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 가서 새 키보드를 사다가 교체했다. 아직 손에 익숙하지가 않아서(어떤 키는 세게 눌러야 한다) 타이핑이 더디다. 연습삼아 페이퍼를 올려둔다. 민속학자 주강현 씨가 <등대> <적도의 침묵> 등의 묵직한 책들을 펴내며 해양학으로 관심을 넓혀나간 줄은 알고 있었는데 제주대 석좌교수가 된 줄은 몰랐다. 그의 학문적 이력을 짚어보고 있는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8. 12. 06) '학문의 바다’ 넘나들다 ‘바다의 학문’으로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 관심을 갖는 분야가 민속이지만 민속학자 중에 스타는 드물다. 거의 유일한 민속학의 간판이라면 주강현(52)씨를 꼽지 않을 수 없다. 1990년대 그가 쓴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등과 함께 우리 땅 우리 문화에 대한 재발견 바람을 일으키며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후 민속학 관련 책을 줄줄이 쏟아내며 주씨는 국내 대표적인 민속학자로 활동해왔다.

이 주강현씨가 올해 새로운 기록을 하나 세웠다. 교수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국립대학 석좌교수가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제주대 석좌교수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석좌교수로 임용된 분야가 정확히 민속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다 전문가’로 석좌교수가 된 것이다.

주 교수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바다 전도사’로 변신했다. 그 스스로 20여년 자신을 수식했던 민속학자라는 타이틀을 거부한다. 이제는 ‘바다학자’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다. 2012년 열리는 여수엑스포 전략기획위원으로 바다올림픽 알리기에 여념이 없다. 잡지 <해양과 문화>의 편집과 해양수산부 통폐합 반대 등 바다와 관련한 분야와 이슈에는 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들어가 있다.

이런 변신은 그가 오래전부터 바다를 자기의 새로운 연구 주제로 삼고 투자해온 덕분이다. 전국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80~90년대를 보낸 그는 이후 본격적으로 바다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관해기> <돌살> <등대> <독도견문록> <적도의 침묵> 등이 이어졌다. 그동안 3면이 바다, 바다가 살길이란 인식은 높았지만 실제 바다를 인문학의 대상으로, 콘텐츠의 연원으로 바라본 학자는 없었다. 민속에서 출발해 바다를 연구의 ‘블루 오션’으로 삼은 주 교수는 요즘 물 만난 고기처럼 바다라는 주제를 누비고 있다. 만나자마자 그는 바다 이야기를 정신없이 풀어놓았다.

-여수엑스포 준비에 한창이라고 들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계획하고 있는지요?

“유치 때부터 해양문화 전문가로 활동해왔고, 지금은 마스터플랜을 짜는 데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엑스포란 것이 원래 제국주의의 산물 아니겠습니까? 1993년 대전엑스포는 군사정권 시절 증산주의 권위주의 개념의 소산이었습니다. 이번 여수엑스포는 문명적으로 생태적으로 가려고 합니다. 주제도 그래서 태평양의 해양문명을 보여주는 해양문명관의 개념을 제안했습니다. 주제도 ‘살아있는 바다 숨쉬는 연안’입니다.”

-화끈하게 보여주는 것을 선호하는 우리 풍토에선 쉽지 않아 보입니다.

“생태주의적인 사고를 좌파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전혀 좌파 개념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유연한 젊은 공무원들이 호응을 해준 덕분에 해양문명관이 들어서게 됐습니다.”

-해양엑스포는 반가웠겠지만 해양수산부가 건설부에 통폐합된 것은 안타까웠겠습니다.

“바다는 통합행정으로 가야 합니다. 수산은 농림부가, 바다는 국토해양부가 맡는 것은 코미디입니다. 운하 파려고 그렇게 만든 것 아니겠습니까? 3면이 바다인데 운하가 무슨 짓입니까.”

-이제는 민속학자라기보다는 해양민속학자라고 해야겠네요.

“저는 이제 민속학자 아닙니다. 해양학자입니다.”

민속과 바다가 따로 떼려야 뗄 수 없을텐데도 그는 잘라 말했다. 그만큼 학문과 활동 모두를 바다에 ‘올인’하겠다는 의지로 들렸다. 그러면 왜 이렇게 변신을 결심하게 된 것일까?

“우리나라 3면이 바다인데 바다에 관심을 안 갖는 것이 이상하죠. 민속학에서도 바다는 당연히 중요합니다. 레비스트로스 등 유명한 인류학자들은 바다와 섬을 뒤지고 다녔습니다. 저는 우리나라 인류학자들을 대신해서 우리나라와 전세계 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는 겁니다.”

-무슨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습니까?

“바다는 에너지입니다. 수심 5천미터에 떠 있는 태평양의 과학기지에서 해저면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장엄했습니다. 그때 바다 위에서 고독을 뛰어넘는 어떤 감정을 느꼈습니다. 바다로 전파된 문명의 역사에 대한 갈증이 솟구쳤습니다. 지중해를 둘러싼 문명의 역사와 자본주의의 전개를 써내려간 프랑스의 페르낭 브로델처럼 되자, 한국의 브로델이 되자고 결심하게 됐습니다.”

이후 주 교수는 자비로 전국 바다는 물론 세계 바다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아다닐수록 바다가 서구 제국주의의 시각으로 덧칠돼 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그래서 쓴 책이 폴리네시아 사람 시각으로 남태평양 해양문명사를 다룬 최근작 <적도의 침묵>이다.

-<적도의 침묵>에서 ‘태평양은 태평하지 않다’고 쓰셨던데요.

서양 학자들은 제국주의 관점에서 원주민들이 미개하냐 아니냐를 먼저 판단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시혜를 베푼 것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서양 항구도시에 있는 해양박물관에 가 보면 대항해시대 인종학살에 대해서는 일말의 반성도 하지 않습니다. 원주민 시각에서 보면 대항해시대는 수탈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원주민 중심으로 기술된 태평양의 해양문명사는 없습니다. 직접 배 타고 남태평양 섬에 가서 원주민들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태평양은 태평하지 않다고 쓴 겁니다.”

-연구비 지원이라도 받는지요?

