 생산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도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과잉축적의 위기를 공간의 부단한 생산과 파괴를 통해 잠정적으로 해소하는 공간이기 때문인데, 이런 사실은 자본주의 도시화의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제2제정기 조르주 외젠 오스만(1809~1891)이 주도한 파리 개조다. 당시 오스만의 작업은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잉여자본과 실업 상태의 노동력을 흡수하는 한편, 도처에 소비와 쾌락의 공간을 만들어냄으로써 노동계급의 급진적 열망을 잠재우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시공간의 개조를 위해서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다. 하비는 오스만의 파리 개조가 “새로운 신용과 금융체계를 마련해 타인자본을 조달함으로써 도시의 기반설비를 개선하는 가장 원초적인 케인스주의 체계를 구축했다”고 평가한다.  



이 오스만 모델은 1940년대 미국의 대도시에서 다시 한번 힘을 발휘한다. 당시 미국은 과잉축적의 산물인 잉여자본과 노동력이 세계대전의 특수 덕에 일시적으로 해소됐지만, 전쟁이 끝난 뒤엔 상황을 낙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그들에게 오스만의 선례는 축복이었다. 신용규제를 풀어 유휴자본이 도시공간에 투입되게 함으로써 전후 자본주의를 전지구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도시 개조는 1990년대 다시 한번 경제의 핵심적인 안정화 기제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의 부동산시장은 도심과 교외주택, 사무빌딩 등을 건축하면서 막대한 잉여자본을 흡수했고, 이를 다시 첨단 금융기법(부채의 증권화)과 결합시켜 소비재·서비스 부문의 소비를 폭발적으로 확대시켰다. 이런 도시화는 세계적 현상이었다. 뭄바이, 서울, 볼티모어, 요하네스버그, 타이베이, 모스크바, 두바이 등 세계 곳곳의 대도시가 거센 건설붐에 휩싸였다. 이런 ‘글로벌 오스만주의’는 대중들에 대한 순치라는 또다른 효과를 낳았다.

“재산가치를 지키는 일이 최대의 정치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사람들은 새로 등장한 최신 부티크와 쇼핑몰, 안온한 커피매장이 선사하는 신기루 같은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문제는 도시공간의 재구조화에는 필연적으로 폭력이 개입했다는 점이다. 파괴와 건설이, 인간적 삶의 확보가 아닌 잉여자본의 흡수라는 체제 논리에 의해 진행되는 한,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린 자들의 저항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도시에서의 갈등과 폭력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사회운동은 어떤 요구를 내걸어야 하는가. 하비는 “잉여의 생산과 활용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확립”을 제안한다. 도시화가 잉여를 해소하는 주요 통로이므로, 그 잉여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민주적 관리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희망적인 것은 세계 각지에서 야만적 도시화에 저항하는 사회운동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비는 이 투쟁들을 단일한 전선으로 결집하기 위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실천 슬로건이자 정치적 이상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엔 물론 ‘강탈에 의한 축적’의 배후에 자리잡은 세계화된 금융자본과의 투쟁 역시 포함된다.  

책에는 이밖에도 미셸 아글리에타, 마이크 데이비스, 프레드릭 제임슨 등 ‘좌파 석학’들의 예리한 현실진단이 담긴 16편의 글이 함께 실려 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피터 고언과 수전 왓킨스의 글들 역시 핵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반도 정세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이세영 기자) 

10. 01. 22.  

P.S. 개인적으론 나도 어제 <뉴레프트리뷰> 제2권에 대한 서평을 써서 보냈다. 하비의 글은 아직 읽지 못했고, 내가 초점은 맞춘 건 주로 NPT에 관한 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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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10-01-23 09:37   좋아요 0 | URL
최근 정부는 행정구역 개편 추진으로 도시(지역 간) 통합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개조 및 개보수와 합병은 인구 100만을 기준으로 광역도시권을 만드는 작업인데요. 전 정부의 마스트플랜을 뒤엎은 세종시 문제도 생각해볼만 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TV속의 도시'는 희망을 꿈꾸게 하지만 그 도시속에 들어가 보면 인간성과 관계의 틀은 여전합니다. 미국 정보국이(?) 취하는 '오믈렛을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개의 계란을 깨뜨려야 한다'는 고전적인 논리는 어느 도시 공간에도 유효한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