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지하 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이 설치됐다는 뉴스를 접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든 생각은 아무래도 게리 슈테인가르트의 <망할 놈의 나라 압수르디스탄>(민음사, 2007)을 좀 읽어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망할 놈의 나라, 내지는 망하기로 작정한 나라가 MB의 대한민국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거의 '압수르디스탄' 수준이 아닐까. 어이없어 하면서 읽은 기사들 중 사설 하나와 진중권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9. 01. 07) [사설]경제위기 확산된 뒤에야 설치된 ‘워룸’

비상경제정부 체제하의 상황실 노릇을 할 비상경제상황실이 어제 설치돼 가동에 들어갔다. 청와대는 하루하루 급박하게 돌아가는 경제 상황을 점검하는 일종의 워룸(War Room)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청와대는 정부 안팎에 긴장감을 불어넣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상황실 사무실을 전시(戰時)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청와대 지하 벙커에 두었다. 그러나 정부가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흔적은 없고, 어딘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진 지 벌써 4개월이 되어가고 있다. 금융위기 초기, 그 위기가 미국 국경을 넘어 전 세계 금융시장으로 번지자 영국 등 몇몇 나라들이 워룸 같은 비상기구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분 단위, 초 단위로 바뀌는 금융 상황을 점검하고 대응책을 신속하게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국내 금융시장이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있을 때에도 관련 업무를 총괄할 비상기구를 설치하기는커녕 부처별 각개약진과 혼선, 한 발 늦은 대책 등으로 여론의 질책을 받았다. 그러던 정부가 금융시장이 얼마간 진정된 지금에서야 워룸을 운영한다고 하니, 뭔가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뒷북치기 식으로 만든 기구가 아니냐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정부가 즉흥적인 업무 처리로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킨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달 전 이른바 신빈곤층 대책 마련을 지시했으나 신빈곤층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놓고 부처 간 논란만 빚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일자리 창출 계획도 뒤죽박죽이다. 이 대통령이 연일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자 지난해 말 정부 부처들은 2009년 업무계획을 통해 너도나도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보고했다. 이때 나온 정부 부처들의 일자리 계획을 모두 합치면 43만개에 이른다고 한다. 실업자들의 절반 이상을 고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그러나 무슨 재원으로 어떻게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 새로 운영되는 비상경제상황실이 이런 전시성 계획이나 ‘뒤죽박죽’ 정책의 양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지 벌써부터 걱정스럽다. 

노컷뉴스(08. 01. 07) 진중권 "녹색뉴딜? 군복이 녹색이면 군대는 환경단체?"  

▶ 진행 : 고성국 박사 (CBS 라디오 '시사자키 고성국입니다')
▶ 출연 : 진중권 중앙대 겸임 교수


▲ 청와대 지하벙커에 비상경제상황실이 설치됐는데요.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 한마디로 어이가 없죠. 서울이 지금 가자지구입니까. 이스라엘에 폭격을 맞고 있는 상황인가요. 그런 상황도 아닌데 왜 벙커로 들어가는지 모르겠고요. 이런 데서 우리는 집권층이 가지고 있는 구시대적 마인드를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분들이 구사하는 수사법을 보면 정말 6,70년대의 남한 아니면 5,60년대의 북조선 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예를 들어 집권하자마자 얼리버드 운동을 했는데 그건 북한의 새벽별 보기 운동을 연상시키고요. 대통령도 디지털 시대에 젊은이들을 향해서 에어컨 돌아가는 사무실이 아니라 공사장 나가서 땀 흘리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이건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기 운동을 생각나게 하고, 또 정부와 여당에서 아주 공공연하게 속도전이라는 얘기를 많이 하더라고요. 속도전이야말로 전형적인 천리마정신인데요. 여당 대표도 공공연히 전국이 공사판처럼 느껴지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건 전쟁 직후의 전후복구사업을 연성시키거든요. 이걸 보면 정부여당의 마인드가 완전히 과거에 고착되어 있다는 느낌입니다.  

▲ 지하벙커 문제는 청와대에 공간이 없어서 기존시설을 활용하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던데요?   

= 그런 식이라면 애초에 그렇게 나와야 하는데 지금 지하상황실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레토릭이라는 게 제가 볼 땐 그런 차원은 아닌 것 같아요. 정치적인 제스처가 있어서 자기들이 시시각각 전쟁 상황처럼 대응하고 있다는 발상 아닙니까. 저는 이렇게 경제를 운용하는 걸 워게임 모델을 도입하는 게 굉장히 시대착오라고 생각합니다.  

▲ 경제위기상황실 운영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여러 나라도 그런 걸 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 그런데 이분들이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약간 일종의 문화적 이벤트로 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리고 너무 서두른다는 느낌이랄까요. 언제는 위기였다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했다가 또다시 했다라고 했다가 굉장히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고요. 지금 필요한 건 위기 자체에 대해 대응하는 것도 있지만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할 것 같습니다. 위기라는 것들이야 왔다가 또 언젠가는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부분 전문가들이 올해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쯤 되면 경기가 다시 풀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군사용어까지 남발해가면서 호들갑을 떠는 게 맘에 안 들고요. 더 중요한 건 이분들이 나중에 경기가 풀리게 되면 그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상황실까지 설치해서 대응한 덕이 아니겠느냐고 자화자찬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 정부가 어제 위기극복대책의 일환으로 녹색뉴딜을 발표했는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 군복이 녹색이라고 군대가 환경단체가 되는 건 아니겠죠. 그리고 녹색이라는 게 원래 현 정권의 시장주의 코드와는 잘 안 맞는 색깔이거든요. 그런데 국제적 압력 때문에 할 수 없이 들여온 건데, 예를 들어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파괴 때문에 세계 각 국에서 시장에 한계를 두려고 하지 않습니까, 탄소배출을 제한한다든지. 그러다보니 할 수 없이 들여온 건데, 그 낱말을 들여다가 자기식대로 해석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저탄소 에너지라면서 원자력을 강조한다든지 그런 식이라는 거죠. 그리고 녹색뉴딜이라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콘크리트 공사 위주거든요. 저는 그 말을 들으면 산 깎아서 콘크리트 치고 그 위에다 녹색그물 같은 걸 덮어두는 게 연상되더라고요.  

▲ 이번 녹색뉴딜의 핵심은 일자리 창출이라는 게 정부의 설명이거든요?  

= 그런데 오바마의 그린뉴딜과 정부의 녹색뉴딜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오바마의 것은 최첨단 재생에너지기술에 대한 연구와 개발로 녹색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일자리들은 전문적이고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또 일본이나 영국과 같은 나라들도 대개 그런 식으로 포트폴리오가 짜여져 있는데, 현 정권의 녹색뉴딜은 결국은 토목공사가 대부분입니다. 거기서 창출되는 일자리도 90% 이상이 건설일용직이고요. 또 공사가 끝나면 사라지는 일자리들인데요. 제가 볼 땐 경제에 대한 관념 자체가 너무 토목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50조라는 거금을 근시안적인 프로젝트에 쏟아 붓는 걸로 보입니다. 사실 경기는 부양해야 할 필요가 물론 있습니다. 그리고 건설 부문에서 일자리 창출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겠지만 50조라는 것도 결국 국민의 세금인데 조금 더 미래지향적이고 전문적이고 우리 경제를 위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지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여야가 극한대치상태를 벌이다가 합의를 했는데요. 여야합의에 대해선 어떻게 보십니까?  

