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이 '세계 책의 날'이라고 한다, 고 적고서 찾아보니 그 유래는 이렇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은 국제출판인협회(International Publishers Association: IPA)가 스페인정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제안한 '책의 날'에 러시아정부가 제안한 '저작권'의 개념이 포함되어 제정된 기념일이며, 4월 23일은 스페인 까딸루니아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했던 세인트 호르디(St. Jordi)의 날이자, 1616년 세계적 문호인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와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맨날 책 얘기들만 늘어놓는 처지에 그냥 지나가기도 뭐해서 관련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책에 미친 인간'들, 곧 '점잖은 미치광이'들을 다룬 책,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를 '책의 날의 책'으로 다룬 기사다.

 

한국일보(08. 04. 23) [오늘의 책<4월 23일>] 젠틀 매드니스

책 읽기에만 정신을 쏟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아니하는 이를 옛사람들은 ‘서치(書癡)’라 불렀다. 책만 읽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비아냥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며 <간서치전(看書癡傳)>이란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서음(書淫)’이란 말도 있다. 글 읽기를 지나치게 즐겨 음란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 그 음란은 결코 추하지 않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서구에도 책 사랑을 가리키는 비슷한 표현이 있다. ‘젠틀 매드니스(geltle madness)’라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변호사ㆍ하원의원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인쇄업자ㆍ도서수집가였던 자신의 할아버지 아이제이어 토머스를 가리켜 한 말이라 한다. ‘점잖은 미치광이’인 셈인데, 점잖게 풀어 쓰면 ‘가장 고귀한 질병, 즉 애서광증(愛書狂症)에 푹 젖어버린 분’ 정도가 되겠다.

<젠틀 매드니스>는 그렇게 책에 미친 인간들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가 고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젠틀 매드니스의 사례들을 방대한 자료수집과 취재를 통해 펼쳐놓는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아내가 죽자 자신의 시 원고들을 같이 묻었다가 7년 후 무덤을 파헤쳐 <시집>이란 책으로 출간한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이 시집은 하버드대 도서관에 있다), 다빈치의 과학에 대한 원고ㆍ삽화가 든 72쪽짜리 필사본을 경매에서 3,080만달러에 낙찰받은 빌 게이츠, 미국 전역 268개 도서관에서 2만3,600여권의 희귀본을 훔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컬렉션을 만든 책도둑 스티븐 블룸버그 등등.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번역본 분량이 자그마치 1,111쪽이다. 이런 책을 쓰고 번역하고 출판하고, 또 비싼 책값 주고 쇄를 거듭할 수 있도록 사서 읽으며 ‘문자의 독배를 들이켜는’ 독자들, 책사랑에 빠진 음란한 그들이 있기에 책은 저마다의 영혼을 갖게 된다. 오늘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다.(하종오기자)

08. 04. 23.

P.S. 나 또한 '책에 미쳤다'는 소리를 가끔씩 듣지만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건 이 책 <젠틀 매드니스>를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 일차적으론 그 부피와 무게와 책값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이지만 한편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책에 미친 당신에게'(http://h21.hani.co.kr/section-021152000/2008/04/021152000200804170706038.html)에서 언급되는 있는 '책에 관한 책들', 혹은 '비블리오 픽션'들에 대해 관심을 덜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예전에는 즐겨 읽었지만). 물론 이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점잖은 미치광이' 아니냐고 당신이 따져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하다. 약간 에누리해서 '점잖은 반미치광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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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4-23 22:24   좋아요 0 | URL
저는 출판사가 대견해서 '책장'에 '감금'시켜놨어요 ㅡ..ㅡ;;;
엄두가 안나요...

로쟈 2008-04-24 00:12   좋아요 0 | URL
쪼개서 읽으면 그래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요? 아예 3권짜리로 간주해서.^^

섬나무 2008-04-24 11:32   좋아요 0 | URL
그냥 미치광이 혹은 반미치광이가 훨씬 매력있네요. 책에 미쳤다는 것도 곰팡내 나는데 꼭 그걸 강조해서 점잖은 이라고 수식하는군요.하여간 어디든 미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인생 이지요.

로쟈 2008-04-24 18:05   좋아요 0 | URL
'미쳐도 좀 점잖게 미쳐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하도 종류가 많아서...

노이에자이트 2008-04-24 23:54   좋아요 0 | URL
제가 구입한 헌책 책갈피 속에서 찾은 귀한 것-백원짜리 지폐,70년대 우표,동독우표,임종석씨가 임수경 씨 방북선전한 유인물,김자옥 씨 20대 사진 등등...이기붕 씨가 추천사를 쓴 이승만 전기도 있는데 4,19 1년 전에 나온 것이라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더군요.

