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병사 - 어느 독일 병사의 2차 대전 회고록
기 사예르 지음, 서정태 엮음 / 루비박스 / 2007년 5월
절판


적의 폭풍 같은 공격에 우리는 어디로든 도망쳤다. 그러나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적보다 강한 힘을 발휘해 승리의 영광도 누리지 못하는 영웅이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히틀러나 국가 사회주의 또는 제3제국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심지어 폭격에 파괴된 도시에 있는 배우자나 어머니, 가족들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힘을 내 싸웠다. 죽음이란 것을 받아들이더라도 우리는 분노에 힘없이 아우성 칠 수밖에 없었다.어쩌면 수치스러운 이유로 싸웠지만 그것은 어떤 사상보다 강력하게 작용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큰 인간과 마주친 코너에 물린 쥐처럼 우리는 모든 이빨을 드러내고 주저없이 싸웠다.-502쪽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죽어가면서 신음 소리를 내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피가 더러운 신성 모독처럼 땅속으로 스며들 때 우리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백만 명이 고통 속에서 흐느끼며 비명을 질러도 전쟁은 무심하게 계속될 것이다. 그저 기다리고 희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무엇을 위한 희망인가? 진흙탕 속에 얼굴을 파묻고 죽지 않기 위해? 그렇다면 전쟁은? 필요한 것은 높은 곳에서 명령이 내려지는 것뿐이다. 그러면 전쟁은 끝날 것이다. 그 명령은 모든 인간이 성사聖事에서처럼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인간은 인간일뿐이기 때문이다. -399쪽

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정확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도 그것을 글로 옮기려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주체할 수 없는 불안감과 세월이 지나도 흐려지거나 사라지지 않는 비참하고 시린 고통만이 있을뿐이다.
우리는 신에게 버림받은 채 무덤같은 곳에 멍하니 엎드려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 흉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언제든지 공격해올지 모르는 동쪽 평야를 쳐다보았다. 영혼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사람에게는 고통만이 아니라 희망과 정 같은 다른 무언가가 있고 우정은 순간이 아니며 사랑도 때때로 찾아오고 땅은 사람을 묻는 데가 아니라 생명을 길러낸다는 것을 잊은 것 같았다. 우리는 아무 생각없이 움직이는 광인이었다.-309-310쪽

철모 아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텅 빈 머리와 치명적인 위험에 맞닥뜨린 동물의 정말적인 눈과 같은 두 눈동자만이 있었다.-295쪽

나는 소련군이 동프러시아의 비참한 난민 수용소에서 일하는 것을 보고 충분히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극단적인 행동이 우리의 같은 행동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었다. 우둔한 자들이 복수라는 명목으로 공포를 다음 세대까지 이어가기 때문에 전쟁은 항상 깊은 증오를 낳는다.-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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