= 저는 당연히 그렇게 됐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건 이렇게 합의가 이뤄질 바에는 뭐 하러 그런 충돌을 해야 했느냐는 겁니다. 어차피 합의가 이뤄질 바라면 서로 예상이 되지 않습니까. 자기들이 강행하면 저쪽에서 물리적으로 저항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예측되는 결과들이 있는데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니고 왜 매번 이런 것들을 반복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여야 합의가 끝나고 나서 민노당 강기갑 의원의 의원직 사퇴결의안을 추진하겠다는 얘기가 나오는데요. 이런 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 제가 볼 때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합의가 이뤄졌고요. 거기서 민노당이 계속 반발하다보니까 일종의 왕따를 시키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민노당 의석이 작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건이 다 끝난 다음에 이어지는 일종의 희생양 제의처럼. 물론 강기갑 의원이 잘못한 행위가 있는데 그것에 비해선 과도하게 중요성들을 부여하면서 상징적인 사건으로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게 현명할까요?  

= 강기갑 대표가 사과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그분이 부상을 당하고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건 이해하지만 의원으로서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거든요. 그 부분에 대해선 이미 대국민사과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기갑 대표를 공적 1호라고 하면서 제명을 추진한다는 얘기까지 들리는데요. 제가 볼 때 강기갑 대표가 공적 1호라면 한나라당과 민주당 그분들은 공적 0순위들입니다. 과거에, 또 현재에 했던 일들을 생각해보라는 거죠. 자기들도 의사당에서 분말소화기 쏘는 것도 폭력 아닌가요.  

▲ 여야 합의는 됐지만 한나라당 내에선 후폭풍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야당의 떼법에 한나라당 원내지도부가 굴복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요?  

= 그건 잘못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만약 국회에서 다수당이 맘대로 한다면 굳이 총선한 다음에 의회를 구성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굳이 야당 의원들에게 뭐 하러 세비를 줍니까, 여당 의원들이 하자는 대로 다 하면 되는 거죠. 보시면 아시겠지만 합의처리라는 용어도 있고 협의처리라는 용어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분명하게 다수와 소수의 의견을 절충하는 절차라는 게 그동안 국회에 있었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 그런데 한나라당은 대선민심, 총선민심을 승복하라는 주장을 계속 하는데요?  

= 그럼 촛불민심도 승복해야죠. 지금 한나라당과 특히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어느 정도 나옵니까. 일본의 경우라면 내각의 사퇴, 내각을 다시 구성해야 할 정도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 국민들이 대선 때 자기들을 뽑아줬다고 대선의 모든 공약을 다 동의했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논리적인 오류죠. 특히 대운하 같은 것들을 국민들이 그때 동의한 건 아니거든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까지. 그리고 방송법에 대해서도 국민들의 여론은 다르게 나오고 있고요.  

09.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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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08 17:45   좋아요 0 | URL
원래 신자유주의,특히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뉴딜 반대파가 그 뿌리인데...그래서 우리나라 뉴라이트 경제학자인 이상돈(중앙대 교수)씨는 루스벨트 비판,뉴딜 비판에 몰두했지요.그런데 대통령이 뉴딜의 명성을 빌려 저렇게 나오니 어떻게 볼지 궁금해요.뉴딜이 실패한 정책이라고 그렇게 강조했거든요.

로쟈 2009-01-08 22:53   좋아요 0 | URL
기회주의적 비판이 아니었다면, MB식 뉴딜도 비판해야겠죠...
 

지난 연말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모티브북, 2008), <장기 20세기>(그린비, 2008) 등의 책이 출간된 조반니 아리기에 관해서는 몇 차례 포스트를 올려놓은 바 있는데, 이를 계기로 세계체제론의 계보를 짚어보는 기사도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8. 01. 08) 14년전 ‘금융위기 예언’ 조반니 아리기 환한 조명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체제론자 조반니 아리기(71·사진)가 뒤늦게 주목받고 있다. 자본주의의 반복되는 호황과 위기를 세계 패권의 순환이란 틀에서 분석한 그의 대표작 <장기 20세기>(그린비 펴냄)와 <체계론으로 보는 세계사>(모티브북 펴냄)가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간다는 세계경제의 위기국면에 때맞춰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덕분이다. 

 

미국의 신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1994년 펴낸 <장기 20세기>에서, 아리기는 당시 미국 경제의 부활이 세계 패권의 쇠퇴기에 등장하는 일시적 호황에 불과하며, 머잖아 최종적 위기를 맞게 되리라는 사실을 앞선 네덜란드·영국 패권 쇠퇴기의 호황 국면과 비교해 제시함으로써 적잖은 파문을 던졌다. 그리고 그 ‘예언’은 14년이 흐른 지난해 가을 월스트리트발 금융 공황과 더불어 현실화된 것처럼 보인다.  

아리기는 1960년 밀라노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좌파 노동운동과 연계된 ‘그람시 그룹’에서 활동했다. 1979년 미국 뉴욕주립대에 자리를 잡은 뒤에는 ‘세계체제론의 지휘부’ 격인 페르낭브로델센터를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이매뉴얼 월러스틴(78), 안드레 군더 프랑크(1929~2005), 사미르 아민(77)과 함께 ‘세계체제론 4인방’으로 불렸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세계체제론이 주목을 받았던 1990년대 말에도 월러스틴의 그림자에 가려 있었고, 10여년이 흐른 최근까지 10권이 넘는 저작과 100여편에 이르는 논문들 가운데 금융화와 미국 패권의 향방과 관련된 몇 개의 단편만 번역됐을 뿐이었다.  

최근 백승욱 중앙대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장기 20세기>는 제목과 달리 15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자본주의의 장기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이 점에서 아리기의 작업은 월러스틴이 집필 중인 <근대세계체제> 시리즈와 중첩된다. 다만 세계체제의 팽창과 순환을 설명하면서 월러스틴이 중시하는 콘드라티예프 순환이나 중심-주변부의 수직적 분업 대신 ‘체계적 축적 순환’이라는 개념을 앞세운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아리기에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네덜란드 패권기(17~18세기), 영국 패권기(19세기), 미국 패권기(20세기)를 거치며 진화해 왔는데, 각각의 시기는 패권국이 주도하는 독특한 축적체제를 갖는다. 이런 축적체제는 새로 등장한 패권국 안에서 형성돼 세계적 규모로 확장된 뒤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일정 기간이 지나면 이윤율 하락과 체제유지 비용의 증대로 위기를 맞게 되고, 결국 새로운 국가-기업 복합체가 주도하는 경쟁력 있는 축적체제로 대체된다. 

