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구판절판


나는 금관과 용포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를 깨달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옷 바꾸기 놀이를 통해 나는 내가 그 제왕의 표지에 얼마나 많은 미련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짚더미 위에 엎드려 연랑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의 당혹스럽고 우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내 섭왕의 표지가 다른 사람의 몸에도 잘 어울리며, 심지어 더욱 위풍당당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관의 누런 옷을 입고 있으면 나는 어린 내시에 불과했다. 금관과 용포를 걸치고 있어야만 비로소 제왕이었다. 그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98쪽

나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불현듯 아주 오래전에 승려 각공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내게 대섭궁이 언제까지나 견고하게 서 있을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순식간에 그것을 산산조각 내서 저 하늘 멀리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어느 날 그대가 왕이 된다면, 왕궁 안에 가득한 미인들과 수많은 금은보화를 갖게 된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텅 비어, 한 조각 나뭇잎처럼 바람속을 떠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80쪽

나는 스스로의 판단을 믿고 있었다. 인간은 초조함과 공포, 거칠게 날뛰는 욕망으로 엮인 생명의 끈 한가닥을 잡고 있다. 누구든 그 끈을 놓으면 그 즉시 어두운 지옥으로 떨어진다. 나는 부왕이 그 끈을 놓음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232쪽

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궁 안에서나 궁 밖에서나 세상 어느 곳을 보아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없더이다. 대체 어디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293쪽

손바닥에는 붉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이상하게 엉겨붙은 다른 여러 사람들의 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랑과 옥쇄의 피일 뿐 아니라, 냉궁에 갇혔던 대낭의 피이고, 참군 양송, 태의 양동과 서북 변경에서 죽어간 수많은 장수들의 피였던 것이다. 나는 그들이 이제 내 손바닥에 그토록 깊은 무늬를 새겨넣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죽음은 나 혼자만을 이렇게 덩그러니 남겨둔 것일까? 왜 이 누구보다 깊고 큰 죄를 지은, 용서받지 못할 자만을? 갑자기 뭐라 말할 수 없는 뼈아픈 슬픔이 북받쳐올랐다. 나는 살겁 뒤에 남겨진 경성의 백성들과 더불어 목을 놓아 울었다. 그것이 내가 평민으로 살면서 흘린 첫 번째 눈물이었다. -339쪽

그들은 그의 독단과 오만, 그리고 자기 과신이 아름다운 한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끈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번에도 방관자가 되었다. 그해 봄에 나는 수없이 많은 밤마다 단문의 꿈을, 내 이복형제이자 태어나면서부터 내 적수였던 그의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베개를 베고 누워, 왕관을 둘러싼 길고도 지루한 싸움이 마침내 끝났음을, 우리 두 사람 다 역사의 조롱을 이기지 못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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