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시평이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가 왜 이리 가깝게 느껴지는 요즘인지...

경향신문(08. 08. 29) 망령

도스토예프스키가 숨 쉬었던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의 공기는 이랬다. 1849년 4월23일 새벽 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된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다. 당시 서유럽의 신 사조에 고취된 젊은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전제정치를 비판한 걸 누군가 밀고한 것이다. 모임에서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것이 28세 신진 작가에게 씌워진 죄목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총살 직전 감형돼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끌려가던 날의 상황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잠결에 샤벨(군경이 차던 칼)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옷을 입는 동안 그들은 방안을 온통 들쑤시며 원고와 책을 끈으로 묶었다. 난로 속으로 들어가 담뱃대로 꺼진 재를 휘젓기도 했다. 탁자 위의 낡은 동전을 경찰관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전(私錢·위조지폐)이라고 생각합니까” “조사해 봐야지” 그는 동전을 중대한 증거인 양 집어 넣었다.’

주동자 페트라셰프스키는 심문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심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고한 한 사람을 벌하기보다 열 사람의 죄인을 방면하는 게 낫다는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말대로다. 다른 하나는 ‘열 마디 말만 내놓으라. 그걸로도 한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담뱃재를 놓고 서류를 불태운 증거라며 논죄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옥중 진술서는 펜으로 피를 찍어 쓴 듯 절절하다. ‘어쩌다 엿들은 말을 종이쪽지에 적은 밀고를 바탕으로 가두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 전후 관계를 생각지 않고, 어떤 의도인지 개의치 않고, 조각조각의 말을 임의대로 엮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검열에 대해서도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어두운 색채로 정경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작품 발표를 금지당한 경험이 있다. 검열관들은 무해(無害)한 문장에서도 악의를 찾아내려고 한다. 있지도 않은 위험 사상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선 작품을 매장해 버린다. 밝은 빛깔만으로 된 그림이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셨던 차르 제정의 공기는 100여년 후 솔제니친이 마신 구소련의 공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공기는 21세기에도 망령처럼 지구를 떠돌며 어느 하늘을 암울하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망령에게 시공(時空)은 따로 없다.(김태관 논설위원)

08. 08. 29.

P.S. 필자가 암시하고자 한 내용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망령에게 시공은 따로 없다"고만 적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징후적 현실이다(올해가 국가보안법 제정 60돌이라 한다. 관련기사는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참조).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분위기를 (웃음까지 섞어가며)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어느 하늘'을 쥐어흔들고 있는 정권의 최대 치적이다. 러시아문학도가 보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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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8-29 18:42   좋아요 0 | URL
로쟈님, 24일 수요일 뵈어요. :)

2008-08-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30 17:28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쓴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한나라당 차명진 대변인을 공통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두 사람 다 보수파로 전향했으니까요.차명진 씨는 예전 민중당 출신인데 한때의 동료였던 오세철 씨에 대하여 "국보법을 위반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더군요.

로쟈 2008-08-30 17:47   좋아요 0 | URL
'보수'란 말 때문에 도매급이 되네요. 차씨의 인간이해는 절망스럽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30 20:53   좋아요 0 | URL
로자 님이 소개한 기사를 보니 국가보안법의 초창기 희생자인 백범이 생각납니다.옛 동지인 이범석의 막말...정치의 비정함을 분명히 느꼈을 겁니다.심지어 해방정국의 '반공주먹'김두한도 반공법에 걸려서 졸지에 빨갱이가 되었으니...
 

대회 초반부터 한국 선수들이 선전하는 바람에 베이징 올림픽의 열기가 뜨겁다. 겸사겸사 올릭픽을 바라보는 중국 지식인의 시각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한겨레21의 '중국 지식인 연쇄인터뷰'가 첫꼭지로 경제학자 쭤다페이 교수와의 인터뷰를 싣고 있어서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8/021003000200808070722037.html). 좌파이면서 중화민족주의자라고 하다(그의 책은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은 듯하다). 인터뷰어는 박현숙 전문위원이다.

한겨레21(08. 08..07) "애국주의 열정은 정당하다”

“당신들이 중국을 알아? 도대체 우리의 무엇을 이해한다는 거야?”
“인권? 보편 가치? 웃기지 말라고 그래. 그렇게 인권을 부르짖는 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유혈전쟁을 부추긴단 말이야! 서방은 우리에게 인권을 말하기 전에 자신들의 인성부터 들여다봐야 해.”

지난 7월22일 오후 베이징의 시즈먼교 부근 한 찻집. 2시간 남짓 인터뷰를 하는 새, 그는 시종일관 서방에 대한 적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중국의 개혁·개방은 “외국 기업들에 중국의 노른자를 고스란히 ‘갖다바친’ 매국 정책이며 중국을 파멸로 이끌었다”라는 노골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 학계와 언론에서는 이런 그를 ‘타고난 좌파’라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의 성씨 역시 ‘좌’(左·쭤)다. 그는 한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좌파’인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며 자신이 중국 좌파 중에서도 가장 ‘좌’에 속한 사람이라고 당당히 밝힌 바 있다.

쭤다페이, 1952년생인 그는 현재 중국사회과학원 경제연구소 연구원이자 교수다. 문화대혁명 당시 가장 어린 ‘홍위병’ 중 한명으로 ‘활약’했으며, 2년간 중국 동북지방의 한 농촌에서 ‘하방 생활’을 했다. 그 뒤 군복무를 거쳐 몇 년간 공장 노동자 생활을 했으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인 1978년부터 랴오닝대학과 중국사회과학원 등에서 경제학 공부를 했다. 2002년 출간된 대표작 <혼란의 경제학>에서 그는 ‘중국 특색의 경제자유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중국 지식인 사회에 일대 논쟁을 불러왔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현재 중국의 경제정책은 소수를 위해 다수 사람들과 국가 이익은 고려하지 않으며, 소수가 마음대로 공동의 재부를 강탈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또한 국제자본이 중국에서 이윤을 약탈하는 데 일조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사유화를 낳았을 뿐 아니라, 가장 야만적이고 잔혹한 사유화를 가져왔다. 다시 말해 소수를 위해 다수가 희생한 대가로 소수는 폭발적인 부를 이뤘고, 중국은 국제자본의 통치와 수탈을 당하고 있다.”



