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될 리 없음!
윤수훈 지음 / 시공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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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책을 읽기 전부터 망한 여행의 분위기를 뿜어내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제목이다. 책을 읽기 전, 어떤 내용이 담겨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비행기 못타십니다!'라고 했으니 '망하는 데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글은 도대체 무엇을 보여줄까 싶은 기대감(?)이 생기는 것이다. 


원래 저자는 여행에세이 출간 제의를 받았고 그래서 또 신나게 여행을 다녀왔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실감나는 여행에세이가 아니라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던 과거의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에필로그에 밝히고 있다. 아니,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 글이 안나왔을수도 있다는 것인가? 이건 정말 여러모로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행경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아르바이트에 얽힌 일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뉘우치고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함께 일을 했던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이야기부터 남다른 유머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저자는 이 일화에서 포기가 아닌 선택지가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렇게 사는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그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내려'하는 긍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행의 일정이 어긋나게 되면서 정신줄을 놓게 된 순간에 제이 누나의 일침에 정신차리고 또 다른 선택지를 찾게 되었다고 하지만 이미 저자는 여행의 준비와 시작에서부터 스스로 최선의 선택지를 택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 그리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행기를 놓쳐버리고 입국절차를 밟아 출국장을 나온 후 - 국제선을 놓치면 그런 절차를 밟아야하는 것도 처음 알았지만 - 한달이 넘는 전체 일정을 과감히 포기해야하는가, 아니면 바로 몇시간 후에 출발하는 다른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떠날 것인가의 고민에서 '마지막 한 좌석'이라는 말에 거금을 투자해 결국 여행을 떠나는 선택지를 뽑지 않았는가.


사실 나 역시 십여년전 비행기 환승 대기 시간이 길면 힘들 것 같아서 프랑스 공항에 도착한 후 한시간 뒤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매했었는데 한국에서부터 연착된 비행기는 그날 바로 이탈리아로 갈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서 - 영어도 못하고 프랑스어는 절대 못하고 로마에서 기다리는 분에게 전화연락조차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내가 했던 것은 그저 게이트에서 기다리는 것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어찌되었든 우리는 로마에 도착했고 - 비록 짐은 도착하지 않아 다음날 하루를 공항에 가서 짐 찾는 것으로 보내기는 했지만 여행은 좋았다. 돌아오는 날 역시 귀국일정을 바꾸려다 말았다는 것을 까먹고 아침에 호텔 카운터 직원에게 얼결에 우리말로 오늘이 며칠이지요? 라고 외쳐 서로 놀라워하다가 시에나로 가려던 일정이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는 것을 빼면. 그 이후 시에나에는 가볼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니. 그리고 물론 이탈리아 출발 비행편도 연착이었고 다행히 휠체어 서비스를 받은 우리 일행은 공항 직원들의 신속한 이동으로 무사히 제시간에 게이트에 도착했고 그때야 아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지났으니 하는 말이지만 나는 솔직히 당시의 심정을 보여주라고 하면 내 머릿속은 백지상태이고 심장은 까맣게 탔을꺼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여행의 스릴을 강렬하게 느꼈다. 카우치서핑의 장단점이 다 있겠지만 - 나는 카우치서핑이라는 것을 해본적도, 해 볼 엄두도 안나는 일이지만 - 저자의 독특한 경험은 정말 생각만으로도 좀 끔찍하고 무섭다. 물론 그에게 잊지못할 좋은 추억의 시간과 맛있는 음식을 베풀어 준 이들도 많으니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비행기를 놓치고 우리나라 땅에서 한발도 벗어나보지 못한 채 입국을 하고 다시 출국을 하여 여행을 떠났지만 망할조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기차표를 날려먹어 장시간 버스를 타야했고, 프랑스 철도 파업으로 여행지를 바꿔야 했지만 그로 인해 히치하이킹이라는 경험을 해볼 수 있었고 다음 기회에 또 가볼 수 있는 관광지가 아니라 새로운 여행지에서 외국인 친구들과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던 이야기들은 과연 저자의 말처럼 "계획대로 되지 않음"을 "망했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좀 완화시켜 엉망진창, 정도의 표현으로 망했다라는 표현을 썼다고 하지만 어찌보면 그 엉망진창 속에서도 자신이 찾아낼 수 있는 반짝거리는 조각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사진 한 장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의 여행에세이였지만 드라마를 보는 듯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린 책이다. 사진 대신 저자의 일러스트를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그리고 계획대로 될 리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 역시 나만의 여행을 꿈꿔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좋다. 




 절대 준비하지 말자.
"인생은 언제나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갖는다." 만화가 신일숙 작가님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명대사다. 준비를 해도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 하는데, 하물며 여행이라고 다르겠는가. 이곳에 와서 가장 후회하는 것을 하나 꼽으라면, ‘너무 많이 준비하고 왔다‘는 것이다. 내가 준비했어야 하는 것은 딱 한가지였다. ‘다 된다‘는 마음 하나.
...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세상에 완벽이란 없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 또한 계획에 없던 우연의 순간들이다. 이쯤되면 여행이란 우연의 합이 아닐까. 예측할 수 없었던 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의미가 되어 가슴속에 박혔다. 역시 여행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의미를 갖는가보다.(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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