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에 읽은 언론 관련기사는 KBS 사장이 자신의 취임을 반대했던 기자와 피디 세 명에게 파면과 해임 처분을 내렸다는 소식이었다. 민주주의와 함께 공공성에 대한 개념 자체를 이 정부와 그 끄나풀들은 (누리꾼들이 쓰는 말로) 어디 안드로메다에라도 두고 온 모양이다. 오직 사익의, 사익에 의한, 사익을 위한 '날강도정치'가 매일같이 벌이는 행태이니 말이다(문을 열어준 국민들이 발등을 찧어봐야 이미 늦은 것인가?). 사정이 그러한 터에 얼마전부터 '클로징멘트'로 화제에 곧잘 오르내리는 MBC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와의 인터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찬찬히 읽어보기 위해서다. 사실 9시 뉴스를 본 지 오래된 터여서 가끔 포털에 올라온 재연화면으로만 몇 번 들은 적이 있지만, 예전부터 그는 무뚝뚝해 보여도 신뢰감을 주는 앵커였다(내가 주로 그를 본 건 주말뉴스 앵커를 하던 시절이다). "비루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자존심"을 가진 앵커가 아직 현역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우리나라에는 아나운서가 나오는 영화는 많은데 저널리즘을 다룬 영화는 그리 많지 않거나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넓게 보면 한국영화가 현대사를 그리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란 멘트도 곱씹어볼 만하다...

씨네21(09. 01. 16) [김혜리가 만난 사람] MBC 뉴스데스크 신경민 앵커   

 

클로징 30초에 혼을 담는다

최초의 24시간 뉴스 채널 <CNN>이 1980년 출범했을 때 한 평자는 “뉴스중독자들을 위한 전일제 전자오락실”이라는 표현을 썼다. 오래지 않아 뉴미디어가 정보의 수문을 열어젖혔고 뉴스가 범람했다. 과거에는 뉴스가 아니었던 소문의 파편들도 홍수에 합류했다. 정보의 풍요를 예찬하는 한편에서, 종일 듣고 보는 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는 허기를 호소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닻’이라는 뜻의 앵커는, 해설과 논평을 곁들여 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보와 현상의 해일 속에서 앵커가 닻이 되기를 진지하게 기대하는 시청자는 많지 않다. 전통적으로 한국 대중은 TV 앵커에게 호감과 신뢰를 주는 외모와 진행을 기대할 뿐 종합과 논평의 능력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혹은 바라지 않도록 길들여졌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다수 앵커들은 전달자의 소임을 성실히 다하고 ‘국민정서’에 부합하는 무난한 맺음말로 안녕을 고했다. “심상치 않습니다”와 “답답합니다”의 수위를 넘는 논평은 희귀했다.

2008년 3월부터 평일 <뉴스데스크> 앵커석에 앉은 29년차 신경민 기자는, 포부를 밝히는 제1성에서 ‘앵커의 적극적 기능’을 말했다. 최고참 기자로서 뉴스 낭독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리고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9개월 남짓, 신경민은 클로징멘트를 거의 독자적인 꼭지로 활용했다. 30초가 되지 않는 맺음말은, 노회한 완곡어법을 구사한 날카로운 권력 비판일 때가 많았고 노련한 전문 기자의 눈이 낚아챈 팁인 경우도 있었다. 미소에 인색한 얼굴로 일간지 만평이 선사할 법한 블랙유머를 구사하기도 했다. 역대 앵커 중 가장 무표정한 축에 속하는 그가, 시청자에게 누구보다 열렬히 말을 걸고 있다고 느낀 시청자는 나뿐일까. 반정부냐 친정부냐를 떠나 그의 방송 기사에서 우선 돋보이는 것은 꼼꼼함이다. 2007년 12월7일 라디오 <뉴스의 광장>에서 신경민 앵커가 남긴 멘트는 적당한 예다. 당시 그는 강화 총기 탈취사건에 휘말려 사망한 20살 병사의 소식을 전하며, 수사 당국이 직계가족보다 언론에 먼저 사망자 신원을 공개한 점을 짚었다. “어둡고 불안한 차 안에서 스무살 난 아들의 이름과 사망 소식을 듣는다면 그때 심정과 절망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 때문에 사고가 날 수도 있을 겁니다. 우리에게도 성숙한 관행이 자리잡고 충분한 배려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전례없는 양식의 클로징멘트를 굳이 고집해 신경민 앵커가 얻은 것이 있다면 논란과 파문이다. 시청률은 여전히 경쟁사 뉴스를 한참 밑돌고 항간에는 앵커 교체 풍문도 흘러다닌다. 박성제 MBC 노조위원장은 “상당수 현업 기자들이 신경민 앵커를 기자로서 존경한다”며“ MBC가 (외압으로부터) 그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자격이 있는 집단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물론 다른 성과도 있다. “신경민 앵커가 날마다 보도할 뉴스 내용을 미리 보면서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잘 전할 수 있을까 방송국 한쪽에서 생각하며 노력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뉴스데스크> 시청자 댓글 게시판에 오른 메시지다. “뉴스 방영 채널의 수가 늘어난 상황에서 언론이 권력보다는 권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합리적 균형을 위해 맞는 길이라고 본다”고 사견을 밝힌 KBS 보도국 소속 한 기자도 비슷한 감상을 밝힌다. “신경민 앵커의 뉴스를 보면,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느낄 수 있다.”

그를 만나기로 정한 날 MBC 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분망한 상황이 염려돼 약속을 이틀 뒤로 미뤘다. 십분 먼저 도착한 월요일 이른 아침 카페에는 이미 신경민 앵커가 도착해 있었다. 인터뷰 대상으로 나온 자리에서도 그는- 거의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인터뷰어보다 먼저 종이와 펜을 테이블에 꺼내놓았다. 그는 정보와 사실, 진실이라는 세 단어를 주의 깊게 구분해 사용했다. 둔하고 무던해지는 현상을 노화라 부른다면 신경민은 아직 젊었다.    

-파업 첫날 <뉴스데스크>를 보니 한나라당과 민주당 원내대표를 연결해 인터뷰를 진행하시더군요.
=뉴스 인력도 아이템도 부족한 상황에서 급히 홍준표, 원혜영 두 대표 인터뷰를 섭외해 오후 6시경 녹화했습니다. 저널리즘이 발달한 국가에서는 대개 라이브로 진행하는데 우리는 녹화가 대부분이죠. 생방송을 해야 질문도 자유롭고 인터뷰이의 진짜 의중과 실력이 분명히 드러나는데, 녹화를 하면 자꾸 ‘약속 대련’을 하게 됩니다.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하자고도 하고 후속 질문도 제한적이죠.   

매스미디어 수업 첫시간에 나오는 이야기

-박혜진 앵커가 파업으로 빠지고 혼자 뉴스를 진행하시는 모습을 본 일부 네티즌은 “초상집 홀아비”같다더군요. 이 참에 엄기영 사장과 진행하면 어떻겠냐는 농담을 하는 것도 들었어요. (웃음)
=사장이 직접 하긴 힘들 테고 기자 중 누군가와 진행하는 방법은 있겠죠. 엄기영 선배와는 2005년 부산 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동안 며칠간 같은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적이 있긴 한데, 보기 아름답지 않았는지 두어번 하고 바로 쫓겨나 광안리로 중계차 타고 나갔어요. (웃음)

-이번 파업이 시작된 뒤 노조 소속 보도국 후배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습니까.
=이 사태를 어떻게 꾸려 가느냐가 급한 현안이라 별로 대화할 기회가 없었어요. 나름 대안을 마련했지만 현실에서 과연 작동할 수 있을지는 전혀 알 수 없죠. 파업 상황은 여러 번 겪었지만, 방송사의 대내적 문제- 가령 사장 퇴진 요구라든지- 가 아니라 정권과 정면으로 맞서는 경우는 처음이 아닌가 싶네요.

-MBC 창사 뒤 아홉 번째 파업으로 압니다. 1997년에 발생한 파업은 안기부법과 노동법이 쟁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1997년 파업은 정치파업이었는데, 정치파업은 형식적이 되기 쉬워요. 이번 파업은 무척 현실적이고 임박한 문제가 걸린 파업이죠. 근본을 파고드는 파업이라 언제 어떤 양상으로 진행될지 예측하기도 힘들어요. 엄기영 사장이 12월24일 발표한 담화문을 봐도 파업을 말릴 수도, 열심히 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고뇌가 묻어 있죠. 일부 신문이 방송 이기주의, 자사 이기주의 운운하는데 국민이 그런 말로 오도될 수준은 아니라고 믿어요.

-최근 정부 여당쪽에서 방송법 개정문제를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논리는 무조건 파벌 이기주의고 경제논리는 불편부당한 진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수사인데요.
=우리가 논란을 벌이는 모든 문제는 사실 서양 근대사회가 이미 겪고 결론이 난 것들이에요. 언론은 재벌이 한다고 해서 절대 좋아지지 않아요. 만약 그랬다면 제너럴모터스(GM)나 제너럴일렉트릭(GE)이 세우는 언론사가 최고겠죠. 서양에서는 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확립되고 역사적으로 증명된 개념이에요. 매스미디어 입문 첫 수업시간에 나오는 이야기죠. 그런데 그걸 갖고 또 논쟁을 새로 시작하겠다? 그건 어떻게 보면 개론서도 안 읽어본 거죠.

-저널리즘이 파는 상품은 바로 신뢰인데 그것은 돈으로 얻을 수 없겠죠.
=저널리즘에 대해서도 수많은 연구가 분야별로 이루어져 있고 공통분모가 도출돼 있어요. 그것을 깨는 실증적 경험이 나오기 전에는 논박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그걸 자꾸 건드린다고요. <PD수첩>이라는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민사적 손해배상과 형사적 처벌은 별개 문제죠. 때려죽이고 싶도록 미워도 고문과 무고한 피해자를 방지하기 위해 형법은 죄형법정주의 등등 엄격하게 만들어놓았거든요. 명예훼손 판례도 세계적으로 다 나와 있고요. 요컨대 우리는 개론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는 사회로 들어서고 있는 겁니다. 기본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를 자꾸 하니까 어디서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모르겠어요.  

기자 출신 아버지 밑에서 어린 시절

-고등학생 때까지 전주에서 사셨죠? 선친께서는 <전북도민일보> 사장을 지내셨더군요.
=일찍 출향해서 서울에서 공부한 아버지는 해방 어간에 서점을 잠깐 운영하다 교사가 부족한 시절이라 선생님이 되셨어요. 그러다 <전북일보>를 창간하면서 기자로 입사했죠. 둘째인 제가 태어났을 때 이미 아버지는 기자였고 제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항상 기자였습니다. 80년 즈음 <전북일보>에서 주필로 은퇴를 하고 <전북도민일보>가 창간돼 경영진으로 가셨어요.

-아버지가 언론계에 종사한다는 사실이 가정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언론이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돌아가는지 일찍부터 이해가 있었죠. 자연스럽게 신문사도 오가고 아버지가 만나는 정치인, 경제인, 문화인들을 볼 수 있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매우 예뻐해서 많이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50년대 말 60년대 초 전주의 음식점 주인 중에는 70년대 서울로 와 명성을 떨친 명창과 고수들이 있어서 손님들에게 판소리나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어요. 다방에 가도 월전 장우성의 그림, 소전 손재형의 글씨가 걸려 있었죠.

-유독 둘째아들을 일터에 동행하신 까닭이 뭘까요?
=형도 데리고 다녔지만 제가 아버지와 외양과 목소리, 취향과 성격이 닮아 더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만 열한살이 되던 해 어느 새벽 아버지가 나를 깨우더니 케네디 대통령이 죽었다고 말씀하셨던 일이 지금도 기억나요. 석간을 만들고 이른 아침에 퇴근한 아버지가 빅뉴스니까 제게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셨나봅니다. 대학 다닐 무렵에는 인턴사원처럼 취재를 시켜 <전북일보>에 기사를 써보라고도 하셨어요.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가 전북 왔을 때 인터뷰를 했더랬죠.     