체계적 축적 순환에 대한 아리기의 분석에서 주목되는 것은, 모든 세계적 축적체제가 최종적 붕괴를 맞기 전 금융부문이 일시적으로 팽창하면서 ‘반짝 호황’을 누린다는 점이다. 축적체제가 활력을 잃게 되면 자본이 과잉축적되면서 생산·유통 부문의 이윤율이 금융수익률보다 하락하고, 유동자본을 얻으려는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는데, 그 결과 실물부문의 자본이 금융으로 이탈하면서 두 부문 모두에서 이윤율이 일시적으로 상승하게 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의 ‘벨에포크’(아름다운 시절), 1990년대 미국의 신경제 호황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러나 이런 호황은 금융부문의 투기적 활황과 생산부문의 부분적 경쟁 완화를 통해 달성된 것이기에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이런 분석은 정보기술(IT) 거품과 과열된 주택경기 덕에 지탱되던 미국 금융호황이 최근 파국을 맞은 것에서도 입증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금융팽창이 경쟁력 있는 예비 패권국들로 자본을 이전시키면서 기존 패권국의 몰락을 가속화한다는 점이다. 아리기가 보기에, 18세기와 19세기 금융팽창의 수혜국은 다음 시기 패권국으로 등장하는 영국과 미국이었다. 그렇다면 위기에 빠진 미국으로부터 패권을 넘겨받아 새로운 축적 순환을 주도할 주인공은 누구인가? 19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아리기는 일본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 경제권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는 10년 새 급속히 성장한 중국 경제로 시선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최근 집필한 <장기 20세기>의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서 아리기는 “미국이 이라크 수렁에 빠진 사이 중국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면서 금융자산을 획득했고, 동아시아와 그 너머에서까지 미국을 대체해 상업적 팽창과 경제 팽창의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아리기가 중국에 주목하는 이유는 이런 외형적 성과 때문만이 아니다. 2007년 펴낸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에서 그는 중국의 경제시스템을 사회주의 복지제도에 기반한 ‘노동 집약-에너지 절약적’ 축적체제로 규정하고, 이것을 ‘자본-에너지 집약적’인 서구식 축적체제를 대체할 ‘지속가능한 경제발전의 미래’로까지 격상시킨다.  

하지만 이런 아리기의 주장에 대한 서구 좌파학계의 평가는 냉담하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지난해 11월 <교수신문>에 소개한 영미권 학자들의 반응은 아리기의 관점이 “초기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은 중국 자본주의의 착취구조에 대한 무지”(데이비드 하비 뉴욕시립대 교수)에서 비롯된 “현실과 동떨어진 희망적 가설”(마크 엘빈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 명예교수)에 가깝다는 것이다.(이세영 기자) 

09.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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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08 17:39   좋아요 0 | URL
분과 사회과학을 뛰어넘어 역사학까지 아우르는 이런 학자들...문사철하는 이들의 꿈이죠.
저 도표를 보면서 정성진 씨가 화내겠군요.트로츠키는 왜 빠졌느냐고...

로쟈 2009-01-08 22:50   좋아요 0 | URL
문사철은 좀 다른데요.^^ 그 안에서도 '데이터(팩트)'를 다루는 이들이 있고, '언어(글)'을 다루는 이들이 있으니까요. 사회과학의 꿈일 텐데, '역사적 사회과학'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딸기 2009-01-08 22:01   좋아요 0 | URL
재닛 아부루고드도 안 보여요...

로쟈 2009-01-08 22:48   좋아요 0 | URL
'4인방' 중심이어선가 봅니다...

딸기 2009-01-08 22:02   좋아요 0 | URL
그런데 유럽중심주의 절판이었는데... 다시 나왔나봐요?

로쟈 2009-01-08 22:47   좋아요 0 | URL
절판된 거 맞습니다. 개정판이 나올 거라고 하네요...

딸기 2009-01-12 16:32   좋아요 0 | URL
헤구구... 언제나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이번주 시사IN에서 '우석훈의 경제프리즘'을 옮겨놓는다. 이유야 물론 책에 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분야로 치자면 출판경제학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이 책시장을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이라고 부른다. 흠, 그렇담 이 알라딘이란 공간 또한 전장(戰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로쟈는 '전선기자'쯤 되겠고. '전우들'에게 보내는 새해 메시지를 우석훈의 칼럼으로 대신한다. 요지는 이렇다. "‘돈이면 최고다’라는 지난 4~5년간의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를 열었다면, 다른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시사IN(08. 12. 29) 책,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  

책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물건이다. 최근의 진화이론을 다루는 생물학자들은 문화와 제도의 영역을 일종의 확장된 유전자와 유사한 개념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접근은 약간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유전자 환원론이라서 생각만큼 학계에서 환영받고 있지는 못하다. 어쨌든 문화 현상을 진화 장치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토막 중 가운데 토막으로 들어갈 것은 역시 책이다. 책은 사회적 기억과 함께 새로운 지식의 창작 그리고 서로 다른 문화매체 간의 소통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기능을 가진 듯하다. 문화 영역에서도 책의 존재는 거의 절대적이다.

지식사회학의 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역은 존재하기 어렵다고 지적한 적이 있는데, 사실 책만큼 이데올로기와 가깝고, 또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물건도 별로 없다. 2008년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각각의 이데올로기의 생산자이며 동시에 전파자이고, 이런 점에서 책들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 전쟁이 뜨겁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갔는가? 웃기지 마시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혹은 그 이후에도 이데올로기 전쟁은 사람들이 경제적 생활을 하는 한, 멈추어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 출간된 책 중에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순수’―이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의 영역에 해당하는 책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한 권도 없다.

만약 한국의 책 중에서 정말로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책이 딱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홍성대의 <수학의 정석>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지금까지 5000만 부쯤 팔린 이 <수학의 정석>은 최소한 한국에서 좌파든, 우파든, 생태주의자든, 여성주의자든, 아니면 극우파까지 모두 보는, 그야말로 이데올로기 없는 책인지도 모른다. 물론 따져보면, 이 책에도 수학 이데올로기가 있고, 진학 이데올로기가 있으며, 학벌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기는 하다.

책의 이데올로기 전쟁이 얼마나 극심한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영화와 비교해보자. 감독이 좌파 계열이든 아니든, 예를 들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같은 대형 국내 영화가 상영되면 전 매체가 이를 밀어주고 띄워준다. 물론 영화에도 예술영화와 B급 영화, 좌파 계열의 영화와 지독한 쇼비니즘 영화 혹은 마초 영화 같은 것들이 있지만, 어쨌든 국내 영화계 생존의 차원에서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거의 모든 신문과 매체가 어느 정도는 다뤄준다.

이데올로기 없는 책은 없다

그러나 책의 경우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특히 신문 서평의 경우, 이른바 조·중·동에서 다루는 책과 한겨레·경향이 다루는 책은 거의 싸늘하다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한때는 조선일보 서평이 2000권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추정하던 시절이 있지만, 지금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어쨌든 그만큼 한국의 신문들이 이데올로기에서 확실한 자기 지형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책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2007년 기준으로 3조1000억원 규모의 시장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볼 때,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데올로기 전쟁터의 최전선이 바로 이 출판문화 현장이다. 물론 그렇다면 흔히 생각하듯 이 이데올로기 전쟁이 사회과학 내에서 좌파와 우파 혹은 기타 서로 다른 사회에 대한 이론이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맞붙는 형국인가? 그렇게 고상한 방식으로 한국에서 논쟁이 진행되거나 사회적 논의가 전개되었다면, 지금 사회가 이 꼴은 아닐 것이다.