돈 받으면 제대로 된 글을 쓰기 힘들어요. 소설가한테 1억원 주고 ‘좋은 소설 써봐라’ 그러면 좋은 소설이 나올까요? 그리고 한국 학자가 폴리네시아인 관점으로 문명사 쓴다고 하면 어느 재단에서 돈을 주겠습니까. 책 써서 번 돈으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 거죠. 일찍 대학교수가 돼서 민속학 논문만 썼다면 이런 도전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골프나 치고 있었겠죠.”

주 교수는 교수직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교수가 못 된 것이 “남의 밥그릇을 넘보지 않는다는 학계의 불문율을 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국문학에 멈춰 있던 민속학에 역사학의 개념을 도입했고 더 나아가 인류학과 해양학의 범주까지 넘나들다 보니 학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책도 많이 쓰고 활동도 활발한데 교수 임용이 안 된 이유가 뭐였습니까?

지적 풍토가 거지 같은 나라죠. 학계는 자기 밥그릇 깨는 걸 싫어합니다. 저는 처음부터 복합 학문을 했습니다. 국문학과 사학과를 넘나들었죠. 그래서 제 활동에 대해 디스카운트를 많이 당했습니다. 건조하고 딱딱한 것은 학문이고 현장에서 발로 뛰어 만든 저술은 학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과 싸우느라고 게릴라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강사가 노예 같은 처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더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가 바다학자로서 ‘찜’한 주제가 바로 독도다. 최근 펴낸 <독도견문록>은 그의 학문 범주가 어떻게 확장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500쪽이 넘는 두툼한 독도견문록은 독도와 울릉도의 역사와 민속뿐 아니라 지질, 식생, 토양, 기후 등을 망라하고 있다. 14차례나 독도와 울릉도를 직접 찾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민속학자가 아닌 지리학 생태학에 밝은 해양학자로서의 변신을 느낄 수 있다.

-<독도견문록>을 보면 독도를 여러 각도에서 접근한 것 같습니다.

“바다를 연구하는 것은 환경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군사문제, 식생, 지리학, 생물학, 신화학까지 연결됩니다. 거의 대책이 없을 정도로 포괄적이에요. 정말 화두가 큽니다. 그런 생각과 자료를 정리한 것이 <독도견문록>입니다. 독도는 보통 섬이 아닙니다. 신성하고 강인한 섬이죠. 460만년 전에 형성된 독도는 수심 2천미터부터 솟아 있는 조그만 화산섬이 아니라 거대한 대륙입니다. 독도를 조그만 섬이라고 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입니다.”

-일본에 견주면 우리나라는 바다를 등한시했죠?

“일본은 1914년 남양군도청을 만들고 남양군도(미크로네시아)를 신탁통치했습니다. 일본의 해양 야욕은 무서울 정도죠. 하지만 우리나라는 바다를 거의 안 챙겼습니다. 고려시대까지 중국과 왕성한 무역을 했는데 명나라 주원장이 집권하면서 중국 남쪽의 수군을 가장 무서워했죠. 그래서 아예 바다에 널빤지 하나 못 뜨게 했습니다. 조선은 그걸 그대로 따라했죠.”

-바다는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한민족은 바다로 나가면 승리했지만 바다를 포기하면서 식민지가 됐습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다산 정약용이 <경세유표>에서 해도경영론을 썼어요. 유배지에서 바다를 본 그는 ‘버려진 섬들을 관리하면 보물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바다의 가치를 본 것이죠. 우리나라는 분단돼 있어 대륙과 떨어진 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수록 바다를 깊게 생각해야 하는데 운하나 파려고 하고 있고….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바다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가 있는 야마구치현 하기 해변을 걸으면서 이들의 100년이 넘는 야욕을 곱씹어 봤습니다. 일본과의 해양 영토 전쟁은 끝난 게 아닙니다.”

-앞으로는 어떤 연구를 하실겁니까?

세계의 대표적인 항구도시 스물네 곳을 돌아볼 계획입니다. 항구는 인문학적 지평을 확장해줍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죠. 하멜 표류기는 제주도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하멜이 처음 떠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시작돼 조선을 탈출해 돌아간 네덜란드에서 끝납니다.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것이죠. 해양학은 지금까지 서양인이 한 것입니다. 우리 식대로 접근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바다를 잊어버린 우리 민족에게 바다를 돌려주고 싶습니다.”(권은중 기자)

08,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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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2-07 17:1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강단학문에 맺힌 한이 많군요.그런데 학문 경계를 넘는 분야를 학제간 연구라고 해서 하고 있는 것도 같은데 실제로는 어떤가요?

로쟈 2008-12-07 17:41   좋아요 0 | URL
여러 분야의 전공자들이 모여서 같이 밥 먹는 걸 '학제간 연구'라고 하지요. 자연계열에서는 혹 성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인문사회쪽은 '시늉'이라고 합니다. '학제간 연구'라고 해야 연구비 지원이 되는 탓에...

드팀전 2008-12-08 10:41   좋아요 0 | URL
예전에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페이퍼를 보니 갑자기 <적도의 침묵>에 관심이 갑니다. 지적 풍토가 거지같다는 말에...잘은 모르지만...대학 사회를 늘상 삐죽거리면서 바라보는 입장에서 웃음이 나옵니다...

로쟈 2008-12-08 21:28   좋아요 0 | URL
대학사회도 점점 재미없어져 가고 있어요...
 

미국의 저명한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 로널드 드워킨 교수가 한국학술협의회의 석학연속강좌에 초빙을 받아 지난주에 내한했다. 인권, 정의, 평등이 이번 강좌의 키워드인 듯하다. 강연회는 가보지 못했고 관련기사만 찾아 스크랩해놓는다. 그의 책은 <법의 제국>(아카넷, 2004), <자유주의적 평등>(한길사, 2005) 등이 소개돼 있는데(나는 사놓기만 하고 아직 읽진 못했다) 낙태와 안락사 문제를 법철학적으로 다룬 <생명의 영역>도 소개될 예정이라고 한다. 몰아서 읽어보면 좋겠다.

한겨레(08. 11. 21) 국민 분열시키면 ‘인권침해 정부’

“인권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려면 종교처럼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합해주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한국학술협의회와 대우재단 초청으로 방한한 로널드 드워킨(77·사진) 미국 뉴욕대 교수는 20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연 공개강연에서 “무엇이 진정한 인권인가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줄 ‘인권의 일반이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인권의 중요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이나 종교에 호소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존 롤스(1921~2002)를 잇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거두로 평가받는 드워킨 교수는 <자유주의적 평등> <법의 제국> 등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가치와 권리에 대한 존중과, 자유의 원천인 ‘자원’의 고른 분배를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평등론’을 주장해왔다.

