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중유보와 거짓말
초등학교 때 TV에서 방영한 디즈니 영화 중 하나가 기억납니다. 줄거리는 청춘 남녀가 서로 좋아하다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야기 중간에 남자가 여자의 집을 찾아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마 남녀가 다투고 나서, 헤어지네 마네 하던 중 남자가 사과하고 다시 사귀려고 집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때 여자의 아버지는 변호사이면 자신의 딸이 이 청년과 교제하는 것을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생각은 이 때 남자 친구를 돌려보내면 교제를 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자가 여자 친구 아버지께 여자 친구가 집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집에 없다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이런 저런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딸의 남자 친구를 돌려보내고 남자 친구는 자신의 여자 친구가 집에 없다고 생각하고 갑니다. (사실은 여자 친구가 집에 있었습니다.) 이 두 남녀는 다른 경로를 통해 화해를 하고, 여자의 아버지가 남자 친구를 돌려보낸 것을 알게 됩니다. (여자는 남자 친구와 다투기는 했어도 헤어질 정도는 아니었고, 남자 친구가 일찍 찾아와 대화를 하였다면 오해와 불편한 감정을 해소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딸이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아버지, 왜 그 때 제가 집에 없었다고 거짓말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법률적으로는 ‘의중유보’라고 하지. 나는 네가 집에 있다고 하지도 않았지만, 없다고 하지도 않았어.” 나중에 여자의 아버지는 딸과 딸의 남자 친구와의 사랑을 이해하고 두 사람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 드립니다. 결혼식을 하면서 영화는 끝납니다.
영화도 재미가 있었지만 (철학적) 의문을 남깁니다. ‘의중유보’는 거짓말일까? 저는 일단 거짓말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이후 실생활에 적용하기도 했습니다. 위와 같이 암묵적인 대화만을 하거나 명시적으로 ‘긍정도 부정도 하지는 않는 것’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 실화
의중유보에 관한 제 실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제 안해와 있었던 것입니다.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도에 출장을 간 일이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 머릿속에는 ‘제주도까지 와서 안해 선물도 없이 가면 분명히 바가지 긁을 텐데.’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때 상대편 회사에서 제주도까지 출장 왔다고 인사로 ‘천혜향’ 과일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잘 되었다. 안해 선물로 갔다 줘야지.’
집에 와서 저는 “당신을 위해 가져왔어.” (생략된 말 ; 선물로 받은 것인데, 저녁에 안주거리로 먹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을 안 먹고,)
안해는 “고마워요. ......” (생략된 말 ; 당신 같은 성격에 선물을 안 사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위해 선물을 사 오다니,)
저는 안해가 명시적으로 돈을 주고 사 왔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내가 돈을 주고 사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굳이 오해를 교정하거나 해명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직장 동료들과 부부 모임이 있었고 제 안해는 그 과일 상자가 제가 돈을 주고 산 것이 아니고 상대 회사에서 출장 간 사람에게 일괄 지급된 선물인 것을 알았습니다.
안해는 제게 물었습니다. “그 때 왜 저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 때 제 말의 문구를 정확히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가져왔다고 했지, 사왔다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이것을 법률적 용어로 의중유보라고 하지요.” (선물을 줄 때, 의식적으로 말했기 때문에는 이것은 사실이다.) 안해는 저에게 더 이상의 항변은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철학적, 윤리적인 답은 궁금합니다. 명시적인 소통과 암묵적인 소통이 다를 때, 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