-입시에 요즘처럼 심하게 얽매이지 않았던 시대인데, 10대에는 어떤 책을 읽으셨나요?
=아버지께서 소장한 장서도 많았고 친구 분들 부탁으로 전집류도 자주 사오셔서 집에 있는 책을 다 못 볼 지경이었어요. 작고한 4년 터울 형님이 몸이 약해 독서를 많이 한 덕분에 제가 초등학생일 때는 중학생, 중학생일 때는 고등학생이었던 형의 책을 기웃거리고 형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또 다른 영향으로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은사 이규일 선생이 계세요. 뒷날 한국 최초 미술전문기자가 되신 분인데, 제가 중학생 때 1천권 넘는 장서를 짊어지고 우리 집에 하숙을 하러 오셨어요. 덕분에 그분 책을 몰래 열심히 읽었죠. 그 양반 서재에 소설도 많았지만 함석헌 선생류나 <사상계>류 전집, <신동아>가 있었어요. 부모님이 “사나이는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철학이 있어서 아주 어려서 서당식으로 한자를 배웠는데 한문 소양이 독서에 도움을 많이 줬죠. 대학 진학 뒤에는 함석헌 선생의 노장사상 강의가 열린 정동교회에 직접 찾아가기도 했어요. 그런 분들의 독재에 대한 항거는, 종교의 힘에서 나온 것 같아요. 지금도 그만한 에너지와 바른 정신을 가진 인물이 아쉬워요.  

“청와대 좋아하네”로 내근조치 5년

-서울대 사회학과 71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셨습니다. 유신헌법 공포 1년 전 대학에 입학한 셈인데요.
=저는 유인태나 이철처럼 투쟁하는 부류의 학생은 아니었지만 이 독재의 끝을 봐야겠다는 굉장히 강한 생각이 있었어요. 이 독재만 끝나면 지금보다 나은 다른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타협을 못하는 습성이 배었어요. 그 성격으로 방송사 입사 뒤에도 출입처나 보직에 여러 번 불이익을 당했고 앵커도 여러 번 잘렸어요. 정치부 취재를 하면서 동시에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90년대 초 현안 중 하나가 YS의 아들 김현철 문제였어요. 김현철이 정치에서 손을 떼는 것이 정의다라는 생각을 코멘트에 여러 번 실었더니 경고성 질문이 나오더군요. “그거 당신이 쓴 거야? 누가 써준 거야?” 제 앵커 멘트를 누가 써주겠느냐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즉석에서 쓴 거냐, 오래 생각한 거냐 묻더군요. 그러다 어느 날 잘렸어요. 그것도 통보도 없이 후임이 결정되는 비겁한 방식으로. 일부러 모욕을 준 것이죠. 그런 일의 시작은 전두환 전 대통령 집권 초기부터였어요. 남대문 대한화재지하상가에 불이 났는데 현장검증을 보러갔더니 경찰들이 기자들을 가로막아 싸움이 났어요. “청와대 지시다”라기에 “청와대 좋아하네. 나쁜 놈들”이라고 대꾸했는데 키가 커서인지 경호실 차장이 나를 지목해 끌고 갔어요. 오후에 청와대 경호실로 오라고 해서 갔는데 그때 국가원수 모독죄라는 것을 처음 들었죠. “청와대 좋아하네”라는 말이 문제가 된 거죠. (좌중 웃음) 결국 입사 1년도 못 돼 당한 내근조치가 5년을 갔어요. 그러잖아도 호남 출신인데 골치 아픈 놈으로 찍힌 거죠. 그래도 방송을 깔끔하게 한다는 평가 때문에 화면에 꾸준히 나오긴 했죠.

-부서에서 밀려나거나 잘린 경우가 여러 번이라고 하셨는데 공통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첫째는 사주에 새겨진 타협 못하는 천성이고, 다음으로 고향 탓도 꽤 있었죠. 회사도 사람 모인 사회니까 계파가 있는데 “우리 편에 서면 오랜 방황을 일거에 해결해주겠다”는 식의 유혹도 있었어요. 제가 가진 유일한 힘인 ‘후배들의 지지’를 사고 싶어 하는 쪽에서 출입처 배치나 특파원 카드를 갖고 흔들었던 적이 몇번 있죠. 그런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가 다시 내근조치를 당하기도 했고요.

-지금도 전라도 출신이라는 점을 근거로 공정성을 의심하는 댓글이 달릴 때도 있던데요.
=지연을 강조하는 풍토의 폐해 중 이런 게 있어요. 한쪽이 정권을 잡으면 자질이 부족한 자기네 지방 출신 인사에게 자리를 줄 뿐 아니라, 상대 지방 출신자를 구색으로 끼워 넣을 때에도 개중 무능한 사람을 써요. 유능한 인물을 쓰면 자기쪽 인사들의 무능함이 두드러질까봐 겁나서죠.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의 수준이 저하되는 것이죠.

-방송 뉴스는 임팩트가 강한 대신 눈으로 볼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아무래도 한계가 있습니다. 문맥이나 전망을 파악하기도 힘들고요. 사회과학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점을 고려하면 어째서 신문이 아닌 방송을 택했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는데요.
=1980년 여러 언론사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는데 기자 해직 사태가 일어나고 쿠데타 상황이라 <동아일보>는 합격이 취소됐고 <중앙일보>는 시험 자체가 취소됐던가 했어요. MBC는 보류상태로 있다가 연말을 넘기고 채용을 했죠. 그래서 사번이 80이 아닌 81이 됐습니다.    

-고교, 대학 동기이자 MBC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입사한 정동영 전 의원과 한데 묶여 언급되는 일이 잦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참여정부 때 한나라당쪽은 두 사람이 돈독한 관계라 신경민 앵커가 열린우리당에 유리한 방송을 한다고 공격했던 반면, 노 정권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두 사람이 오랜 라이벌인 만큼 신경민 앵커가 견제하느라 노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한다고 해석했다는 점이에요.
=정동영과는 학교와 직장이 같고 전주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부모님끼리도 인연이 있으셔서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관계지만, 둘을 잘 아는 사람은 스타일이 서로 다르다라는 사실을 알아요. 정동영이 고위직에 있을 때 저는 회사에서 보직도 없이 고초를 겪었지만 도움을 청하자는 생각은 한순간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러나 제게 특히 적대적인 사람들쪽에서는 ‘이 자식들은 패키지다’라고 생각하겠죠. (웃음) 고교 때는 얼굴만 알고 지내다가 대학에 가서 가까워졌습니다. 젊어서부터 정동영은 정치 지향적인 사람이었고 저는 정치가 중요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정치보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방송은 정동영이 더 잘하는 것 같고 취재는 제가 더 잘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걸프전 당시 <CNN> 동시통역 맡기도

-전주고등학교는 언론계에 졸업생을 유난히 많이 진출시킨 학교로 알려져 있는데요. 왜죠?
=전라북도의 우수한 인재가 거의 전주고에 모여들어 명문대학으로 진학했는데 그들이 갈 수 있는 직장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공무원이 돼도 미래가 뻔하고 검사도 마찬가지고. 결과적으로 판사와 언론인이 많이 배출됐어요. 전주고 교훈이 ‘기자가 되자’라는 소문도 있는데, 그건 거짓말이고요. (일동 웃음)

-80년대 중반까지 외신부 기자로 근무하시는 동안 KAL기 격추 등 큰 사건도 많이 터졌죠?
=KAL기 격추, 포클랜드 전투, 아키노 암살 등 사건이 많았죠. 원래 외신부에 있으면 주목을 못 받는데, 당시는 국내 뉴스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니까 외신을 많이 다루었어요. 위성을 연결하는 방송이 각광을 받게 됐는데, 제 영어가 조금 나은 편이라 위성 신청 절차와 메커니즘을 알아내 비상시에 전화를 들고 직접 수배를 했어요. 지금은 상식이 됐지만 그때는 전인미답의 세계였죠.

-걸프전 때 동시통역사가 도착하지 않은 비상 상황에서 <CNN> 동시통역을 대신한 일화도 접했습니다. 영어에 능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이왕 배운 언어인데 듣기, 말하기도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AFKN> 라디오를 자주 들었어요. 국제부에 배정돼 주한미국대사관을 오가며 외교관들과 이야기할 일이 많았는데, 대학에서 4년간 원서로 공부도 한 내가 이들과 농담 따먹기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아요. (웃음) 지금도 발음이 좋진 않지만 라디오를 들으며 따라하려고 노력을 했고 그 결과가 인공위성 청약에 공을 세우니 보도국에서 소문이 난 것이죠.

-1987년 처음으로 미국 연수를 다녀오셨습니다. 상당히 빡빡한 프로그램이었다고 들었어요.
=그즈음 입사 동기들이 모두 연수를 가는데 회사에서 내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혼자 알아보고 다니다 하버드에서 주관하는 니먼 펠로십(Nieman Fellowship)에 관한 정보를 듣고 지원을 했어요. 그런데 마침 보도지침을 폭로한 <말> 사건이 터진 거예요. 친구인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구속 기소되고 난리가 났죠. 그러자 하버드 니먼 재단에서 언론 상황이 그 지경인 국가의 기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취소하더라고요. 나중에 김주언에게 따지기도 했어요. (웃음) 그러다가 아시아 재단이 미국의회 펠로십(Congressional Fellowship)을 권유해 연수를 갔어요. 한달간 미국의 정치인, 의원 스탭, 백악관 사람들의 강의를 듣고 하원의원 사무실에 인턴 자리를 구해 일하는‘공수훈련’이었습니다. 종일 영어로 일하고 나면 금요일 저녁 퇴근할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언덕을 못 올라갈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지만 그 과정에서 영어가 많이 늘었어요. 뿐만 아니라 미국의 실체에 어떻게 접근해야겠다는 깨달음도 많이 얻었죠.

-워싱턴에서 연수 뒤 특파원 생활도 했는데 어떤 도시라고 설명하시겠어요?
=로비의 천국이고 추한 정치행위(dirty politics)가 판치는 도시가 분명하지만, 워싱턴을 이해하지 않고 미국을 알기란 불가능합니다. 워싱턴을 자국 정치의 모델로 삼는 나라도 굉장히 많거든요. 양질의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에 살기에도 좋은 도시죠.

-(웃음) 가족과 산책하던 거리나 공원에 대한 추억은 없나요? 다시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다면요?
=의사당이 대단합니다. 일단 굉장히 크지만 설계가 합리적이죠. 의회가 정치 행위의 중심이 되려면 이 정도 구조는 갖춰야 하겠구나 싶죠. 여의도 국회의사당 같은 구조로는 의회가 중심이 될 수 없어요. 일단 워싱턴 의사당은 관심있는 국민이라면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의원석과 청문회, 위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예요. 미디어의 취재도 굉장히 편하게 이뤄지도록 설계되어 있어요. 모든 위원회에 비디오 촬영시설이 있어 방송사가 직접 카메라를 대지 않아도 다 녹화가 되죠. 우리 의회는 일반인 접근은 물론이고 언론사 간부급 기자라고 해도 국회 출입기자 패스가 없으면 제지를 받아요.

-85년부터 사회부 기자로 취재를 하셨는데 그 시기에 김근태 고문,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뜨거운 뉴스가 많았습니다. 인상이 오래 남는 사건이 있나요?
=열심히 취재하고도 많이 기사화하지 못한 일이 가슴 아픕니다.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나 김민석 재판, 김근태 사건의 재판과정이 그런 경우죠. 보도지침의 제한도 있었고 MBC의 한계도 있었죠. 카메라 취재도 못했고 송고 자체를 원하지 않았어요.  