개혁·개방 30주년이다. 개혁·개방이 중국 사회에 가져온 득과 실은 무엇인가.
=가장 큰 성과는 빠른 경제발전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방향의 견지라는 측면에서는 중대한 문제를 드러냈다. 소유제 문제에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실제로 자본주의가 경제의 주도적 역량이 됐다. 중국 정부는 비록 공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한다고 발표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 이미 사유제를 실행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과거보다 개인의 자유가 많이 확대됐고, 공산당의 통제력도 많이 약해졌다. 하지만 개혁·개방 뒤 전면적인 사유화는 사회적으로 빈부 격차를 확대시켰고, 외국 기업에 대한 지나친 우대 정책은 중국의 많은 이익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중국에 많은 대기업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핵심적인 기술이 없다. 핵심 기술은 죄다 외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다. 사회 모순의 확대 역시 큰 문제다. 개혁·개방 뒤 중국 사회 내부에 많은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빈부 모순, 정부와 인민대중 간의 모순 등이 곳곳에서 민중봉기와 시위를 유발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민족주의·애국주의 열풍이 뜨거운데.
=시장경제 환경이 발전할수록 민족성과 지역성은 더욱 강렬해진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봐라. 한국인은 자발적으로 미국을 배척한다. 중국인도 마찬가지다. 민족주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요인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시장화가 더욱 발전할수록 민족주의 경향도 강화된다.

최근 중국의 ‘80후세대’(1980년 이후 태어난 세대) 사이에서 나타나는 민족·애국주의 운동의 이면에는 맹목적인 요소들이 많다는 걸 안다. 중국 정부는 비록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애국주의 운동이라 할지라도 절대로 ‘조직화’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화되지 않고 리더가 없는 운동은 자칫 비이성적으로 흐르기 쉽다. 하지만 이들의 애국주의 열정은 정당하다. 서방이 먼저 자극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중화민족주의를 지지한다. 서방세계는 중국의 ‘굴기’(성장·불쑥 솟아오른다는 뜻)를 걱정한다. 그래서 1990년대부터 중국위협론을 떠들어왔다.

경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다. 중국의 굴기는 필연이며, 단지 옛날로 돌아가는 ‘회귀’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청조 말기 중국은 서방의 발전을 무시했다. 그들은 최근 200년 동안 무기를 이용해 중국을 개방시켰고, 경제발전 역시 중국을 훨씬 더 앞섰다. 이는 중국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하지만 이제 중국은 자존심을 회복해가고 있다. 중국이 다시 일어나려고 하니까 서방세계는 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을 다시 분할시키고 흠집내고 싶어한다.

민족주의·애국주의 열풍이 정상적인 반응이라는 뜻인가.
=그렇다.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공산당 창당 29주년 기념문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방을 선생으로 여기고 싶지만 왜 선생은 학생을 항상 때리기만 하는가.” 지금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원래 중국은 서방의 비위를 맞추면서 올림픽을 치르고 싶어했으나, 그들이 중국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았다. 생각해봐라. 만일 결혼식 집 앞에서 누군가 난동을 부린다면 혼주 입장이 어떻게 되겠는가? 중국인이라면 이런 상황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중국은 지금 잔칫집이다. 그런데 잔칫집 앞에서 그들은 온갖 난동을 부린 셈이다. 이것이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좌파 지식인들은 베이징 올림픽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올림픽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반감을 가지고 있다.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중국 인민들의 정서를 고려해서다. 중국인들은 오랫동안 서방세계에 대해 열등감을 느껴왔다. 그래서 올림픽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느끼고 싶어한다. 세계인으로부터 존중을 받고자 한다. 그럼에도 올림픽에 반감을 갖는 것은 올림픽을 통해 중국이 더 ‘세계화’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개혁·개방 정책이 가져온 경제 자유주의와 사유화,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으로 인한 중국 경제의 세계화는 이미 중국을 다국적 기업의 이윤 쟁탈·약탈장으로 만들었다. 또 올림픽을 통해 서방은 자신들이 보편적 가치라고 믿는 것들을 중국에 주입시키고 싶어한다. 그런 의도를 경계하기 때문에 올림픽에 반감을 갖는 것이다.

중국 내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경제적으로는 시장화를 취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일당독재의 폐해와 언론자유, 인권 등 보편적 가치의 부재를 지적하는데.
=공산당 체제는 크게 보면 인권을 보장한다. 부족한 것은 단지 다당제일 뿐이다. 다당제는 사실 중국에 맞지 않는다. 서방은 인권과 보편 가치를 중시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중국 쓰촨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때 ‘당연하다’ ‘싸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예를 들어 미국의 유명 여배우 샤론 스톤은 “당해도 싸다”라는 발언을 했다. 중국이 티베트를 탄압했기 때문에 ‘인과응보’라는 식이었다. 이게 인권을 중시하는 태도인가? 그렇게 인권을 중시하고 인도주의 등의 보편 가치를 중시하는 미국이나 서방세계가 이라크와 옛 유고슬라비아 등지에서 저지른 일들을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들이 ‘국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일으킨 세계적인 전쟁과 유혈 사건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자들이 중국을 향해 감히 보편 가치를 떠들어댄다는 게 말이 되는가.

중국이 나아가야 할 가장 합리적인 방향은 뭔가.
=현재 중국에는 사유화를 둘러싸고 격렬한 좌우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의료, 교육, 부동산, 노동계약법 등의 시장화 문제 역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시장화에 반대한다. 특히 의료 방면의 시장화는 절대 안 된다. 이것들은 최소한의 사회주의적 요소다. 자유주의·개방파 지식인들은 국유경제를 없애고 전면적인 사유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국유경제는 보존돼야 한다고 본다. 최소한 국유경제가 경제의 선두 작용을 해야 한다. 경제에도 일정 정도 계획성이 보존돼야 한다. 경제적으로 중국은 상대적인 독립 자주를 해야 하고 대외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 중국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경제에서 주도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반드시 중국 기업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국유기업이 주도적 지위를 점해야 한다. 언론자유 등 민주주의 확대에 찬성하지만 서방식 민주주의는 절대 반대한다.