로쟈 2008-04-25 12:26   좋아요 0 | URL
헌책 '전문' 수집가신가요?^^

파란여우 2008-04-25 10:44   좋아요 0 | URL
오, 로쟈님도 안읽은 저 책을 저는 신나게 쫙쫙 읽었습니다.
반미치광이든, 온미치광이든 이 책을 읽지 않으셨다는 핑계로는 아닌걸요^^
생각보다 술술 읽혀지는 재미난 책입니다.
실제로 8백여쪽만 미치광이 얘기고 나머지는 참조자료라는~~~

로쟈 2008-04-25 12:26   좋아요 0 | URL
책은 안 읽었지만 여우님 리뷰는 읽었더랬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18   좋아요 0 | URL
주머니 사정 때문에 헌책방이나 고물상을 가다가 요즘은 공짜 맛에 아파트 폐지 수집일에 나오는 책들을 고릅니다.그런데 비오는 아침 일찍 우산 받치며 종이더미에서 이리저리 서성대는 모습이 보기엔 자세가 잘 안나옵니다만...가끔 좋은 책이 나오죠.

로쟈 2008-04-27 18:37   좋아요 0 | URL
웃음은 나오는데요.^^
 

출판 동향에 조금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최근 몇 년간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 2008)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알라딘에서만 그런가?). 그밖에도 '독서법'과 관련된 책들을 여럿 더 떠올려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챙겨둔다. 교수신문의 기획서평이며 필자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이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926).

교수신문(08. 04. 14) '방법으로서의 독서’가 유행하는 시대

책에 관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이런 규칙을 누구나 지켜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읽지 않은 책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말아야 하고, 글 한 줄도 써서는 안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고교 시절 『죄와 벌』을 읽다가, 쏟아져 나오는 러시아 사람들 이름에 기가 질려 책을 덮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죄와 벌』을 읽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은 『죄와 벌』에 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리 8대학교 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에서,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도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것은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요컨대 특정의 책 한 권 한 권이 아니라 책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선이 중요하다는 것.

사실 책과 독서에서 ‘소통과 연결선’이란 한 권의 책을 읽는 가운데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이미 모든 독서인이 어느 정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책 속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그 문장은 무수히 다른 책들 및 문장들과 差延하며 交織돼 있는 게 아니던가. 이러한 책과 독서의 진실은 이른바 하이퍼링크에서 더욱 분명하게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은 이른바 정보 리터러시(information literacy)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예컨대 노우웨어(know-where), 즉 유의미한 지식과 정보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 곧 ‘아는 것’이기도 하다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지식론과 바야르의 독서론은 일맥상통한다.



한편 독일 작가 마틴 발저는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미래의 창)에서 “글이 남긴 인상을 기억하는 것이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하고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값지다”고 말한다. 예컨대 발저는 젊은 시절 바이런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가 떠올리는 것은 당시 읽었던 바이런의 詩句가 아니다. 오히려 시를 읽을 때,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마당의 나무, 머리 위의 하늘, 마음에 차 있던 생각, 요컨대 시를 읽는 한 순간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이다.

그러한 발저가 자신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묻거나 나름의 해석이 맞는지 물어오는 학생들의 편지에 이렇게 답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나는 특별한 뜻을 두지 않았다. 독자 개개인이 스스로 느끼고 독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발저는 선생님들에게도 이렇게 부탁했다. “선생님이 두고 있는 의미에 얼마나 근접했는가에 따라 점수를 주지 말고, 학생 자신의 독서 경험을 전달하는 능력을 점수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발저는 계속해서 독서의 주관성 혹은 주체성을 강조한다. “책읽기는 음악을 듣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거기에서 악기는 우리 자신이다. 우린 연주한다.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횔덜린의 악보에 맞춰 연주하는 것이다.” “책이 우리의 내면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조금도 수동적이지 않다. 책에서 아픔과 불안이 나타날 경우, 그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아픔과 불안과 더불어 인생에 자극을 주지 못하면 책은 단지 종이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을 ‘사이와 연결의 독서론’, 마틴 발저의 독서론을 ‘주체성의 독서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입장은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오히려 깊이 상통한다. 역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독서에서 사이를 연결하는 주체는 독서인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야르와 발저의 독서론이 각각 프랑스와 독일의 지적 풍토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이다. 요컨대 두 입장이 깊은 지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상통하면서도, 바야르의 입장이 이른바 상호텍스트성에 보다 주안점을 두는 데 비해, 발저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주체성을 보다 강조한다.



