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의 이야기만들어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오키나와전의 실상이 있다. 오키나와의 ‘위안소‘에는 한반도에서 끌려온 여성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도 포함해서 더욱 자세하고 적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피해문제뿐만 아니라 가해 문제에 대해서도 더 깊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전을 조사하고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아니다.

미군에게 제압당한 이후, 일본군은 낮에 산속에서 유격전을 벌인다고 하고는 산속에 숨어있다가 밤이 되어 미군이 사라지면 마을로 내려왔다. 주간 미군과 접촉한 주민들을 일본군에게 알리는 협력자들이 주민들 속에 조직되어 있었다. 협력자들에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우고 학살하는 사건이오키나와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일본군에 대한 공포와 반발을 낳았다. 미군보다 패잔병이 된 일본군이 더 무서웠다는 이야기는 나도 조부모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다. 친척 집에 숨어있던 남성은 다행히 일본군에게 발각되지 않았다고 한다. 벽장 안에 숨어있던 남성이 갑자기 생각난 일이라며 고모에게 말해 준 이야기는 중국에서의 자기 체험이었다. 일본군으로서 중국 대륙에서싸우고 있던 남성은 어느 날 스무 명 정도의 여성과 아이들만 숨어있는 참호를발견했다. 당시 마을에는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서인지 각 집에 수확한 콩을 건조한 줄기와 잎이 있었는데, 일본군들이 그것들을 호 입구에 쌓아 올린 뒤 불을지펴 여성과 아이들을 불태워 죽였다고 했다. 벽장에 숨어있으면서 그는 당시 참호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을 여성과 아이들을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일본군에게 목숨이 노려지는 몸이 되자, 남성은 자신이 한 행위의 의미를 살해당하는입장에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그때는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고 고모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 P15
최근 몇 년 사이 오키나와전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의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특히 일본군의 ‘명예 회복‘이라 칭하며 일본군이 저지른 주민 학살과 ‘집단자 결‘의 명령·강제를 은폐하려는 움직임이 눈에 띈다. 히메유리 학도대와 철혈근황대 학생들의 죽음을 순국 미담으로 만드는 작위도 반복되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14세에 철혈근황대로서 전장에 동원되어 총을 들고 미군과 싸웠지만, 직접말해준 그 체험은 순국 미담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그러한 역사 수정주의의 횡행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알고, 체험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모의 이야기만들어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오키나와전의 실상이 있다. 오키나와의 ‘위안소‘에는 한반도에서 끌려온 여성들도 많았다. 그 사람들도 포함해서 더욱 자세하고 적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피해문제뿐만 아니라 가해 문제에 대해서도 더 깊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오키나와전을 조사하고 고민하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단지 과거를 되돌아보는 과정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오키나와전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의 움직임이현재 세계적 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미군 ‘재편‘에 따라 전국의 미군기지 및 자위대 기지가 대 중국 및 대 테러 전쟁을 목적으로 재편성·강화되고 있다. 그런가운데 미·일 양 정부는 오키나와에 마치 기지의 ‘부담 경감‘을 하려는 듯한 리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억지력 유지‘라는 이름으로 미군의 기지 기능을 효율화하고, 나아가 ‘남서방면 중시‘를 내세운 자위대의 강화도 추진하려 하고 있다. - P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