“공자·맹자·부처님·예수님 말씀 되도록 피해요”

-2008년 3월부터 평일 <뉴스데스크> 메인 앵커를 맡으셨는데 앞서 1993년에 주말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경험이 있죠?
=1년 반 정도 했습니다. 입사 이후 뉴스 앵커를 맡으라는 회사의 요구는 계속 있었지만 거절한 까닭은 앵커 일의 한계가 뚜렷해 보였기 때문이에요. 요즘 입사하는 세대는 앵커를 열망하지만 우리 때만 해도 앵커보다는 현장 취재기자를 하고 훌륭한 에디터, 부장, 국장을 하고 싶다는 소망이 강했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는데 이제는 나이가 들어 달리 할 일이 없어 앵커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죠.

-방송기자 사회에서 가치관 변화가 있었던 셈이네요.
=요즘 기자들은 70년대생이 다수고 이젠 80년대생들이 입사하기 시작해요. 방송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 70년대부터니까 태어나서부터 비디오 세대인 그들은 방송 하면 앵커가 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세대는 저널리스트라는 이름을 선호하거든요. 저는 50년대에 태어나 성장기에도 TV를 보지 못했고 고등학생 때는 입시준비, 대학 때는 하숙집에서 생활하며 공부하느라 TV와 거리가 멀었어요. 방송기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입사했죠.

-원래 TV 출연이나 분장을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맨 얼굴로도 방송을 했는데 그러면 안된다네요. 대통령도 화장을 하는 걸 보면 하긴 해야겠죠. 넥타이와 재킷은 코디네이터가 가져와요. 패션에 워낙 관심이 없어서 아내에게 만날 혼납니다. 유일한 사치는 아내가 다니는 미용실에서 이발하는 겁니다.  

-화제의 클로징멘트 이야기를 해볼까요. 일단 신경민 앵커 클로징멘트의 특징은 “여야 모두 각성이 필요합니다”류의 주례사적 멘트가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단순치 않은 정보를 담을 때가 많다는 점인데요.
=공자, 맹자, 예수님, 부처님 말씀 같은 말을 싫어해서 되도록 피해요. 그런 말은 교회나 절에 가도 들을 수 있고, 서점에 처세술 알려주는 책이 산더미인데 제가 할 필요가 없죠. 불과 20, 30초지만 나만이, 아니 기자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자로서 내가 알거나 접근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되 팩트와 논리, 관점을 취재기자나 정보를 가진 사람에게 더블 체크받고 모자라면 다시 객관적 인물한테 검증받습니다. 때로는 내 독선을 배제하기 위해 남이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기도 합니다. 가령 내가 대운하를 반대한다고 해서 뉴스에서 “나, 대운하 반대합니다”라고 하면 누가 귀기울이겠습니까? 어느 정치인이 이야기할 때를 기다렸다가 이러저러한 것을 검토해야 한다고 멘트를 하죠. 정치인이 아닌 기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한계죠.

-미국 대선이 임박한 시기에는 오바마에 관련된 이야기에 며칠간 클로징멘트를 할애했는데요. 그중 오바마가 북한 핵무기 숫자를 적시한 사실을 두고 미국 정계가 이미 그에게 보고를 하고 대세를 인정하고 있다는 징후라고 해석을 보태셨어요.
=그 뉴스의 의미를 잘 모르고 다루더라고요. 그래서 이면을 지적한 거죠. 오바마가 북한이 핵을 8개 보유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미국 조야가 북한을 이미 핵무기 국가로 인정한다는 거예요.

-또 재미있었던 클로징멘트로, “국회 현안 질의에서 국정 전반에 혼선을 일으키게 된 책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지목됐습니다. 북한과 문제 생기거나 대북 정보가 없어지게 된 데에도 경제위기를 몰아간 것도 쇠고기 협상이 잘못된 것도 모두 노 전 대통령 탓이 컸습니다. 흥미로운 평가이고 알아봐야 할 대목입니다”라는 발언이 있었어요. 시청자 게시판이 발칵 뒤집혀서 말 그대로의 뜻이냐 비꼬는 거냐 논란이 있었죠.
=지금의 혼선을 빚은 건 자신들인데 그 책임을 왜 전부 노무현에게 미루느냐는 뜻이었죠. 하지만 노 대통령을 방어하려는 생각은 한치도 없어요. 개인적으로 그가 성숙한 정치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보도국 내에서도 너무 어렵게 말한다는 비판이 있지만, 저는 쉽게 이야기하려면 무엇하러 하냐고 답합니다.

-이따금 정부당국의 외교적 대응을 답답해하는 기색이 보이는 멘트도 눈에 띕니다.
=기자로서 전공이 외교, 통일, 법조이기 때문에 관련된 토픽이 나오면 가급적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또 우리나라에는 여러 중요 현안이 있지만 외교 안보 이슈를 이해하는 사람이 정치 지도자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에다 분단상황이 더해져 있고 4대 강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어요. 그나마 DJ를 꼽지만, 그의 경우는 잘 안다는 믿음이 너무 큰 게 흠인 듯해요.  

왜 저널리즘을 다룬 영화는 없는가

-한국에서 국제뉴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국제관계가 한국인의 삶을 좌우하는 비중에 비추어 적당하다고 보십니까?
=미국에서도 그 주제를 갖고 토의를 많이 해요. 어느 나라건 먹물 든 사람일수록 국제뉴스가 많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국제뉴스를 하면 시청률이 떨어져요. (웃음) 신문도 마찬가지고요. 우리나라는 외교나 안보문제에 굉장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형편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인 대부분이 외교, 국방 이야기가 나오면 싫어합니다. 복잡하거든요. 역사적으로 국토와 국민을 그토록 유린당한 것을 생각하면 희한한 일이죠.

-클로징멘트를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칼럼에 가깝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본 사설의 논지는 본지 입장과 무관합니다”라는 꼬리말이 달리는 칼럼처럼 앵커의 클로징멘트가 방송사 입장을 대변하는 건 아니라는 뜻일 텐데요.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공중파 메인뉴스 앵커의 맺음말이 어떻게 개인의 견해일 수만 있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비판이 있죠. 보도국 안에서도 비판이 있고요. 한데 보통 때는 별말 안 하다가, 자기들 의견과 생각이 다르고 권력에 기분 나쁘게 들릴 만하면 그런 말을 많이 하더라고요. (웃음) ‘칼럼’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과 논리는 나름 신중히 확인합니다. 국민 가운데 공감하는 분들이 50%일지 30%일이지 몰라도 나의 양식에 비추어 이 정도 코멘트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말을 하죠.

-신경민 앵커의 멘트를 모아서 곱씹어보면 정부건 비판하는 입장이건 공허한 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막연히 희망을 말하지 말고 구체적 대책을 말하라는 촉구가 많아요. 동시에 비웃기는 쉽지만 그 이상이 필요하다는 의식도 보이고요.
=학창 시절에는 추상적인 내용의 책도 즐겨 읽었지만, 저널리스트로서 추상적 단어는 좋아하지 않아요. 저널리즘은 구체적 이야기를 해야죠. 뭐가 잘못됐는지 꼭 집어줘야 하고. 대안이 있다면 그것도 논해야죠. 모두가 착해지자, 모두 같이 나누자는 이야기를 들으려고 신문이나 방송을 보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방송 기사는 짧습니다. 현실을 간명하게 표현하는 법을 어떻게 고민하십니까?
=사전을 가까이 두고 적확한 단어를 고르려고 노력하고, 한자나 영어 공부를 한 경험도 도움이 됩니다. 법률서적과 법조인으로부터는 세분화된 용어 중 정확한 말을 골라내는 고민을 배웠고 경제학, 경영학에서도 많이 배웠어요. 국제경제학적 지식은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유용합니다. 기사는 일단 쓴 다음 불필요한 단어와 조사를 지워나갑니다. 형용사나 부사, 조사를 넣었다 뺐다 하며 읽어보고 말의 감칠맛을 생각합니다. 문학적 표현을 부러 구사할 때도 있고 주어, 동사만 갖고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때도 있죠.

-MBC 보도국은 KBS보다 인력도 적고 조직 체계도 달라 물량이 달리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뉴스를 취사선택해 깊이 보도하는 의제 설정 기능에 좀더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KBS를 물량으로 따라가는 건 궁극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결국 편집 판단과 취재 역량 강화 외에는 해결방안이 없다는 방향은 오래전에 잡혔어요. 문제는 인사의 안정성입니다.

-타깃 시청자층이 확실한 뉴스라는 평도 있는데 어떤 가상 시청자층을 염두에 두나요?
=대체로 젊은 시청자, 비판적인 층, 식자층을 겨냥한다고 봐야죠. 좀더 진보적인 층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보수, 진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친정부와 반정부 정도 차이가 있을 뿐 뭐 다 보수죠. (웃음) 한국은 근본적으로 보수를 벗어나본 적이 없어요.

-미국에서 앵커가 공인이라는 판례가 있었다고 해요. 사람들은 뉴스 앵커에게 정치인 수준의 도덕성을 기대합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받는 사람 위에 있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생각도 있고요. 예를 들어 앵커가 무심코 쓰레기를 버린다거나 매너없는 행동을 한다고 했을 때 꽤 파장이 있을 텐데요.
=미국에서는 공인의 범위를 굉장히 넓게 보기 때문에 법에 정한 건 아니지만 공인일 겁니다. 저도 무단횡단 안 합니다. (웃음) 식당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에도 참고요. 쓰레기야 원래 함부로 버리지 않고 술을 안 마시니 주사 걱정은 없고 담배도 안 피우니 꽁초 버릴 일도 없어요. 패션에 무관심하니 호사스러운 옷 입고 다닐 일도 없고요. (웃음)

-저널리스트에 관한 영화 가운데 재미있게 보신 작품이 있습니까.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룬 <대통령의 사람들>이나 <네트워크>는 봤죠. 우리나라에는 아나운서가 나오는 영화는 많은데 저널리즘을 다룬 영화는 그리 많지 않거나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넓게 보면 한국영화가 현대사를 그리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우리 아버지 세대가 어려서 겪은 일이나 언론인 해직사건도 충분히 극화되지 못했죠. 빨리 취재해서 다큐로도 만들고 다큐로 만들 수 없는 건 드라마로 제작해 집단적 경험으로 공유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런 작업이 부족해서 우리 사회가 형식적으로만 발전하고 실질적으로는 발전하지 못한 것 같아요. 과거로부터 레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거죠.  

운전하거나 웹서핑할 때도 뉴스 생각뿐

-매일 뉴스를 제작하는 일을 사료(史料)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스스로 무엇에 중독된 인생이라고 말하시겠어요?
=뉴스에 중독돼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사무실에서도 계속 뉴스를 듣고, 차만 타면 뉴스를 틀고 웹서핑을 할 때도 국내외 뉴스 사이트를 돌아다니죠. 모든 분야를 알아야 한다는 강박은 아니지만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궁금함이 있어요.   

-간혹 한가한 시간에는 울증이 오지는 않습니까?
=혼자 잘 놉니다. 책도 보고 친구도 만나죠. 미국 연수 기간에 아들, 딸과도 친해져서 직접 운전해 드라이브를 가곤 합니다. 영화도 자주 봐요. 아들 녀석이 효자인 것이 이미 본 영화도 보러가자면 묵묵히 같이 갔다가 나중에야 세번 봤다고 실토해요. 나이 들어서도 쫓겨나고 물먹는 아비가 안쓰러운지. (웃음) 엄마보다야 내가 멀겠지만, 다른 아빠들보다는 아이들과 좀 가까운 것 같아요.

-최근에도 앵커를 교체하라는 외부 압력이 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오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교체 명분은 시청률이 되겠지만 시청률은 늘 그만했으니 구실일 테고요. 여건이 그리되면 할 수 없죠. 저 역시 주야장천 앵커하려는 열망도 없어요. 늦게 시작했으니 누구처럼 10년을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미국이 아니니 댄 래더나 월터 크롱카이트처럼 70 넘어 하기도 어려울 겁니다. 다만 하는 동안 하루하루 열심히 할 뿐이죠.