다음으로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이다. 이 책은 앞의 두 책에 비해 훨씬 더 실용적이다. 작가 자신의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른바 슬로 리딩, 즉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책 속에 숨겨진 수수께끼와 비밀을 속속들이 발견하고 즐기기 위한 방법을 안내한다. 히라노의 슬로 리딩이 추구하는 바는 저자의 의도 그 이상의 흥미 깊은 내용을 독자 스스로 자유롭게 발견해내는 誤讀力을 기르는 것이다. 독자 나름의 이른바 창조적 오독이야말로 독자의 내면을 진정으로 성장시킨다는 것.

그렇다면 히라노가 말하는 슬로 리딩이란 단순히 책을 천천히 읽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책을 읽는 속도, 즉 시간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독서라고 하는 편이 낫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면, 책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주저 없이 이미 읽은 앞부분으로 되돌아가는 것,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슬로 리딩은 작자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언제나 오독력에만 의지하는 것과도 다르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도 늘 독선적인 결론만 이끌어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독선적인 책읽기는 창조적 오독과 거리가 멀며, 독자로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편협하게 만들 뿐이다.



한편 책 읽기와 책 쓰기에서 공히 달인이라 할 만한 사람, 바꿔 말하면 지식정보의 입력과 산출에서 공히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다치바나 다카시가 있다. 그는 이른바 논픽션 분야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머리와 발로 함께 쓰는 책, 다시 말해서 현실 문제에 착안해 직접 발로 뛰며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관련 도서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 쓰는 책에서 뛰어난 저자다. 그런 다치바나가 논픽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를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청어람미디어)에서 엿볼 수 있다.

“문춘(문예춘추)에 입사하자 한 선배로부터 ‘자네는 어떤 책을 읽나’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것저것 답변을 하고 보니 그게 온통 소설뿐이지 뭡니까. 그러자 그 선배가 ‘그런 것만 읽어선 안 되지. 논픽션도 읽게’라고 했어요. 엄청난 양의 문학서를 읽음으로써 남 못지않은 문화인입네 하고 있었지만, 실상 나 같은 문학 편식자는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가치 있는 책의 태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지요.”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적 필요성과 광범위한 지식에 대한 호기심 및 지식욕이 결합된 결과가 바로 다치바나의 지금까지의 지적 행로였다. 그런 다치바나의 독서 편력이 기록된 이 책을 읽어보면, 문필가적 상상력이나 창조성이라는 게 결코 골방에서 홀로 피워 문 담배 개피 수효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다치바나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영 같은 창작물의 세계는 시시하고 밑바닥이 너무 얕다.’ 물론 다치바나의 이러한 입장을 문학적 상상력 일반에 대한 질타라고 보기는 힘들며, 오히려 진정한 상상력이란 딱딱한 현실과 광범위한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저자인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은 매우 실용적이어서 ‘방법으로서의 독서’에 보다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견강부회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유달리 다양한 실용서가 발달한 일본의 출판 및 독서 풍토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에서도 우리는 일종의 독서인간학 같은 걸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다치바나의 경우, 독서하는 인간은 결국 좀 더 많이 좀 더 정확하게 인간과 세계를 알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다. 책의 우주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는 우주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독서론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매우 진지한 독서론의 범주에 드는 책이 있다. 미국 문학비평계의 거장 헤럴드 블룸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다. 2003년 9월 스티븐 킹이 전미도서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블룸은 이렇게 말했다. “싸구려 모험 소설이나 쓰는 작가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말에서 블룸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그는 서양 ‘주류 정통’ 문학 및 사상 전통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을 읽고 가르치는 이유에 관해 단지 세 가지 기준만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학적 훌륭함, 지적 능력, 그리고 지혜다. 사회적 압박이나 저널리스트 사이의 유행 때문에 한동안 이런 기준이 별로 주목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순한 시대물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진리와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블룸의 책 차림표가 플라톤과 호메로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 몽테뉴와 프랜시스 베이컨, 새뮤얼 존슨과 괴테, 에머슨과 니체, 프로이드와 프루스트, 토마스 복음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성경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철학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지혜를 천착하는 것이 블룸의 독서 목표인 것이다. 浮薄한 대중문화의 시대에 이러한 전통적인 正典의 가치와 의미를 재확인하고자 하는 불룸의 태도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서라는 행위가 지녔던 진정성과 어떤 숭고함 같은 것을 회복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블룸의 진지함은 시대착오적이기보다는 고전 르네상스라는 차원에서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들어와 독서에 관한 책들이 전에 없이 자주 출간되는 현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독서의 목적과 방법이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해지고,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의 의미와 위상이 흔들리는 현실과 상관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셈이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8.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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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7 23:49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가 고전문학을 폄하하는 건 수용하기 힘듭니다.더군다나 로망 롤랑이 19세기 작가라니..아무리 중학교 이후 문학서적 소홀히 했다해도 무슨 그런 실수를...히라노의 독서론은 새겨들을 만합니다.특히 외국 소설 읽다가 지명이나 인명이 생각 안나서 다시 앞에 돌아가 확인한다는 경험담은 저도 겪어봐서 친근감이 가더군요.
저는 한국인이 쓴 이런 류의 책으로는 장정일 <공부>를 추천합니다.특히 독일사 논쟁에 관한 책들의 해설은 발군입니다.안인희가 우익사관으로 히틀러를 해석한 시각을 맹공한 대목은 최고입니다.

