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엔 교리 준비때문에 - 사실 제대로 준비하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스트레스 받는 척 했었으나, 언젠가부터 교리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마구 성당으로 가버린다.
애들이 '선생님~ 시험있어요~'그러면 아주 당연하게 '에에~ 오늘은 5분교리니까 금방 끝낼꺼야' 하면서 느긋하게 교리실로 간다. 지난번도 그랬고, 오늘도 역시 평소의 교리상식(?)으로 5분땜빵을 하는거다. 그런데 정말 내가 5분만 하고 끝내려고 맘 먹어도 이놈들이 얘기를 지일질 끌면서 삼십분은 잡아먹는다.
물론 그 중간 중간 각자 떠드는 녀석들의 말에 각자의 컨셉에 맞게 응대를 해 줘야 한다. 그러면서 또 소외되는 녀석이 없게 딴 애들과 내가 주고받는 말에 웃겨 죽는 표정으로 말없이 웃기만 하는 녀석에게 툭툭 말도 건네줘야 하고, 진지한 녀석에겐 또 그에 맞게 물음을 던지고 답해줘야 하고.
그 와중에 교리는 해야겠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하기 위해, 잠시 개그를 발휘할 시간을 마련했다. 그...그런데 이놈들이 내게 면접시험 없이 그대로 개그맨 시험 통과 2위의 영광(ㅡㅜ)을 내려준다.

집에서 가위로 쓱싹쓱싹 앞머리를 잘랐는데, 사실 그리 짧게 자를 생각은 없었지만, 금세 자라버리는 앞머리가 귀찮아 가위를 든 김에 그냥 싹뚝 짤라버린게 화근이었다. 눈썹 위로 살짝 올라간 앞머리가 내 보기에도 웃긴데, 애들보기엔 오죽할까.
뭐라뭐라뭐라 해대는 애들 앞에서 앞머리를 쓰윽~ 했더니 한녀석이 황급히 '아~ 그렇다고 올리진 마시구욧!'한다. 이것들이!
'선생님이 니들 피자 사줄라고 돈 모으느라 미장원 못가고 집에서 잘렀다, 응? 불쌍하지 않냐구우~'

아무튼 그렇게 나의 순위는 면접시험 없이 그냥 통과할 수 있는 개그맨 순위 2위다. ㅡ,.ㅡ

 

2.

미사 시간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한참 열성적으로 얘기를 하는데, 한 녀석이 갑자기 '선생님, 그런데요 우리가 그렇게 떠든것도 아닌데 고등학생이 '너네 그러게 떠들면 죽여버린다'라고 말하면 되나요? 거룩한 미사 시간에'

기분이 나빴나보다. 더구나 웃긴건 잠깐 귓속말로 뭐라 얘기한 것 같고 그런식으로 얘기를 하는데, 자기가 아니라 옆친구에게 그랬다는거다. - 그 말을 한 녀석은 좀 험상(^^;;)이고 친구녀석은 딱 보기에도 중학생 꼬맹이다. 순간적으로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재빨리 머리를 굴려 친구녀석보고 그 말을 들은 니 느낌은 어땠는데? 라고 물어봤다. 별 표정의 변화가 없길래 '야, 그 말을 들은 쟤가 아무 상관없대잖아. 그럼 무시하고 말어~'했지만 정말 기분나빴는지 딴애까지 가세해서 뭐라그런다.
얘들아, 선생님도 일상적으로 야, 죽을래? 라는 말 잘 쓰거든? 해봤지만, 그런 말은 친근감의 표시인 것이고 오늘 지들이 들은 건 절대로 그런 말이 아니랜다. 그러는 와중에 한녀석은 그걸 또 'I'll going to kill u'라 한거라고 떠들고 그 말을 받아서 맨 첨 얘길 꺼낸 녀석이 표현이 틀렸다고 하는데 '죽여버린다'와 '죽이려고 한다'가 다르다나? 그러면서 have to와 must까지 얘기하는데 저쪽에 얌전히 있던 녀석이 뜬금없이 if 조건절~ 하고 외친다. 그러니까.. '떠들면' 죽인다 를 말해야 한다나?
아아, 이 녀석들의 입담에 절.대.로. 밀리는 건 아닌데 빨리 끝내고 싶은 교리가 이런식으로 삼십분을 넘겨버리는거다. 가뿐히. ㅠ.ㅠ

그런데... 매번 교리시간마다 느끼는거지만, 정말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라는 결심을 새삼 되새겨야한다는거다.
다양한 이야기를 꺼내는 녀석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바로 그 포인트에서 내가 애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교리의 포인트를 집어내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입담으로 끌고가는데... 갈수록 힘들어지겠지?
힘들어 힘들어 힘들어..... ;;;;

 

3.

60여명의 애들중에 10명정도가 학생미사에 보이고, 그 중에서 또 다섯명정도가 교리실에 들어온다. 이 녀석들은 내가 직접 '교리 없어'라고 하기전엔 도망갈 생각도 없는 당연히 교리실에 들어오는 녀석들이다. - 지난번에 교감선생님이 내가 안보이자 어찌해야할지 몰라 교리가 없다고 애들을 보내버렸는데, 큰일났다고 애들 찾으러 뛰어가려는데 저쪽에서 애들이 떼지어 몰려온다. 교리받으러;;;;;;;;
덕분에 나는 정말 훌륭한 교리 선생님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애들을 그렇게 끌어당길 수 있죠? 비결이 뭐예요? 라는 물음을 받는. ㅡㅡ;;;

애들하고 앉아서 마구 잡담을 하는 듯 하면서도 교리를 할 수 있게 되고, 또 녀석들과 허물없이 개그의 컨셉도(!!) 나눌 수 있기까지 3년이 흐른 것 같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지만, 얻은 것이 많고 녀석들과 알게 모르게 친숙해져버린거다. 난 벌써 내년엔 어찌해야하나... 걱정이다. 뜬금없이, 너무 많은 정을 줘버렸어...라는 걱정을 하고 있으니, 이거 참으로 바보같지 않은가.

 

4.

지난 여름 '적벽대전'을 봤으니 그 후속편도 나오면 영화를 보여줄텐데, 올해 지나고 내년에 개봉하면 그땐 녀석들이 내 담당이 아니기때문에 영화 못보여준다고 했다. 그랬더니 애들이 '공짜'에 현혹되어 한마음으로 외친다.
'한번 선생님과 제자는 영원히 선생님과 제자'라고.
나중에 기억에 남는 선생님들...중에 '교리선생님'도 손에 꼽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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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8-09-21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19, 총 119090 방문

웅~ 이 오묘한 숫자...
요즘 열심히 벤트꺼리를 찾고 있는데 쉽지 않다. 사실 열성적이지도 않지만. 우웅~ 담 주 피자값으로 수만원이 나갈텐데 벤트생각을 잠시 접어야 할까? ㅡ,.ㅡ

순오기 2008-09-22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3, 총 119103 방문 ^^
다음 주 교리반 학생들한테 피자 쏘시나보죠. 멋진샘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