-지난해 미국 방송의 대통령 선거전 보도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후보자들이 유세에서 주장한 내용 중 객관적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부분을 골라서 참, 거짓을 검증해주는 코너가 흥미로웠어요. 기계적 중립이 능사가 아니라 사실과 다른 주장과 잘못된 인용을 짚어주는 선거방송도 가능하겠다 싶었습니다.
=우리도 시도할 수 있을 테지만 분명 정파성 논란이 나올 겁니다. 당신 어디 학교 나왔냐, 고향이 어디냐 따지겠죠. 미국이 천국은 아니지만, 거기서는 처음 만났을 때 어느 지방에서 왔느냐고 묻지 않아요.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지요. 학창 시절 공부 잘하고 환경이 받쳐줘서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평생 기회를 누리지만, 그 시기에 힘든 일을 겪거나 능력이 늦게 발현되면 평생 애를 먹게 돼요. 불평등한 일이죠. 법조기자 시절, 고시에 합격한 이 나라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사람들을 수시로 접했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절대로 우수하지가 않았어요. 분명 인재들인데 왜 그럴까요? 건설적 경쟁이 사라졌기 때문이죠. 생산적 경쟁을 통해 능력을 업그레이드해 조직의 안팎에서 발휘해야 하는데, 일단 자리를 얻고 나면 누가 술 잘 먹고 아부 잘하는지, 연줄 잘 타는지 등 파괴적인 경쟁 내지 비생산적 경쟁을 하니까 직급이 올라갈수록 우수한 사람이 줄어들어요. 과장보다 국장이 우수해야 옳은데, 똑똑한 사무관이 과장이 되면 흐물거리고 국장이 되면 존재감이 거의 사라진다고요. 양질의 사람들은 조직을 떠나거나 사라지거나 변질하고요. 그러니 사회가 향상되지 않는 것이죠.

-스스로 젊은 날의 태도를 견지하며 자신을 지켜왔다고 생각하시나요? 만일 일관성을 지켰다면 지탱해준 힘은 뭐라고 보세요.
=글쎄요. 그저 나를 계발하고 기자로서의 능력대로 평가받고 싶었어요. 비루하게 살지는 않겠다는 자존심이 지탱해준 것 아닐까요? 문리대에서 좋은 선생님과 올곧은 친구들을 많이 만난 것도 큰 힘이 됐어요. 교수님들이 권력에 아부하는 모습도 교훈이 됐고 반면 훌륭한 모습도 봤죠. 그 시절 만난 사람, 읽은 책과 토론, 독재 상황이 제 의식과 인생행로를 결정한 것 같아요. 지금도 고민스러울 때면 꾸준히 연락하고 토론하는 대학 친구들이 많아요. 내 인생의 반려자들이죠. 의식과 정신의 반려자.   

追伸 12월29일 오후 5시 반. 여의도 MBC 남자 분장실에 신경민 앵커가 들어섰다. 메이크업을 쑥스러워하는 그가, 보정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약점’은 눈썹. 조명을 받으면 사라져버린다고 한다. 분장 담당자가 그날 뉴스에 대해 그와 나지막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익숙하게 손을 놀렸다. 앵커실로 돌아오자 20여개의 뉴스가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다. 6시부터 8시까지는 그가 앵커 멘트를 작성하는 하루 중 가장 고독한 시간. 저녁식사는 그 와중에 부인의 도시락으로 해결한다. 시계가 8시를 가리키자 그는 보도국 정치 국제 총괄 데스크로 자리를 옮겨 최종점검에 들어갔다. 파업 중이라서인지 을씨년스러움이 감도는 보도국 한쪽에서 담배연기 한 줄기가 올라오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피아노 줄처럼 팽팽하게 긴장된 생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앵커실. 그의 책상에 쌓인 종이더미 꼭대기에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요소>가 놓여 있었다. 요즘도 원론적인 책들을 가까이 두냐고 물었다. 몇번이나 읽고 딸에게 부탁해 원서까지 구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들춰본 <저널리즘의 기본요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새로운 세기에는 진실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이 유포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진실의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09. 01. 17.  

 

P.S. "우리나라에는 아나운서가 나오는 영화는 많은데 저널리즘을 다룬 영화는 그리 많지 않거나 재미가 없는 것 같아요. 넓게 보면 한국영화가 현대사를 그리 진지하게 다루지 못한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란 언급에서 떠올린 영화는 강우석 감독의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1991)이다. 영화에 대해서는 김석 KBS 기자의 평을 참고할 만하다(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237). 틀에 박힌 스토리에 설정도 어설프지만, "기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는 아마 지금까지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는 영화다. 신경민 앵커의 표현을 빌자면, "그리 많지 않"은 영화의 하나이지만 "재미가 없는"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한국영화가 현대사를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오겠지(그나마 강우석 감독이 이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아무려나 <실미도>도 같은 영화도 그런 관심의 산물일 테니까). 우리의 동시대를 정면으로 다룬 영화라면 아마도 이런 제목이지 않을까 싶다. '누가 쥐의 꼬리를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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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h.의 생각
    from sanghyun's me2DAY 2009-01-19 14:39 
    신경민 앵커
 
 
비로그인 2009-01-17 21:50   좋아요 0 | URL
"누가 쥐의 꼬리를 보았는가?" 는 언어유희 같은데... 혹시 지시하는 대상이나 기대는 출전이 있나요?

로쟈 2009-01-18 14:44   좋아요 0 | URL
국외에 계신 티가 이런 데서 나네요.^^ '쥐'를 모르시다니요!..

비로그인 2009-01-19 21:47   좋아요 0 | URL
네, 국외에 오래 있다가 보니 어쩔수없이 국외자가 되었습니다. 그다지도 티를 내지요? ^^ 하하, 그런데 '쥐'가 정말 뭐죠? 혹시 MB 정권正拳(井權인가?)을 지시하나요?

2009-01-19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9 2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9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0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0 0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1-17 23:06   좋아요 0 | URL
경제면은 주식시세라도 보는 이들이 있지만 역시 외교,군사 쪽은 신문에서도 잘 안보지요.방송보도도 마찬가지구요.

로쟈 2009-01-18 14:46   좋아요 0 | URL
옛날 같으면 '우민화'라고 했겠죠. 시사교양 프로가 강화돼야 하겠지만, 다들 '예능'으로 쏠리니...

라주미힌 2009-01-17 23:16   좋아요 0 | URL
'누가 쥐의 꼬리를 보았는가' ㅋㅋㅋㅋㅋㅋㅋ
로쟈님의 클로징 멘트도 훌륭하네용;;

로쟈 2009-01-18 14:46   좋아요 0 | URL
흉내 정도죠 뭐...

Kircheis 2009-01-18 00:15   좋아요 0 | URL
신뢰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앵커분이지요. 전 이 분 표정에 은은한 미소가 어려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기사도 그렇고.. 사람들한테 물어도 어디 그런 게 보이냐는 핀잔을 듣고 좀 놀란 적이 있어요.
+) '누가 쥐의 꼬리를 보았는가'는 어떤 식으로든 제작 무산된다에 천원 걸겠습니다...

로쟈 2009-01-18 14:47   좋아요 0 | URL
'쥐꼬리'는 저예산 독립영화로 가야겠군요.^^;

람혼 2009-01-18 03:51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두 분이 나눈 값진 대화, 너무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챙겨주시지 않았다면 놓치고 지나쳤을 인터뷰네요. 저희 어머니도 클로징멘트 때문에 신경민 앵커의 팬이 되신 지 오래인데, 이 기사를 보여드려야겠어요.^^

로쟈 2009-01-18 14:47   좋아요 0 | URL
김혜리씨도 좋아하시는군요.^^

순오기 2009-01-18 10:58   좋아요 0 | URL
우리집에서도 클로징멘트, 저 말을 하기 위해 그는 오늘도 뉴스데스크 앵커를 했구나~ 감동하지요.^^ 좋은 기사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로쟈 2009-01-18 14:48   좋아요 0 | URL
뉴스 시간에 저희 집 식구들은 드라마를 보더군요...

연두부 2009-01-18 12:03   좋아요 0 | URL
뭐...울 집에는 tv가 없어서 아쉽기는 한데...근데 왜 mbc뉴스 시청율이 낮은 건지...쩝

로쟈 2009-01-18 14:49   좋아요 0 | URL
뉴스 시청률이 직전 드라마랑 연결되기도 한다더군요...
 

이번주에 나온 책 <인문학 스터디>(라티오, 2009)와 인문학 '교양'의 문제에 대해 몇 마디 적으려고 했지만 계절강의 준비 등으로 시간을 내지 못한다. 써야 될 아이템들만 쌓이고 있는데, 언제 다 방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오늘 읽은 기사들을 옮겨놓을 시간도 부족하기에 대신 어제 읽은 기획연재를 옮겨놓는다. 고종석의 새로운 연재 '여자들'이 그 첫 번째로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루고 있다. 나는 간혹 '로쟈'라는 닉네임이 '로자'에게서 온 게 아니냐란 질문을 듣곤 해서 '친근감'을 갖고 있지만, 생각해보면 그녀에 관해 진득하게 읽은 것도 없다. 이 참에 읽을 만한 거리들도 챙겨놓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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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9. 01. 12) [고종석 기획연재 여자들] <1> 로자 룩셈부르크

혁명의 희망이 가뭇없이 사라진 시대에 새된 목소리로 혁명을 구가하는 것만큼 허영심을 채워주는 일도 찾기 어렵다. 그 허영 놀이에는 아무런 위험도 뒤따르지 않는다. 비밀경찰의 감시도, 구사대의 폭력도, 고문의 공포도, 생명의 위협도.  



그 혁명은 현실 바깥의(차라리 중심부의) 패션이고 놀이다. 체 게바라의 초상을 아로새긴 티셔츠가 한 시절 세상을 휩쓴 것도 그런 '안전한' 허영 놀이였을 테다. 그 옷을 입은 누구도 실제로 체 게바라처럼 되고자 하지는 않았을 게다. 되고 싶어도 될 길이 (거의) 없었다. 혁명은 과거사다. 그것은 일어날 수 없는 가상의 서사다. 그래서 아무리 과격한 혁명의 언어를 발설해도 잡아갈 '에이전트'가 없다. 외려 유행에 민감한 '에이전트'라면, 제 아이에게 게바라 티셔츠를 입힐 것이다.

티셔츠에 아로새겨진 게바라는 체제의 안녕을 전혀 위협하지 않으면서, 진보, 혁명적 낭만주의, 세련된 지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것은 지적 도덕적 데커레이션이었고, 이상주의자의 거짓 신분증이었다. 그래서 체제는 게바라 바람을 내버려두었다. 대학 강단의 '좌익' 교수가 우익 신문에 게바라를 기리는 글을 써도, 젊은이들이 그 '과격한' 혁명가의 '티셔츠 동지'가 되어도, 체제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본에 빨려 들어간 게바라라는 이름은 임박한 혁명의 표징이 아니라 사라진 혁명의 전설이었으므로. 그것도 벌써 한 세대 전 얘기다. 

게바라 티셔츠를 팔아 돈을 번 의류업자에게 나는 또 하나의 세련된 아이콘을 소개하고 싶다. 게바라 못지않은, 아니 게바라를 넘어서는 소비사회의 매력적 혁명 아이콘을. 이번엔 여자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라는 이름의 여자. 명민한 자본가들이 아직까지 이 여자를 그대로 놓아둔 것이 신기하다. 우선 나부터도 허영심이 '체'보다 '로자' 쪽에 훨씬 더 쏠리는데 말이다. 그녀는 파리코뮌의 해, 그 코뮌의 달에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단 봉기(고대 로마의 노예봉기 지도자 이름에서 따온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다) 때 죽었다. 그 죽음도 게바라보다 더 극적이다.  