로쟈 2008-04-18 00:11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의 문학에 대한 폄하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이란 설도 있더군요.^^ <공부>는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직접 대담을 나눌 기회도 있었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8 00:22   좋아요 0 | URL
아하...히라노는 오에를 지지하던데...으흠...그런 사연이...히라노의 독서법은 다치바나를 의식한 곳이 있더군요.
다치바나도 일종의 전향자...<일본공산당 연구>로 우익에 눈도장 찍었죠 뭐...일본 혁신계에서 나온 책을 보니까 다치바나의 일본공산당 연구를 엄청나게 비난했더라구요.다치바나가 박학다식한 건 이해하겠지만요.
저도 50세가 되면 그동안 쓴 독서일기를 다듬어 <공부>같은 책을 내볼까요...

로쟈 2008-04-18 00:26   좋아요 0 | URL
지금 내셔도 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8 00:40   좋아요 0 | URL
너무 바람 넣으신다...하하하...

로쟈 2008-04-18 22:36   좋아요 0 | URL
내년까지 기한을 드리겠습니다.^^

marine 2008-04-18 15:23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 다카시가 문학을 폄하한다기 보다는, 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낮게 평가되는 논픽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쓴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문학, 특히 고전을 폄하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논픽션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너무 무시하기 때문에, 그의 그런 강조가 의미있게 다가오더군요. 일종의 충격 요법이라고 할까요?

로쟈 2008-04-18 22:38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 자신이 문학에 경도됐던 시기도 분명 있었죠. 하지만 '과거형'으로만 말하지 않는지요. 제가 읽은 대목들에선 과학서적이 오늘날의 '고전'으로 읽혀야 한다고 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1   좋아요 0 | URL
미국이나 일본은 논픽션 작가에게 주는 상이 있을 정도로 이 분야의 독자층이 상당히 두꺼워요.부럽더라구요.재미도 있고...
저도 논픽션물이 재밌더라구요.그렇지만 명작 소설도 괜찮던데...다치바나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부터 이번의 <피가 되고...>까지 고전으로 알려진 문학에 대해서 읽을 필요가 없다고 계속 강조하더라구요.상당히 직설적으로...
 

책에 대한 잡담들을 자주 늘어놓다 보니 옆에서 보기에 아니꼬운 이들도 더러 있는 모양이다. 최소한 약간 명은 훨씬 상회한다. 이 서재에 어쩌다 한번씩 X가지 없는 불평을 털어놓는 블루비니님도 그 중 하나다. 오랜만에 그가 적어놓은 댓글이 이렇다(http://blog.aladin.co.kr/mramor/1471313#C1431916). 

블루비니 2008-04-08 18:09   댓글달기 | 삭제 | URL

이 책 저책 열거는 하나 책 내용에 대한 건 별로 없군. [대다수 독자들이야 별로 불편함을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서지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좀 아쉬운 일이다] ㅋㅋㅋ 그렇게 튀고 싶수?

그래도 이번엔 좀 '얌전한' 편이군. '서지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왜 이곳에서 얻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으나(그런 정보야 검색해보면 될 일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인용한 것이다. 내가 본문에서 지적한 건 <만들어진 신>의 참고문헌이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감이이라고.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불필요하다고 출판사에서는 판단한 듯하지만 그런 정보가 필요한 독자들도 있다는 걸 적어놓은 것이다(그러니까 출판사의 처사를 꼬집고자 한 의도에서 적은 수사다). 그런 지적이 아니꼬운가? 내가 '튀고 싶은' 만큼 그런 지적이 눈에 밟히는 그 또한 가끔은 '튀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기 어렵나 보다. 그런 바람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의 서재주소는 http://blog.aladin.co.kr/740069143 이다. 많은 관심들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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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8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08 23:26   좋아요 0 | URL
ㅎㅎㅎ

