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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공화국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평점 :
절판
21세기판 파리대왕.
그저 이 문구 한마디만을 기억하고 책을 펼쳐 무작정 읽기 시작했다. 내게 파리대왕은, 어린시절 뭔가 동화가 아닌 새로운 책을 읽을만한 것이 없을까 하고 책장을 살펴보다가 무심코 집어 들어 읽었는데 그때의 내 기억은 '15소년 표류기'와 같은 소년들의 모험과 용기,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가 한대 얻어맞은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21세기 파리대왕은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지, 더구나 평소 많이 읽어보지 못했던 스페인 현대문학이라니 예측이 안되는 묘한 설레임으로 기대를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내용은 산크리스토발 지역의 사회복지과 공무원으로 발령받은 화자인 나,의 20년 전 있었던 사건에 대한 회고를 담은 글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이렇게만 한문장을 쓰면 그저 20년전의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만 생길지 모르겠다.
이 책은 "산크리스토발에서 목숨을 잃은 32명의 아이들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물어본 사람의 나이에 따라 다르게 대답한다"로 시작하고 "아이들이 우리를 피해 달아나면서 우리를 배신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또한 살기 위해 그들을 배신한 것이다"로 끝을 맺고 있다. 책을 다 읽고난 후 이 문장들을 다시 읽는순간 32명의 아이들의 이야기와 함께 20년의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인가. 아니, 그러한 결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아이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것일까?"(25)라는 물음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이야기가 진행되어갈수록 우리의 현실 속 아이들의 모습은 어떤지 자꾸만 겹쳐지고 끝내 내몰리듯 아이들의 죽음에 이르렀을 때, 내가 글을 제대로 읽은 것인가 싶어 다시 되돌아가 읽기도 했는데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가 갑자기 이야기속에 담겨있는 진실이 무엇이지? 라는 물음을 던지는 순간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로만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 순간적으로 '그들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은 다르다'라는 생각을 얼핏 했던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비겁한 생각인가를 깨닫고 잠시 책을 덮어두었다. 아이들을 통해 드러내는 인간성, 특히 악함에 대한 이야기는 뭔가 불편하면서도 부인할 수 없는 실존의 느낌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
생존자를 찾아내고 그 아이를 통해 - 그 과정 역시 인성을 상실한 폭력적인 고문으로 인해 마음이 편치않았는데 그의 생존이 두 세계를 잇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상투적인 기대를 했다는 것 역시 내 단순한 상상력의 한계임을 깨달을뿐이었다.
"나는 요즘 산크리스토발시가 32명의 아이들에게 끝내 주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틈날 때마다 생각해보려고 한다"(244)
32명의 아이들이 어느 순간 나타났고 우리의 현실 세계를 헤집어 놓다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결국 찾아낸 그들과 그들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닮은 듯 다른, 다른 듯 닮은꼴임을 깨닫게 되는데 우리에게 32명의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보고 있다.
"인간의 정신을 파멸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비극적인 운명을 이해하려면, 두려움에 사로잡혀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눈여겨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른은 어떤 것이든 자신과 상관없이 계속 존재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린아이는 자기가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듯하다."(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