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선 숨긴 목사부부, 이후 그들이 다녀간 곳에서 확진자 발생.
그 탄산온천은 어머니 모시고 주말이면 가던 곳이다. 관광객도 많지만 일부러 그곳을 찾는 어르신들이 많은 곳인데.

지역감염자가 확산이 없다고 그나마 안심하고 다녔는데 이젠 병원에 가는것도 걱정된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감기처럼 지나가는 거, 아니냐는 코로나에 대한 가벼운 인식들. 그래서 난 괜찮을거야라는 인식이 더 강해서 그런지 요즘 너무 심한 규제가 있는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코로나에 걸리고 완치 후 심각한 후유증에 대한 데이타는 본적이 없는지. 그리고 본인은 괜찮다고해도 그로인해 2차,3차 감염이 퍼지면 치명적일수있는 기저질환자는 죽을수있는데, 그걸 신경쓰지 않는다는건 강한자만 살아남을수밖에 없지않냐는 이기주의의 발로같은 느낌이다. 자신은 죽어도 좋다며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하는 교회가 인간들이 세운 종교예식에 목매고있는게 이해가되지않는다. 전공의들이 밥그릇지키기 파업을 한다고 인식하는것처럼 주일헌금을 걷기위한 예배강행이라는 인식뿐이다. 주일예배 빠졌다고 배교자라하지는 않을텐데? ㅡ굳이 이렇게 비교하는 이유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가장 큰 줄기는 그거아니겠냐는것이다.

나는 두달전에 폐수술을 했다. 코로나에 취약하다는 폐 기저질환자인것이다. 주위 사람들이 그냥 활보하고 다닐때 나 스스로 알아서 더 조심할수밖에 없다. 하지만 폐수술전에도 방역마스크를 하면 숨쉬기가 쉽지않았는데 지금은 천마스크를 하고도 편하지는 않다. 관광객이 있을것같은 곳에는 절대 가지않...으면 좋겠지만 그건 집에 갇혀 살라는 이야기다. 공항버스를 타야 출근하고, 걸어가는 길에도 관광지, 맛집이 산재해있다.
난 괜찮으니까, 라는 생각으로 활보하는 이들을 피해 기저질환자는 숨어있어야하는 약자가 되는것이 당연한 것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시대에도 약자들에 대한 차별은 여전하지만 그걸 인식하지못하고 있다는 건...

방역을 철저히하고 개인위생을 잘 지키면 괜찮을꺼라고 한다. 겨울에 독감이 유행할때 나는 되도록 푹 쉬고 손 잘씻고 필요없이 다니지 않아서 감기를 잘 피해간다. 그런데도 가끔은 감기에 걸린다. 그렇다고 어쩔수없어,가 아니라 최선의 노력은 계속한다.
전염성이 더 강한 코로나에 대처하는 방법중 하나는 대면접촉을 줄이는 것이다. 잠잠해져가던 코로나가 급확산세로 돌아버린 이유, 이정도는 괜찮겠지. 나는 괜찮으니까... 뭐 그런것때문이 아닌가.
정말 모두의 바람대로 일상으로의 복귀, 경제활성화를 위해서라면 깜깜이 확산을 막기위해 노력해야하는거 아닌지.

답답하다. 월급쟁이인 나는 생계걱정이 없지만 주위를 보면 정말 답답해진다. 많은 도민들이 관광객이 안왔으면 하지만 그들의 지출로 생계를 유지하는 이들의 마음은 어떨까. 그저 안타까울뿐이다.
부디 제발. 국가방역지침을 좀 지켜서 코로나 확산을 줄이고 모두가 힘을 내보는 계절을 맞이하기를.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수는 없겠지만 팬데믹시대를 현명하게 살아가는 슬기로운 인류가 될수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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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3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1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 출판된 보이지않는 여자들,에 담긴 내용과 맞물릴 수 있을것같다.
이건 흥미 이전에 명백히 의식해야할 차이와 차별.