2008-04-09 0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9 0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08-04-08 23:09   좋아요 0 | URL
와아~ 서재 벽지가 너무 근사해요~!
.....라고 뜬금없는 소리 하면 때..때리실건가요? ( -_-);

로쟈 2008-04-08 23:26   좋아요 0 | URL
보기보다 저렴합니다.^^

L.SHIN 2008-04-09 11:55   좋아요 0 | URL
네? ㅡ_ㅡ

로쟈 2008-04-09 15:18   좋아요 0 | URL
'벽지'가요.^^;

이매지 2008-04-08 23:37   좋아요 0 | URL
흠. 페이퍼에 올리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부분도 있는데,
내용이 없다고 왈가왈부할만한게 아닌 듯.
뭐 로쟈님이 서지정보를 정확하고 많이 할 의무도 없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저 청년은 혹 조인성입니까? ㅎ

로쟈 2008-04-08 23:48   좋아요 0 | URL
척 보면 아시는군요.^^

전자인간 2008-04-08 23:41   좋아요 0 | URL
로쟈님도 '인간의 본성'에 이끌리시나보군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로쟈 2008-04-08 23:48   좋아요 0 | URL
애써 조롱받을 이유야 없지요...

가넷 2008-04-09 00:02   좋아요 0 | URL
참 궁금증이 일어나게 만드는 존재들인 것 같습니다.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는지 다른 분을 괴롭히는 사람도 그렇고...쓴 글을 보면 나사빠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마늘빵 2008-04-09 00:48   좋아요 0 | URL
좀 유명하다 싶으면 달려와서 저런 식으로 자기 할 말 해놓고 난 몰라유 하면서 시니컬하게 구는 녀석들이야 그동안 몇몇 봐왔죠. :) 주목받고 싶은가봅니다. 알고 싶은 정보는 딴 데 가서 알아보렴.

가시장미 2008-04-09 01:15   좋아요 0 | URL
정말 네가지가 없군요. -_-;;; 어떻게 저런 댓글을 달 수 있는지... 원..
신경쓰지마시고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랄께요..

sweetmagic 2008-04-09 01:42   좋아요 0 | URL
그 분 서재,,,똥색바탕에 흰 글씨라 눈 아파요.

Mephistopheles 2008-04-09 02:00   좋아요 0 | URL
그 서재의 바탕색 물에 좀 튀겨야 겠습니다.
(주) 바탕색은 스윗매직님의 댓글을 참조해주세요.

우주돌이 2008-04-09 06:0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로쟈노릇 그만할 때가 되었다...(정확한 말씀이 기억은 안 나네요..)고 운을 떼셔서 조마조마한 참에, 어설픈 분이 참 더 심란하게 만드네요...


로쟈 2008-04-09 07:47   좋아요 0 | URL
제가 광고를 한 만큼 그도 관리만 잘하면 '튀는 서재'를 꾸리겠군요...

2008-04-09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4-09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8-04-09 15:5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공인'이 되었다는 증거? ㅡ..ㅡ;
정말 튀는 댓글이네용...

로쟈 2008-04-09 22:09   좋아요 0 | URL
서재가 절반은 공적인 공간이 돼버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사생활'은 존중되어야지요...

릴케 현상 2008-04-09 17:38   좋아요 0 | URL
사진은 누구신가 여쭤보려 했는데^^ 그래도 알라딘이 악플 드문 동네긴 하지 않나요!

로쟈 2008-04-09 22:08   좋아요 0 | URL
이매지님은 척보고 아시던데요.^^ 이 서재도 그렇고 로그인 후에 댓글을 달아야 하기에 기본적으론 악플이 드물 수밖에 없고, 한편으론 책 이야기들 위주니 악플러들의 멋임감이 되기엔 좀 심심하지 않을까 싶네요...

세라비 2008-04-09 20:57   좋아요 0 | URL
로쟈의 저공비행에 쓰시는 글들은 로쟈님의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서 쓰시는 것이니, 물론 로쟈님에게 달려있음을 이해합니다. 예의없는 댓글이랑 논외로, 저도 평소에 구독하면서, 단순히 책 목록보다는 로쟈님이 왜 특정 주제에 관심이 생겼나, 목록 상의 책 중에 권위 있는 저자와 책은 무엇인가 하는 정보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냥 수많은 독자의 의견 중 하나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로쟈 2008-04-09 22:06   좋아요 0 | URL
마이리스트에 대한 지적이신가요? 참고하겠습니다. 한데 읽은 책이 아니라 읽을 책이나 읽고 싶은 책들의 리스트를 만들 경우에는 제가 정확한 정보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관심은 주로 새로 나온 책에 촉발되기 때문에 대부분 우연적입니다.^^

2008-04-10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는 요즘 매주 두어 장씩 가장 주의해서 읽고 있는 책이다. 필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의의 품위와 격조가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어서다. 교수신문에서 관련서평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26). 필자는 <신곡> 번역서와 해설서를 낸 바 있는 김운찬 교수다.