만약 이념적 지평에서 한국의 출판계를 나눈다면, 한쪽에 역시 사회과학으로 분류되는 책이 자리하고, 다른 한쪽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계발서와 경제경영 서적이 들어갈 것이다. 물론 이 경제경영서의 정식 분류는 ‘재테크 책’ 정도가 맞겠지만, 어쨌든 장하준같이 이 시장에서 버텨낸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경제경영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것이다. 물론 그 내부도 분류해보면 금융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한 부류, 건설자본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것이 또 다른 부류이다. 뭔가 기술적인 분석을 한 것 같지만, 사실 ‘증권 투자해라’와 ‘땅 투기 해라’ 따위 아주 강력한 한국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 외에는 별 얘기가 없다.  

그리고 이런 재테크 서적과 쌍을 이루는 책이 바로 최근 한국 출판계의 큰 특징인 자기계발서이다. 물론 모든 자기계발서가 다 지독한 이데올로기 서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은 거의 100% 그렇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지난 수년 동안 한국을 강타했던 <마시멜로 이야기>나 <시크릿> 혹은 공병호의 자기계발서 시리즈들은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다. 이런 책들의 실제 메시지는, ‘모든 것은 네 탓이다’ 그리고 ‘사회에 절대로 반항하지 말라’ 같은 매우 단순한 코드를 담고 있다.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 열어
이러한 흐름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들은 흔히 인터넷 서점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기준으로 인문학 혹은 사회학과 같은 분류 코드를 가진 책이다. 이런 책들은 많은 경우, 개인에게 무엇인가 할 것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돈이면 최고다’ 혹은 ‘우리나라 최고다’라는 말이 아닌 또 다른 것들을 독자에게 끊임없이 전달하려 한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유형의 책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며, 그것이 직접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문학 역시 이데올로기 성격이 강한데, 최근 한국의 문학들은 일본식 표현대로 사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

올해 국방부의 불온서적 사태에서 보았듯이, 책에 대한 정부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더욱 강해질 것이고, 특히 정부 지원금을 받으면서 출간되는 많은 책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더욱 많은 책이 원천적으로 봉쇄당하는 정치 탄압이 발생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게다가 수년간 계속될 경제 위기 속에서 국민은 제일 먼저 지갑을 닫게 될 것인데, 불행히도 한국에서 도서 구입비를 별도 예산으로 소비 계획을 짜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이 심각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결과가 사실은 다가올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고, 상황은 지금 매우 열악해 보인다. 어쨌든 더 많은 책을 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회원들이 참여하는 일종의 출판생협 형태나 사회적 기업 같은 제3부문의 방식을 고민하는데, 방법이 녹록지 않다.

‘돈이면 최고다’라는 지난 4~5년간의 자기계발서 이데올로기가 ‘명박 시대’를 열었다면, 다른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돈이 최고가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책들이 많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필요하다. 이제 일반 시민의 지혜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정부의 돈을 사용하기는 어렵다.(우석훈_경제학박사) 

09. 01. 01. 

P.S. 대개 그렇듯이 기사는 지난 월요일에 읽었다. 또 대개 그렇듯이 아침 전철 안에서였다. 책을 소재로 한 칼럼이기에 나름 '진지하게' 읽다가 몇 번 키득거렸는데, 우석훈의 독특한 스타일, 곧 문체 때문이었다. 문체를 만드는 건 일차적으로 반복이다. 당신은 무엇을 반복해서 읽으셨는지? 내가 읽은 건 이것이다.  

-어쨌든 문화 현상을 진화 장치의 일부로 파악한다면, 그 가운데 토막 중 가운데 토막으로 들어갈 것은 역시 책이다.    

-어쨌든 국내 영화계 생존의 차원에서 나름 괜찮은 작품이 나오면 거의 모든 신문과 매체가 어느 정도는 다뤄준다.

-어쨌든 그만큼 한국의 신문들이 이데올로기에서 확실한 자기 지형을 가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책이 이데올로기 전쟁의 최전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쨌든 한국에서 책이라는 것은 2007년 기준으로 3조1000억원 규모의 시장이기는 한데, 그 중에서 아동용 서적 1조원을 빼면 실제로는 2조원 정도 된다.  

-어쨌든 장하준같이 이 시장에서 버텨낸 극소수를 제외하면 한국에서 경제경영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것이다.  

-어쨌든 이 두 가지 유형의 책은 모두 이데올로기적이며, 그것이 직접 이데올로기를 다루고 있든 그렇지 않든, 굉장히 사회적인 의미를 띤다.  

-어쨌든 더 많은 책을 내고, 사람들이 더 자주 책을 접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물론, '물론'이란 부사의 과다한 노출에 주목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내 경우엔 '어쨌든'의 반복이 보다 유표적으로 여겨진다. 눈에 띈다는 말이다. 글쓰기 버릇이기도 할 텐데(하지만 이 버릇은 사고습관과도 연관이 있다), 어쨌든 경제학자 우석훈은 '어쨌든'이란 부사를 너무 자주 쓴다. 과소비한다. 그럼에도 '어쨌든 우석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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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1-01 21:15   좋아요 0 | URL
그것은 마치 로쟈님의 '해서, ...'와 같군요.^^

로쟈 2009-01-01 21:21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혹 그렇더라도 온라인과 오프라인 글쓰기는 좀 다릅니다.^^; 온라인에서는 일부러 반복해서 쓰기도 하거든요...
 

여느 때 같으면 목요일 아침이지만, 해가 바뀐 탓에 언론에도 여러 신년특집기사들이 게재된다. 하루  쉰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그런 기사들을 일람해보는 것이다(1년에 한번이다!). 일람까지는 아니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걸 읽어본다. '대전환의 시대'를 화두로 한 '세계 석학과의 대담' 시리즈인데, 이매뉴얼 월러스틴 편이 가장 먼저 실렸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30706.html). 작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어서 이젠 낯이 익다. 세계체제론자가 보는 변화의 향방을 '신년대담'으로 읽어/들어본다.  

한겨레(09. 01. 01) [세계 석학과의 대담] 자본주의 어디로 가나?  

지난해 전세계를 휩쓴 금융위기는 1980년대 이후 진행된 투자금융 중심의 자본주의 발전모델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고삐풀린 시장과 자본의 폭주로 특징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해를 맞아 <한겨레>는 시장과 국가, 성장과 복지, 국제무역과 통화질서뿐 아니라 환경과 발전, 소득과 분배, 생산과 소비 등 기존 사회질서 곳곳에서 움트고 있는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의 기운을 ‘대전환’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세우려 한다. 한겨레는 크게 2부에 걸쳐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전환의 물결을 독자들과 함께 나눌 예정이다.