‘인권이란 무엇인가’ 주제의 이날 강연에서 그는 “국가가 국민을 평등하게 배려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면, 국민에게 부과되는 어떤 강제나 의무도 도덕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며 “이런 평등한 배려와 존중의 기준이 되는 것이 인권”이라고 말했다.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보다, 신자가 비신자보다, 아리안족이 셈족보다,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가정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노골적인 편견과 차별 행위가 바로 이론의 여지 없는 인권침해다.” “언론·표현·양심·정치활동·종교의 자유처럼 삶에 대한 시민의 자기책임과 관련된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엇보다 유럽과 미국의 학자·사상가들이 인권을 기독교적 전통과 결부짓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인권이 종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필연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인권이 종교적 기초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아주 오래된 것이며, 일면 유용한 점도 있다고 인정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의 권위에 기대서는 윤리적 이상이나 도덕적 권리를 전혀 지탱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할 인권을 갖는다는 것은 정부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행에 대해 똑같은 힘을 가지고 대응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라며 “다음 강연에서 평등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밝히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평등에 대한 인권을 갖고 있는가’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두 번째 공개강연은 21일 오후 3시 서울 안국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다.(이세영 기자)

고대신문(08. 11. 09) 법철학으로 푸는 실제 법률 문제

<Life's Dominion>에서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낙태와 안락사를 법으로 허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고자 하는데 이 책의 주제 보다 더욱 매혹적인 것은 장중하면서도 집요한 논증방식이다. 드워킨(Dworkin)은 하버마스(Habermas) 및 롤스(Rawls)와 함께 칸트의 철학을 법학적으로 계승한 가장 유명한 법철학자 중의 한 명이다. 이들이 2008년도의 한국에 중요한 이유가 있다.

국민이 법원이 내놓는 판결과 국회가 만드는 법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법실증주의자들은 ‘악법도 법이다’라며 실정법의 정확한 이해만을 고집하고 법현실주의자들은 ‘법은 결국 정치이다’라고 하며 권력을 쟁취하는데 몰두하고 있을 때 국민들은 법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이런 와중에 이들 삼총사는 ‘법은 도덕적 원칙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리고 ‘도덕적 원칙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국민들이 법을 두려워하지도 도구로 보지도 않으면서 법을 자발적으로 경외하면서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할 수 있게 한다.

하버마스는 ‘이상적인 대화의 원칙(discourse principle)’으로, 롤스는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의 가정으로, 드워킨은 ‘정합성(integrity)’등의 절차적 원칙들은 모두 칸트가 순수이성의 작용을 통해 도출했다고 주장하는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에 대응되는 것들이다. 즉 법을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원칙으로 만드는 절차적인 요건들을 제시한 것이다. 이중에서도 유일하게 변호사이기도 한 드워킨은 자신의 법철학을 실제 법률문제를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독자들을 기쁘게 하는데 바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그의 법철학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책의 내용을 설명하여 서스펜스를 망치기 보다는 드워킨이 고안한 매혹적인 개념들의 쌍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드워킨은 낙태를 반대하는 근거에 대해 생각할 때 태아 생명의 독립적인 가치(detached value)와 파생적인 가치(derivative value)를 구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독립적인 가치는 태아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파생적인 가치는 태아가 살 권리가 있으므로, 즉 권리의 주체이므로 소중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독립적인 가치와 파생적인 가치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국가가 특정한 예술품이나 역사유적들을 보호하고 이들을 파괴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파괴행위가 누구의 권리를 침해해서가 아니라 그 예술품이나 유적 자체가 가진 독립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는 아무런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유재산이라도 이를 훼손하는 자를 처벌하는 것은 그 재산이 독립적인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훼손행위가 소유자의 재산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며 소유자가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없는 동물이라면 우리는 훼손행위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드워킨은 현재 낙태에 대한 논란은 태아의 생명이 가진 파생적인 가치에 천착하면서 불필요한 극한대립을 겪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결국 그럼 어쩌자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또 드워킨은 안락사에 대해서도 환자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s)에 대해 생각할 때 결단적 이익(critical interests)와 향유적 이익(experiential interests)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이익의 차이는 드워킨의 저술시점 이후에 나온 영화인 매트릭스(Matrix)를 예로 들면 설명하기 쉽다. 그 영화에서 저항군들은 향유적 이익의 측면에서 보자면 매트릭스 속에 갇혀 기계가 제시하는 경험들을 향유하며 사는 것이 더 좋다. 하지만 저항군들이 향유적 측면에서 최선의 이익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결단적 이익에 더욱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단적 이익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가진 소설처럼 읽히기를 바란다는 면을 개념화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결단적 이익이 안락사에서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소설과 영화에 대한 그리고 거기 등장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필자가 현재 우리말로 번역 중에 있고 <생명의 영역>이라는 우리말 제목으로 곧 서점에서 판매될 것이고 아름답지만 힘있는 영어 문구들의 예시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Vintage Press의 원서를 사 볼 것을 권한다.(박경신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

08.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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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24 16:07   좋아요 0 | URL
1990년대 들어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 한 적이 없음을 알리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그런 말이 있다고 믿고 있으니 역시 학교에서 배우는 거짓말이 무섭긴 하네요.다행히 요즘 청소년들은 그 말을 안 배운다고 하더라구요.역시 문제는 어른들.

노이에자이트 2008-11-24 16:08   좋아요 0 | URL
파생적 가치,독립적 가치는 굉장히 흥미로운 분류로군요.역시 윤리학과 법학의 교차지대는 흥미 만점의 논쟁거리가 많네요.

로쟈 2008-11-24 23:44   좋아요 0 | URL
내년에는 아마 책이 나올 듯싶어요...
 

아직도 몇몇 사전과 책에서 1991년에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가 이달에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고 한다(잘못된 정보에 대한 지적은 http://blog.aladin.co.kr/mramor/1807030 참조). '장수' 학자로서 (103세에 세상을 떠난) 가다머(1900-2002)의 뒤를 바짝 좇고 있는 것인데, 국내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대규모 학술대회가 개최된다고 한다. 이 참에 <구조인류학>이라도 완역돼 나왔으면 좋겠다.