'체'는 미국 비밀경찰이 지휘하는 볼리비아 군인에게 총살당했지만, '로자'는 한 때의 동지가 집권한 '제2의 조국'에서 군인의 개머리판에 이마를 맞고 확인사살을 당한 뒤, 베를린의 운하에 내던져졌다. 그 죽음을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노래했다. "붉은 로자도 사라졌네/ 그녀의 몸이 쉬는 곳마저 알 수 없으니/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했고/ 그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이 그녀를 처형했다네." 몇 달 후 로자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을 때 그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했다. 그 '붉은 로자'는 '피투성이 로자'였다.

로자의 삶도 게바라 못지않게 극적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국적을 지닌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태어났고, 바르샤바의 중학생 시절 '프롤레타리아당'의 세포에 가입했고, 대학에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는 조국을 떠나 스위스의 취리히로 건너갔고, 위장 결혼을 통해 독일 국적을 얻었고, 러시아와 폴란드와 독일 세 나라의 혁명 운동에 발을 담갔다.

그녀는 친구보다 적이 훨씬 많은 사람이었다. 그 적은 부자들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도 있었다. 사회민주주의운동을 폴란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수행하려는 움직임을 비판함으로써, 그녀는 폴란드 동료들에게서 미움을 받았다. 로자가 선택한 '진짜' 조국은 폴란드도, 독일도, 러시아도, 가상의 시오니스트 국가도 아니었다. 로자의 조국은 프롤레타리아였고, 그녀는 죽을 때까지 철저한 국제주의자로 일관했다. 자신의 당, 독일사회민주당이 국방예산 증액을 거들자 그녀는 이를 격렬히 비판함으로써 당 동료들로부터 소외되었다. 애국주의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 세계전쟁 시기에 반전주의자로 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국제주의를 버리고 애국주의에 투항했다.  



로자는 감옥 안팎에서 그런 훼절을 통렬히 비판한 극소수의 사회주의자에 속했다. 그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한쪽 발을 저는 유대인이었는데, 이것마저도 (반동진영으로부터만이 아니라 소위 혁명진영으로부터) 야비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절 사회주의의 지도적 혁명가들이 흔히 그랬듯, 로자도 학자와 기자를 겸했다. 그는 <자본축적론>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를 쓴 경제학자였고, <노이에 차이트> <라이프치히 폴크스차이퉁> <로테 파네>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 쉴 새 없이 글을 써댄 기자였다.

그러나 그녀의 펜은 혁명을 선동하는 글보다 사랑을 갈구하고 고백하는 글에 훨씬 더 많은 잉크를 소비했다. 그 연애편지들의 수취인 가운데 로자가 제 가슴 가장 깊이 담은 사람은 그의 스승이자 동지이자 애인이자 사실상의 남편이었던 리투아니아 출신 유대인 레오 요기헤스였다. 로자의 친구였던 루이제 카우츠키(카를 카우츠키의 아내)의 레토릭에 따르면 "로자의 불같은 성격은 레오라는 기름을 만나 타오를 수 있었다." 



계급의 적에게 돌덩이처럼 단단했던 로자는 레오 앞에서 수줍은 아가씨가 되었다. 로자가 품었던 여러 모순 가운데 첫 번째가 레오와의 관계였다. 사민당의 가까운 동료들에게까지 가차없었던 그의 필봉은 레오에게 쓴 연애편지에선 한없이 말랑말랑한 응석으로 무뎌졌다. 그녀가 '디오디오'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레오는 운동의 선배였지만 주로 지하활동에 종사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로자만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독립 여성의 상징이라 해도 좋을 로자가 레오 앞에서만은 순한 양이 되었다. 외면적 사회민주주의 운동에서 로자의 공적(公的) 짝은 한 날 거의 같은 시각에 살해된 카를 리히프크네히트였지만, 로자의 로맨스 속에서 그 자리는 그들보다 두 달 쯤 뒤에 처형된 레오의 것이었다.

그 시절엔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쓰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해야겠다. 베른슈타인 같은 수정주의자들도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 일컬었지만, 대체로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 곧 공산주의를 뜻했다. 독일 사민당의 전쟁 지지에 환멸을 느껴 탈당한 동료들과 함께 독일 공산당을 창건한 로자는 내심 공산주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타협적, 혁명적, 국제주의적 사회주의자였다는 점에서 로자는 일생동안 공산주의자였다

 

1907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사회주의자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

나는 로자의 만년에 러시아에서 실현되기 시작한 공산주의를 혐오한다. 그 점에서 나는 로자주의자가 아니다. 그런데 로자의 사회적 전망에는 모호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는 레닌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지였지만, 10월혁명을 전후한 레닌의 독선적 행태에 부정적이었다. 이를테면 레닌이 독일군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잠입한 것이나, 제국주의 독일과 굴욕적 정전협정을 맺은 것 따위는 로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거기서 그녀의 반전주의는 흐릿해졌다. 주로 선전선동의 일을 맡았으면서도, 로자는 레닌의 전위당 이론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하자면 로자에게는 민중주의 편향이 있었다.

그러나 레닌이 로자를 가장 크게 실망시킨 일은 10월혁명 이후에 일어났다. 실질적 소수파였던 볼셰비키(다수파)를 이끌고 혁명에 성공한 뒤 실시한 총선에서 패배하자 레닌은 이를 힘으로 무효화했고, 로자는 서유럽의 부르주아 정치인들 이상으로 신랄하게 레닌을 비판했다. 그녀는 그 때 "일당의 당원들만을 위한 자유는, 그 당원들 수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자유가 아니다"라고 일갈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경직화를 우려했다. 로자에게 자유란,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 점에서 그녀는 '위대한 반대자'라 불렸던 미국 법률가 올리버 홈스의 동지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사회는 자신이 죽은 뒤 70년간 존속했던 사회주의 사회와는 크게 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를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녀를 죽인 것은 군부와 결탁해 정권을 장악한 사민당 우파였다. 전쟁에 찬성하고 군부와 결탁한 사민당 우파는 여전히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1919년 상황에선 독일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도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그가 살해한 로자 룩셈부르크도 사회민주주의자였고, 그녀가 비판한 레닌도 사회민주주의자였다. 그 세 사회민주주의의 내실은 전혀 달랐는데도 말이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 '자유'의 한계라면, 나는 잠재적 로자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충실한 로자주의자는 못될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이상주의자이며 이상주의자로 남고 싶다고 되뇌었지만, 나는 현실주의자이며 현실주의자로 남고 싶기 때문이다. 

09. 0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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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1-14 00:00   좋아요 0 | URL
고종석씨의 새 칼럼 기대되네요.

로쟈 2009-01-14 00:18   좋아요 0 | URL
'여자들'을 너무 밝힙니다.^^

일요일의마음 2009-01-14 00:14   좋아요 0 | URL
아내가 너무 재탕이라고 전해 달래요^^

로쟈 2009-01-14 00:18   좋아요 0 | URL
고종석씨가 어디 썼던 건가 보죠? 제가 '재탕'한 건 아닐 테니까요.^^

2009-01-14 0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4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4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9-01-14 22:33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PhEAV 2009-01-14 17:20   좋아요 0 | URL
로자 티셔츠라면 저라도 거부할수가...;;;;

로쟈 2009-01-14 22:45   좋아요 0 | URL
'상품성'이 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1-15 23:4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 지에서 벌어진 룩셈부르크,카우츠키,베른슈타인,쿠노 간의 대논쟁이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사실 제 변명도 그래서 따왔는데요.물론 박호성,강신준 양인의 연구서도 좋습니다만 원자료를 직접 읽고 싶군요.

로쟈 2009-01-15 23:55   좋아요 0 | URL
강신준 교수도 이쪽으로 책을 썼나요?..

노이에자이트 2009-01-17 16:32   좋아요 0 | URL
예.베른슈타인 저서 번역도 했구요.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이 노이에자이트에서 벌어진 논쟁을 연구한 거예요.그게 단행본으로 <수정주의 연구1>(이론과 실천)로 나왔지요.

로쟈 2009-01-16 11:48   좋아요 0 | URL
그랬었군요...

2009-01-16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16 1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향신문의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시리즈를 챙겨서 본다. 오늘이 여덟번 째인 걸로 보아 매번 챙겨 읽은 건 아니지만 읽을 거리는 많다. 다 옮겨오진 못하고, 현 미국발 금융위기를 마르크스와 하이에크, 두 경제학자의 시각에서 비교 분석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여전히 이번 위기의 본질이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있다는 '신자유주의론자'의 시각이 놀랍긴 하지만, 참조는 할 수 있겠다...   

경향신문(0. 01. 12)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금융위기를 보는 두개의 시각  

 

노동·자본간 불평등 심화…금융 독재는 역사적 침몰

금융위기 속 ‘마르크스의 반격’
“역사는 종말을 고했다. ‘우파의 이념적 승리’는 완료됐고, 모두가 만족한 가운데 자본주의는 사회구조의 결정적 형식으로 굳어졌다.” 우리를 거의 설득시킨 이 담론은 2008년의 금융 대지진으로 무너졌다.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2008년 10월13일은 영국 자본주의 시스템이 실패한 날로 기록될 것”이라 평가했다. 뉴욕 월가의 시위대는 “마르크스가 옳았다!”라는 팻말을 치켜들었다.

<자본론> 등 한 세기 반 이전 마르크스의 저작 모두를 현 상황에 직접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사회상을 제시한다. “금융 귀족이 법을 명하고 국정을 지도하며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넣어 여론을 지배한다. 이들이 전 영역에서 생산에 의하지 않고 타인의 부를 강탈하면서, 매춘, 사기 등을 재생산하는 것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이는 1848년 혁명 직전 프랑스의 묘사다.

금융위기 원인으로는 복잡한 금융 상품의 휘발성, 자체 규제 불능의 자본시장, 금융계의 도덕적 해이 등이 거론된다. ‘실물경제’에 대한 ‘가상경제’의 시스템 붕괴가 원인이란다. 하지만 ‘가상’의 비극은 ‘실물’에 뿌리를 둔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은행 융자를 안고 집을 산 수백만 미국 가계의 부채상환 불능 상태에서 야기됐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축적의 일반 원칙’을 보자. 그는 자본가 계급이 생산의 사회적 조건을 사유할 경우 “생산 발전의 모든 수단이 지배 수단, 생산자 착취 수단으로 전복된다”고 설명한다. 생산자들이 희생되는 동안 축적된 자본은 자체 동력을 얻어 광적으로 비약한다. ‘한 극점에서의 부의 축적’은 정반대 극점에서 ‘비례적 빈곤 누적’을 초래, 격렬한 상업·금융위기를 낳는다.

신용위기의 파괴력은 생산위기로 전화됐다. 이는 노동·자본 간 분배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최근까지만 해도 시장 자유주의의 적실성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용납하지 않던 자유주의자들이 자본의 ‘도덕화’, 금융 ‘규제’ 등 위기 해결책을 들고 나선다. 자본의 도덕화란 블랙코미디다. 자유경쟁 체제가 망친 사회 미덕은 바로 ‘도덕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진정 도덕적 경제생활을 원한다면, 악덕 기업주의 잘못 따위 지엽이 아닌 근본을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개인적 행위들 너머 자본주의 원칙, 그게 문제다. 자본주의는 인간을 부를 창출하는 수단, 상품으로 전락시킨다. 물론 국가의 규제 기능으로 사회의 비도덕을 개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자 감세, 우정 민영화를 벌이는 사르코지 등 우파 정권에 규제자 역할을 기대하는 일은 순진하거나 위선적인 짓이다. 



사회적 관계가 근본적으로 재고돼야 한다. 마르크스는 <1844년 수고>에서 ‘소외된 노동’의 개념을 고안했다. 임금 노동자가 자신의 물질적, 도덕적 결핍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위해 부를 창출하는 저주스러운 상황을 뜻한다. 산업재해, 정리해고, 저임금 등 오늘날 임금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이 개념을 뒷받침한다. 자본은 생산자들을 끊임없이 생산 수단에서 괴리시키고, 무한경쟁 상태로 내몬다.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이념적 과정으로 생산자를 포섭, 종속시킨다.