08. 08. 12.

P.S. 지면기사로 읽어보니 '연쇄인터뷰'의 두번째 편도 마저 실려 있다(http://h21.hani.co.kr/section-021003000/2008/08/021003000200808070722052.html). '체제비판자 허웨이팡 교수'와의 인터뷰인데, 같이 옮겨놓는다.

한겨레21(08. 08. 07) "정부의 통제는 달라진 게 없다”

“언론 자유도 없는데 무슨 자유로운 토론이 있고 논쟁이 있을 수 있나? 중국 공산당은 지식인들이 모여서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합의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모이지 말라, 토론하지 말라고 하는데 어떻게 진정한 논의가 이뤄지겠는가?”

허웨이팡 베이징대 법학과 교수는 생각보다 훨씬 ‘자유롭게’ 발언을 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간접화법을 통해 현 체제를 비판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것과 달리, 그는 일관되게 직접화법으로 얘기했다. 심지어 최근 들어 중국인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후진타오-원자바오 체제에 대해서도 “도대체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예전에 비해 변화된 건 거의 없고 개혁도 변죽만 울리고 있다. 언론·사상에 대한 통제는 예전보다 훨씬 강경해졌다. 그들이 뭔 일을 하고 있는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며 강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지난 2006년 3월4일, 중국 국무원 산하 경제체제 개혁연구회가 주최한 중국 시장화 개혁 방향 토론회(‘시산회의’로 더 유명하다)에서 일대 파장을 몰고 온 발언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 회의에서 “공산당은 헌법에 위배되는 조직”이라는 폭탄 발언을 한 데 이어, 공개적으로 다당제와 군대의 국가화, 전면적인 언론·집회의 자유 등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런 그의 발언이 외부에 알려진 뒤 인터넷을 중심으로 중국 정치 개혁에 관한 좌·우파 진영의 거센 논쟁이 일기도 했다. 지난 7월24일 오후 베이징대 앞 서점 ‘만성서원’에서 1시간30분가량 허 교수와 마주 앉았다.

올림픽은 중국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에 민주정치를 촉진하는 등 일련의 변화를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지난 2001년 올림픽 개최권을 따낸 이후 중국 내 많은 지식인들은 올림픽을 통해 중국 사회가 변화하길 희망했다.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가 확대되길 바랐다. 하지만 (티베트 시위 사건 등) 올해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과 그로 인한 올림픽 분위기 변화는 이런 희망이 사실상 실현되기 어렵게 만들었다. 올림픽 기간 중 일시적으로 언론·취재의 자유 등이 보장될 수 있겠지만 올림픽 뒤에는 다시 예전과 같은 통제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현재 중국 사회 발전 방향의 대세가 민주·개방으로 가는 것임은 확실하다. 사람들의 사상을 통제·압제하는 사회주의 관리 방식이 이미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인민들은 중국과 세계의 관계가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고, 시장경제와 합리적인 민주주의 제도를 통해 사회가 관리돼야 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3~5년 이내에 그다지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올림픽이 중국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 뿐이다.

장기적으로 중국 사회가 민주·개방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보는 근거는?
=중국인들은 이미 개방사회에 익숙해 있다. 사람들의 민주의식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일당 집권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인민대표대회가 공민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을지 여부, 정당과 군대의 관계, 언론 자유 등에 대해서도 생각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은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언론이 돼가고 있다. 이미 인터넷은 많은 지식인들이 정보를 얻는 주요한 경로가 됐기 때문에 강경한 언론 통제 체제는 조만간 유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중국은 지금 과도기에 처해 있다. 민주·개방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선 아직도 많은 장애가 도사리고 있고, 중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공통된 인식 기반도 없다. ‘무엇이 당연히 변화해야 하는 것들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한다.

개혁·개방 30주년이다. 개혁·개방은 국가와 사회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지고 왔나.
=개혁·개방의 가장 큰 성과는 빈곤을 줄였다는 것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개혁·개방은 확실히 성공했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조금의 변화가 생겼다. 개인들의 자유가 확대된 것이다. 예전에는 국가가 모든 개인을 통제했고 모든 개인은 자신의 ‘단웨이’(單位·회사나 기관)에 소속돼 모든 개인 행위를 통제받았다. 개혁·개방은 이런 통제에 변화를 가져왔고, 개인을 통제하던 단웨이 체제는 해체됐다. 그 결과 개인들은 일정한 자유를 갖게 됐다. 당과 정부, 공민의 관계에도 눈에 띄는 변화가 왔다. 당과 정부는 더 이상 인민들의 주인이 아니며, 정부의 말이나 마오쩌둥의 어록이 진리로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 심지어 국가 지도자의 일부 발언이 종종 사람들의 농담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중국 개혁·개방은 옛 소련의 개혁 방식과는 다르다. 소련의 개혁은 모든 것을 하룻밤 사이에 뒤집어엎었지만, 중국은 지난 30년간에 걸쳐 아주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했다. 특히 이데올로기의 변화는 다른 경제·사회 구조 변화에 비해 완만하게 진행되고 있다. 또 당과 정부의 통제 스타일에도 변화가 없다. 개혁·개방 뒤 중국 사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일 변화 중이지만 전체적인 변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3월14일 티베트 시위 사건 뒤 중국인들, 특히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반서방·애국주의 운동이 강하게 불고 있다.
=‘정보’의 문제다. 중국 정부는 사실 서방매체에서 보도한 내용 중 극히 편향적인 것들만 부풀려서 제공했다. 서방매체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중국 정부가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2007년 중국은 이미 외신들에게 취재 개방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티베트 문제에 대해 중국 정부는 서방매체의 취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것이 서방매체로 하여금 중국 정부를 비판하게 만들었다. 흔히 ‘80후 세대’라고 일컫는 중국 신세대들의 민족주의 열풍도 정부가 조장한 것이다. 신세대들은 자신들이 구세대에 비해 개방적이고 인터넷 등을 통해 정보를 많이 안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예를 들어 중국 정부는 문화대혁명 등과 같은 중국 정치사의 민감한 사건을 연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세대들은 문화대혁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며, 이 때문에 마오쩌둥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현상도 일어나고 있다.