한겨레(08. 11. 20)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돌 ‘구조주의 학술 파티’

대표작 <슬픈 열대>와 <야생의 사고>로 친숙한 프랑스 구조주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1908~·사진)가 28일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 신화·결혼규칙·요리체계 같은 사회문화적 현상의 심층에는 ‘형제와 자매’ ‘구운 것과 끓인 것’ ‘손님과 친족’ 같은 이원적 대립의 구조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혀낸 레비스트로스는 언어학의 로만 야콥슨, 정신분석학의 자크 라캉과 함께 구조주의 시대를 열어 젖힌 20세기 지성계의 거목으로 꼽힌다. 인간의 의식이나 사회 제도가 생물학이나 개인 심리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차이의 관계망’ 속에서 구성된다는 구조주의의 발견에 대해 20세기 지성사는 “데카르트 이래 인류가 자부해 온 주체의 존엄성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든”(푸코) 혁명적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93년 <보기 듣기 읽기>라는 비평집을 낸 뒤 모든 대외 활동을 접었던 까닭에 레비스트로스의 존재는 15년 가까이 사람들 기억에서 잊혀져 있었다. 그사이 프랑스에서는 지난 5월 그의 저술 7편이 갈리마르출판사의 ‘플레이아드 총서’로 묶여 나온 것을 계기로 <누벨 옵세르바퇴르> 등의 매체가 ‘레비스트로스 특집’을 대대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하지만 100번째 생일을 일주일 남짓 앞둔 19일 현재까지도 프랑스를 제외한 서방 언론의 반응은 조용하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구조주의의 변방’ 한국에서 그의 탄생 100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학술대회가 열린다는 것은 하나의 ‘사건’에 가깝다.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레비스트로스는 헤겔·하이데거로 상징되는 독일 철학과, 미드·래드클리프브라운 등의 영미 인류학에 밀려 변변한 학맥조차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기호학회가 22일 서울 덕성여대에서 ‘레비스트로스 탄생 100주년-구조·탈구조와 우리’라는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선 원로 학자인 김형효·임봉길 교수의 기조강연을 시작으로 10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최용호(한국외대)·박여성(제주대)·김기국(경희대)·윤성노(숭실대) 교수 등 인류학·철학·불문학·국문학계에서 구조주의 방법론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와 관계를 맺은 학자들이 총출동한다.

» 1981년 10월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한 레비스트로스(오른쪽에서 두번째) 부부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해 전통 한옥구조를 둘러보고 있다. 한길사 제공

사실 레비스트로스와 한국의 인연이라면, 그가 1981년 10월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청으로 방한해 20일 가까이 머물며 경주와 통도사 등을 방문한 뒤 돌아갔다는 것 정도다. 그의 존재가 알려진 것도 1968년 방한한 프랑스 문학비평가 질베르 뒤랑이 강연을 통해 그의 이름을 언급한 뒤, 같은해 잡지 <사상계>에 3회에 걸쳐 ‘레비스트로스 기획’이 연재되면서부터다.

개인적 친분을 유지하는 학자도 그의 대표작 <신화학> 1·2권을 번역한 임봉길 강원대 교수가 유일하다. 임 교수는 프랑스 인류학의 대가 마르셀 모스 밑에서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수학한 조르주 콩도미나스 교수에게서 인류학을 배웠다. 임 교수는 “3년 전 번역한 <신화학> 1권을 레비스트로스 교수에게 보냈더니 ‘표지 디자인이 좋다. 한글도 아름답다’는 내용의 친필 답장을 보내왔다”며 “지난해부터 기력이 쇠해져 파리의 집에서 칩거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1989년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이라는 책을 통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사상을 국내에 본격 소개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한국에서 구조주의의 ‘학문적 시민권’ 획득이 지연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프랑스어를 모르고, 또 구조주의 이론 자체가 워낙 난해하니까 철학이나 인류학 쪽에서는 제대로 소화를 못했다. 게다가 감정으로 모든 것을 결단내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선험적 구조’를 중시하는 구조주의가 설 자리가 있었겠는가.”

송효섭 기호학회장은 “포스트모던과 탈구조가 논의되는 21세기의 시점에서 그의 이론과 방법론은 아직도 달성해야 할 목표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며 “구조주의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내의 석학과 중진, 신진기예를 망라해 그의 탄생 100년이 던지는 의미와 공과를 짚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이세영 기자)

08. 11. 19.

P.S. 레비스트로스 혹은 구조주의와 관련한 신간은 뜻밖에도 수학사에 관한 책이다. 아미르 악젤의 <수학이 사랑한 예술>(알마, 2008)이 그것. "구조주의 운동이 실은 한 사람의 천재 수학자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책"이라고 소개돼 있는데, 진중권 교수의 평은 이렇다.

이 책은 현대 수학의 역사에 관한 보고이자 구조주의 운동 역사에 대한 충실한 기술이다. 그동안 구조주의에 대한 연구는 언어학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거기에 수학이라는 또 하나의 기둥이 있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레비-스트로스의 예가 보여주듯이 구조주의 운동은 언어학이 발견한 구조의 개념을 수학으로 형식화하여 다른 분과 학문에 적용시킨 하이브리드 전략의 선물이었다. 나아가 그 전략은 학문의 영역을 넘어 현대의 예술과 문학에까지 확장되었다. 그렇게 풍부한 결과를 낳은 위대한 정신적 창조의 바탕에 수학이 깔려 있었음을, 저자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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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에서 출간되고 있는 레비스트로스 문집
    from 순간과 영원 2008-11-20 22:32 
    레비 스트로스가 이달 28일에 100번째 생일을 맞는다고 한다.(관련소식: 한겨레 보러가기) 로쟈님의 서재에서 소식을 접한 김에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던 정리를 한번 해 볼까 한다. 즉, 중국에서는 이들 사상가들, 혹은 인문사회과학 도서들이 얼마나, 어떤 게 번역되었을까? (서점을 훓어보다가,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다가 이런 건 대충이라도 정리를 해 둬야지 마음만 먹었다가 계속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보일때마..
 
