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 지음, 김혜신 옮김 / 돌베개 / 2006년 1월
구판절판


모든 뿌리에서, 그 뿌리를 키울 토지에서조차 떠나 있는 나는 온갖 시대를 둘러보아도 좀처럼 드문, 참으로 그런 인간이다. 나는 1881년 하나의 거대한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곳을 지도 위에서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곳은 이미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나는 2000년에 걸쳐 국가를 초월해 존재해온 수도 빈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도읍이 독일의 일개 지방도시로 떨어지기 직전에 나는 마치 범죄자처럼 그곳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내 문학작품은, 나의 책이 몇백만 독자에게 기쁨을 줬던 바로 그 나라에서 불태워져 재로 돌아갔다. 그러기에 나는 이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며, 기껏해야 지나가는 객이다. 내 마음이 택한 진정한 고향 유럽도, 다시금 동포끼리의 전쟁이라는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 자살한 것과 다름없이 제 몸을 찢은 이후로 내게는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다. 내 뜻이 아니건만 나는 온갖 시대의 연대기 가운데 가장 무서운 이성의 패배와 가장 흉포한 야만적 승리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188-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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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02-05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