우선 제1부에서는 ‘자본주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진보적 외국 석학 5명의 진단과 분석을 차례로 싣는다. 첫 문을 여는 주인공은 ‘세계체제론’으로 잘 알려진 이매뉴얼 월러스틴 예일대 명예교수다. 이매뉴얼 교수와 한 대담은 지난달 17일(현지시각) 코네티컷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 연구실에서 이뤄졌으며, 서재정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진행을 맡았다.    

이매뉴얼 월러스틴(78) 교수는 16세기 이후 전개된 자본주의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분석한 ‘세계체제론’으로 유명하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아프리카 식민체제 연구에 몰두하다가 1974년 <근대세계체제론> 1권을 시작으로, 1980년과 1989년 전3권의 대작을 내놓았다. 뉴욕주립대(SUNY) 빙햄턴대학 브로델연구소를 중심으로 ‘세계체제론 학파’라는 새로운 학문 흐름을 일궈냈다. 1976년부터 1999년 은퇴할 때까지 빙햄턴대학 교수를 지냈고, 2000년부터 예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세계체제론> 외에도 <역사적 자본주의>(1983), <미국파워의 쇠퇴>(2003), <유럽의 보편주의>(2006) 등이 있다.

서재정(48) 존스홉킨스대학 국제관계대학원(SAIS) 교수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국제정세의 전문가로 꼽힌다.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서울대 물리학과 2학년 재학 중 가족 이민으로 미국에 정착한 뒤 시카고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는 대학시절 자유로운 독서와 한반도 정세 변화에 대한 관심이 자신을 물리학도에서 정치학도로 변신케 했다고 말한다. 정치학 석·박사 과정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에서 마쳤다. 2000년 코넬대 교수를 거쳐 2007년 7월 존스홉킨스대학으로 옮겼다. 주요 저서로는 <군사동맹에서 파워와 국가이익, 정체성<(Power, Interest and Identity in Military Alliances) (2007)이 있다.    

서재정 교수(이하 서)=요즘 누구나 ‘위기’를 말한다. 어떤 사람은 금융위기, 어떤 사람은 더 일반적인 경제위기를 얘기한다. 신자유주의의 위기,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란 말도 하고 있다. 현재의 위기를 어떻게 봐야 하는가?

월러스틴 교수(이하 월)=우선 위기란 말을 너무 막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상승하던 경기곡선이 하강하는 상황을 위기로 해석한다. 나는 그런 식으로 위기란 말을 쓰진 않는다. 1945년 이후 세계를 보면, 미국이 세계체제 속에서 확실한 헤게모니 국가였던 25년의 시기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세계경제도 역사상 최대의 팽창이 이루졌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는 7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은 경기순환 관점에서 보면 ‘콘트라티에프 B국면’(50~60년 주기의 경기순환에서 침체국면을 뜻함)에 들어섰다. 경기침체기의 전형적인 특징은 막대한 이윤을 얻던 독점기업의 지위가 다른 기업의 진입으로 흔들리고, 가장 이윤이 높던 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임금이 좀더 싼 곳으로 산업을 옮기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본을 금융영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여러 형태의 빚 메커니즘을 통한 투기이다. 또 나는 이것을 ‘실업의 수출’이라고 이른다. 이런 방식으로 1970년대엔 유럽이, 1980년대엔 일본이, 그리고 1990년대 초엔 미국이 성공했다. 하지만 금융투기는 언젠가 터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콘트라티에프 B국면의 막바지 단계에서 그것을 경험하고 있다. 최근 밝혀진 매도프의 폰지사기 사건은, 더이상 금융투기로는 이윤을 계속 창출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완벽한 사례이다.  

서=현재 국면에서 흥미로운 점은 세계경제가 경기순환의 하강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헤게모니가 전보다 더욱 심각하게 의문시되는 상황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 이래 약 30년 동안 쇠퇴를 거듭해왔다. 이후 미국의 여러 행정부들이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 과정을 역전시키려고 해왔다. 어떤 행정부는 인권외교나 일부 진보적인 조처들을 시도했고, 다른 행정부는 군사력을 확장하는 정책을 펴거나 ‘스타워즈’ 같은 첨단 군사력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행정부도 이 과정을 되돌리지는 못했다.

월=지금 국제 상황은 미국도 돌이킬 수 없는 다극체제다. 아주 복잡하고 혼란스런 상황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른바 금융의 붕괴, 경기 불황에 빠져 있다. 심각한 디플레이션이 이어질 것이다. 4~5년 안에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작동해온 방식이다. 헤게모니의 쇠락에도 새로운 것은 없다.

 

서=미국 헤게모니의 쇠락과 결합된 장기적인 경기침체는 정상적인 흐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그 자체로 어떻게 되나? 전체 세계체제가 깊은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할 정도인가?

월=우리는 정상적인 경기 하강국면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번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위기라는 점에서 앞으로 20~30년 안에 안정될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가 사라지고 다른 종류의 세계체제로 대체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년간 썼던 글들에서 수차례 설명한 얘기이지만, 자본이 부담해야 할 세가지 기본 비용은 인적 비용과 투입 비용, 과세 비용이다. 모든 자본가들은 꾸준하게 상승하는 이 세가지 비용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미 비용 부담이 너무 많은 데 반해 생산으로 얻을 수 있는 잉여가치는 너무 줄어든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가 균형 상태에서 과도하게 이탈해 일시적으로라도 다시 균형 상태로 회복될 수 없게 됐다고 분석했다. 우리는 분기점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체제보다 나은 체제나, 또는 더 나쁜 체제를 갖게 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됐다는 점이다.  

서=위기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70, 80, 90년대에도 아주 위험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체제의 종말이나 자본주의 종말을 예견하는 전문가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계체제는 어려움을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70년대 세계경제는 석유 위기를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았고, 80, 90년대에도 그랬다. 그렇다면, 이번 위기에서 그렇게 되기 어려운 이유는 뭐라고 보나?

월=이번은 아주 힘든 국면이다. 체제 붕괴를 1년이나 10년의 문제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체제 붕괴는 50~80년 걸리는 사안이다. 석유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는 미국이 깊이 개입했다. 미국이 그 위기를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1973년 유가 인상을 밀어붙인 두 나라가 사우디와 이란이었는데, 이란의 샤 국왕은 석유수출국기구 가맹국 내에서 가장 친미적인 지도자였다. 유가 인상에 따라 뭉칫돈이 산유국으로 옮겨갔고, 그 돈은 다시 미국 은행에 예치됐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는 미국 정부와 소비자들이 위기를 벗어나는 일이 더욱 어려워졌다. 미국 정부와 소비자 모두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다. 결국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중국 등 다른 국가들과 공생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는 미국이 전적으로 부채에 의존해 살아가는 믿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는데,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부채란 언젠가는 되갚아야 하는 것이다. 중국이나 노르웨이, 카타르 같은 나라들은 한편으로는 자국 상품을 계속 구매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달러로 투자한 돈의 가치를 잃지 않기 위해서 미국이 지탱하기를 바라는 미묘한 상황이 전개됐다. 결국에는 이들 나라들이 달러에서 서서히 손을 떼면서 달러는 붕괴하고 있다.   