비교적 최근에 들어서야 임상연구에서 성별이 고려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도 신약허가신청(신약승인에의 길고 고된여정의 첫 번째 단계)을 위한 연구에서 여성이 임상시험에 포함되기는 했지만 대체로 적은 인원밖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러한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1993년에 미국 국립보건원은 자금 지원을 받는 임상연구에 여성을 포함시킬 것을 의무화했다. 임상시험의 여성 포함 문제를 다룬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약 18만5,000명의 임상시험 참가자를 검토한 결과 여성의 과소 참여는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좋은 소식이다. 이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한 걸음이다. 그러나 앞서 이루어진 의학 연구 대부분이 성별에 따른 차이를 근본적으로 무시했기 때문에 개선해야 할 점이 여전히 많다. - P193

임상시험에 여성이 포함되었을지라도 모든 연구에서 성별과 젠더에 따른 약물 및 치료 경과의 차이가 충분히 다루어지고 있지는않다. 예를 들어 미국 식품의약국의 신약허가신청 내역을 살펴보면성별에 따른 권장 투여량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약물이 남녀에 따라 서로 다르게 대사되고 배출되는데도 그렇다.
알코올을 예로 들어보자. 에탄올은 세계적으로 매우 많이 소비되는 기분전환용 약물 중 하나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여성의 알코올 대사속도는 남성보다 느리다. 이는 여성은 술을 마실 때마다 남성에 비해 알코올 섭취의 부작용을 더 많이 겪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에 따라 약물대사가 다르게 이루어지는 예는 그 외에도 많이 있다. 나는 의사 수련을 받을 때 수면제인 앰비엔 Ambien(졸피뎀)을 여성과 남성에게 동일한 용량으로 처방하라고 배웠다. 하지만 왜 성별에 따라 복용량을 달리해야 했는가?
이 경우 복용량을 구별하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처방전이 발급되고 나서야 여성은 남성보다 졸피뎀의 졸리게 하는 효과에 더 민감하다는 보고가 나오기시작했다. 결국 졸피뎀의 안전성 검토가 이루어졌다. 아무도 그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2013년 4월에 미국 식품의약국은 졸피뎀의 투여량이 성별에 따라 달라야 한다고 인정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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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2
메도루마 슌 지음, 유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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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를 어루만지는 작가, 메도루마 슌.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상처를 신비로운 상상과 유머로 풀어낸 물방울,
국가에 의해 죽어야했던 가미카제 특공대의 한을 흐느끼는 소리로 형상화한 바람소리,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만으로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기발한 형식의 단편 오키나와 북 리뷰.

수용소에서 시작된 전후 오키나와 문학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영토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이 벌어져 생활 기반이 뿌리째 파괴되고 27년간 미국의 통치 아래 있던 오키나와의 문학은, 생활과 밀착된 문화의 재건‘ 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같은 미국 점령하에 있던 일본 본토의 전후 문학이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정신이 깔린 자유로운 표현을 기조로 삼았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전후의 오키나와 문학은 1945년 일본 패전부터 1972년 미국이 일본에 시정권을 반환할 때까지의 미국 점령기와 1972년 일본 복귀 이후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 P199

1960년에 태어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없는 메도루마가 이토록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기발한 구상, 이색적인 묘사, 탄탄한 문장력을 쏟아내며 다양한 작품에서 오키나와 전투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유는무엇일까? 1945년에 끝났어야 할 전쟁이 오키나와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기에, 아름다운 풍광 속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오키나와의 어두운 이면을 독자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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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적 사실주의를 현대 인간의 문제와 연결시킨 콜롬비아 최고의 시인이자 소설가 알바로 무티스의 대표작.



