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끝 바다
닐 게이먼 지음, 송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오솔길의 끝에는 바다가 보이던가?

내가 어렸을 때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던 몇 권 안되는 책들 중에는 빨강머리 앤도 있었는데 어릴때 본 그 책은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나는 앤이 오랫동안 앙숙처럼 지내던 길버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끝부분에서 앤이 '길 모퉁이'를 돌면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장 강렬한 느낌으로 남아있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비밀의 화원에서는 환청처럼 들리던 '화원으로'라는 외침이 있는 부분에서, 그러니까 모든 일의 해피엔딩으로 치닫고 있는 그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화원의 비밀스러운 아름다움에 빠져들어 나중에 그런 화원을 갖는 것이 소원이 되었었다. 그 어린 시절의 추억때문이었을까? [오솔길 끝 바다]는 닐 게이먼이라는 이름을 보기 전부터 왠지 바다가 들린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오솔길을 지나 햇살에 반짝거리는 파도를 볼 수 있는 길의 끝에 있는 바다는 어딘가에 실존해 있는 공간이면서 또 우리가 상상속에서 그려보는 낭만과 멋의 세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어린 시절에 읽었던 '동화속' 환상의 세계는 아니다. 청소년 문학 아닌가, 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건 환상문학, 어른들을 위한 판타지의 세계를 그려낸 이야기가 맞는 것이다.

오솔길 끝 바다라는 것은 그 깊이도, 크기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움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왠지 내게 익숙한 그 오솔길의 끝에 있기 때문에 내가 그 바다속으로 빠져들어가도 안심하게 될 것 같은, 그런 매력적인 바다의 느낌이었다.

 

"아무도 자기 내부의 진짜 모습을 보이진 않아. 너도 그러지 않잖아. 나도 안 그러고. 사람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해. 누구나 그래.  ......그리고 어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어른들도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어른의 모습이 아니야. 바깥에서 보면 그들은 크고 배려심도 없고 언제나 자기가 뭘 하는지 알고 있지. 하지만 안에서는, 언제나 똑같은 모습이야. 네 나이와 다르지 않아. 진실은, 어른이란 없다는 거야. 이 넓은 세계 전체에 하나도 없어

나는 어른에 대해 생각했다. 그 말이 진짜인지 궁금했다. 그들은 모두, 사실은 어른의 몸에 싸인 어린아이들일까? 그림도 대화도 없는 지루하고 긴 어른 책들 사이에 숨겨진 어린이 책 같은?" (184-185)

 

판타지가 아이들의 세계같은것은 어른들도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어른의 몸에 싸인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일까? '오솔길 끝 바다'에는 그러한 어른들의 슬픈 자화상 같은 모습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솔길 끝 바다는 한 중년의 남자가 장례식에 참석한 후 갑자기 어린 시절에 지내던 집과 근처를 헤매다니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돌아다니다 불현듯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가 일곱살때 집에 세들어 살던 오팔의 광부가 어느 날 아버지의 차를 몰고 가 자살해 숨져있는 것을 봤던 기억, 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경찰들이 왔을 때 어디선가 나타난 레티가 그를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음식을 주고, 어머니 지니 헴스톡 부인과 오팔 광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모를텐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현실과 마법의 세계를 오가고 있는 듯 한데....

 

사실 실제 이야기는 그 이후에 벌어지는 대양으로의 여행(?)이 주된 줄거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판타지처럼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을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것들의 의미와 무의식중에 받았던 상처들을 하나씩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어렸을 때는 내가 본 장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만 성인이 되어 불현듯 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서 그 의미가 다시 되새겨질 때, 과거의 기억들은 재편성되어가는.. 그런 과정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다 있지 않을까 싶다.

 

"그것들이 사실인가요?"

"네가 기억한 거? 아마도 대부분은. 각각의 사람들은 사건을 모두 다르게 기억해.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보았어도 그것을 똑같이 기억하지는 않을거다. 그 사람들이 같은 곳에 있었든 아니든 말이야. 서로 바로 옆에 서 있는 두 사람도, 모든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륙만큼 떨어져 있을 수 있지"(278)

 

지니 헴스톡 부인의 말에 의하면 주인공은 이전에도 그 이전에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곳을 찾아갔었고, 그에 대한 기억은 또다시 헴스톡 노부인에 의해 잘려나가 꿰매어졌을 것이다.

처음 읽으면서 그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런 의미를 찾기보다는 이야기 자체가 흥미로워 어느새 생각하기를 멈추고 그대로 이야기속으로 빠져들어가버리며 책을 다 읽었다. 새삼스럽게 책의 내용을 다시 떠올리려하고 보니 바로 엊그제, 금세 다 읽은 책이지만 자꾸만 책장을 다시 뒤적이고 싶어지고 다시 한번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처음엔 오솔길 끝 바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 빠져들어갔지만 이제는 오솔길 끝 바다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 안에는 무엇이 잠겨있을지 궁금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티는 너를 위해 아주 큰 일을 했어. 그 애는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기가 한 일이 가치가 있었는지 알고 싶었을거야. ...... 나는 그때 내 심장에 대해 생각했다. 그 안에 아직도 문의 차가운 일부분이 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것이 선물인지 저주인지 궁금했다."

 

내게 있어 레티와 같은 존재가 있었을까? 나의 기억들은 나를 조금씩 더 좋은 곳으로 이끌어가고 있을까? 나의 심장이 차가워지지 않고 지금의 내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정말 가치가 있는 일일까?

책을 읽다 문득문득 떠오르게 되는 물음들에 헴스톡 부인의 말을 빌어 자신에 대한 긍정과 삶의 가치를 다시 새겨보게 된다.

"사람으로 사는 일에는 합격이나 불합격은 없단다"

그러니 나의 심장이 선물인지 저주인지 궁금해하기보다 그녀의 말을 믿자. "넌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더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 무엇보다도, 네 안에 새 심장이 자라고 있어"(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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