서=세계경제가 경기순환의 관점에서 콘드라티예프 B국면에 놓여 있는 동시에 위기의 말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이미 말기에 들어섰다고 한다면 지금의 경제위기는 어떤 작용을 하게 되는가.

월=현재 상황은 지난 20~30년간 진행된 과정의 한 부분이다. 과거에도 이런 경기침체는 몇 차례 있었다. 독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선도 산업을 육성하는 게 지금까지 일반적인 위기 탈출 방식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식으로 위기를 벗어났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5년쯤 뒤에 일시적인 회복을 보일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 자본의 세가지 비용을 더 상승시킬 것이기 때문에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오래전 물리학에서는 한 곡선이 점근선(Asymptote)을 따라 올라가 정점의 70~80%까지 도달한 상태에서 갑자기 붕괴를 시작한다는 분석이 있었다. 지금 세계경제는 이와 비슷한 상황이다. 현재 상황은 세가지 비용곡선의 70~80% 지점에 와 있고, 엄청나게 요동치고 있다.

서=미국의 오바마 새 행정부를 어떻게 보나? 오바마는 당신이 자본주의 체제 위기의 핵심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세가지 비용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답을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전체 임금비용을 줄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일종의 전국민 의료보험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 또 오바마의 야심에 찬 재정지출 프로그램은 인프라와 신기술 투자를 통해 투입비용 상승에 제동을 걸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녹색기술에 대한 투자는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오바마는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치유할 뿐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 같다.

월=세계무대에서 오바마가 가진 힘을 고려했을 때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힘의 중심이 8~10곳으로 분산된 상태에서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은 제한적이다. 최근 브라질에서 열린 리우정상회의를 보자.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유럽 각국 대표들을 초청하지 않은 채 중남미와 카리브해 연안 대부분 나라의 대표들이 200여년 만에 처음으로 다 모였다. 룰라 브라질 대통령은 이번 리우정상회의를 통해 미주정상회의를 완전히 격하시켰다. 5년 전엔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다. 오바마는 세계인들의 맘에 들게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미국을 지도국가로 만들 수는 없다. 사람들은 미국이 지도국가가 아니라, 단지 기후변화와 같은 많은 사안에서 협력하는 국가의 하나가 되길 원한다. 오바마가 할 수 있는 일은 미국 내 문제에 머물 것이다. 국내 소요를 막기 위해 사회민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일이 대표적이다.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다리를 짓는 데 돈을 쓸 것이다. 전국민 의료보험도 시행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내적이고 지역적인 일이다.  

서=우리는 아주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 브레턴우즈협정 이래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잡아 70년대 위기에서도 살아남았던 달러가 최근 뚜렷하게 약세다. 금융위기는 달러에 대한 믿음을 근본적으로 흔들었고, 어떤 이들은 세계통화로서 달러는 이미 붕괴했다고 얘기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은 군사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력은 아무리 기술적으로 정교하더라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전장에서는 효과가 거의 없다는 것이 입증됐다. 미국의 헤게모니를 지탱해온 두 축이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변화가 지정학적 역학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라고 보는가?

월=세계 주요 패권국들은 각자가 충분할 정도의 파워를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타협을 통해 최상의 조합을 모색하려 할 것이다. 예컨대 ‘상하이협력기구’(SCO) 같은 조합이다. 또 러시아나 중국은 브라질과 중남미 국가들과 은밀하게 거래를 하며 주도권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도 이런 게임을 할 수 있다. 서로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미국과 동아시아, 유럽과 러시아 등이 가능한 조합이다.

서=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다양한 금융위기 극복방안이 나오고 있고, 국경간 자본거래에 대한 새로운 감독체계도 논의되고 있다. 이런 논의들은 자본주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쟁점은 지금의 세계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역사적 체제다. 이에 대한 논의에서도 크게 둘로 나뉘어 있다. 세계경제의 체제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개입을 확대하고 국제기구의 감시 기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있고, 다른 쪽에선 힘을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인간과 자연을 ‘상품화의 사슬’에서 해방시켜야만 민주적이고 평등한 세계체제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세계체제 대안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월=평등한 세상에 대해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 200여년 동안 벌어진 논쟁들은 ‘자코뱅’(전위주의)의 시각에서 전개됐다. 이 때문에 모든 게 국가지향적이었고, 또 누구에게나 결과가 똑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종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려 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다 그랬다. 이제는 이런 자코뱅적 시각이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다.

두 갈래 전략을 강조하고 싶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덜 나쁜 악’을 찾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해야 할 일을 10년, 20년 뒤로 미루기를 원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차악은 있게 마련이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건설하려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관심을 유지해야 한다. 이런 가운데서 끊임없이 토론하고 협상하고, 통합을 이뤄나가야 한다.(뉴헤이븐(예일대)/정리·사진 류재훈 특파원)   

팔순 앞둔 백발의 열정…‘근대세계체제론’ 5권까지 의욕

15년 만에 다시 만난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는 팔순을 앞두고 백발이 더 늘긴 했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열변을 토할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월러스틴 교수는 코네티컷 뉴헤이븐에 위치한 예일대 연구실을 먼저 찾은 기자로부터 <한겨레>의 ‘대전환’ 신년기획에 대한 설명을 듣고 “누구나 듣고 싶어하는 얘기”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본주의는 이전의 다른 역사적 사회체제처럼 종말의 기로에 서 있으며, 앞으로 20~40년이 새로운 체제를 향한 전환기가 될 것”이라는 지론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월러스틴 교수는 지난 1998년부터 3년간 한겨레에 실렸던 자신의 칼럼이 스캔된 한글파일들을 보여주며 한겨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다. 그는 1998년 한겨레 연재와 함께 시작했던 매달 칼럼 쓰기를 바쁜 일정 중에도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월러스틴 교수는 해마다 겨울엔 3개월씩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고 있는데, 올해 체류기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연말부터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EHHSS)의 연구실에서 <근대세계체제론> 제4권의 마지막 장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장기 19세기’를 다루게 될 제4권이 새해 초에 출간되면 1989년 제3권 출판 이후 20년 만에 이뤄지는 업적이다. 월러스틴 교수는 자신할 수는 없지만, 20세기를 다루게 될 제5권도 마무리짓고 싶다는 의욕을 보였다. 그는 또 1985년 한국에서 출간된 <세계체제론>(정진영 편역·나남신서 13)을 보여주면서 절판됐겠지만 사본을 한 권 구하고 싶다는 뜻도 밝혔다.(류재훈 특파원)  