교수신문(08. 03. 31) 50년 고전 읽기의 모범

아마 『신곡』만큼 다양한 해석으로 열린 작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소위 고전 작품들의 특징이라면, 『신곡』은 그런 정의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때로는 깊이 읽을수록 오히려 헷갈리게 보이거나 더 많은 수수께끼를 던져주기도 한다. 언제나 새롭고 신비로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일부 열성적인 독자들에게 『신곡』은 지속적인 탐색과 산책의 무대가 된다. 읽을 때마다 여러 가지 사색의 실마리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진정한 ‘텍스트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도쿄대 문학부 교수를 역임한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의 『단테 ‘신곡’ 강의』는 50년에 걸친 『신곡』 사랑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 사랑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매주 토요일 밤 3시간씩의 만남을 통해 지속됐다고 한다. 아마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강렬한 사랑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1997년 3월부터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이뤄진 15차례의 ‘강의’를 통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게 됐으니, 그 정도와 깊이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마미치는 단순히 『신곡』을 읽고 이해하는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의 전공 분야인 철학이나 미학의 관점으로만 읽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곡』을 매개로 해 자신의 삶과 학문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단테뿐만 아니라 다른 위대한 인물들과 어울려 마음속의 대화를 나눈다. 그것은 일종의 창조적인 읽기가 된다. 텍스트의 전통적인 해석에만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연상 작용과 함께 새로운 연결 고리들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 책은 고전 읽기의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신곡』을 읽기는 쉽지 않다. 『신곡』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보와 지식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테의 개인적인 삶과 사상을 비롯해 당시 유럽의 시대적인 상황, 정치적 싸움과 종교적 갈등,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주요 관념 등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으면 단테의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거기에다 텍스트의 의미 구조가 복잡하다. 하나의 표현 속에 여러 가지 의미들이 중첩되고 겹쳐진 구조로 돼 있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알레고리, 즉 友誼(우의)적 의미와 신비적 의미, 도덕적 의미 등이 동시에 함축돼 있다. 따라서 어떤 구절에서는 서너 가지의 상이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중세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특히 성경 텍스트의 해석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또한 단테 자신이 그렇게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신곡』에는 무슨 뜻인지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구절들이 종종 발견된다. 일부는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학자들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감추어진 비밀이나 은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도 바로 그런 해석을 토대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마미치가 『신곡』의 첫 3행을 해석한 것처럼, 악센트 하나가 있는가 또는 없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우리말 번역본에서는 그 차이를 감지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독자들에게 탐색의 재미를 찾게 해준다. ‘철학자 시인’ 또는 ‘시인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단테는 자기 텍스트의 여러 곳에다 마치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이 흥미로운 해석의 장치들을 마련해두고 있다. 게다가 『신곡』은 중세를 총체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작품,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만큼 풍부한 상징적 의미들의 보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고려해볼 때 『신곡』 읽기는 일종의 지적 도전이 된다. 제대로 음미하면서 읽으려면 상당히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이마미치의 책은 전체 15번의 강의로 구성돼 있는데, 처음 세 번의 강의는 그런 준비 작업에 할애돼 있다. 단테와 『신곡』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교양’을 탐색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작업이다. 먼저 호메로스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거쳐 단테에 이르는 고전 서사시의 전통과 특징을 더듬어본다. 또한 단테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유럽 문화의 양대 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고전’, ‘문학’, ‘성경’, ‘역사’ 등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교양 용어들의 어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특히 클래식, 즉 ‘고전’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와 역할을 다시금 되새겨 봄으로써 보다 풍부하고 알찬 읽기를 준비하도록 배려한다.
 
본격적인 『신곡』 읽기에 들어가서 이마미치는 오랜 세월 동안 관심과 사랑을 기울인 노련한 학자답게 수많은 해설서와 번역본, 관련 자료들을 상호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거기에다 나름대로 독창적인 해석과 번역까지 곁들여 제공한다. 인상적인 것은 놀라운 외국어 능력이다. 단테의 이탈리아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넘나들면서 『신곡』의 세계를 파헤치고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낸다. 인문학 연구는 무엇보다 외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실증적으로 보여주듯이, 작품의 연구로서 해석이란 원래 작가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미까지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때로는 누구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독특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는데, 그런 읽기에는 다른 분야의 관점들이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한다. 이마미치는 『신곡』을 일본 문학의 고전 작품이나 구비 문학, 또는 다른 전통적 요소들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읽기를 시도한다. 일부 구절에 대해서는 다른 예술 분야나 종교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관점들은 특히 강의가 끝난 후 청중들과의 자유로운 질의응답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중들 각자의 관심 분야에 따라 단테의 목소리는 색다른 어조를 띠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스콜라 철학의 본질을 노래하는 『신곡』이 불교나 동양 사상과 비교되거나 접목될 수도 있다.