 
놀이네트 2008-11-19 21:32   좋아요 0 | URL
저는 레비스트로스보다는 프로프(이종진 교수는 블라지미르 쁘로쁘가 맞다고 하시는 듯)가 훨씬 좋던데요. 머리가 딸려서 그런지... 로쟈님 전공이 러시아 문학이신데 프로프 좀 더 번역하시면 어떨까요. ^^;;

로쟈 2008-11-19 21:48   좋아요 0 | URL
프로프는 신화학자라기보다는 민담학자이니까 전문분야는 좀 다르죠.^^ 아실 듯한데 <민담의 형태론>은 중역이긴 하나 2종의 번역본이 있고, <민담의 역사적 기원> 등도 번역돼 있습니다. 웃음에 대한 책은 번역중인 걸로 알고요. 주저들은 다 나오는 셈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0 13:19   좋아요 0 | URL
마르셀 모스의 제자의 제자가 한국에도 있군요.모스가 뒤르켕 제자이니 뒤르켕 학맥이기도 하겠구요.

로쟈 2008-11-20 20:45   좋아요 0 | URL
제자가 곧바로 '햑맥'을 뜻한다면, 국내에도 어지간한 학맥은 다 있을 듯싶은데요...
 

교수신문에서 '해외 지성 동향' 기사를 옮겨온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7246). 지령 500호 특집의 하나인데, 기자는 특별히 스티글리츠, 울리히 벡, 피터 싱어, 아즈마 히로키 등을 거명하고 있다. 출간된 책들의 이미지들을 덧붙여놓는다.

교수신문(08. 11. 17) 불확실한 세계의 내일을 보려거든 이들을 주목하라

미국의 금융위기와 그로인한 경제 불황의 그림자와 불안은 새로운 변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 변화는 경제 정책만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사상적 변화를 의미할 것이다. 오바마에게 미국의 리더십이 넘어간 것은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각자가 처한 맥락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곧 방향을 잃고 표류하는 오늘의 세계를 진단하고 내일을 전망하는 학자들의 시선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선 체감 온도 영하를 기록 중인 경제 불황의 한파 속에서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미래의 경제학은 누구에게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지난 2001년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조셉 스티글리츠(Joseph E. Stiglitz)의 행보에 주목할 수 있다. 그는 본래 주류 경제학에서 출발을 했지만, 정보 경제학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이 높다. 스티글리츠는 전통경제학의 완전 시장 개념이 정보 완전성을 전제했다 주장하면서, 현실에서는 정보의 결함 및 불완전성이 존재한다고 지적, 정보의 비대칭성을 고려하는 새로운 경제학 모델을 주창했다. 또 스티글리츠는 보험시장은 물론이고 노동시장, 신용거래시장, 국제금융시장 등의 여러 사례의 분석을 통해 정보 비대칭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을 정초했다.

그런데 그를 미국 경제학계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학계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이론적 업적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의 입장에서 선진국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행보 때문이기도 하다. 스티글리츠가 세계화에 반대하는 평등주의 시장 경제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의 저서들을 보면, 그는 미국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에 힘을 쏟고 있다.

올해 9월에 출간된 『3조 달러 전쟁 : 이라크 전쟁의 진짜 비용』에서 스티글리츠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3조 달러(우리 돈으로 3000조원 이상)를 이미 썼고, 전쟁 부상자들의 간호 비용으로 수십억 달러를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스티글리츠의 이러한 분석은 경제학적 관점에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지적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세계화와 그 불만』과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정면에서 문제 삼는 저작들로 역시 큰 화제가 되고 있다.

홍훈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스티글리츠에 대해 “굳이 계보를 따지자면 케인지안에 속하겠으나, 범상한 케인지안과는 다른 학자”라면서 “기존 경제학이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던 그는 이번 금융 위기에 대해서 경제회생에 최소 18개월이 필요하다고 진단하고, 폴 볼커 전 연준의장을 차기 재무장관으로 추천하는 등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바마 시대에 어떤 역할을 할지 주목된다.



현대 사회가 낳는 문제는 비단 경제적 위기와 미국 중심 질서에 한정될 수는 없다. 얼마 전 광우병 파동과 사스 등 신종 질병의 출현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고유하게 나타나고 있는 과학 기술의 부정적 산물 역시 우리의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이 같은 위험에 대해 사고한 사회학자로는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있다. 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하버마스, 기든스 등에 견줄만한 학자로 손꼽힌다. 뮌헨 대학에서 사회학 학위를 받고, 뮌스턴 대학과 밤베르크 대학을 거쳐 뮌헨 대학 사회학 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는 울리히 벡은 지난 86년 『위험사회』란 저서를 통해 서구 근대화 과정이 낳은 현대 사회의 위기화 경향을 진단하면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성찰은 특히 현대의 과학기술이 현대 문명의 여러 이기를 낳았지만, 동시에 위험도 증폭시킨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 두드러진다. 벡은 탈지역화, 계산불가능성, 보상불가능성이라는 특징으로 현대 사회의 위험을 바라보면서, 예기된 재난 속에서 현대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뻔히 그것이 일어날 것임을 알면서도, 즉 예기됐으면서, 감내할 수밖에 없는 재난이라는 점에서 역설적인 면까지 있다. 벡은 근대화의 근본적 한계를 진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법 모색에도 힘을 쏟고 있다. 최근 『성찰적 근대화』, 『정치의 재발견』, 『적이 사라진 민주주의』등의 저서를 통해 근대화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울리히 벡에 대해 “벡은 현대의 과학기술이 일종의 예기된 재난을 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한 학자”라고 하면서 “세계위험사회에 대한 분석을 통해 새로운 비판 이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또 “국내에는 그의 위험 개념이 희화화되고 오해된 측면이 많은데, 진면모가 소개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울리히 벡은 최근 『코스모폴리탄 유럽』, 『코스모폴리탄 비전』등의 저서를 통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를 염두에 둔 새로운 세계 질서를 사유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촛불 시위에 대해서도 언론사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고, 방문 강연을 한 적도 있어, 친숙한 학자로 인식되고 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한 학자는 많이 있다. 그러나 벡처럼 전면적이고, 치밀하며, 독창적인 관점에서 현대 문명의 위험성을 분석한 사람은 드물다. 벡이 과연 새로운 비판 이론의 역사를 열어갈지 관심이 간다.