티베트나 신장위구르족 통치정책은 서방인들 눈으로 보자면 제국주의 정책과 다를 바 없다. 자치구라고 하지만 사실상 자치가 허용되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은 농노 사회였던 티베트를 해방시켰고 경제를 건설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티베트인들은 독립을 원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인들의 생활방식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들의 종교 신앙을 존중하고 있는지다.

중국은 올림픽을 계기로 ‘중화민족이 일어서야 한다’고 말한다. 서방에서는 이런 중국의 부상을 ‘위협’으로 간주하는 시각도 있는데.
=중국 정부는 사실 예전만큼 강하게 ‘중국의 굴기’를 선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변 국가와 서방세계가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록 중국은 ‘평화로운 굴기’를 주장하지만, 외부에선 중국이 인권을 존중할 것인지와 외교에서 정의의 관점을 유지하는지 여부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단의 다르푸르 문제나 버마 군정 문제에서 중국이 취했던 자세를 들 수 있다. 서방 국가에서 중국의 굴기를 위협으로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최근 들어 중국 내 민족주의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과 중국의 정치제도가 예전과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외부 세계의 ‘중국 위협론’을 잠재우기 위해 중국 정부는 최근 ‘연성 권력’(소프트 파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얼마 전 쓰촨에서 지진이 났을때 <북경완보>와 <남방주말>이라는 두 유력지 간에 재밌는 논쟁이 있었다. <남방주말>은 기사에서 지진을 통해 중국은 생명이나 인권·인도주의에 대한 ‘재발견’을 했고, 이것은 중국 사회가 인류의 보편적 가치 기준을 향해 진보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북경완보>는 반박 기사를 통해 그것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공산당이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이며, 지진 극복 과정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 얼마나 웃긴 말인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마저도 부정하는데, 무슨 ‘소프트 파워’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 먼저 우리 사회 내부에서 논쟁의 자유와 언론집회의 자유 등이 보장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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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 2008-08-12 23:05   좋아요 0 | URL
'구좌파'군요. 사실 이런 중국 지식인들은 널린거 같습니다.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다수인 듯도 하지만... 사실 요즘 '대화'가 통할만한 지식인이 얼마나 되는지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가 가장 궁금합니다.

로쟈 2008-08-12 23:23   좋아요 0 | URL
네, 상식적으론 '특이한' 포지션인데, '다수'인 모양이군요. 그게 '모순적인 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vol 2008-08-13 13:28   좋아요 0 | URL
저도 중국은 잘 모르지만, 중국 전공한 분들한테 줏어들인 얘기입니다. 좀 단순하게 얘기하면 '비판적'이라는게 대개 정부와 미국에 비판적이라는 뜻이고 '진보적' 이라는건 자유주의자라는 뜻이라더군요. 지식인이라고 하면 저 둘 중 하나라고 보면 그리 틀리지 않다고... 그런데 비판적이면서 좌파이면서 민족주의인 모순적인 경우는 이미 한국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잇엇지 않습니까? 그게 모순적이다못해 이제는 반동적이기까지 하지만요. 국내에 소개된 저자로 따지면 쑨거, 왕샤오밍 같은 사람이 그나마 비판적이면서 자유주의자는 아니면서 중화주의자도 아니라더군요.

로쟈 2008-08-13 22:01   좋아요 0 | URL
네, 그렇군요. 진보주의자에 대한 정의는 러시아와 비슷하네요. 러시아에서도 진보주의자는 자유주의자이지요. 반대로 보수주의자는 공산주의자를 가리키고요...

로쟈 2008-08-14 08:59   좋아요 0 | URL
유태인과 중국인의 상술을 비교하는 건 자주 접하지만, 제가 과문해서인지 유태인과 중국인이 대표적인 디아스포라라는 건 처음 듣습니다. 참고할 만한 책이 있으신지요?..

로쟈 2008-08-15 14:28   좋아요 0 | URL
유태인의 경우엔 2천년간 국가가 없어서 '디아스포라로서의 유태인'이란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중국은 경우가 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위키피디아에도 주로 20세기에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많아진 걸로 나와 있고요. 그리고 모든 중국인을 '화교'라고 하는 건 아니니까 구별해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디아스포라의 개념에 대해서 제가 특별히 오해하고 있는 것인가 해서 질문을 드렸던 것이구요...

로쟈 2008-08-16 09:29   좋아요 0 | URL
통계를 보니 소위 '화교'가 4천만쯤 되는군요. 재외 한국동포가 6백만입니다. 당연히 중국 디아스포라의 숫자가 훨씬 많지만 인구비율을 놓고 보자면 한국이 훨씬 더 높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산'으로 인한 고통은 한국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구요. 저는 중국인 좌파지식인이 "당신들이 뭘 알아?"라고 특권적으로 말할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섬나무 2008-08-19 15:23   좋아요 0 | URL
음...미묘하고 미세한 감성의 차이 같은데 좀 더 근원적인 차이네요.
로쟈님 건재하셔서 감사하구요...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솔제니친과 관련한 칼럼이 눈에 띄어서 옮겨놓는다. 인권에 관한 책들을 연이어 출간하고 있는 조효제 교수의 칼럼인데, '진보의 복합적인 현실인식'을 주문하고 있다. '모든 억압에 대한 저항'을 진보로 포용하자는 취지이다.

