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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역사기행
이영권 지음 / 한겨레출판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변방의 시선으로 제주의 구석구석을 만나는 즐거움, 이라 적혀있다.
변방의 시선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석구석을 만나는 즐거움만은 분명하다. 때로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때로는 희미한 기억속에 봤던 모습을 떠올리며 또 어떤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배워나가며 내 고향을 새로 배운다.
오랜세월동안 스쳐지나갔던 곳들이 새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중앙로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 동네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볼 수 있는 어릴적 놀이터였던 용두암 바당도, 공연을 보러 갈때마다 마주치곤 했던 방사탑이 4.3 해원 방사탑이라는 것도 새롭다.
나는 우연챦게도 4.3 유적지 순례를 다닌 세대에 속했고, 또 우연챦게도 무속기행을 따라 바닷가의 당집도 가봤고, 어느 농가에 모셔진 토속 성상 구경도 다녔었다. 지금의 나로서는 좀 쌩뚱맞은 기행들을 많이 따라다닌 것이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면 그때 좀 더 열심히 설명을 듣고 기록해두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그나마 4.3 유적지는 여러번 갔었고 그에 대한 공부도 좀 했었기에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책을 처음 펴들었을 때, 맨 앞머리에 나온 선사시대의 유적을 보면서부터 나는 내가 제주사람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낯이 익으면서도 낯선 유적들이 나를 무척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더구나 한때는 매일같이 신제주로 가는 길에 지나치는 공항로의 근처에 있는 움집을 보면서 '저게 도대체 뭐야?'라는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것이 어느날 갑자기 제주 초가집도 아닌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면서도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사실 부끄러운 것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제대로 진상규명되지 못한 근현대사의 역사가 가슴아픈 부끄러움을 더해줄뿐이다.
그래서 어렴풋이 알고 있는 얼치기 지식들이 이 책을 읽으며 조금 더 명확해졌고 내가 몰랐던 새로운 역사를 알게 되면서 조금 더 내가 살고 있는 곳에 대한 자부심이 생겨나지만 또 하나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 후대에 전해줘야 겠다는 사명감도 일어난다.
지금 제주는 '평화의 섬' 어쩌구 하면서 경제 성장을 위해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그것이 제주도민 모두에게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관광산업에 의존하면서 우리의 누이는 캐디가 되어 골프공을 주우러 다녀야 하고 카지노장에서 딜러가 되어야 하고, 우리는 탐라섬의 원주민으로 오돌또기를 부르며 춤을 추는 광대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나는 정말 세계적인 관광지라는 하와이가 부럽지 않다. 아니, 이곳이 하와이처럼 된다는 것이 정말 싫다.
가끔씩 누군가 '환상의 섬, 제주'라는 말을 농담처럼 던지면 나 역시 농담처럼, 하지만 강한 어조로 '내게는 현실의 섬, 내 삶의 터전인 섬'이라 받아친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의 터전인 이 곳의 역사를 깊이있게 바라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 있다는 것이 고맙고 또한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