그렇게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이 책은 분명 『신곡』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나 입문서가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먼저 최소한 한 번 이상 『신곡』을 주의 깊게 통독해야 할 것이다. 또 가능하다면 단테의 목소리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이탈리아어 지식도 필요하다. 이마미치의 강의를 듣고 질문이나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런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마미치가 관심을 기울이는 또 한 가지 문제는 번역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곡』을 읽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단테의 언어로 읽는 것이리라(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테가 직접 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필사본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탈리아 단테 학회에서 정한 판본이 일종의 표준 판본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번역본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번역은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 사이의 차이 때문에 불완전한 ‘옮기기’가 될 수밖에 없다. 운문의 경우 특히 그렇다. 단테는 『신곡』을 집필하기 직전에 쓴 미완성 작품 『향연』에서 시의 번역 불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호메로스의 작품과 「시편」을 예로 들면서 단테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형식적 조화를 특징으로 하는 운문 작품은 다른 언어로 번역할 경우 필연적으로 고유의 감미로움과 조화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언어로 번역하든 음절의 숫자와 각운, 리듬 등 단테의 시가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형식적 아름다움은 훼손되거나 변화될 수밖에 없다. 이마미치는 권위 있는 『신곡』 주석본들과 여러 개의 일본어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면서 설명하는데, 그것은 주로 단테의 이탈리아어가 갖는 시적 풍부함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본어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대개 일본어 번역문의 표현 방식, 또는 시적 느낌이나 뉘앙스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석이나 오역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또 다시 우리말로 옮기다 보니(이것은 일종의 重譯이다) 그 구체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일본어의 시적 표현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어떤 번역이 뛰어나거나 훌륭한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곡』의 경우 번역과 관련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20여 종류가 넘는 『신곡』 번역본이 출판됐다. 그 중에는 정체불명의 번역이나 번안 작품도 포함돼 있으며, 최소한 절반 이상이 중역이다. 물론 중역본이 더 훌륭한 경우들도 있지만 원본, 즉 출발 텍스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 대부분이 내용 위주의 번역에 치우쳐 형식적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시적 전통을 고려하는 참신한 번역을 시도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 지향적 번역은 『신곡』의 난해함이나 지루함을 어느 정도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번역의 문제와 관련된 책을 번역할 때에는 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텍스트를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하고 있으나, 일부 일본어식 한자 용어들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또한 베르길리우스의 이탈리아어 이름을 ‘베르질리오’로 표기했는데 국적 불명의 이름이 돼버렸다. 굳이 우리말로 표기하자면 ‘비르질리오’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원문에서 라틴어 이름과 이탈리아어 이름을 뒤섞어서 쓰고 있지만, 하나로 통일하고 역주로 처리해도 좋을 듯하다. 단테의 저술 『제정론』을 『제왕론』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신곡』의 경우처럼 모든 번역은 언제나 수많은 가능성 앞에 노출됨으로써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다.(김운찬/ 대구가톨릭대·이탈리아어과) 

08.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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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4-04 09:26   좋아요 0 | URL
저도 토요일 3시간을 할애해서 열심히 읽으리라 다짐을 하지만...토요일만큼은 놀고싶다요~~
요 챕터 가져갑니다.

로쟈 2008-04-04 09:36   좋아요 0 | URL
공부의 즐거움도 노는 즐거움 이상인데요.^^
 

최근 <나의 '햄릿' 강의>(생각의나무, 2008)을 출간한 원로 영문학자이자 연극평론가 여석기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그의 <강의>는 지난 월요일에 손에 들었고 마침 모니터 바로 앞에 놓여 있기도 하다.

경향신문(08. 04. 02) 여석기 교수 “연극은 바보 짓, 그래서 의미있다”

21년 전 대학 강의실을 떠난 원로 학자가 못다 한 강의를 책으로 옮겼다. 영문학자로 셰익스피어 전문가이자 한국연극평론 1세대인 여석기 고려대 명예교수(86)가 최근 ‘나의 햄릿 강의’(생각의 나무)를 펴냈다. ‘해방 학문 1세대’로 평생을 영문학에 매진해오며 날카로운 비평으로 연극계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노학자는 학생들에게 건네듯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매주 월·수·금 서울 종로2가 사무실에 나가 오후 5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를 계속한다. 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자택에서 만난 여 교수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일찌감치 겉옷을 갖춰 입고 기자를 맞아주었다. 그의 서재는 가난했다. 평생 학문연구를 위해 모아온 방대한 자료들은 진작에 기증했다.

