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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생태보고서 - 2판
최규석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12년 6월
평점 :
처음엔 잠시... 어떤 그림일까, 어떤 내용으로 그려낸 것일까.. 그렇게 잠시만 훑어볼 생각이었다. 사무실에서. 일 할 것을 책상위에 펼쳐놓고.
그런데 난 중간에 책을 덮어버리지 못했고 윗분이 먼저 퇴근하신 후 오히려 맘 놓고 책을 끝까지 다 읽어버렸고 조금 더 곱씹어보다가는 이 책의 느낌을 풀어내지 못할 것 같아 멍..하니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서 동네 이름만 바꿔가며 이사를 다닌 기억밖에는 자취는 커녕 하숙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서울의 산동네라는 것도 TV에서 본 것 말고는 쓰러져가는 집을 본 적도 없다. 다만 서울로 유학간 친구녀석의 하숙집을 찾아가며 90도로 경사진 듯한 오르막을 쉼없이 올라가는 마을버스 안에서 차가 뒤집히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만 있다.
내가 편히 집에서 용돈받으며 설렁설렁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서울로 유학간 친구녀석은 조금이라도 싼 방을 얻기 위해 조금씩 성질을 죽이며 동거인을 찾아다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고교시절 별로 친하지 않던 친구녀석을 서울에서 만나 얘기 나누다가 친구의 비어있는 아파트를 잠시 빌려쓰면서 엄청 좋다, 라는 부러움을 한웅큼 집어냈다가 그 다음 바로 가진자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아파트 주인에 대한 비난과 가진자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편지를 보냈을때도 나는 그 친구의 그 쓰라린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이 책, 습지 서식에 관한 54가지 연구라는 부제가 딸린 습지생태보고서를 나는 백퍼센트 공감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미안하다. '팔이 잘려본 사람은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라는 말처럼 팔이 부러져본 적도 없는 나는 위로는 커녕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조차 헛말처럼 나오는 것 같다.
짧게 끝나버리는 만화컷과는 달리 그 여운은 길게 가고 있다. 경험이 아니고서는, 습지에 살아본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낼 수 없는 보고서. 내가 그 보고서 내용에 백퍼센트 공감할 수 없지만, 이 땅의 수많은 습지에는 슬프지만 즐거운, 그들의 우정어린 행복한 생활이 있다는 것은 기억할 수 있다.
남들 다 하는 것, 연애를 하면서 가져야 하는 죄책감이 없는 습지가 생겨나기를. 정당한 분노가 뒤늦게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분노가 일 때 터져나오기를. 아니, 정당한 분노가 터져나오지 않는 습지가 생겨나기기를. 그러길... 희망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