☞ 월러스틴 교수의 ‘세계체제론’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의 원래 관심 분야는 미국 정치였다. 미국 정치에서 ‘인종’이란 변수가 갖는 중요성을 인식한 뒤 아프리카 지역 연구에 뛰어들었고, 다시 근대 아프리카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유럽 세계경제’의 역사로 관심을 확장시켰다.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이 대표작 <근대세계체제> 시리즈이다. ‘세계체제론’이라는 그의 독창적 분석틀이 이 책에서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월러스틴 교수에 따르면 사회과학은 ‘부분들의 총체’인 ‘체제’를 분석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체제란 두 가지 기준에 의해 개념화된다. 우선 그 안에서의 생활이 자기충족적이어야 하며, 발전의 동인이 내생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은 오직 ‘세계체제’뿐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은 지역사회나 주권국가가 아닌, 세계체제를 학문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그는 세계체제의 여러 유형 중에서도 16세기 유럽에서 출현한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주된 관심 대상으로 삼았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주변부-반주변부-핵심부’라는 지리적·위계적인 분업구조로 이뤄졌는데, 이 안에서 작동하는 주기적 파동과 장기적 추세가 체제를 팽창시킨다.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유럽에서 시작된 자본주의가 19세기 말 그 경계와 세력권을 전지구적 규모로 확장시킨 결과라는 게 월러스틴 교수의 분석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영속하는 체제가 아니며, 탄생·확장·종말이라는 생애주기를 갖는 ‘역사적 체제’라고 월러스틴 교수는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언젠가 다른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존재의 가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요컨대 체제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한 조정비용이 지나치게 커져 그것을 평형상태에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월러스틴 교수는 △지리적 팽창의 완성에 따른 저임금 노동력 풀(pool)의 소진 △계급투쟁에 따른 체제불균형의 증대 △경제적 압박에 따른 정치적 정당화의 위기 등에서 찾는다.(이세영 기자) 

09. 01. 01.  

P.S. 기자의 마무리 정리멘트가 요점을 말 그대로 '정리'해주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영속하는 체제가 아니며, 탄생·확장·종말이라는 생애주기를 갖는 ‘역사적 체제’라고 월러스틴 교수는 본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언젠가 다른 체제로 대체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본주의가 ‘존재의 가을’에 도달했다는 점이다." 그의 전망대로라면,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새로운 호황 국면을 기대하는 것은 말기 암환자의 회생을 바라는 것만큼이나 '신앙'에 가깝다(위기가 기회이다?). '삽질하는 신앙' 대신에 우리에겐 다른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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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1-01 15:44   좋아요 0 | URL
종속이론과 세계체제론이 함께 소개되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는 종속이론가들은 모조리 그 영향력이 사라지고 왈라스틴의 세계체제론만 남았군요.근대세계체제론의 마무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노익장이 대단하군요.

로쟈 2009-01-01 21:08   좋아요 0 | URL
경제학에 과문해서 그런데, 저는 (자본주의의 중심부-주변부를 전제로 하는) 세계체제론이 종속이론도 포함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닌가요? 종속이론은 일방적인 수탈/착취관계로만 파악하는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2 15:54   좋아요 0 | URL
두 분야 모두 자본주의 이행논쟁 당시의 진영으로 보면 유통주의에 속해요.굳이 따지자면 종속이론은 트로츠키즘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요.그래서 국내에 소개된 종속이론 해설서 중 제일 잘 되었다는 유아사 다케오<제3세계의 경제구조>는 트로츠키를 많이 언급했고 트로츠키 싫어하는 스탈린 정통파?들은 종속이론을 트로츠키즘이라고 평가절하했지요.왈러스틴은 아날학파의 브로델을 더 많이 수용했지요.하지만 국제분업을 강조한다는 점에선 종속이론과 공통점이예요.

로쟈 2009-01-03 00:0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어림짐작에 종속이론이 해방신학과 나란히 유행을 타다가 시들해진 듯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3 18:01   좋아요 0 | URL
종속이론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책중 가장 많이 팔린 <제3세계와 종속이론>(한길사)의 저자 염홍철 씨가 교수에서 정치인으로 그리고 대전시장으로 변신하면서 종속이론도 시들해진 것 같죠?

로쟈 2009-01-03 22:51   좋아요 0 | URL
같은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노이에자이트 2009-01-03 23:56   좋아요 0 | URL
그 양반 정당을 많이 옮겨서 철새 정치인인데 이상하게 인터넷에다가 정당 이력을 안 밝히는
이들이 많아요.염홍철 씨도 마찬가지...민자당에서 어떻게 열린 우리당으로 갔는지...헷갈려요.

로쟈 2009-01-04 00:33   좋아요 0 | URL
어떻게 종속이론을 공부했는지도 헷갈리는데요...
 

주초에 재미있게 읽은 이번주 시사IN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제학자 우석훈의 '사회과학 대망론'이다. 경제위기 때마다 마르크스 경제학이 부활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지만, 그의 주장대로 르네상스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사회과학 독자가 1998년 수준인 20만명이 되는 것이다(고작 인문학 독자 1만명을 꿈꾸는 내가 소심하게 여겨진다). 그렇게 되면 뭔가 새로운 '얘기 만들기'가 진행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당신이 미네르바를 믿는다면 이 참에 우석훈도 믿어보자. 그리고 최소한 한달에 한권, 사회과학서를 돈 주고 사서 읽어보자.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문화가 어떻게 살아나는지 한번 지켜봐 보자. 그런데, 방안을 둘러보니 정말 사회과학서가 드물군. 죄다 문학, 철학, 미학, 역사, 예술서 들이니... 

시사IN(08. 12. 09) 사회과학 르네상스는 오는가

‘부분균형’이라는 분석 틀을 만든 앨프리드 마셜이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고 했단다. 이후에 마셜의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정말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찾지 못했다. 요즘 다시 부활하는 케인스의 적 중에 한 명이, 바로 이 마셜이었다. 어쨌든 이 한 문장은 스무 살 청춘이었던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내가 태어난 이유를 비로소 찾은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개뿔, 경제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의 경제학은 모든 것을 은폐하려고만 했고, 과학은 숫자로 가득한 예쁜 도표에서만 존재했다. 이제 마흔이다. 다시 이 문장을 접하고는 “미네르바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점심이나 저녁식사, 그리고 차를 마실 때 미네르바보다 더 끔찍하고 참혹하게 미래를 예상하던 증권사나 연구소의 경제학자들이 다음 날 발표한 문건의 모든 문장은, “나도 월급쟁이야”라는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월급이 그렇게 중요하더냐, 전문가라는 사람이!

‘마르크스주의 르네상스’라는 말이 있다. 한때 마르크스 경제학이 화려하게 부활한 적이 있는데, 바로 1974년 1차 석유파동 이후의 한동안이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위기를 맞으며, ‘이것은 석유값 때문이다’ 혹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음모 때문이다’라고 되지도 않는 말을 할 때,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그게 맞든 틀리든 나름의 설명을 했다. 과잉생산 때문이든가, 부문별 조정 실패 때문이든가, 아니면 유통주의적 임금조정의 실패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다리면 좋아진다’는 우파들을 제치고 좌파끼리 논쟁하던 시기가 있었고, 이 시기에 마르크스 경제학은 다시 한 번 꽃을 피웠다. 고 정운영 선생이 평생 풀어보고 싶었던 ‘전형논쟁’이라는 것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파 경제학에는 ‘공황론’이라는 것이 없고, 위기이론이라는 것이 아예 없다. 그러니 경제위기가 오면, 당연히 공황이라는 이론 틀에서 출발하는 좌파 경제학이 힘을 쓰게 되어 있다.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이다. 과연 한국에서 사회과학 르네상스가 올 수 있을까?