현대를 사는 우리가 봉착한 문제는 비단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것만이 아니다. 환경오염 등은 자연을 대하는 현대인의 근본적 태도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윤리학계의 좌장으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는 현대 사회가 제기하는 여러 윤리적 문제 해결의 지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싱어는 특히 동물 해방론 및 생명 공학이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에 대한 탁월한 해법을 제시해 명성이 높다.

우선 피터 싱어는 자신을 저명한 윤리학자로서 자리매김해준 저서인 『실천 윤리』에서 이기적 행동은 이기주의적 원칙에 어긋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불합리하며, 윤리 도덕적 삶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곧 비이기적인 삶이 이기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싱어의 논의는 윤리적 행동의 필요성을 그저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과 ‘의무’를 이유로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논증적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도덕 법칙의 존재를 거부하는 자도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논증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 싱어는 인간 중심의 윤리관에서 탈피할 것을 촉구한다. 싱어는 동물이 비록 지적으로 인간보다 저능하지만, 그것이 동물의 윤리적 권리를 박탈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인간 중에서도 발달이 더딘 사람이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차별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비판이다. 이는 우리가 윤리적 고려를 나누는 대상을 확정하는 기준으로 어떤 이해관계나 이성이 아니라 고통을 삼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즉 윤리적 의식의 근원에는 고통에 대한 의식이 있으며, 따라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기능이 윤리 공동체에 편입될 수 있는 자격을 정하는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싱어는 생물중심주의 윤리학을 구축했는데, 광우병 파동으로 관심이 커진 동물 보호 운동의 이론적 준거를 제공했다고 평가할 만하다.

변순용 서울교대 교수(윤리교육)는 싱어에 대해 “살아 있는 윤리학자 중 가장 강하게 생명 윤리와 동물 윤리에 대한 주장을 펼치면서 확고한 이론적 업적을 세운 학자”라고 지적했다. 박상혁 계명대 교수(윤리학)는 “자신 수입의 20퍼센트를 빈민을 위해 사용하는 실천하는 철학자이고, 의료 윤리 등 다양한 응용 윤리 연구의 진보에 광범위한 영향을 준 학자”라고 강조했다. 피터 싱어는 최근 대형 농장에서 잔인하게 살육되고 있는 동물의 현실을 문제 삼은 화제작 『죽음의 밥상』(산책자, 2008)을 내놓은 한편, 『세계화의 윤리』등을 통해 비판적 지성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 



피터 싱어가 이렇게 인간의 윤리적 지향에 대한 모범을 제시했지만, 윤리적 삶은 언제나 대중의 삶과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있다. 이는 윤리적 규범과 의무에 대한 강조만으로는 현대 사회의 보다 거칠고 생생한 이면을 들여다 볼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특히 최근 묻지 마 살인이 빈발하고, 니트족이 사회 현상의 상수로 자리매김한 상황에서, 하위의 대중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절실해지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일본의 젊은 논객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에 주목하게 된다. 1971년생인 히로키는 1998년 『존재론적, 우편적─자크 데리다에 관해』라는 화제의 저작에서 데리다의 논의를 하이데거·프로이트와 연계하면서 ‘우편적 불안’이라는 테마로 재해석해 존재론적 함의를 이끌어낸 바 있다.

이후 히로키는 일본 특유의 오타쿠 문화를 포스트모던과 연결해 사고하고자 하는 시도로도 유명해졌다. 특히 국내에 번역이 된 바 있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문학동네, 2007)와 연작인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에서 거대 오락 산업과 오타쿠 집단의 출현을 포스트모던적으로 읽어내면서 현대 일본사회의 정신적 구조와 인간의 새로운 변화 양상을 진단했다.

그는 이 저작들에서 많은 독창적 테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오리지널 대 복제라는 구도를 데이터베이스 대 시뮬라크르라는 구도가 대신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데이터베이스는 기존에 표층을 규정하던 심층으로서 커다란 이야기를 대신해, 유저(독자)의 읽어내기에 따라 결정되는 심층으로서 데이터베이스를 말한다. 기표에 대한 기의의 초월적 귄위를 거부한 포스트적 관점을 인터넷 세대의 감수성으로 풀어내고 변형한 독창적 제안이다.

히로키는 더 나아가 사람들이 시뮬라크르 수준의 작은 이야기들에 대한 욕구와 데이터베이스 수준에서 생기는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해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포스트모던 시대에 사람들은 △ 타자 없이 충족하는 동물적 존재가 돼가는 동시에 △ 데이터베이스 수준의 커다란 非이야기에 대한 욕망에 따르는 형해화된 인간성을 유지하는 이층적 주체로 변모한다고 본다.

일부에서는 히로키를 가라타니 고진의 뒤를 이를 사람으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다른 일부에서는 초기의 진지한 인문학적 사유를 팽개치고, 일본 특유의 오타쿠 하위문화에 천착해서, 능력을 낭비하고 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후기 구조주의나 미국의 포스트모던주의자들보다 진일보한 관점에서 과감한 테제와 분석을 제시하는 히로키를 이론적으로 천대시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더구나 아직 젊다는 점에서 그 미래가 주목된다.

인간의 미래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지성들은 이밖에도 더 열거할 수 있다.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는 푸코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세계 지성사에 독보적 획을 그은 바 있다. 아주 최근은 아니지만 인간복제 등 생명공학의 발전에 대해서 경계와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그러나 정보화 사회의 심화, 생태 및 환경윤리에 대한 요구의 증대, 집단지성의 출현 등 급변하는 현실을 사고하기에는 낡은 틀을 고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푸코, 데리다, 들뢰즈와 다른 목소리가 프랑스에도 존재함을 각인시켜주고 있다. 현대의 대표적 플라톤주의자로 꼽히지만 결코 고루한 이성주의자에 머물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바디우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복수의 진리를 내세운다. 또 문화적 차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문제의 핵심은 그러한 차이들을 넘어 작동하는 보편성의 차원에 있다고 말하는 점에서 특기할만하다.

현대 정치 철학의 거장이자 기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탈리아 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도 시선을 끈다. 그의 저서들은 늘 화제를 몰고 있으며, 영미와 유럽대륙은 물론이고 한국에까지 광범위하게 지지자를 확보하고 있다. 다만 몇 년 전, 대부분의 좌파들이 ‘NO’를 외친 유럽연합 헌법투표에 대해 ‘YES’를 외쳐 비판의 대상이 된 적이 있다. 또 그의 자율주의가 함의하는 대중 정치 역량에 대한 과도한 신뢰를 문제 삼는 경우도 많다.(오주훈 기자)

08. 11. 18.

