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서 '김창진의 제국의 그늘' 마지막회를 스크랩해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5000/2008/07/021165000200807300721026.html). 미국 경제가 '뚜렷한 쇠퇴 경향'을 보인다는 기사들이 최근 자주 눈에 띄는데, 그런 경향의 '배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해준다(우리가 '쇠고기 선물'도 받은 만큼 어려움에 처한 미국을 돕기 위해 '금 모으기'라도 해야 할까?). 우리는 이 '뚜렷한 쇠퇴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겨레21(08. 07. 30) 두 번째 위협이 내부에서 터져나온다

인간의 역사에서 ‘제국’은 정치적 꿈의 최대치를 표현한다. 그것은 계급·성별·지역·종교 간 이해관계의 차이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권력을 통해 지배의 욕망을 거의 완벽히 구현하려는 정치체제다. 하지만 제국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정복과 억압을 넘어 그것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질서와 안정, 곧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또는 대동아공영권 따위로 명명된, ‘제국의 힘에 의한 평화’는 그 추종자들에게 당대 문명이 이룬 최고의 업적으로 추앙된다.



제국, 한여름 밤의 꿈
그러나 제국은, 좀더 넓고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결국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뤘다고 자부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보는 소극적인 관점을 인정하더라도, 제국의 총칼과 군함, 미사일 아래 모욕당한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를 헤아리지 못하는 편협한 질서다. 제국은 한 번도 세계평화를 이룬 적이 없고, 심지어 제국의 경계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저항의 싹이 움트고 모반이 숲 속의 버섯처럼 소리 없이 자란다. 카를 마르크스의 비유를 모방하자면, 제국은 그 자신의 거대한 몸속에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다.

2001년 9·11 동시테러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세계평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며 제국의 꿈에 취해 있던 미국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날벼락이었다. 그것은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질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을, 대다수 세계인들이 백악관과 할리우드가 선전하는 미국의 꿈에 취해 있지 않다는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준 충격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미국인들을 달콤한 제국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벌이고, 7개의 ‘불량국가’와 3개의 ‘악의 축’을 지목해, 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야기함으로써 세계를 더욱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제 두 번째 도전이 바로 제국의 내부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지난 세기 미국인들이 누려왔던 ‘우월한 문명과 풍요로운 일상생활’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뚜렷한 쇠퇴 경향이다. 최근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투기 자본가들이 거듭해 ‘생애 최대의 위기’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단지 미디어를 의식한 제스처일까? 혹자는 향후 몇 년간 미국 경제가 겪게 될 혹독한 경기 후퇴는 1930년대 대공황기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될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곪아터지기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올해 들어 경제 전반을 강타한 국제적인 고유가의 여파로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은 중대한 조정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최근 〈CNN방송〉의 조사에 따르면, 폭등하고 있는 휘발유값 탓에 여름휴가 계획을 축소하는 등 생활 태도를 변경하겠다는 응답자가 10명 중 9명에 달했다. 그나마 휴가를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지난 몇 년간 은행들이 선심 쓰듯 마구 내준 주택담보 대출 덕분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고 좋아하던 수천만 명이 앞으로 몇 년간 그 집을 잃고 중산층의 꿈을 접어야 할 판이다. 부동산 전문 사이트 ‘리얼티트랙’이 7월10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중 미국 전역에서 대출 할부금을 제때 내지 못해 주택을 차압당한 비율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53% 급증했다. 전국적으로 500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했고, 캘리포니아의 일부 지역에선 72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미 전역에서 150만 가구에 달했던 차압 사태가 올해에는 약 250만 가구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가구당 부채, 대공황기와 비슷
미국 경제를 덮고 있는 음울한 구름은 이것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인들의 가구당 평균 부채는 11만7962달러(약 1억1800만원)에 달한다. 이는 대공황기인 1930년대 수준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빚이 없는 가구는 1957년 42%에서 2004년 24%로 줄어들었다. 대신 가구당 저축액은 단 392달러(약 40만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이는 미국인들이 37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전국의 교회들이 빈민구제 사업을 중요한 사업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지난 7년간 ‘테러와의 전쟁’에 약 7천억달러(약 700조원)를 쏟아부었다.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 취미가 있는 자본가 정부 탓에 미국이라는 국가는 지금 해외 각국에 진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매월 30억달러(약 3조원)를 빌려와야 한다. 미국 정부와 일반 가계가 완전히 빚더미에 올라 있는 셈이다. 채무도 자산이라는 회계장부의 마법이 과연 언제까지 통할 것인가?

지금은 미국의 군사력과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 세계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냉전 시기도 아니고, 19세기 세계제국이던 영국이 1차 대전으로 사실상 파산 상태에 몰려 있던 20세기 초반도 아니다. 유로화에 비해 달러가 계속 힘을 잃고 미국 경제가 더 이상 세계경제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라시아의 경쟁국들이 더욱더 부상하게 되면, 필경 미국이라는 이름의 ‘안전 자산’ 신화도 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제국의 역사에서 사태가 항상 일직선적으로 파국을 향해 가는 것만은 아니다. 일시적인 침체를 이겨내고 회복기에 들어서거나 심지어 과거보다 더 강해지는 경우도 가끔씩 관찰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하강 국면에 접어든 제국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정하고 제국 체제에 내재한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지배 엘리트의 전략적·정책적 선택이 존재하며, 그 방향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국의 힘과 영향력은 언제나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선도적인 혁신 능력과 기술적·경제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국의 이익을 누구보다 더 많이 누려온, 사회 곳곳에 포진한 기득권 집단의 완고한 저항을 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안팎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적절하게 위기를 극복한 제국들은 결코 흔하지 않다. 지금 미국은 기로에 서 있다. 설령 제도권 정치인 버락 오바마(민주당)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과연 미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제국의 생활양식을 조정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판에, 존 매케인(공화당)이 당선된다면 그것은 미국인들 스스로 파국을 재촉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때
벌거벗은 군사력만으로 세계제국을 유지하기에는 21세기 지구는 너무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다. 그 군사력마저 유지할 경제력이 소진돼가는 마당에 더 말해 무엇하랴.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름으로 세계를 구원한다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제국적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08. 08. 03.

P.S. 페터 벤더의 <제국의 부활 - 비교역사학으로 보는 미국과 로마>(이끌리오, 2006)처럼 한때 미국을 로마 '제국'에 비유(하면서 비교)하는 책들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비유를 계속 이어받자면 이번에 새로 완역돼 나온(총 여섯 권 중 두 권이 먼저 나왔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민음사, 2008)는 단지 역사책으로만 읽히지 않을 듯하다. '미 제국주의 쇠망사'로도 읽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제국의 그늘'일 테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8   좋아요 0 | URL
6월엔가 미국 현지 취재에서 봤는데 미국 디트로이트는 완전히 유령의 도시더군요.자동차 산업 완전 붕괴로요.그리고 플로리다는 비우량 담보대출 때문에 어떤 동네는 전체가 차압 딱지 가 붙어 있구요.정말 무시무시하더군요.

로쟈 2008-08-03 20:32   좋아요 0 | URL
말로만 듣던 '종말'이 오려나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2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런 낙오자를 양산해야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도 해봅니다.그렇다면 이건 종말보다 더 무섭죠.

로쟈 2008-08-03 21:23   좋아요 0 | URL
그렇긴 하지만 낙오자도 '임계치'가 있지 않을까요. 양질전화가 되는, 폭발하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