해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여석기 연극평론가상’ 얘기가 나오자 쑥스러워했다. 60여년 넘게 품어온 햄릿에 대한 생각, 연극평론가로서 바라본 연극계의 현실 등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침침한 눈과 뻣뻣해진 몸 탓에 연극을 못본 지 10년이 넘었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 흥미를 끌만한 가벼운 질문에는 학자다운 진지함과 냉철함으로 쉽게 답을 내놓지 않았다.



-책은 어떻게 내셨나요.

“내가 책 낼 나이가 아닌데 작년에 엉뚱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내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다면 뭐가 달라질까? 딱딱하고 힘든 책은 못쓰겠고, 햄릿이 텍스트 연구보다는 공연 쪽으로 비중이 커지고 있으니 무대 위의 ‘햄릿’은 어떻게 그려지는지도 함께 담아 편히 읽도록 했죠. ‘맷집’ 좋은 햄릿이니 시종 편안한 건 아니고…. 읽다가 딱딱한 얘기는 그냥 건너뛰면 돼요. 1년 넘게 작업했죠.”

-연극과는 언제 인연을 맺으셨나요.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작이 ‘햄릿’이었어요. 당시 유치진 선생이 번역을 부탁했죠. 그 전에도 햄릿이 자주 공연됐으니 번역대본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개관 3~4개월 앞두고 급하게 공연대본으로 번역했어요. 51년 이해랑 선생이 이끈 극단 신협이 대구에서 ‘햄릿’을 공연할 때도 그 자리에 있었지요. 전쟁의 와중에도 구경꾼들이 많아 난리가 났어요. 예전 배우들이 여관에 발 묶여있을 때 쉽게 올렸던 작품이 ‘춘향전’ 아니면 ‘햄릿’이었어요. 그만큼 인기가 좋았던 작품입니다.”

-‘햄릿’이 왜 인기일까요, 햄릿과 60여년 살아오셨는데요.

매력적이에요. 그러나 한마디로 말할 순 없어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 가운데서도 드문 인물이죠. 햄릿 1막부터 5막까지의 시간 경과를 따지면 채 1년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1막의 햄릿과 5막의 햄릿은 달라요. ‘내면적 성숙’, 인간적으로 바라본 햄릿의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42년 도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햄릿을 만났으니 오랜 세월 함께했죠. 청년 때 만난 햄릿과 점점 늙어가며 느끼는 내 마음속의 햄릿은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그런 건 야단스러운 얘기일 테고 난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게 햄릿에 대한 나의 결론입니다.”

-요즘 자기 확신에 차서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햄릿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흔히 ‘햄릿형’이라고 해서 ‘귀공자인데 사색적이고 우유부단하고 행동이 부족하다’ 그런 말을 하죠. 19세기부터 내려온 이미지입니다. 시대마다 햄릿에 대한 풀이가 달랐던 것 같아요. 햄릿이 너무 일찍 죽었어요. 햄릿에게 ‘본심이 뭐냐’고 물으면 씩 웃고 치우겠죠. 대답도 하지 않을 겁니다. 이 질문에는 뭐라고 답변할 수가 없군요. 햄릿의 본심을 모르니까요.”

-요즘 연극,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이 참 묘합니다. ‘연극 위기론’은 사람들이 연극을 즐겨보던 60~70년대에도 끊임없이 나왔어요. TV·영화에 이어 요즘은 뮤지컬이 자리를 빼앗는다고 하죠. 연극도, 연극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굶주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극이 줄어들지는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관객 수가 아니라 좋은 극작가, 좋은 배우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많은 관객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 연극의 역할은 뭘까요.

연극은 산 사람(무대)과 산 사람(객석)이 교류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에 연극처럼 비효율적인, 바보같은 짓이 어딨습니까. 한 번 공연하고 사라지는 일회성, 참 골치아픈 겁니다. 얼마나 낭비입니까. 하지만 그 비경제성이 의미있어요. 산사람끼리의 소통을 이끄는 그 매체(연극)의 깊이를 어떤 것도 못따라갑니다. 능률만 갖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연극은 그것을 일깨워주죠.”(김희연기자)

08. 04. 03.

P.S. 한겨레의 인터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80076.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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