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순식간에 그것을 산산조각 내서 저 하늘 멀리 날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어느 날 그대가 왕이 된다면, 왕궁 안에 가득한 미인들과 수많은 금은보화를 갖게 된다면, 그대는 그대 자신이 텅 비어, 한 조각 나뭇잎처럼 바람 속을 떠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80)

나, 제왕이 된다면 나의 생애는 어떻게 될까.... 나 자신은 텅 비어 바람속을 떠돌게 될까?

단백은 어린 나이에 원하지도 않았던 섭국의 왕이 되었다.

나는 이 책에 대해 이 한문장 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고 싶지 않다. 이 하나의 문장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이야기들의 깊이를 생각해보라... 나는 나의 한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쑤퉁이라는 작가가 꿈에 기대어 글을 쓰고, 꿈에 기대어 살아간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것을 꿈속의 꿈처럼 꿈결에 들을뿐이다. 저 한문장 안에 수많은 역사가 담겨있음을 꿈속의 이야기처럼 들을 뿐이다. 어느 시대, 누구의 역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수백년을 지나간 역사의 몇 단편들이 어렴풋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꿈에 기대어 쓴 이야기에서 역사의 사실을 끄집어 내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뿐인것이다....

가을이 깊었으니 머지않아 섭국의 재난이 닥치겠구나, 라는 말은 제왕인 단백의 첫 말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섭국의 재난이 닥치겠구나'는 역사의 흐름속에서 당연히 몰락해가리라는 섭국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나는 무심결에 어린 단백이 섭국의 제왕이 되었기에 섭국의 재난이 닥치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어린 나이에 섭국의 왕이 되었다'에서 시작해 바로 '섭국의 재난이 닥치겠구나'로 끝나는 것이 아닌것이다.

두려움에 떨고, 그 두려움을 '죽여라'라는 명령으로 물리치려고만 한 겁많고 철없는 어린 제왕 단백의 섭국통치는 당연히 그의 할머니 황보부인에 의한 섭정통치인 것이었고 내게 황보부인은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었다.
"이건 내가 너희 사내놈들과 즐긴 한바탕의 농담이니라"(207)
죽음을 앞둔 황보부인이 단백에게만 보여 준 향낭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었음에도 새삼스럽게 놀라버렸다. 그녀가 진정 권력의 중심이었고 역사의 흐름을 좌우하려한 야망가였던 것이다. 이것 역시 섭국의 재난이 닥치게 되리라는 것을 말하려한 것일까?

"나는 문득 내 섭왕의 표지가 다른 사람의 몸에도 잘 어울리며, 심지어 더욱 위풍당당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관의 누런 옷을 입고 있으면 나는 어린 내시에 불과했다. 금관과 용포를 걸치고 있어야만 비로소 제왕이었다. 그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98)
단백이기 때문에 제왕인 것이 아니다. 제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없었던 단백이었기에 그는 그저 제왕의 겉옷을 뒤집어 쓴 제왕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만 가득한 단백은 충신 양송을 비참히 죽게 만들어버렸고, 어린 섭왕의 잔학함은 머지않아 섭국의 재난이 닥치리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나는 대섭궁안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이야기들은 오로지 섭국의 재난이 닥치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라 믿었고, 나는 그렇게 단백의 어리석고 불안정한 마음에만 생각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섭국의 역사라고 생각을 했다. 역사를 생각하다니. 진정 어리석은 것은 오로지 나 뿐이었던 것이다.
제왕의 자리에 더 어울린다고 믿었던 단문의 통치는 어쩌면 단백의 그것보다 훨씬 더 잔혹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미 단백이 제왕의 옷을 벗어던지고 섭궁을 나와 광대의 꿈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때였다. 단백이 광대의 꿈을 꾸고 있으니, 머지않아 섭국의 재난이 닥치리라......

"인간은 초조함과 공포, 거칠게 날뛰는 욕망으로 엮인 생명의 끈 한 가닥을 잡고 있다. 누구든 그 끈을 놓으면 그 즉시 어두운 지옥으로 떨어진다. 나는 부왕이 그 끈을 놓음으로써 죽음에 이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232)
"왜 죽음은 나 혼자만을 이렇게 덩그러니 남겨둔 것일까? 왜 이 누구보다 깊고 큰 죄를 지은, 용서받지 못할 자만을? 갑자기 뭐라 말할 수 없는 뼈아픈 슬픔이 북받쳐올랐다. 나는 살겁 뒤에 남겨진 경성의 백성들과 더불어 목을 놓아 울었다. 그것이 내가 평민으로 살면서 흘린 첫번째 눈물이었다.(340)

<단백은 어린 나이에 원하지도 않았던 섭국의 왕이 되었다>라는 한문장 외에 어떠한 말도 덧붙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내뱉고 왜 이렇게 많은 말을 해버린 것일까.
아니, 실상 그리 많은 말을 한것도 아니다. 나는 섭국의 재난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단백에 대해, 단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연랑에 대해, 단백이 사랑한 혜비에 대해, 단백의 생을 바꿔버린 황보부인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꿈에 새로운 세계를 본' 자유로운 광대 단백에 대해서조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 제왕의 생애는 나의 이야기로 옮겨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안에 담겨있는 삶의 이야기를 직접 쑤퉁의 글로 읽어보기를 권할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속이 들여다보일 듯 맑고 끝이 없는 하늘을 눈처럼 하얀 새들이 날아 오르는, 꿈에 새로운 세계를 본 단백의 이야기를 털어놓는것보다 내 마음을 치는 것은 단백이 사랑한 혜비의 한마디뿐이었다.
"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입니다. 하지만 궁 안에서나 궁 밖에서나 세상 어느 곳을 보아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없더이다. 대체 어디에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293)
순간 나는 부끄러운 자가 되었지만, 또한 도무지 내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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