읽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내용이 생각나지 않아.
일종의 환상문학처럼 남아있는데 왠지 느낌이 백년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는데 해설을 읽으면 그 느낌이 쌩뚱맞은건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61년 마르케스가 멕시코시티에 도착했을 때 무티스는 기차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 무티스는 마르케스를 멕시코의 문학 엘리트들에게 소개해주고 후안 룰포의 『페드로 파라모」를 읽어보라고 조언하는데, 이 소설은 후에 『백년의 고독」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무티스는 1966년에 『백년의 고독을 탈고한 마르케스를 오후마다 찾아가기도 했다. 그리고 1982년에는 마르케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을 때 함께 스웨덴으로 가서 축하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1993년에 무티스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콜롬비아 정부가 ‘보야카 대훈장을 수여하자, 마르케스는 그 기념식장에서 무티스를 기리는 연설을한다. 이 연설문은 후에 몰락한 시대의 우정』과 『내 친구 무티스』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마르케스는 무티스의 시에서 작중인물로 등장하기도 하는데, 바다와 육지 3부작』에 실린 시 「알람브라 3부작」과산문 「마크롤 가비에로와 화가 알레한드로 오브레곤의 만남과 음모에 관한 진정한 이유가 대표적인 사례다.
- P503

콜롬비아는 일련의 거짓말 위에 놓여 있다. 가령 콜롬비아는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국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민주주의는계속되는 야만과 폭력을 간신히 숨기고 있다. 또한 콜롬비아는 시인들의 땅이라고 일컬어진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그런 말은 현재에는 더이상 진실이 아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스페인어는 콜롬비아에서 말하는 스페인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현학적인 문법학자들이 콜롬비아의 스페인어를 라틴아메리카의 스페인어중에서 가장 형식적이고 가장 생동적이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 속에는 슬픔과 괴로움이 잠재되어 있다. 즉, 망명의 쓰라림과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조국과 그 문화가, 부패와 탐욕과 폭력과 부정으로 인해 하찮은 국가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보는 괴로움이 있다.
마크롤은 그런 문화의 산물이며, 동시에 그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 P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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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데릭 젠슨 지음, 이현정 옮김 / 아고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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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FBI에 전화를 해 묻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흑인이라고 해서 때렸다면 그건 증오범죄라 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아시아인이라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강간했다면 증오범죄라 할 수 있지요?" "맞습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어떤 여자를 강간했다면 그건 증오범죄라 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어떤 사람을 흑인이라는 이유로 노예로 만들거나, 다른 식으로 해서 그 사람이 일하도록 강제한다면, 그건 증오범죄라고 할 수 없지요?" "맞습니다"


증오범죄,라는 건 무엇일까.


데릭 젠슨이라는 이름을 보고 혹시나... 싶었다.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나 싶었는데 조금은 아쉽게도 이전 책 '거짓된 진실'의 개정판이다. 

이 기회에 다시 꺼내들어 슬쩍 읽어보니... 정말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들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하듯이 풀어나가고 있어 읽기에는 편한데, 문득 책이 씌여진 2004년, 우리말로 번역 출판된 2008년, 그리고 개정판이 나온 지금 2020년에도 이 책에 씌여진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라는 것이 착잡하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모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등 뒤에서 그것도 그의 세 아이가 같이 있는 자리에서 경찰관이 케어콥 블레이크에게 7발의 총을 쏘는 사건이 또 발생했다. 

세상은 변하는가? 그렇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 그렇다.


10년도 더 전에 내가 썼던 감상을 다시 읽어보며 지금의 세상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생각해보게 되는 날이다. 