P.S. 아즈마 히로키에 대해서는 중앙대 대학원신문의 기사를 보충해놓는다. 기사에서 언급되는 아키라의 책 <구조와 힘>은 국내에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새길, 1995)로 소개된 바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아즈마 히로키, 새로운 사상보다 사상의 새로움을

일본사상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1971~ )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그는 가라타니 고진의 후계자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물론 일본의 한 비평가가 푸념했듯이, 예전의 대학원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진을 읽었다면, 요즘에는 히로키를 읽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히로키는 고진의 후계자로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히로키의 출세작 <존재론적, 우편적>(1998)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자크 데리다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고진의 추천으로 등단한 히로키가 <비평공간>에 연재한 글로, 연재 시작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3살이었다. 그리고 3년 후 이 글이 묶여 출간되자 높은 평가를 받으며 산토리학예상을 수상함은 물론이고, 대개 소설에 수여되는 미시마유키오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아사다 아키라에게 “<구조와 힘>은 이제 과거가 되어버렸다”는 찬사를 받으며 현재까지 수만 부가 팔려나갔을 뿐 아니라 만화로까지 출간됐다. 그 난해하다는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 연구서가 이처럼 많이 읽혔다는 것은 확실히 일본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물론 예외는 있다. 80년대에 <구조와 힘>은 20만 부 정도 팔렸고, 고진의 책도 대부분 수만 부씩은 팔리고 있다).

그러나 히로키는 이와 같은 화려한 데뷔 이후 철학사상 연구를 내동댕이친다. 그리고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같은 오타쿠문화(하위문화) 연구에 매진한다. 국내에 유일하게 소개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001)은 바로 그와 같은 연구의 성과물 중 하나이다. 이 책의 국내 소개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내용도 잘 모른 채 책제목과 저자에 대한 소문만 듣고 이 책을 출판사에 추천한 이가 정작 출간된 뒤에는 실망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확실히 징후적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생각보다 너무나 완고한 나머지 익숙한 분석대상이나 개념, 인명이 등장하지 않으면 한시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확실히 그런 한국의 인문학도들에게 히로키는 어쩌면 실망의 대상일 수 있다.

히로키 자신도 이와 관련해 많은 충고를 들었다고 한다. “자네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인문학(철학이나 사상) 연구 대신에 미소녀 게임이나 분석하고 있다니 재능이 아깝네”라고 말이다. 이에 대한 히로키의 답변은 대충 이랬다. “내가 데리다에 관한 책을 낸 것은 하위문화 비평가가 되기 위해 일종의 지명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위문화는 엄청나게 생산되고 소비되지만 정작 주류 비평가들은 기존 틀에 갇혀 이런 현실적 문제들을 일관되게 무시해왔다. 그러나 나는 서구사상을 학습하며 조립하는 데 만족하기보다 실제 우리의 삶 가까이에 널려 있는 문화의 정체를 분석하고 싶었다.” 이처럼 우리에게 히로키는 새로운 사상가라기보다는 사상의 낯섦(새로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조영일/ 문학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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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1-20 13:17   좋아요 0 | URL
일본에서는 아즈마 히로키 처럼 20대초반에 떠오르기도 하는군요.우리나라 고교생 독서현실로는 어림없는 일이죠.

로쟈 2008-11-20 20:44   좋아요 0 | URL
고교생도 읽을 수 있게끔 번역이 돼 있지도 않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1 14:10   좋아요 0 | URL
사실은 우리나라는 고졸이나 대졸의 차이점도 없는 것 같아요.모두 수험서만 읽으니까요.저도 졸업하고 나서 이런저런 책을 읽었지 대학 시절엔 고졸과 지적수준은 똑같았다고 봐야죠.

로쟈 2008-11-21 22:16   좋아요 0 | URL
사실 우리나라 학생들이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은 영어나 일어로 읽을 수 있는 책의 1/10도 안될 듯싶은데요. 원초적인 한계가 있는 듯싶어요...
 

'프리케리아트'란 신조어가 있다고 한다(일본에서는 유행어인 듯하다). 불안을 뜻하는 영어의 ‘프리케리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어다(분류하자면 나도 프리케리아트로군). 아래 박혜영 교수의 칼럼에서 이 단어의 의미와 '프리케리아트 시대'의 배경에 대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최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는 올해의 대표 키워드를 '자기치유'라고 발표했는데, '희망 잃은 사회' 내지는 '희망 빼앗는 사회'로 내몰린 대중(프리케리아트)의 불가피한 독서 성향으로도 읽힌다. 그 '자기치유'로 우리는 과연 '치유'받을 수 있을까?.. 

교수신문(08. 11. 10) 藤田省三과 땅끝에 선 사람들

지금 우리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은 불안감이다. 경제만은 반드시 살리겠다는 대통령후보에게 다른 자질은 전혀 묻지 않고 몰표를 몰아준 이유는 이 불안감 때문이었다. 경제지상주의와 무한생존경쟁시대를 맞아 한번 밀려나면 끝이라는 사람들의 극사실주의적 현실의식이 결국 떠받쳐준 당선이었다. 지금 사람들은 직장이 있어도 불안하고 없어도 불안하다. 건강해도 불안하고 건강하지 못해도 불안하며, 성공해도 불안하고 성공하지 못해도 불안하다. 집이라도 한 채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왜냐하면 우리사회가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스승도 없이 각자 돈벌이에만 올인하는 끝없는 경쟁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윤리나 미학은 대학교양과목으로도 팔리지 않고, 인간에 대한 예의나 관심은 애완동물에 대한 배려에도 못 미칠 지경이다. 돈이 없으면 더 이상 삶도 없다는 것이 우리시대의 깨달음이 됐고, 투기와 사기는 이런 불안한 시대의 강을 건널 유일한 방법이 돼 버렸다. 치고 빠지는 기술이 최고의 삶의 기술(art of living)이 되고, 불안을 먹고 자라는 보험산업, 펀드산업, 오락산업, 노름산업 등이 최고의 돈벌이 산업으로 떠올랐다. 