한겨레(08. 08. 08) 솔제니친과 진보의 복합적 현실인식

며칠 전 타계한 솔제니친만큼 평생을 격렬한 논쟁 속에 산 사람도 없을 것이다. 소련 당국은 그를 반역자로 몰았다. 그의 러시아 민족주의 경향은 사르트르와 같은 서구 좌파 지식인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를 반소 지성인의 상징으로 칭송하던 서구의 우파 지식그룹은 그가 구미의 도덕적 타락과 방종, 물신숭배를 비난하기 시작하자 반자유주의자로 낙인찍었다. 일각에서는 그를 반유대주의자라고 비판했다. 1994년 그가 오랜 망명생활 끝에 귀국하자 전통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던 <모스크바 타임스>는 ‘호메이니의 귀환인가?’라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설왕설래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신뢰였다. 로버트 인차우스티가 보기에 그는 사라진 사람들과 억눌린 사람들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로 쓴 현대의 사가였다. 이렇게 본다면 그는 민주파들이 경청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우리 진보·개혁 진영에서 솔제니친은 많이 읽히지도, 크게 주목받지도 못했다. 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우리의 비판적 지성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아보는 것과 같다.

우선, 솔제니친이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던 때 우리는 군부독재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반독재 투쟁을 벌이고 있던 민주화 진영은 솔제니친의 메시지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둘째, 한국의 극우보수 세력이 솔제니친을 철저히 자기들 입맛에 맞게 왜곡했다. 문화계의 이데올로그들은 그를 최고의 반공작가로 떠받들었다. 남한에 있었더라도 반체제 민주인사가 되었을 인물을 엉뚱한 존재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이런 왜곡된 시대상황에서 진보·개혁 진영이 솔제니친을 균형 있게 인식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솔제니친의 서거를 계기로 이제 우리 진보·개혁 진영의 지적 역량에 얼마만한 여유 공간이 있는지 점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모든 정치권력은 어떤 이념이든 억압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고, 그 모든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진정한 진보라는 복합적인 인식을 가져보면 어떨까?


진보·개혁 진영이 이런 태도를 지닐 때 진보 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 현실의 뉘앙스와 아이러니를 깊이 이해하는 세련된 세력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어째서 그런가? 그런 태도는 사울 알린스키의 표현대로 일반대중의 욕망과 희비의 결을 ‘그래야만 하는’ 렌즈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렌즈로 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태도는 진보·개혁 진영에서 등에 구실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오도록 장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진보·개혁 진영은 더욱 풍부한 콘텐츠로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가령 서울시 교육감 선거를 보라. 그것은 지난해 말 대선과 올봄 총선에 이은 보수 선거혁명 3부작의 완결판이었다. 한국 보수세력의 능수능란함이란! 비비케이(BBK), 인사파동, 광우병, 촛불집회, 남북관계, 독도주권, 외교참패 등 현실정치의 온갖 악재를 선거 이벤트로써 단숨에 돌파하지 않았는가. 대선에선 항의 성향 투표를, 총선에선 욕구 지향 투표를, 교육선거에선 계급 취향 투표를 교묘하게 동원하여 기어코 권력의 핵심 제도들을 움켜쥐고야 마는 저 모습을 보라.

이게 우리의 솔직한 현실이다. 단기간의 선명한 투쟁만으론 이길 수 없는 현실이다. 싸울 때는 안경 벗고 싸우더라도 세상을 읽을 때엔 다초점 렌즈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최근 어느 진보적 출판인으로부터 아서 케슬러의 <한낮의 어둠>을 번역·출간할 계획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복합적인 현실인식의 좋은 사례가 아닐까 한다.(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08. 08. 08

P.S. 칼럼 말미에서 언급되고 있는 아서 케슬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3)은 한길 세계문학의 한 권으로 묶여서 출간된 적이 있다.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었다. 이 책에 대해서는 '폭력이란 무엇인가'(http://blog.aladin.co.kr/mramor/1747960)란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어느 진보적 출판인이 아서 케슬러의 <한낮의 어둠>을 번역·출간할 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복합적인 현실인식의 좋은 사례"로 지목된 것은 이 책이 스탈린시대의 숙청을 비판한 일종의 '반공문학'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메를로퐁티는 <휴머니즘과 폭력>(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이러한 케슬러의 입장을 비판한 바 있다('쾨슬러의 딜레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이 가장 유익한 참고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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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8 12:43   좋아요 0 | URL
저는 부하린 재판과 박헌영 재판을 비교연구해보고 싶습니다.저의 필생의 소원입니다.문학작품으로는 부하린 재판을 다룬 한낮의 어둠.그리고 박헌영 재판을 직접 다루진 않지만 해방공간에 미군정이 남로당 핵심에 정보원을 심었음을 소설가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마쓰모도 세이죠<북으로 간 시인 임화>를 연구목록에 넣고 있습니다.이 소설은 북한에서도 남로당 노선비판할 때 중요한 교재로 쓰였습니다.

로쟈 2008-08-08 14:46   좋아요 0 | URL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를 꼭 읽어보시길...

노이에자이트 2008-08-09 00:08   좋아요 0 | URL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에 나오는 부하린 재판을 비롯한 대숙청 작업에 대한 스탈린 주의적인 해석은 결국 숙청도 혁명을 위해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다는 식의 변명이라고 봅니다.지젝이 카프카를 인용한 것은 스탈린 식의 이런 변명을 거부하면서 부하린을 비롯한 당시의 숙청대상자들은 난 데 없이 죄인이 되었다는 비판이죠. 그 밑바탕엔 당시 재판정에 선 피고들은 소련을 무너뜨리려는 외국세력의 앞잡이라는 소련 당국측의 견해 자체가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하지만 남로당 지도부는 상당수가 미군정에 포섭되어 있었음이 해제문서를 통해 밝혀졌습니다(정창현 <인물로 보는 북한 현대사>).임화도 그렇고 이강국도 그렇구요.물론 박헌영 자신이 포섭된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죠.그래서 제가 <북으로 간 시인 임화>를 언급한 겁니다.거기엔 연세대 설립자 집안인 언더우드가가 미군정의 앞잡이로 나옵니다.

로쟈 2008-08-09 00:05   좋아요 0 | URL
미군에 포섭됐었다는 건 확정적인 건가요? 한데, 만약에 사실이 그랬다면 아무런 미스터리도 없는 것 아닌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9 00:14   좋아요 0 | URL
예.우리나라 신문에서도 그게 나왔습니다.정창현 책엔 그 문서 번호까지 나와 있구요.방선주와 기광서가 확인했습니다.정병주 씨도 인정했구요.그런데 학계에서는 아직도 수용을 안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작년에 나온 심지연<이강국>에서도 이강국이 북한에서 희생되었다...그런 식이구요.여하튼 마쓰모도 세이죠는 문서해제가 되기 전에 거의 정확히 짚은 거죠.

