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언제 들춰볼지 알 수도 없는 책을 왜 그리 보관하고 있느냐고. 전에 한 번 읽었을 뿐 지금 내 독서 취향과는 동떨어진, 그리고 몇 년이 지나도 다시 펼칠 일이 없을 듯한, 아니 어쩌면 영영 읽지 않게 될 책들 말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몇 안되는 유년의 기억 가운데 하나인 <야성의 부름>이나 소년 시절의 눈물을 담은 <조르바> 또는 <25시>처럼 내 책장의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책들과 어떻게 그리 쉽게 결별할 수 있겠는가. 그 책들은 하나의 완성된 전체였고,충성스러운 헌신으로 서로를 묵묵히 버텨주고 있었다.
책 한 권을 버리기가 얻기보다 훨씬 힘겨울 때가 많다. 우리는 궁핍과 망각 때문에 책들과 계약을 맺고, 그것들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지난 삶에 대한 증인처럼 우리와 결속되어 있다.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안 우리는 축적의 환상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책을 읽을 때마다 정신적인 소득을 기입하듯 해와 달과 날을 기록하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첫장에 자기 이름을, 공책에 빌려갈 사람의 이름을 적도 난 연후에야 빌려주곤 한다. 공공도서관처럼 도장을 찍고 소유자의 카드를 꽂아놓은 책들도 본 적이 있다. 책을 잃어버리는 걸 달가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라리 반지나 시계, 우산 따위를 잃는 편이, 다시는 읽지 않더라도 낯익은 제목만으로도 우리가 과거에 누렸던 감정을 일깨워주는 책 한 권을 잃는 것보다 훨씬 낫다.-16-17쪽
나는 살아오면서 덜그럭대는 탁자를 책으로 받치거나 책을 탑처럼 쌓아 천을 덮어 보조탁자로 쓰는 걸 많이 보아왔다. 사전류는 사전의 용도보다는 구겨진 물건을 눌러 펴는 데 쓰일 때가 많고, 겉멋 부리기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사실 편지나 돈 그리고 은밀한 비밀을 감춰두는 장소일 때가 많다. 이렇게 열거한 경우들을 그 누구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만이 책의 운명을 바꾸어놓을 수있다.
화병이 깨지고 커피포트나 텔레비전이 망가져도 책은 끄떡없다. 책은 소유자가 고의로 책장을 찢어내거나 불태우기 전에는 망가지지 않는다..........
일이백 년 또는 이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는가 하면 모래 속에서도 살아남는 저 내구성 있는 물체와 인간의 관계는 결코 무해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옳다. 저 부드럽고 쉽게 소멸되지 않는 책이라는 사물은 인간과 숙명적으로 맺어져 있다고.-82쪽
나는 신간에 대해서 무관심해졌다. 또한 할인된 가격에 파는 책들의 그 모든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먼 외국에서 보내온 것까지 포함해 내게 도착한 책들을 거의 읽어보지도 않은 채 도서관에 기증해버렸다. 나는 내가 어떤 책 한 권에라도 흥미를 느낄까 봐, 그래서 그걸 집으로 가져가 점점 손쓸 겨를 없이 불어나는 책들의 거대한 식민지에 추가하고, 그 책들이 벽으 ㄹ따라 쌓이고 복도로 넘쳐날까 봐 지레 겁이 났다.-95-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