금융위기는 인간소외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무도 위기를 원치 않았지만 모두 위기에 노출된다. 자본주의는 ‘일반화된 규제 철폐’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여 규제 부재의 황무지를 만든다. 스스로 규제할 능력이 결여된 체제는 구성원에게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즉시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대안은 동유럽에서 실패한 공산주의 ‘실험’ 탓에 왜곡당한다.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오인되는 동안 사람들은 진정한 ‘공산주의’의 의미를 도외시한다. “다른 사회란 파멸적 유토피아일 뿐이다. 우리는 인간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라는 냉소가 퍼진다.

자유주의 사상에서 ‘인간’은 사회로부터 유래되지 않은 자생체이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 충만한 동물(호모 에코노미쿠스)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는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이 지배하는 사유 재산의 사회만 가능하다고 한다. ‘경쟁적 인간’ 이데올로기는 ‘살인자가 되자’는 비인간적 교육을 권장한다. 일확천금의 광풍 속에 전방위적 탈문명화를 진행한다. 하지만 결국 금융독재의 역사적 침몰 맨 밑바닥에 자유주의적 인간 담론이 깔려버렸다.

마르크스는 자유주의 담론에 대항할 혁명의 초안을 제시한다. 그는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자신의 여섯 번째 테제에 “인간의 본성은 개별적으로 분리된 개인의 고유한 어떤 추상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 속에서 전체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라고 썼다. 자유주의 담론과 반대로 ‘인간’은 ‘인간의 세상’에서 유래한다. 인간과 사회는 서로 상대방을 발달시킨다. 그렇다. 우리는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으며, 이는 사회를 바람직하게 바꾸는 조건하에서 가능한 것이다.(루시앙 세브 프랑스 공산당 중앙위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발췌(www.ilemonde.com)) 

 

 ▲마르크스

자본주의는 내재적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극복 수단들이 결국 더 큰 한계를 새로 만들어낼 뿐이다. (자본론 3권)

금융거래 활동이 스스로 가치를 생산해낸다는 생각은 ‘가장 바보 같은 망상’일 뿐이다. (자본론 3권) 



시장실패 아닌 정책 잘못…위기본질 지나친 개입 탓 

신자유주의는 실패했나?
최근 비우량 담보 시장에서 촉발된 미국발 금융위기로 경제가 혼란에 빠지자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시장 개입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금융위기의 원인이 규제 완화와 작은 정부 때문이라고,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선언하면서 큰 정부의 도래를 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진단과 해법은 금융위기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접근에서 나온 것이다.

그 본질에 접근하는 중요한 단서는 상환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 담보 대출이다. 이 담보 대출의 부실화에서 부동산 시장의 거품 붕괴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 담보 대출을 늘려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야기한 원인이다.

그 원인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1995년 지역재투자법(CRA)을 대폭 개정해 은행들로 하여금 저소득층에 대한 담보 대출을 늘리도록 했다. “누구나 내 집 갖기”라는 주택 보급 정책을 위해서였다. 의회와 정부는 연방주택청(FHA)이나 주택도시개발부(HUD) 등 정부기관을 동원해 은행들에는 대출심사 기준을 대폭 낮추도록, 패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에는 비우량 주택 담보와 이에 근거한 유동화 증권을 구매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러자 은행들은 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위험한 담보 대출을 늘리고 이를 유동화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주택가격의 버블을 야기한 두 번째 요인은 서민들의 주택보유를 확장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는 모기지 전문회사의 도덕적 해이다. 정부와 의회는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손실에 대한 보증을 약속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실은 생각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비우량 담보 구입과 이에 기반을 둔 유동화 증권의 규모를 늘려갔다. 그 결과는 서민층 주택구입의 활성화와 주택가격의 버블이다.

금융위기의 세 번째 원인은 연방준비은행의 방만한 통화정책이다. 심지어 1%라는 초저금리정책을 통해서 유동성을 확대시켰다. 은행들은 늘어난 유동성을 소화하기 위해 저마다 대출처를 찾아 나섰다. 이것이 주택시장의 과열로 연결되었다.  



이 세 가지 요인은 자유와 책임, 작은 정부를 국정원리로 하는 신자유주의를 저버린 정책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국의 금융위기는 시장실패가 아니라 정부정책의 잘못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시장규제와 손실의 보증이 없었더라면, 유동성을 과잉 공급하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위기가 월가의 탐욕 때문에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접근법은 옳지 않다. 탐욕은 자기 이익추구로서 특수한 사람이나 상황에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늘 어디에서나 목격되는 인간의 불변적인 심성이다. 따라서 이것을 가지고는 평시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금융충격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탐욕을 위기로까지 몰고 간 이유에 주목해야 한다. 시장에 거침없이 풀린 돈과 정부의 시장 개입이 그 이유다.

금융위기가 규제 완화의 탓이라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80년대 말 이래 지속적으로 규제가 증가해왔는데 규제가 가장 많이 늘어난 부문은 주택 부문이고 그 다음이 금융 부문이다. 99년 ‘그램-리치-브릴리 법’으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겸업이 허용됐다. 이런 규제 완화가 금융위기의 원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겸업이 금지됐더라면 이번 금융위기로 상업은행들이 신용위기에 몰려 있던 투자은행을 흡수 합병하지 못해 위기의 여파가 더욱 극심했을 것이다.

감독부실이 위기의 원인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식 문제 때문에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감독이 어렵다. 감독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언제, 그리고 왜 감독해야 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필요한데 정부는 그런 지식을 전부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정부의 감독은 늘 부실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감독에 필요한 지식과 관련해 시장이 정부보다 현명하다. 시장은 그 같은 지식을 발견하는 절차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교란되면 ‘발견의 절차’가 작동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시장을 교란시킨 요인이다. 그것은 방만한 통화 공급과 정부의 시장 개입이다.

금융위기의 원인이 정부의 개입임에도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문제의 해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한 때문이다. 시장 개입은 경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고 지금의 고통을 미뤄 나중에 더 큰 고통을 겪을 위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다고 위기 상황에서 정부가 손놓고 뒷짐지고 있으라는 말이 아니다.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확립하는 일이다. 개인의 책임과 경제활동을 방해하는 제도와 규제들을 걷어 내고, 노동시장을 유연하게 하고 세금을 낮춰야 한다. 그러면 우리 경제는 지금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안정적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정도(正道)다.(민경국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하이에크소사이어티 회장)) 



▲하이에크

국가의 경제 개입은 모든 개인을 노예로 만든다. <노예의 길>(1944)

정부의 시장 개입은 문제이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 <자유의 헌법>(1961)

세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은 치명적 자만이다. <치명적 자만:사회주의의 오류>(1988) 

09. 01. 12.  

P.S. '마르크스냐 하이에크냐'라는 이분법적 문제설정에 대한 비판은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50840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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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12 23:50   좋아요 0 | URL
오...민경국 씨가 경향신문에 글을 쓰다니...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요.요즘 민 씨와 같은 주장을 하는 해외인사들의 글이 세계일보에 자주 실리고 있지요.하지만 한국판 뉴딜이라면서 전형적인 정부개입형 경기부양책을 쓰고 있는 현정부의 경제정책엔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이 별다른 말을 안하던데요.

로쟈 2009-01-13 01:25   좋아요 0 | URL
특이하게도 강원대에 (신)자유주의 학풍이 있습니다. 신중섭 교수 같은 양반도 있고...

비로그인 2009-01-13 00:15   좋아요 0 | URL
"위기의 본질이 정부의 지나친 개입에 있다는 '신자유주의론자'의 시각"은 정말 놀랍군요. 아무리 보아도 반론을 위한 반론 제기, 그 이상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정치경제에 대한 제 상식이 얕은 수준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만 보더라도 금융과 기업에 대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방임 정책을 자성하고 비판하는 소리가 높지요. 미국 정치의 본질이 금권 정치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고 현재의 위기를 초래한 것이 그릇된 정책이라면, 이 그릇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힘을 행사한 것이 금권이고, 이 금권이 누구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안다면, 이 금권의 출처가 되는 거대 기업이 정부를 비판한다는 것은 제 꼬리를 무는 격이 아닐까요? 의식 있는 미국 국민의 정부의 정책에 대한 비난은 대기업, 특히 초국적 거대 기업에 대한 비난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의 실정에 대한 직접적인 포섭 기제로 적용하여 설명할 수는 없겠지요. 정부의 규제가 너무 강력해서 불행을 초래했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입니다. 이 규제의 제정과 적용이 편파적이었고, 이 편파적인 규제의 밝은 편에 선 무리가 힘 있는 쪽이고 어두운 편에 선 무리가 금융권을 비롯한 피해자들이라면 말입니다.

그냥 제 관찰과 소견일 뿐입니다. 극구 주장할 것을 못되지요. 다만 신자유주의 자체에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 가야 할 길인듯 하는 경향신문의 뒤의 사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기가 힘이 듭니다. 로쟈님 말씀대로 참고나 할까요...

로쟈 2009-01-13 01:27   좋아요 0 | URL
경제학계에서도 소수의견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아랫글은 '사설'은 아닙니다. 경향에서는 두 가지 상반되는 시각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예요...

비로그인 2009-01-13 04:47   좋아요 0 | URL
네, 그렇군요.

PhEAV 2009-01-13 00: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시장의 정부개입에 대해 쓴소리를 해야 할 때인 것입니~! (변사풍으로)

로쟈 2009-01-13 01:27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시장의 정부개입은 왜들 자연스럽게 여기는 걸까요...
 

책관련 기사들 말고도 스크랩해둘 만한 기사는 얼마든지 있지만 여건상 하루에 서재로 옮겨놓는 건 10-20% 정도밖에 안된다(책관련 기사도 사실 관심을 끄는 기사의 20-30% 정도를 스크랩해둘 뿐이다). 이런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가불 놓치고 지나가는 기사가 많은데, 오늘 읽은 외신기사 하나는 그래도 챙겨두려고 한다. 외신기사라고는 하지만 한국 관련 기사다. 유감스럽지만, 자랑할 만한 기사는 전혀 아니고, 과거 우리의 치부를 환기시켜주는 쪽이다. 한국 정부가 미군 기지촌 여성들의 매춘을 '관리'하면서 '거대한 뚜쟁이' 노릇을 했다는 것이 기사의 요점인데, 이건 '근대 국가론'을 보강해줄 수 있는 소스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괴물'(리바이어던)은 '거대한 뚜쟁이'이기도 하다는. 지나가긴 했지만 건국 60주년을 맞이하여 집중조명을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이런 건 '역사 강의'에서 왜 빼놓는지?..  

 

 

 

 

 

 

 

 

   

  

 CNB뉴스(09. 01. 09) '한국정부, 거대한 뚜쟁이’ 파문

“한국 정부는 과거 미국의 보호를 받기 위해 매춘부들이 미군들에 몸을 팔도록 허용했다. 한국 정부와 미군은 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기지촌 매춘부들이 미군에 성병을 옮기지 않도록 직접 관리했다”

한국의 전직 매춘부들이 과거 한국 정부가 미군기지촌의 '매춘(Sex Trade)'을 허용하고 미군당국과 함께 매춘부들을 관리했다고 뉴욕타임스는 8일(현지시간) A섹션 6면에 서울발 기사로와의 인터뷰에서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이와 함께 타임스는 “한국이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활용된 위안부의 추한 역사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는 또다른 학대의 모습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고 기지촌 매춘부와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빗대 새로운 파장도 예고되고 있다.

타임스는 올해 80세로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사는 배모 할머니의 사진과 인터뷰를 실어 전직 기지촌 매춘부들의 비참한 삶을 부각시켰다. 신문은 “한국의 전직 매춘부들은 매춘이 강제로 이뤄졌지만 항의 할 수 없었으며 과거부터 지금까지 한국정부가 자신의 추한 역사를 돌이켜보지 않고 일본에 대해 위안부 배상을 요구하는 위선을 보이고 있다고 비난한다”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매춘부들은 한국정부가 한국전쟁이후 피폐한 경제를 돕는데 자신들을 활용했으며 효율적인 기지촌매춘을 위해 영어와 에티켓을 가르치고 몸 팔아 달러를 마련하는 것을 칭찬했다고 주장했다.  