로쟈 2008-08-10 00:31   좋아요 0 | URL
미 군정문서인가 보군요. 그 경우엔 소련측 문서보다는 신빙성이 있을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0 21:01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미군 방첩대 문서죠.하지만 저는 북한 것을 복사한 것이나 한민전(이런 단체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에서 나온 남로당 비판서는 적당히 에누리해서 읽습니다.박헌영 재판 기록은 구할 수 있습니다만 그걸 소재로 삼은 소설이나 논문이 없고 부하린 재판을 다룬 소설이나 평론은 있는데 국내에선 재판기록을 구할 수 없지요.부하린 기소의 이유가 독일과 일본의 간첩들이 준동한다! 였는데 아예 첩보의 역사를 읽어보려고 해요.박헌영 사건도 아예 남과 북 그리고 미군정 첩보전까지 다뤄보려고 합니다.인문 사회 하는 이들은 군사 첩보분야를 멀리하고 군사 첩보 연구하는 이들은 인문 사회적 시각이 부족하여 문제이니 아예 두 분야를 함께 해보려구요.
제가 부하린 재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우리나라 연구서인 김남국<부하린:혁명과 반혁명의 사이>(문학과 지성사1993)을 읽은 후부터예요.이 책을 통해 <한낮의 어둠>과 <휴머니즘과 테러>에 대해 알게 되었죠.

로쟈 2008-08-10 21:33   좋아요 0 | URL
저도 철학적으론 관심있는 테마인데, 엄두는 잘 나질 않습니다. 김홍우 교수의 <현상학과 정치철학>에도 관련 논문이 들어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0 21:55   좋아요 0 | URL
오...감사합니다.내일 낮 도서관에서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로쟈 2008-08-10 22:03   좋아요 0 | URL
시립도서관들은 보통 월요일에 휴무 아닌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1 11:31   좋아요 0 | URL
격주로 쉬니까 문 연 곳에 가면 됩니다.오전 일 끝내고 이제 왔습니다.저쪽 도서관은 오늘 쉬는 날!

로쟈 2008-08-11 20:09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2 23:18   좋아요 0 | URL
현상학과 정치철학 중 관심가는 논문을 봤습니다.케슬러가 인간을 콤미싸르 형과 요기 형으로 분류하여 후자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태도는 이사야 벌린의 자유관과 비슷하더군요.그리고 이 책의 제일 첫번 논문인 행태주의에 관한 글은 경제학의 방법론까지 다루어 매우 유용했습니다.이 부분을 좀 더 정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사회실재론과 사회명목론의 대결은 최근에 관심을 갖는 쟁점이라서요.

로쟈 2008-08-12 23:21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나중에 세미나라도 해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12 23:48   좋아요 0 | URL
근데 메타이론 쪽의 독서는 두뇌소모가 엄청나서 괴롭습니다.개별학문 분과를 넘어서 버리니까요.
 

한겨레21에서 '김창진의 제국의 그늘' 마지막회를 스크랩해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5000/2008/07/021165000200807300721026.html). 미국 경제가 '뚜렷한 쇠퇴 경향'을 보인다는 기사들이 최근 자주 눈에 띄는데, 그런 경향의 '배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해준다(우리가 '쇠고기 선물'도 받은 만큼 어려움에 처한 미국을 돕기 위해 '금 모으기'라도 해야 할까?). 우리는 이 '뚜렷한 쇠퇴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겨레21(08. 07. 30) 두 번째 위협이 내부에서 터져나온다

인간의 역사에서 ‘제국’은 정치적 꿈의 최대치를 표현한다. 그것은 계급·성별·지역·종교 간 이해관계의 차이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권력을 통해 지배의 욕망을 거의 완벽히 구현하려는 정치체제다. 하지만 제국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정복과 억압을 넘어 그것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질서와 안정, 곧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또는 대동아공영권 따위로 명명된, ‘제국의 힘에 의한 평화’는 그 추종자들에게 당대 문명이 이룬 최고의 업적으로 추앙된다.



제국, 한여름 밤의 꿈
그러나 제국은, 좀더 넓고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결국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뤘다고 자부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보는 소극적인 관점을 인정하더라도, 제국의 총칼과 군함, 미사일 아래 모욕당한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를 헤아리지 못하는 편협한 질서다. 제국은 한 번도 세계평화를 이룬 적이 없고, 심지어 제국의 경계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저항의 싹이 움트고 모반이 숲 속의 버섯처럼 소리 없이 자란다. 카를 마르크스의 비유를 모방하자면, 제국은 그 자신의 거대한 몸속에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다.

