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나무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가지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정하고 잘라낼 것과 살릴 것을 정해야 한다. 생각처럼 잘되지는 않지만,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버릴 것을 버리는 나무의 결단을 배워야 한다. 나무가 된다는 것은 한곳에 자리 잡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만을 마냥 기다리는것이 아니다. 나무의 미덕은 인내와 여유로움만이 아니다.
치열한 자기성찰과 말 없는 실천에 나무의 미덕이 있다.
- P80

(연필과 지우개는) 서로의 힘을 빌려 대상의 윤곽을 포착하고 세계에 개입한다.
그렇게 연필과 지우개에 의해 주조되는 기록들은 세계에 흔적을 남기고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들 사이에서 맴돌던 생각과 계획들은 더 이상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현실이 된다. 그것이 누군가의 인생을 결정하기도 하고, 진실을 가리는 기만과 폭력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나 자신을 겨누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내가 쓴 하나의 문장, 내가 종이위에 무심히 그은 줄 하나가 언제든 나를 구속하고 파괴할 수있다. 연필에 지우개가 붙어 있는 것은 쓰고 그리는 사람의이런 운명에 대한 말없는 경고일 것이다.
- P182

먼지의 총량이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은, 반짝이고 매러운 표면을 원하게 된 우리의 취향과 관련이 있다.
원래 사물의 표면은 이렇게 반짝이지도 매끄럽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거칠었으며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스스로를 내세우기보다 주변의 것들과 섞여 풍경의 일부가 되었고,
그래서 어쩌다 피는 꽃들의 훌륭한 배경이 되곤 했다. 눈에 잘 띄지 않고 거친 표면을 가질수록 제자리에 남아 있기가 쉬웠고 그렇게 사물들은 익숙한 것들 사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어쩌다 조약돌이 매끄러운 표면을 갖게 되는 것은 강바닥에서 오랜 시간 구르고 부딪히고 깨지고 닳아진 결과이고, 오래된 물건들의 반들거림은 그것을 사용한 - P219

사람의 무수한 손길의 흔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처음부터 매끄럽고 반짝이는 사물을 원한다. 인체공학적으로 모서리가 둥글리고 매끄러운 표면을 갖게 된 물건들은 더 이상 어떠한 외부의 개입도 허용하지 않는 자신의 완전한 개별성을 선언한다. 그것들은 세상과 아무런 마찰도 인연도 없이, 세상을 가장 빠른 속도로 통과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단시간에 이런 표면을 얻기 위해 세상의 모든 공장들은 밤낮없이 사물의 표면을 갈고 닦는 일에 열중한다. 그러는 동안 엄청난 양의 먼지가 생산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물건을 생산하려고 먼지를 만들고 있는지 먼지를 생산하려고 물건을 - P220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지금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미세먼지의 정체는 결국 사물의 표면에서 떨어져 나가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사물들의 유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반짝이지 않고 매끄럽지 않은 사물의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거칠고 소박한 것들을 시간 속에서 우리의 손으로 서서히 반짝이고 매끄러운 것으로 만드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사물의 세계에서 강제 추방당한 먼지의 복수를 감수해야 한다.
- P221

밤새 퍼붓던 비가 새벽녘에 그쳤다. 건너편 산자락은 아직 낮은 구름 속에 있고, 어둠 속에서 젖은 몸을 웅크린 채떨고 있었을 새들은 부산하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멀리 떨어져 있는 계곡의 요란한 물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어제 내린 비는 앞으로 여러 날 동안 그렇게 골짜기를 흘러내려갈 것이다. 비가 오는 시간이 있고, 비가 가는 시간이있다. 바위와 모래 틈 사이에 머무는 물방울들의 시간, 그시차가 숲을 만들고 풀벌레를 키우고 새들을 먹여 살린다.
빗물이 곧바로 강과 바다로 돌아가지 않고 세상 구석구석에 스며들며 순환의 시간을 지연시키는 동안, 나무와 풀과 들짐승들이 자란다.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하나의 사건과, 그 - P243

사건이 완전히 종결되어 흔적 없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시간,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물방울이 겪는 숱한 우여곡절의 시간, 뜻밖의 급류와 흙탕물의 시간,
얼음처럼 차갑고 어두운 지하수의 시간, 누군가의 땀과 뜨거운 눈물이 되는 시간을, 우리도 빗물처럼 살아가는것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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