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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ㅣ 패러독스 1
피에르 바야르 지음, 김병욱 옮김 / 여름언덕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은 우리의 인식의 장으로 들어오는 즉시 낯선 책이 아니게 되며, 그 책의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해도 그 책을 꿈꾸거나 그것에 대한 토론을 하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호기심과 교양을 갖춘 사람은 책을 펼쳐보기도 전에, 책의 제목이나 표지를 한 번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일련의 이미지와 인상들을 떠올리게 되며, 이 이미지와 인상들은 일반교양이 책들 전체에 부여하는 표상의 도움을 받아 곧 최초의 견해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책을 그런식으로 극히 일과적으로 만났을 뿐 영원히 그 책을 펼쳐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독서자에게 그 만남은 진정으로 그 책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단초가 될 수 있으며, 그렇게 볼 때 처음 만나는 순간 곧바로 낯선 책이라는 지위를 잃게 되지 않는 책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33)
이 책을 열심히 읽고 난 후 리뷰라는 걸 쓰려고 하니 우습게도 어쩌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고도 이 책에 대해 주구장창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뭐 주구장창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이 책에 대해 나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마구잡이로 털어놓으며 소박한 잡담을 이끌어나갈 수 있을꺼라는 얘기다.
사실 내가 아는 대다수의 독서가들 역시 이 책의 제목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슬쩍 보기만 해도 책을 읽은 나보다 더 유창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이라는 말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또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어보지 않고 이 책의 진면목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이 책은 말하기 기술에 대한 책이 아니라 독서와 비독서의 경계에 대해 생각해보고, 움베르토 에코의 평처럼 온갖 읽기 방식의 창조적 국면에 주목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나 -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혹은 그의 희곡작품을 읽기 쉽게 문어체로 변형한 작품을 읽었거나 실제 연출된 극작품으로 봤거나 영화로 봤거나 그외 기타등등으로 접해본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그 누구나 햄릿의 유명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독백은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이 한문장의 독백을 시작으로 우리는 햄릿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햄릿을 읽었거나 읽지 않았거나 우리 모두는. - 누가 딴지를 걸지 모르니 '거의' 모두라고 해야할까?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햄릿'을 반드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또하나의 재미있는 - 특히 내게 해당되는 것이 많아서 - 문제제기는 책을 읽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그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것인가? 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무엇이지? 이 책에 그것이 나왔던가? 아니, 문제제기는 있었던가?
자, 과연 이 시점에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쩌면 내 글이 책을 읽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말장난같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런 문제제기들이 상당히 새롭게 느껴졌고 재미있다. (물론 '난 이 책을 읽지 않고도 생각했던 것들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리뷰를 너무 엉성하게 못쓰고 있다거나 혹은 그 모든 것을 이 책은 포함하여 서술하고 있다라는 대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글 읽기와 창조적인 글읽기, 읽어야 할 책 100권만큼이나 읽지 말아야 할 100권의 선택 역시 중요하다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 한가지 웃긴 얘기를 덧붙이자면, 내가 쓴 리뷰를 누군가 '책을 읽지도 않고 제목과 목차만 보고 리뷰를 쓰는' 파렴치한(!)으로 단정했던, 별로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 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그때 나의 내공정도면 책표지만 보고도 리뷰를 쓸 수 있지 않냐는 댓글에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걸 보면 이미 나는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읽지 않고도 이야기할 수 있는 내공을 기르고 있었던 것 같다. 더구나 책을 읽은 나보다 책을 읽지 않은 자가 나의 리뷰에 대해 그런 추측성 판단을 했던 걸 보면 독서가와 비독서가의 창조적 글쓰기를 비교할 때, 비독서가의 창작력이 아주 훌륭할 수 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것이 진실한 글쓰기라는 것과는 별개다.
글을 쓰고나니 또 애매해지네. 책을 읽느냐, 마느냐... 결론은 뭐, 내 편할대로! 다만 우리 모두 '교양'머시기와는 상관없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내 편할대로 '리뷰'가 아니라 '페이퍼'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강한 바램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