타임스는 김모씨(58)의 말을 인용, “한국정부는 미군을 위한 ‘거대한 뚜쟁이(Big Pimp)’였다”면서 “그들은 가능한 우리가 미군에 몸을 많이 팔도록 독려했으며 달러를 버는 애국자라고 불렀다”고 말해 충격을 주었다. 일부 매춘부들은 “미군과 한국 공무원들이 정기적으로 이들이 있는 집창촌을 단속해 성병의심자를 골라내 단골고객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한국경찰은 병에 걸린 것으로 의심되는 매춘부들을 창문이 철망으로 막힌 이른바 ‘몽키 하우스'에 완치 될 때까지 가두기도 했다고 전했다. 타임스는 이들이 2차대전 때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들처럼 보상과 사과를 바라고 있다면서 “그것이 선택이든, 필요에 의한 것이든, 강요이든 우리 모두는 정부 정책의 희생양”이라는 말을 전했다.

한편 뉴욕 타임스가 기지촌 매춘부들을 일본군 위안부와 비교한 것과 관련, 논란이 확산될 가능성과 함께 한국 정부의 대응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동맹속의 섹스()’라는 저서를 1987년 출간한 캐더린 문 웰슬리 대학 교수는 “이런 기지촌이 한국정부와 미군당국에 의해 지원됐다면 공범관계가 성립된다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여성문제를 관장하는 한국의 성평등부는 이같은 문제에 대해 논평을 거부했고 주한미군 사령부는 “인신매매나 매춘을 묵인하거나 지원하는 불법적인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타임스는 이번 기사를 위해 모두 8명의 전직 기지촌 매춘부를 인터뷰했다면서 관련 문서와 사진에 따르면 상당 부분 이들의 말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한국과 미군당국은 수십년동안 기지촌의 매춘을 용인했기 때문에 사실 이들의 주장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면서 미군기지가 있는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도 기지주변에 술집과 매음굴이 퍼져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전직 매춘부들은 한국 국민들이 정부가 이 일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2006년 한 전직관리는 TV에 나와 정부가 기지촌 매춘부들을 적극적으로 독려하지는 않았을지라도 당시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해서 나쁜 일은 아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인정했다. 



국회 기록에 따르면 일부 한국 지도자들은 매춘의 필요성을 용인하기도 했다. 1960년 두명의 의원이 동맹국의 군인들이 일본에서 달러를 쓰는 것을 막고 이들의 ‘자연적 욕구’ 충족을 위해 매춘부 공급을 촉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 내무부 이성우 차관은 정부 답변에서 ‘미군을 위한 매춘부 공급과 여가활용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한국 정부는 1969년 닉슨독트린 선언 이후 미군의 철군 가능성을 두려워했고 이를 막기 위해 주한미군을 잘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한국과 미군 당국은 매춘부들을 등록하고 적절한 성병치료를 받도록 공동 노력을 기울였고 미등록됐거나 정기검진을 받지 않는 매춘부들을 단속한 1976년 보고서 기록도 있다. 이들 기지촌은 현재도 존속하지만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필리핀에서 온 외국여성들로 대체되고 있다. 전직 매춘부들은 주류사회와는 소외된 채 기지촌에서 대부분 궁핍하게 살고 있으며 해외로 입양을 보낸 혼혈자녀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전모씨(71)는 18살이던 1956년 고아가 돼 굶주림을 못이겨 동두천의 기지촌을 찾게 됐다. 전 씨는 60년대에 아들을 낳았으나 아이가 열세살이 됐을 때 장래를 위해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훗날 미군이 된 아들은 10년전 엄마를 찾아왔지만 전 씨는 아들에게 “난 엄마로서 실패했다. 나를 잊으라”고 말했다. 정부 보조와 폐품 수집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전 씨는 “아들에게 의존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나같은 여성들은 한미 동맹을 위한 최대 희생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녀는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정부와 미군의 것이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김진의 기자)  

09.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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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09 23:41   좋아요 0 | URL
가부장적 민족주의 정서로만 종군 위안부 문제를 접근하던 우리의 자세에 일대 경종을 울려주는 사건입니다.<동맹 속의 섹스>가 제기하는 문제의식만 있으면 일제시대 종군위안부는 민족의 순결한 여성이고 기지촌 여성과 감히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은 할 수 없지요.박노자도 <만감일기>에서 정대협이 종군위안부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길지 않은 글이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리영희<전환시대의 논리>에도 통금이 있던 시절에 정부가 직업여성에게 특별통행증을 주어 외국인 대상 매춘을 허용한 데 대한 글이 있었지요.

로쟈 2009-01-09 23:52   좋아요 0 | URL
기사를 읽고 든 생각은 대한민국이 정말 임시정부의 적통을 이은 게 아니라 일본 총독부와 미군정을 계승한 거구나, 란 거였어요. 해전사의 '재인식'이라고 할까요...
 

새해 벽두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지 지구 공습이 중단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상군까지 투입된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몇 차례 제시된 평화안을 모두 거부했고, 급기야는 유엔 구호차량까지 공격했다 한다. 좀 지나간 어법을 사용하자면 '깡패국가'가 따로 없다(이번 공습의 이유가 자국 주변의 '깡패'(하마스)를 소탕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이스라엘판 '최종적 해결’도 불가능하지 않겠다. '최종적 해결'은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집단 소각한 일을 가리킨다. 분석기사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지지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물러나기 전에 유리한 전략적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나 다음 달로 예정된 총선 등도 고려해 군사작전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라 한다. 세상은 아직 지옥이다...   

경향신문(09. 01. 09) 이스라엘의 왜곡된 건국신화  

새해를 맞이해 희망의 노래를 합창해야 하는데, 올해는 벽두부터 마음이 무겁다. 대공황에 준하는 경제위기가 주요인이지만, 연말연시에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무자비한 학살극이 스산함을 참담한 전율로 바꿔놓는다. 중동 사태의 근원을 캐다 보면 유럽의 모순을 엉뚱하게 해외로 수출한 제국주의와 유럽 중심주의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의 칙칙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을 증폭시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막는 것 가운데 하나가 편향된 역사인식이다. 우리 사회 역시 기독교, 미국, 서방 여론의 영향 아래 이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중동 사태에 대한 공정한 이해를 심각하게 방해받고 있다.

민족의 유전학적 동질성 미약
이스라엘이 학교 교육을 통해 가르치는 ‘유대민족사’를 보면,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토라’(율법)를 받은 이후 줄곧 존재해 온 유대 민족의 유일한 직계 후예다. 유대인들은 ‘출애급’ 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해 다윗과 솔로몬의 위대한 왕국을 세우나, 이후 왕국의 분할과 함께 결국 두 차례(기원전 6세기와 기원후 70년)의 유배생활을 경험한다. 2000년에 걸친 방랑(‘이산’)으로 유대인들은 예멘, 모로코, 스페인,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지로 퍼져갔는데, 하지만 언제나 혈연적 관계를 유지해 민족성을 결코 상실하지 않았다.

이 역사 해석에 따르면, 19세기 말이 되면서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나치의 대학살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유대인들이 오랜 염원을 실현해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땅’에 정착했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은 무주공산이며, 애초의 주민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처녀지이다.거기에 살고 있는 소수의 아랍인들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며, 독자적인 역사를 갖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에 속한다. 유랑민족이 땅을 되찾기 위해 벌이는 전쟁은 정당하며, 그것에 저항하는 것은 범죄행위이다.

이 역사관이 신화에 불과한 것임을 입증하는 책들이 이미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온 ‘신 역사가들’의 논지를 요약한다. 먼저 성경을 역사서로 볼 수 있느냐이다. 종교적 진리를 민족교육의 토대로 만든 것이 19세기 후반기의 시온주의 역사가들인데, 최근 ‘신 고고학’ 등의 연구는 출애급과 관련한 ‘모세 오경’의 사실적 근거를 의심하며, 솔로몬의 왕국도 ‘영화’를 운위하기에는 소왕국에 불과했음을 지적한다. 또한 ‘바빌론 유수’에 대해서는 소수의 지배층만이 유배당했고, 기원후 70년의 ‘제2차 성전 파괴’로 유다왕국의 주민들이 유랑생활을 겪기는커녕 그대로 살다가 일부는 4세기에 기독교로, 대부분은 7세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그렇다면 고대 이래 지중해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고대에서 중세 초에 걸쳐 유대교 역시 가장 강력한 경쟁자인 기독교에 못지않게 중동과 지중해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다수 확보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오늘날 쿠르드족의 거주지에 기원후 1세기에 있었던 한 왕국이 유대교를 받아들여 유대왕국이 되었으며, 5세기에는 예멘에 유대왕국이 들어서 그 후예들이 오늘날까지 신앙을 지켜왔다. 또한 7세기에는 북아프리카의 일부 베르베르족이 유대교를 받아들이고 아랍의 이베리아 반도 정복에 동참해 일종의 공동정권을 이루었다. 대규모 개종은 8세기에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던 하자르족에게서 일어났다. 여기서 유대교는 우크라이나로, 13세기 몽골 침입 이후에는 동유럽과 독일로 퍼져나가 ‘이디시 문화’의 토대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국사학계’는 건국신화에 어긋나는 사실을 애써 무시한다. 가관인 것은 과학을 동원해 유대민족성의 유전학적 근거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그런 것이 발견될 리 만무하지만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인구의 약 4분의 1이 비유대인으로 간주되어 법적으로 국가에서 배제당한 상태인 반면에,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정식 시민임에도 전 세계 유대인들의 고국으로 자처한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의 비서실장 내정자인 람 이매뉴얼은 미국 시민이면서 이스라엘 군에 입대해 아랍군과 싸운 바 있다. 이스라엘 군이 이런 건국신화를 내면화하고 있다면, 하마스에 대한 ‘최종적 해결’은 강력한 정신무장의 지원을 받는 셈이다. 참으로 상상조차 싫을 정도로 무서운 일이다.(최갑수 서울대교수·역사학)     

미디어오늘(09. 01. 08)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 학살극, 즉각 멈춰야

이스라엘은 가자 사태와 관련한 언론의 취재를 철저히 제한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7일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가자 지구에 대한 무차별 공격으로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은 해외 언론사 취재진들의 가자 지역 전투 취재 요구를 거부했다. 취재진들은 전투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쪽의 일방적인 브리핑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신문은 가자 지구에 취재진을 들여보낼 수 없는 해외 언론들은 가자 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언론인들에게 현지 소식을 전해듣고 있다고 말했다. 가자 지구에서의 취재는 하마스에게 통제를 받지 않는다고 이 신문은 밝혔다.
이스라엘 보도통제로 실상 안 알려져
가자 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전 세계의 관심사 이지만 이스라엘의 보도 통제 등으로 그 전모는 다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외신에 소개되는 사진 기사 등을 보면 이스라엘은 전투기, 헬기, 탱크 등을 앞세우고 군인들은 최첨단 장비로 무장한 상태다. 반면 하마스는 로켓과 박격포로 무장하고 대항 중이라고 보도되지만 그 규모, 파괴력 등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국내 일부 언론은 ‘가자 지구에서 치열한 전투가 발생했다’고 하는데 정작 희생자는 팔레스타인 쪽에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지난 십여일 동안의 관련 보도를 보면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은 어른이 어린 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식의 공격으로 보인다. 양쪽의 무력이 큰 차이가 나는 것과 함께 가자 지구 아이들과 부녀자 등 민간인 다수가 피해를 입는 것을 볼 때 이 비극은 군사작전을 통한 학살극과 같다. 이스라엘이 어떤 이유를 댄다 해도 비인도적 무차별 공격이란 비난을 피할 수 없다. 국제사회는 분노에 떨면서도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라는 벽앞에 가로막혀 발만 구르고 있다.   