1만 권 팔면 ‘신의 영역’

자, 한국의 출판시장 규모를 살펴보자. 대한출판문화협회 통계로, 2007년 3조1000억원 정도 된다. 그렇다면 시계를 10년 뒤로 돌려서, 외환위기의 여파가 몰려들기 시작한 1998년에는? 3조7000억원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출판시장은 고작 6000억원만 줄어든 선방을 한 셈이다. 물론 이것은 ‘슬픈 선방’이다. 1998년 한국에서는 1억9000만 권이 발행되었는데, 2007년에는 1억3000만 권이다. 확실히 부수는 줄었다. 그렇다면 어떤 책이 가장 많이 줄어들었을까? 2007년 한국에서 사회과학 도서는 총 1532종이 발행됐다. 1999년 1351종보다 약간 늘어난 셈이다. 그렇다면 1998년에는? 두둥! 1만4460종. 1998년에서 1999년으로 넘어오는 1년 사이에 사회과학 도서가 만 종 단위에서 천 종 단위, 즉 10분의 1 가까이로 준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이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됐다. 다시 말해 외환위기를 경계로 한국에서는 사회과학이 죽었고, 이게 출판시장 자체를 위축시킨 1등 요인이 된 셈이다.

아주 과학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2년 전 나는 여러 통계를 종합해서, 한국의 사회과학 독자가 ‘2만명’이라는 가설을 세운 적이 있다. 이 가설은 대체로 여러 정황에 대해 합리적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사회과학 시장은 50권에서 시작한다. 가족과 지인이 사주는 분량이다. 교수 가 내는 책은 1000권이 넘으면, 우리끼리 베스트셀러라고 부른다. ‘명함 대신 사용하는 책’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2000권을 넘으면, 출판사의 손익분기점을 넘어 최소한 손해는 안 끼치는 책이 된다. 5000권을 넘기면, ‘50명의 글쟁이’ 안에 들어간다. 고종석 같은 저자가 대충 그 선에 서 있는 걸로 안다. 1만 권을 넘기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이런 책을 낸 출판사는 보통 ‘중견 사회과학 출판사’라 분류된다. 이 정도 됐을 때 저자가 받는 인세는 1000만원 안팎이다. 그 이상의 경지는 하늘이 하는 일이다. 장하준은 그래서 ‘신 중의 신’이라 불린다. 국방부 불온문서? 그것도 신의 능력에 포함된다.

최근 일본의 어느 에디터에게 놀랄 만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의 출판시장은 한국보다 3배 이상 큰데도 이른바 ‘심각한 책’이 연간 1500종 나오는 데 비해, 한국에서 같은 1500종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과학을 우습게 보지만, 어쨌든 그는 이것을 한국의 저력이라 파악하며, 일본이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매번 외국 저자들에 비해서, ‘급 떨어지고, 질 떨어지는’ 저자 정도 취급받는 한국 사회과학의 지은이들이, 지난 10년간 일본보다 규모도 작고 구조도 열악한 상황에서, 정말로 이 악물고 사회과학이라는 장르를 지켜온 셈이다. 한국인은 한국 저자를 우습게 보지만, 일본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금방 망할 것 같아 보이는 한국이 아직도 학술문화에서 저력을 가지고 있다고 경계하는 눈치이다.

저자의 고령화가 진짜 위기

한국의 사회과학 시장은, 지난 10년 동안 2만명 정도의 사회과학 독자, 1000명 미만의 저자, 그리고 아직 남아 있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이 이 악물고 지켜온 시장이라서, 단군 이래 최악의 출판 공황이라는 작금의 위기 상황에서도 어찌어찌 버티기는 할 것 같다. ‘신의 영역’이라는 1만 권 팔아 1000만원 버는 상황에서도 버텼는데,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다. 그러나 저자의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편집자의 나이도 같이 높아지는 것, 이건 위기다. 20대가 에디터로 활동하고, ‘지금 여기’에 대해 얘기를 던지는 20대 저자들이 등장하지 못하는 이 구조적 위기, 이건 정말 위기이다. 일본과 한국 시장의 미래 구조 차이는 바로 이 대목에 있다. 즉, 길게는 못 버틴다.

르네상스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이 위기에서 더 많은 사람이 분석하고, 더 많은 사람이 쓰고, 더 많은 사람이 읽고 떠들면서 소통해야 사회적 대화가 시작되고, 사회 합의든 논의든 다음 단계를 위한 진화가 시작된다. 지금보다 10배 많은 사람이 글을 써서 사회과학 독자가 1998년 수준인 20만명이 되면, 나는 비로소 한국형 경제모델도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가장 핵심 쟁점인, 사회과학을 바탕으로 한 문화예술 분야의 ‘시대와 호흡하기’ 그리고 ‘얘기 만들기’가 시작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지금, 세상은 위기이다. 많은 사람이 그 위기를 직시하지 않으면, 그 시스템은 결국 붕괴하게 된다. 한때, 세계의 제국이던 네덜란드가 그렇게 붕괴했다. 위기의 순간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문학적 상상이 결국 위기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단지 ‘용기를 내라’는 이명박식 처방으로는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 문화경제로의 전환, 그 첫발은 이 위기 국면에서 사회과학 르네상스를 이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래야 영화도 살고, 만화도 살고, 음악도 살아난다(하나만 부탁하자. 제발 도서관들, 출판사에게 ‘영광으로 알고 책 공짜로 달라’는 거, 그것 좀 하지 마라). 

08.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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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사IN] 사회과학 르네상스는 오는가 / 우석훈
    from 자기치유 2008-12-14 20:12 
    ‘부분균형’이라는 분석 틀을 만든 앨프리드 마셜이 “경제학은 사회과학의 여왕이다”라고 했단다. 이후에 마셜의 책을 꽤 많이 읽었는데, 정말로 그가 그런 말을 했는지는 찾지 못했다. 요즘 다시 부활하는 케인스의 적 중에 한 명이, 바로 이 마셜이었다. 어쨌든 이 한 문장은 스무 살 청춘이었던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내가 태어난 이유를 비로소 찾은 것 같았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개뿔, 경제학!”이라는 말이 나왔다. 외환위기 시절 한국의 경제학은..
  2. 인문교양과 딜레탕트적 독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6 00:20 
    주간한국의 '당신은 딜레탕트입니까'란 커버기사에서 독서문학 꼭지를 옮겨놓는다. 인문교양서 독자층의 관심을 엿보게 한다('로쟈'와 '비평고원' 같은 이름도 거명되고 있다).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의 양상을 딜레탕트적 독서와 연관하여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럴 만한 여유가 없어서 일단은 기사만 스크랩해놓는다. 참고할 만한 내용은 먼댓글로 걸어둔다.     주간한국(09. 03. 11) [딜레탕트] 독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