==========================

사랑을 하는 사람이 위험에 직면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자유로운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다(190)

이 책을 읽는 내내 편하지 않았음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거짓된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해보기도 전에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적나라한 모습을 봐야했으니까.
나는 언제나 진실이라는 것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든 없든, 내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하더라도 '진실'이기 때문에 그것에 직면해서는 결코 고개를 돌려서는 안된다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과 진실을 직면한다는 것과 그에 더하여 끔찍한 증오를 만나게 된다면 진실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세상에 대해 환멸과 좌절을 느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상상하던 끔찍함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는가를 느꼈다. 과연 진실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이 책을 쓰면서 내가 탐구하고 싶었던 것은 인식에 관한 것이다. 또는 인식의 결핍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정직해져보자. 우리의 경제, 사회체제는 지구를 죽이고 있다. 다른 생물은 차치하고 인간만 보더라도 우리의 활동은 전례없는 궁핍을 만들어내고 있다. ...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명백한 부정의에 대해 누군가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지적을 하면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 갈가리 찢어발기는 것이다. 물리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끝까지 공격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공동의 미래를 파괴한다. 정복에 저항한 원주민 부족들을 사람들은 얼마나 열광적으로 억압해왔는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강하게 저항하는 이들에게 똑같은 결말을 안겨주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그들을 열성적으로 공격하는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사회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게 되었는가'(8-9, 서문)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끔찍한 세상의 적나라함을 그대로 보여주며 때로는 증오하라고 부추기는 듯, 데릭 젠슨은 도전적으로 글을 쓰고 있다. 아니, 처음 이 책을 읽을때는 그런 인식조차 없이 도무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수가 없었다. 이런 끔찍한 세상의 적나라함을 보여주고, 이제 그 피비린내나는 역사가 바로 잡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 어쩌면 더욱더 끔찍하고 증오로 가득차서 교묘한 피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도대체 그는 왜 증오를 부추기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하는가?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 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메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성냥이다.'(11)
문득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왔다'라는 성서말씀이 떠오른다. 평화의 상징(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동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인 예수가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과 데릭 젠슨의 말이 일맥상통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구구절절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실 책을 읽었음에도 나는 '거짓된 진실'의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히 얘기하기가 힘들다. 다만 어렴풋이 잡히는 윤곽만을 보면서 이 끔찍한 세상을 바라보려고 애써볼뿐이다. 물론 지금도 외면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고있지만).

마이클 무어의 영화(볼링 포 콜롬바인 bowling for columbine)에서 희화적으로 그려졌지만 - 나는 그 영화를, 끔찍한 진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풍자적인 표현과 간단 명료한 진실의 접근에 마구 웃으면서 봤던 기억이 있다. -  침략과 약탈의 역사 위에 세워진 북아메리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8mm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져 그 인기를 실감케했던 에미넴의 화이트 아메리카 (white america)도 거친내용과는 달리 역동적이면서 경쾌한 리듬으로 풍자된 백인들의 아메리카에 대해 웃으면서 노래를 듣곤했었다. 나는 세상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의 인식속에서 구역질날만큼 끔찍하고 증오에 가득차고 온통 피바다였다는 것을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도대체 이 책은 어떻게 씌여졌길래 그리 끔찍하다는 이야기를 자꾸하는지 궁금해지려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나의 감상적인 리뷰를 읽기보다 직접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겠다. '계급, 인종, 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가 이 책의 부제이다. 그만큼 광범위하게 씌여졌지만 - 간혹 너무 광범위하고 세세한 자료 조사로 인해 내 이해의 수준을 넘어버려 이해하기가 어려울때도 있긴 했지만 - 소화해낼 수 없는 범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가끔 - 아니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면 아주 자주 '그래, 잔인하고 폭력적인 약탈과 침략으로 일으켜 세운 피의 아메리카 얘기일뿐이야'라고 내뱉었었다. 사람을 죽이고, 자연을 죽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죽이고 있는 것이 피의 아메리카뿐은 아닐진대 나는 역시 그렇게라도 생각하면서 또 진실을 슬그머니 빗겨나고 싶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괴물들이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위험한 것은 평범한 인간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프리모 레비)
우리는 괴물이 되어서도 안되지만 결코 기계인간이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지금 나는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고 지구 환경에서 마음껏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세상에 불을 지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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