우리시대의 불안은 과학지식이 없던 시절 인류가 자연과 우주에  막연히 느꼈던 신비적 두려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우리시대의 불안은 자본주의 초기에 등장한 프롤레타리아들의 계급적 두려움과도 다르다. 단결할 노조조차 없고, 계급적 당파성조차 모호한 무한계약직, 혹은 임시비정규직이 모든 경제분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면서 등장한 ‘프리케리아트’(precariat)란 말은 불안을 뜻하는 영어의 ‘프리케리스’(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의 합성에서 나왔다. 이 말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널리 퍼진 일시적, 유동적, 간헐적, 비공식적 노동조건의 확산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정신적, 정서적 불안이 이들의 전반적인 삶의 조건이 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프리케리아트는 우리시대에 들어서 비로소 등장한 전혀 새로운 세대이며, 초국적 후기산업자본주의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전의 노동계급보다 훨씬 더 전방위적인 자본의 공격에 노출돼 있지만 사람들은 단결할 계급의식조차 형성하지 못한 채 더욱 파편화되고 말았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구조조정의 공포로 위기상황은 일상화됐지만, 사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 오직 혼자서만 분투하다 절망하게 된 것이다. 사실 신자유주의가 진정으로 세계화하는데 성공한 것은 지금 확산일로에 있는 이 프리케리아트들인지 모른다. 



원래 ‘프리케리어스’는 ‘기도에 의해 얻어지는’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이 말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삶의 근원적 위험에 대한 민중의 인식과 동시에 그런 삶의 불확실성을 오직 신의 은총에 의지해 순정의 기도로 이겨내려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지금의 프리케리아트는 원래의 종교적 실존의식과는 무관한 채 오직 경제적으로 끝없는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시달리며 불안해하는 우리시대의 모든 약자들을 뜻한다. 이런 사회에서의 삶의 평화란 경제적 성공으로만 보장될 수밖에 없다. 즉 팍스 에코노미카(pax economica)가 만들어낼 안락에의 평화이다.

일본의 현대문명사상가인 후지따 쇼오조오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라는 글에서 억제라고는 모르는 고도 기술사회의 정신적 기초가 바로 이 경제인간들의 안락에 대한 광적인 추구와 안락의 상실에 대한 초조한 불안이라면서, 이런 정신상태는 마침내 안락에 예속 되고, 따라서 사회는 안락을 향한 전체주의로 치닫게 된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요즘은 신문이나 인터넷을 보기가 두렵다. 실직이나부도로 인한 사람들의 자살소식이 너무 많아서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가 자기 손을 떠났다고 느낄 때 절망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기도에 의지해서라도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그나마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어디선가 게오르그 루카치가 토로했듯이 인간이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길을 찾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지금 우리세대는 강을 건널 배도 없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읽을 눈도 없이 그저 무작정 강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쇼오조오가 말한 이런 안락한 지상의 평화에서 내몰린 우리시대의 프리케리아트에게는 차라리 사람의 운명이 신의 은총에 달려있다고 믿었던 과거 희랍시대가 어쩌면 더 안전했다고 생각될지 모른다.(박혜영 인하대·영문학)


 
한겨레(08. 11. 14) 희망 빼앗는 사회 속 ‘자기치유 열풍’

경제경영서를 펴내는 한 출판사 대표는 자신이 최근 ‘멜라민의 함정’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멜라민을 이용해 수많은 식품을 만드는 일을 줄곧 해 왔는데 갑자기 멜라민을 써서는 안 된다는 말이 나오니 앞이 노랗다는 이야기였다. 신자유주의를 근간으로 해 모든 기획을 진행해 왔지만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책 시장에서 신자유주의 철학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다. 따라서 그동안 기획해 놓았던 책의 대부분을 폐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처음부터 다시 기획해야 한다. 그러니 폐기해야 할 기획의 선인세를 크게 오른 환율로 당장 갚아야 하는 것부터가 난감하다는 이야기다.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이 어디 그 출판사 대표뿐이겠는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을 뽑아놓았지만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갈팡질팡하기만 해서 불안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나마 내세우는 정책마다 모두 가진 자를 위한 것뿐이라 없는 자들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지난 10년간의 상실감을 정신분열적 정책으로 되갚는 듯하다. 그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의 확산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의 확산, 빈부격차의 심화에 따른 양극화 심화, 고사상태로 빠져드는 문화시장, 해소되지 않는 청년실업, 심리적 불안으로 인한 자살자 증가 등으로 대중은 모든 희망을 접어야 할 상황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희망을 잃고 단지 목숨만 겨우 부지하는 상태다. 따라서 스스로 위안받는 자기치유(self-healing)를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대중은 이미 ‘성공’을 포기한 지 오래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사치일 뿐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상처를 보듬는 것에 몰두한다. 이 자기치유가 2008년 출판시장을 상징한다. 대중은 이제 ‘물질’이나 ‘권력’의 획득도 포기하고 자신의 상처난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만을 찾고 있다. 또 먼 미래보다는 당장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틸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시크릿>(론다 번 외)의 ‘비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의 ‘응원’, <하악하악>(이외수)의 ‘거친 숨소리’, 아고라 광장에서의 치유로서의 글쓰기, <개밥바라기별>(황석영), <완득이>(김려령), <리버보이>(팀 보울러) 등 성장소설, 죽음과 자살을 다룬 책, 섬세하게 인간의 마음을 위로하는 심리학 서적 등에 대중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올해 출판시장에서 자기치유가 거대한 흐름을 이뤘음을 방증한다.

함정에 빠진 이들을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정말 우리는 아무것에도 희망을 걸기 어렵다. 개인에게는 국가나 사회, 나아가 가족 등 거의 모든 울타리가 사라진 지금, 우리는 오로지 스스로 위로하며 절망감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와야 한다. 이런 이유로 앞으로 출판시장에서는 자기치유의 바람이 더욱 거세게 불 것으로 보인다.(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08.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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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11-16 21:02   좋아요 0 | URL
공감하지만.. 아래 허연의 시집을 선택하겠어요!! ^^ 내 치유는 그를 통하여.

로쟈 2008-11-16 21:17   좋아요 0 | URL
"가난한 사람이 음식 앞에서 수줍어하는 것처럼 나는 오늘 눈물 앞에서 수줍어합니다." 아무데나 펼쳐서 읽은 구절입니다. '치유'에 도움이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