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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는 대로 ㅣ 피터 레이놀즈 시리즈 1
피터 레이놀즈 글 그림, 엄혜숙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9월
평점 :
오랫만에 책상밑에 쌓아두었던 책 정리를 했다. 위에 보이던 책들을 하나씩 꺼내어보니 안보이는 곳에 있던 책들이 하나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데 괜히 책들에게 미안해졌다. 구입한 기억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책들이 생각보다 많아 당황스럽기도하고 말이다. 그런데 저 밑에 '느끼는대로'가 먼지를 잔뜩 머금고 바닥에 깔려있다.
이 작은 그림동화는 내가 선물하려고 산 책 아니었나? 내가 읽고 주려고 한 책인데 왜 그대로 있는거지?
책 정리하다말고 책을 들고 펼쳐들었다.
"레이먼을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어요"
나 역시 그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연필을 잡고 야심차게 주위의 사물을 종이에 옮겨놓고보면 갑자기 그림 그리기가 싫어지곤 하기도 하지. 균형이 맞지 않고 귀여운 얼굴을 찡그린 얼굴로 옮겨놔버리고 도무지 그 원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지면 그 누구라도 그림 그리기를 계속 좋아하기는 쉽지 않을거야.
"언제나 무엇이나 어디서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레이먼의 그림을 본 형 레온의 반응은 책을 읽는 나의 마음마저 부끄럽게 만들어버렸지. "도대체 뭘 그리는 거야?"
아, 갑자기 열살무렵에 노트에 정성스럽게 적어놓은 시와 그림을, 집에 놀러 온 친구가 펼쳐보고 픽, 웃었던 그 오래전 모습이 떠오르고 말았어. 시간이 흐르고 구겨진 종이들이 쌓여갔지만 이제 그만 연필을 내려놓고 싶은 그 마음이 어린 시절, 딱 내 마음이었어. 그런데.
여동생 마리솔이 레이먼이 구겨버린 종이를 들고 방으로 뛰어갔지. 마리솔의 방에는 레이먼의 그림이 한가득 붙어 있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야"
"꽃병을 그렸는데...... 꽃병처럼 보이지 않아"
"그래도 꽃병 느낌이 나는걸"
"꽃병 느낌이 난다고?"
"정말...... 그렇구나"
정말 그랬다. 레이먼의 그림은 레이먼이 그리고자 하는 것의 느낌이 그대로 묻어나는 그림이었고, 그렇게 느끼는대로 세상을 옮겨 그리는 것은 무척이나 신 나는 일이었다. 근사한 일이기도 하고.
느낌이 있는 레이먼의 그림을 좋아한다며 방에 붙여놓은 마리솔의 마음에 감동을 받았는데, 자신의 느낌을 굳이 그림이나 글로 붙잡아 보여주려하지 않고 그 굉장한 느낌을 마음껏 즐기는 레이먼의 행복한 표정에도 감동을 받았다.
느끼는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근사하고 즐겁고 행복한 것이구나.
책정리를 마저 끝내고 나면, 이제 나의 이 느낌 그대로를 맘껏 그려넣어봐야겠다. 왠지 그 생각만으로도 즐거워지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