이스라엘의 학살극 성격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이 지난달 27일 시작된 후 10여 일이 지나면서 알려진 양측의 사상자 숫자를 비교하면 그 참상의 정도가 한 눈에 나타난다. AFP 통신 등에 따르면 8일 현재(한국시간) 팔레스타인 사망자는 702명, 부상자는 3100명에 이르는 반면 이스라엘 쪽은 사망 10명, 부상 10여 인데 이 가운데 전투중 사망한 군인은 6명이다.

가자 지구 사망자 가운데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진격 이전 현지 사망자는 4백여 명이었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진격이 시작된 지난 3일이후 팔레스타인인 3백여 명이 사망했으며 이스라엘군은 6명이 사망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구 진격 이전에 이스라엘 쪽에 로켓 공격을 벌여 이스라엘 민간인 4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이 부상했다.

이스라엘군은 지난 6일 탱크를 동원해 팔레스타인 난민 다수가 피신해 있던 3개 유엔 학교를 공격했으며, 이로 인해 48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가운데는 다수의 부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군은 한 학교에서 하마스가 이스라엘군에게 발포했기 때문이었으며 사망자 가운데 하마스 부대원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엔 쪽은 일차 조사결과 그럴 가능성은 99.9%가 없다고 부인, 공동 조사를 제의하면서 이스라엘의 공격에 분노를 표시했다.

유엔 학교 공격 이유는 하마스 발포 때문 주장에 유엔 그럴 가능성 99.9% 없어
가자지구에서 자행하는 무차별 공격에 대한 비난의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바티칸 성당의 정의와 평화 장관은 이스라엘의 2주 간에 걸친 공격으로 가자 지구는 ‘거대한 수용소’로 변했다고 비판했다고 이탈리아의 한 온라인 신문이 보도했다. 바티칸 성당 쪽의 이스라엘에 대한 이런 비난은 2차 대전 당시 히틀러가 유대인을 집단 수용소에 감금하고 수백만 명을 살해한 것을 상기시키는 날선 내용이다.

바티칸 성당 쪽은 2차대전 당시에는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했지만 지금은 유대인이 가자 지구 공격을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을 집단 학살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 것이다. 폴란드의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는 유대인 1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 나치는 수용소에 감금된 유대인을 처음에는 총으로 쏴죽였으나 나중에는 가스실에 몰아넣어 한 에 수십,수백 명씩 학살을 자행했다. 이스라엘은 바티칸 성당 쪽의 언급에 대해 하마스의 선전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바티칸 성당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하더니 이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사람 집단 학살" 비판
과밀의 빈곤 지역으로 주민 150만 명 가운데 80%가 유엔의 구호식량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번 이스라엘 공격으로 이 지역은 식량과 연료, 약품 부족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있다. 전기와 수돗물 공급은 끊기거나 턱 없이 부족한 상태다. 국제사회는 이스라엘이 이런 상황을 고려해 비인도적인 공격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구호품이 전달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국제사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지난 7일부터 매일 오후 1시(현지시각)부터 3시간 동안 하마스에 대한 군사작전을 중단키로 했다.  

이스라엘은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으로 제안한 하마스와의 휴전안 논의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지만 단시간 내에 타결될 가능성은 낮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의 무략화와 가자 지구로의 무기 반입을 중단시키는 조건이 총족될 때까지 휴전협상을 끌면서 공세를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을 지지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물러나기 전에 유리한 전략적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나 다음 달로 예정된 총선 등도 고려해 군사작전을 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참혹한 일이다. 비인도적 가혹행위는 피의 보복을 부른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대한 공격을 즉각 멈춰야 한다.(고동우 논설실장)  

09. 01. 09. 

 

P.S.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이후, 2008)은 최근에 새 번역본 개정판이 출간됐다. 이전 번역본에 제기된 불만을 출판사쪽에서 받아들인 결과인 듯싶다. 새로운 리뷰기사도 챙겨놓는다. 

한겨레(09. 01. 10) 촘스키의 ‘미국-이스라엘 커넥션’ 고발  

“폭격의 공포에 질린 아이들이 ‘아빠, 이스라엘이 왜 우리에게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이스라엘은 우리 땅을 빼앗으려 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이 모두 죽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왜 ‘세계가 이런 짓을 보고만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가자지구 주민 림 알구사인의 2009년 1월 7일치 <가디언> 인터뷰 중에서)

팔레스타인이 다시 짓밟혔다. 이스라엘의 미사일과 폭탄에 찢긴 채 죽어간 어린아이들의 주검이 비탄에 빠진 부모 품에 안겨 묘지로 향하고 있다. 700명이 넘는 생명이 차가운 주검이 됐다. 지난 60년 동안 왜 이런 비극이 끝없이 반복되고, 세계는 이토록 침묵하는가? 개정증보판으로 새로 나온 노엄 촘스키의 <숙명의 트라이앵글>은 이 질문에 대한 묵직하고 진지한 대답이다. 세계적 언어학자라는 안락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이스라엘 건국 이후 계속된 억압의 역사와 이를 지원해온 ‘끈끈한 동맹’ 미국의 태도를 날카롭게 고발해온 촘스키의 치열한 노력이 1075쪽에 이르는 이 책 곳곳에 배어 있다.  

미국 주류 언론과 이스라엘이 세계를 세뇌시켜온 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의 야만적 공격에 맞서 안보를 지킬 권리가 있다. 이스라엘은 많은 것을 양보하고 평화를 유지하려 하지만, 팔레스타인은 이를 거부하고 로켓포를 쏘아댄다. 이스라엘은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하면서도 민간인들은 희생시키지 않으려 최선을 다한다.”

유대인으로서, 이스라엘 건국 당시부터 이 문제를 깊이 추적해 온 촘스키의 설명은 완전히 다르다. 19세기 말 유럽의 시오니스트들이 2천년 동안 팔레스타인 땅에 살아온 아랍인들을 쫓아내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영국이 이를 지원하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100만명 이상이 쫓겨나 주변국의 난민이 됐고, 고향 땅에 남은 팔레스타인인들도 1967년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군사점령한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가자에서는 2005년 이스라엘군 철수, 이후 봉쇄정책 계속)에서 ‘피정복민’으로 살아왔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을 빼앗아 정착촌을 세우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저임금 노동력으로 착취하면서, 점령에 맞서는 이들을 잔인하게 탄압해 왔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현실에 적응하며 생존권을 찾기 위해 애써 왔으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모든 권리를 거부해 왔다.

중요한 진실은, 이스라엘의 가혹한 점령정책은 “특별한 동맹” 미국의 지원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숙명의 트라이앵글’을 이루고 있다. 이스라엘은 중동의 막대한 부가 중동의 주민들이 아닌 미국과 서구로 흘러가는 데 방해가 되는 중동의 민족주의자와 저항세력을 소탕하는 ‘전략적 자산’이다. 이스라엘은 중동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친미 독재국가들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아 왔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살해하는 데 사용한 무기의 대부분은 미국이 제공한 것이다. 1978~1982년 이스라엘은 미국이 전세계에 제공하는 군사원조의 48%, 경제원조의 35%를 차지했다. 유엔에서 이스라엘의 지나친 행위를 막으려는 결의안들은 모두 미국의 거부권에 좌절돼 왔다. 이스라엘의 학살을 고발하는 이들과 언론에는 ‘반유대주의’라는 딱지를 붙여 매장시킨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세계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는 지금, 이스라엘·미국의 주장과 이 책의 주장 어느 쪽에 귀를 기울일지는 독자의 몫이다.(박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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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1-09 17:49   좋아요 0 | URL
정말 너무들 하네요... 제가 너무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걸까요?

저 처참한 풍경을 사진으로 보자니, 눈물만 흐르네요...

로쟈 2009-01-09 21:40   좋아요 0 | URL
사실 더 처참한 사진들이 많지요...--;

Kircheis 2009-01-09 19:18   좋아요 0 | URL
참 싫어하는 표현인데, 요즘 이스라엘의 행태를 보면 하도 기가 차서 절로 떠오릅니다. 악의 축... 히틀러와 일당들보다 더하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걸까요?;

로쟈 2009-01-09 21:41   좋아요 0 | URL
더하다는 할 수 없겠지만, 요즘은 덜한 거도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9 23:54   좋아요 0 | URL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만들어진 정체성을 다룬 키스 휘틀럼<고대 이스라엘의 발명>도 추천합니다.우리나라에도 신학생들의 필독서로 잘 알려진 고대 이스라엘에 관한 명저들이 사실은 만들어진 고대에 기반하고 있다고 주장을 한 책인데 저도 읽고 나서 그 '명저'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로쟈 2009-01-10 00:00   좋아요 0 | URL
오호, 유익한 정보입니다.^^ 한데, 그 '명저들'도 몇 권 말씀해주시죠. 신학쪽 책은 뭐가 진짜고 아닌지 판별할 수 없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1-10 23:28   좋아요 0 | URL
가장 대표적인 게 존 브라이트<이스라엘의 역사>전 2권입니다.이거 좀 괜찮은 신학대에선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이 보거든요.물론 유령 신학교에선 안 보지만요.

anathema 2009-01-10 10:24   좋아요 0 | URL
키스 휘틀럼의 책'만' 읽어서는 안됩니다. 키스 휘틀럼 같은 사람을 '코펜하겐 학파'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주장은 너무 극단적이고 설득력도 없습니다. 아래 책도 읽어보세요.
William G. Dever, What Did the Biblical Writers Know and When Did They Know It?: What Archaeology Can Tell Us About the Reality of Ancient Israel, Eerdmans, 2001.

로쟈 2009-01-10 13:37   좋아요 0 | URL
이스라엘의‘유대민족사’에 대해서 입장이 다른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1-10 23:53   좋아요 0 | URL
저는 휘틀럼의 책을 이성시<만들어진 고대>와 같은 문제제기를 한 것으로 이해했어요.그리고 그리스 문명에 대한 서구식 해석과 맞먹게 이스라엘 역사를 해석한 것에 대한 비판작업으로 이해했구요.에드워드 사이드가 호평했다니 그 성격을 알 수 있지요.서구 위주의 시각+시온주의의 공모를 파헤치는 작업이죠.핑켈슈타인 위의 책 읽은 뒤 보니까 좋더라구요.다음에 읽을 때 좀 더 정독해야겠어요.
논문집으로 <사회학적 성서해석>도 좋습니다.필자들이 성서해석 분야 일급학자들이에요.특히 게르하르트 타이센 논문이 좋아요.안병무 씨를 비롯하여 한국신학 연구소 쪽 신학자나 성직자들이 영향을 많이 받은 학자지요.

anathema 2009-01-11 19:44   좋아요 0 | URL
다시 말하지만 휘틀럼, 닐스 피터 렘키, 토머스 톰슨 같은 코펜하겐 학파 사람들의 주장은 극단적이고 설득력이 없기 때문에 인정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 기록을 불신하고 고고학에 무지한 이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핑켈슈타인은(저를 가르친 교수님의 스승입니다) 기존 이론과 코펜하겐 학파의 이론에 거리를 두는 사람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1-11 22:10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성서 고고학의 최신학설이 실린 책들도 읽어봐야겠군요.

딸기야놀러가자 2009-01-12 16:31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트라이앵글 다시 나온다는 소리 들은지 5년 쯤 됐는데 이제야 다시 나왔군요
그렇다고 또 사서 볼 수도 없으니... 처음에 번역을 좀 잘 해놓을 일이지 말예요.

휘틀럼 책만 읽고 핑켈슈타인 책은 좀 지겨울 것 같아 안 읽었는데...
그런데 로쟈님, 그냥 제 생각인데, 9.11과 이라크전 이후에
'이-팔 분쟁의 이미지'와, 세계가 그걸 받아들이는 방식도 상당히 바뀐 것 같기는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