2001년 9·11 동시테러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세계평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며 제국의 꿈에 취해 있던 미국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날벼락이었다. 그것은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질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을, 대다수 세계인들이 백악관과 할리우드가 선전하는 미국의 꿈에 취해 있지 않다는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준 충격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미국인들을 달콤한 제국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벌이고, 7개의 ‘불량국가’와 3개의 ‘악의 축’을 지목해, 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야기함으로써 세계를 더욱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제 두 번째 도전이 바로 제국의 내부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지난 세기 미국인들이 누려왔던 ‘우월한 문명과 풍요로운 일상생활’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뚜렷한 쇠퇴 경향이다. 최근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투기 자본가들이 거듭해 ‘생애 최대의 위기’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단지 미디어를 의식한 제스처일까? 혹자는 향후 몇 년간 미국 경제가 겪게 될 혹독한 경기 후퇴는 1930년대 대공황기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될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곪아터지기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올해 들어 경제 전반을 강타한 국제적인 고유가의 여파로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은 중대한 조정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최근 〈CNN방송〉의 조사에 따르면, 폭등하고 있는 휘발유값 탓에 여름휴가 계획을 축소하는 등 생활 태도를 변경하겠다는 응답자가 10명 중 9명에 달했다. 그나마 휴가를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지난 몇 년간 은행들이 선심 쓰듯 마구 내준 주택담보 대출 덕분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고 좋아하던 수천만 명이 앞으로 몇 년간 그 집을 잃고 중산층의 꿈을 접어야 할 판이다. 부동산 전문 사이트 ‘리얼티트랙’이 7월10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중 미국 전역에서 대출 할부금을 제때 내지 못해 주택을 차압당한 비율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53% 급증했다. 전국적으로 500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했고, 캘리포니아의 일부 지역에선 72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미 전역에서 150만 가구에 달했던 차압 사태가 올해에는 약 250만 가구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가구당 부채, 대공황기와 비슷
미국 경제를 덮고 있는 음울한 구름은 이것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인들의 가구당 평균 부채는 11만7962달러(약 1억1800만원)에 달한다. 이는 대공황기인 1930년대 수준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빚이 없는 가구는 1957년 42%에서 2004년 24%로 줄어들었다. 대신 가구당 저축액은 단 392달러(약 40만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이는 미국인들이 37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전국의 교회들이 빈민구제 사업을 중요한 사업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지난 7년간 ‘테러와의 전쟁’에 약 7천억달러(약 700조원)를 쏟아부었다.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 취미가 있는 자본가 정부 탓에 미국이라는 국가는 지금 해외 각국에 진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매월 30억달러(약 3조원)를 빌려와야 한다. 미국 정부와 일반 가계가 완전히 빚더미에 올라 있는 셈이다. 채무도 자산이라는 회계장부의 마법이 과연 언제까지 통할 것인가?

지금은 미국의 군사력과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 세계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냉전 시기도 아니고, 19세기 세계제국이던 영국이 1차 대전으로 사실상 파산 상태에 몰려 있던 20세기 초반도 아니다. 유로화에 비해 달러가 계속 힘을 잃고 미국 경제가 더 이상 세계경제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라시아의 경쟁국들이 더욱더 부상하게 되면, 필경 미국이라는 이름의 ‘안전 자산’ 신화도 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제국의 역사에서 사태가 항상 일직선적으로 파국을 향해 가는 것만은 아니다. 일시적인 침체를 이겨내고 회복기에 들어서거나 심지어 과거보다 더 강해지는 경우도 가끔씩 관찰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하강 국면에 접어든 제국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정하고 제국 체제에 내재한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지배 엘리트의 전략적·정책적 선택이 존재하며, 그 방향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국의 힘과 영향력은 언제나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선도적인 혁신 능력과 기술적·경제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국의 이익을 누구보다 더 많이 누려온, 사회 곳곳에 포진한 기득권 집단의 완고한 저항을 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안팎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적절하게 위기를 극복한 제국들은 결코 흔하지 않다. 지금 미국은 기로에 서 있다. 설령 제도권 정치인 버락 오바마(민주당)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과연 미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제국의 생활양식을 조정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판에, 존 매케인(공화당)이 당선된다면 그것은 미국인들 스스로 파국을 재촉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때
벌거벗은 군사력만으로 세계제국을 유지하기에는 21세기 지구는 너무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다. 그 군사력마저 유지할 경제력이 소진돼가는 마당에 더 말해 무엇하랴.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름으로 세계를 구원한다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제국적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08. 08. 03.

P.S. 페터 벤더의 <제국의 부활 - 비교역사학으로 보는 미국과 로마>(이끌리오, 2006)처럼 한때 미국을 로마 '제국'에 비유(하면서 비교)하는 책들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비유를 계속 이어받자면 이번에 새로 완역돼 나온(총 여섯 권 중 두 권이 먼저 나왔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민음사, 2008)는 단지 역사책으로만 읽히지 않을 듯하다. '미 제국주의 쇠망사'로도 읽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제국의 그늘'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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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8   좋아요 0 | URL
6월엔가 미국 현지 취재에서 봤는데 미국 디트로이트는 완전히 유령의 도시더군요.자동차 산업 완전 붕괴로요.그리고 플로리다는 비우량 담보대출 때문에 어떤 동네는 전체가 차압 딱지 가 붙어 있구요.정말 무시무시하더군요.

로쟈 2008-08-03 20:32   좋아요 0 | URL
말로만 듣던 '종말'이 오려나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2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런 낙오자를 양산해야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도 해봅니다.그렇다면 이건 종말보다 더 무섭죠.

로쟈 2008-08-03 21:23   좋아요 0 | URL
그렇긴 하지만 낙오자도 '임계치'가 있지 않을까요. 양질전화가 되는, 폭발하게 되는...
 

교수신문에서 좀 지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국 칭화대에서 공자철학을 강의하는 서양인 교수에 관한 것이다. '화제'거리여서 옮겨놓는 건 아니고(하지만 한국대학에서 퇴계철학을 강의하는 벽안의 교수를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롭긴 하다), 기사 중에 한국 기독교인을 가리켜 '유교적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는 대목이 눈에 띄어서이다(사실 한국 기독교인들도 제사를 거부하는 것 말고는 유교적 인간 아닌가?). 참고할 만한 관련서들을 잠시 생각해본다(찾아보니 '윤동주 시에 나타난 유교적 기독교'를 다룬 논문도 눈에 띈다).  

교수신문(08. 07. 07) 碧眼의 이방인은 ‘유교’를 어떻게 가르칠까

중국대학에서 서양인이 공자철학을 중국인에게 가르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다니엘 벨 (Daniel A. Bell) 중국 칭화대학 교수가 종종 듣는 말이다. 유교의 종주국에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유교를 강의한다는 것은 마치 뭍에 사는 토끼가 물에 사는 고기에게 어떻게 헤엄치는가를 가르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벌써 4년째 하고 있다.

 

캐나다인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던 벨 교수는 운명을 바꾸는 만남에 마주쳤다. 바로 중국인 부인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중국에 ‘올인’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을 순순히 받아들인 벨 교수는 그 후로 중국에 와서 중국인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고 있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살려는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 복도 굴러왔다. 그는 방문교수 신분으로 왔지만, 현재 중국 명문 칭화대학 정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교수직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박사학생 지도교수’ 자리에까지 빠르게 승진했다.

