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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와후와 ㅣ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비채 / 2016년 3월
평점 :
책을 받고 잠시 망설였습니다. 금세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동화책을 잠시 덮어두고 '후와후와'같은 느낌이 들 때 펼쳐야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무지 참을수가 있어야지요. 잠시 외근을 나가는 길에 가방에 이 책을 담고 나와버렸습니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엄마와 함께 앉아서 장난을 하는 꼬마를 보니 후와후와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 책을 펼쳤지요. 세상의 온갖 고양이를 다 좋아하지만 그 중에서도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를 가장 좋아한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린 시절 고양이와의 추억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아직 조그마한 꼬마인 나와 늙은 고양이는, 그다지 크기의 (혹은 사고방식의) 차이가 없다. 그의 비슷하다 해도 좋다. 우리 둘은 서로 뒤엉켜 마치 익숙한 흙탕물처럼 조용히 뒹군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우리밖에 없는 것 같다. 그런 오후에는 우리 세계를 움직이는 시간과는 또 다른 특별한 시간이 고양이 몸 안에서 몰래 흘러간다"
고양이와의 추억은 커녕 고양이를 가까이 해본적도 없는 어린시절의 나와는 전혀 달라서 그냥 그렇게 스치듯 책장을 넘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마음이 끌립니다. 그저 대충 그려넣은 것 같은 안자이 미즈마루의 그림은 처음 보는 순간에는 이쁘지가 않잖아, 라고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 역시 묘하게 마음이 끌립니다. 아니, 그래도 역시 '사랑스럽다'라고 말은 못하겠네요. 그냥 묘하게 마음이 끌린다, 정도로만 해 두기로 합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후와후와를 읽고난 후 한마리의 길냥이를 만났습니다.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왠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야기하는 그 고양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모두가 좋아할만한 귀염성이 있다거나 털에 윤기가 흘러 폭신폭신함이 느껴지며 쓰다듬어 보고 싶다거나 눈에 확 띠게 이쁜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끌립니다. 슬그머니 지나가다가 내가 핸드폰을 꺼내드니 자리에 앉아 가만히 포즈를 취합니다. 뭐야, 내가 사진찍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야? 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옵니다.

"나와 고양이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고양이의 시간 덕분에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런 고양이를 좋아한다. 늙고 커다란 암고양이"
"고양이털은 이미 해의 온기를 잔뜩 머금은 채, 생명이란 것의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 관해 내게 가르쳐준다. 그런 생명의 일부가 무수히 모여서 이 세계의 일부 또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준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 다른 공간에도 존재한다"
고양이, 툇마루, 따사로운 봄볕처럼 포근한 기억이 내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봄날에 마주친 길냥이의 저 사랑받고 싶은 듯한 애교어린 몸짓은 왠지모를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될 것 같습니다. 나와 마주친 길냥이의 저 시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지 무척 궁금해지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