벨 교수는 칭화대학이 문화혁명(1966~1976)이후 처음으로 인문학부에 채용된 외국인 교수다. 그는 또한 중국지도층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공산당간부 양성의 산실인 공산당중앙학교에서 열린 비공개회의에 초대받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紙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그는 중국에 온 이후 발견한 서양인의 중국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예를 들면 “중국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전제주의 국가가 아니다. 대부분 서양국가의 중국에 대한 생각과 정책은 중국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비하면 중국은 학문자유의 천국이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이런 ‘중국옹호’의 발언과 그가 중국인 부인을 둔 사실, 그리고 중국에서 받는 특별한 대접 때문에 많은 서양 사람들은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공산당에게 세뇌당한 줄 알아요,” 그가 칭화대 부근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사실 그는 중국에 대해 좋은 점만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중국에 대한 직언도 서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정부가 1989년 ‘천안문사태’의 희생자들에게 사과를 표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대부분의 중국인은 그 때 중국정부가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그처럼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현재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정부가 좀 더 ‘안정적이고 합법적이게’(stable and legitimate) 되면 언젠가는 사과를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하버드대 유교학자 뚜웨이밍(杜維明) 교수는 한 강의 시간에서 유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동양의 중국, 한국, 일본 중 한국의 유교전통이 종주국 중국보다 현재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유교학자로서 다니엘 벨 교수 역시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개화기때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다름 아닌 유교학자들이었다. 서양학자들은 이들을 ‘유교적 기독교인’(Confucian Christian)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않아 성경책을 읽었고, 교회에 가서는 남녀가 따로 앉아서 찬송가를 불렀다. 기독교인인지만 생활방식은 여전히 유교적인 모습을 유지한 것이다. 벨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유교적 기독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교사상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역할도 했다고 분석했다.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대학교수의 사회적 권위가 큽니다. 그들의 말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에 이에 반대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성명은 당시 정부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문화혁명뒤 유교가 많이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르크스 사상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와 지식인들도 새로운 눈으로 유교를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벨 교수가 말했다.(써니 리 / 중국통신원·베이징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08. 08. 01.

P.S. 나는 한국인을 이해하는 키워드, 혹은 '문화적 DNA'가 '유교' '기독교' '한국전쟁'이 아닐까 싶었는데(10가지 코드는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 참조), '유교적 기독교인'이란 개념 덕분에, 둘로 줄일 수 있게 됐다. 그런 관심 때문에 언제부턴가 읽어보려고 하는 책은 '벽안'의 도이힐러 교수가 쓴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과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나무, 2007)이다. 리뷰들이야 여럿 읽어뒀지만 아무래도 직접 통독해봐야 생각할 거리들을 더 얻을 수 있을 듯하다...

P.S.2. 말이 나온 김에 도이힐러 교수의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한국학 전공자인지라 방한이 이례적인 건 아니고 작년 가을에도 한국을 찾았었다('한국사회의 기독교적 변환'이란 책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곧 이명박 장로님이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할 텐데 말이다).

경향신문(07. 10. 11) 도히힐러 교수 “한국인들 한국학을 몰라”…‘지원 인색’ 꼬집어

“한국에서는 아직 ‘한국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72)는 11일 서울대 규장각에서 열린 ‘도이힐러 교수와 함께 한국학 40년을 회고한다’ 토론회에서 한국학의 국제화 수준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한국학이 개설된 외국 대학에도 담당교수 1명이 어학, 역사, 문학, 경제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한국학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고 질타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특히 국내 한국 관련 학문 연구자의 의사소통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한국 학계에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연구자가 거의 없어 외국연구자와 토론하는 데 애를 먹는 일이 많다”고 지적하고 “한국사를 연구하더라도 국제화를 추구한다면 의사소통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위스 출신인 도이힐러 교수는 40년 전인 하버드대 유학시절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1967년 한국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서울대 규장각을 찾아왔다. 도이힐러 교수는 “하버드대에서 구한말 외교사를 공부하던 중 서울대에 개항과 관련된 사료가 풍부하게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67년에 무작정 한국을 찾아왔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한국학의 매력에 푹 빠져든 도이힐러 교수는 73년에 다시 한번 한국을 찾았고, 75년에 스위스 취리히대 한국학 교수로 임용됐다. 88년 한국학 연구센터가 있던 런던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한국학의 불모지인 유럽에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다.

그는 92년 자신의 한국학 연구를 결산한 ‘한국의 유교적 변환: 사회와 이데올로기연구(하버드대 출판부)’를 발간, 한국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런던대 퇴임 후에도 취리히로 돌아가 한국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내 젊음을 바친 한국학을 더 파고들겠다”면서 “조선시대 사회사를 대한 논문도 곧 집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강병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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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25   좋아요 0 | URL
도이힐러 여사는 2003년 경에도 우리나라에 왔죠.한국남자와 결혼했는데 사별했고 한국에 올땐 시댁을 방문한다고 합니다.그런데 인터뷰 기사를 보면 조선유교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해석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마치 계몽사상 이전 유럽 지식인들이 중국의 관료정치인들을 칭찬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 같았어요.예전에 김용옥 씨가 "서양인이 어떻게 한문문헌을 잘 해독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지 말라.우리나라 학자보다 한문해석 실력이 더 뛰어난 이도 많다."고 했죠.그리고 도서관에 가시면 이번에 개정판 나온 이인화<머나먼 제국>뒤에 서평으로 나온 도날드 베이커(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 교수)의 글을 읽어보세요.그는 천주교를 수용한 조선 후기 유학자를 연구한 학자입니다.티비에서 보기도 했는데 정말 한국어를 잘 합니다.

로쟈 2008-08-02 20:15   좋아요 0 | URL
한국인이 서양학문을 하는 것보다 두 배는 어려울 텐데(적어도 우리는 무얼 읽어야 하는지는 알고 시작하지요), 여하튼 배울 점이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53   좋아요 0 | URL
미국인 중 한국학하는 이들 중에선 평화봉사단 출신이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