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의 내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3
하라 료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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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에 찬 눈빛, 비정한 거리에서 의리 하나로 살아가는 패밀리, 복수와 배신이 넘쳐나는 어둠의 뒷골목에서 정의를 찾아 나서는 외로운 탐정. 글과 영화로 배운 하드보일드의 느낌이 이런 것이었다. 내게는. 그래서 현실에서 중년의 아저씨가 담배를 꼬나물고 있으면 백퍼센트 인상을 쓰지만 "담배를 물고 연기를 천천히 빨아들였다. 나는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았다" 같은 문장을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이 분위기에 혹하게 넘어가버리고 만다.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하는것이지!를 외치면서 말이다. 아, 이야기의 끝이었는데 시작을 외치다니. 아니지, 그렇게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맞는 는것이다. 


하라 료의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는 꽤 오래전에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새롭게 번역 출판된 시리즈인가 싶어 원제의 출판연도를 먼저 확인해봤다. 2018년, 이전의 사와사키 후 무려 14년만의 등장이 맞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으니 사와자키에게도 뭔가 변화가 있을까? 했는데 여전히 그는 휴대폰이 없고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혼자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21세기의 독자를 상대로 과거시대의 탐정이야기를 회고하는 것도 아닌데 현시대에 휴대폰도 협력자도 없이 혼자 탐정을 한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사와자키 탐정의 입을 통해 선수를 쳐 버린다. '휴대폰이 있으면 편리하겠군' 이라거나 잠복을 위해 다른 흥신소의 직원을 데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후계자를 키우는 것은 아니라며.


주변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사와자키 탐정 시리즈의 묘미는 그 이야기의 구성에 버금가게 툭툭 던져지는 대사와 사실적인 묘사에 있다. 이야기의 스포일러와 관계없어 보이는 대사 하나를 끄집어 내 보면, 정통 하드보일드 탐정 이야기의 무거움이라기보다는 우리집 골목의 끝 어딘가 오래된 건물에 입주해 있는 이웃집 탐정 이야기 같은 느낌도 들어버린다.


"이놈들을 방패 삼아 한판 뜰까!" 조수석 남자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빛 속에서 분노에 차 소리쳤다. 

"그렇게까지 희생할 의리는 없잖습니까." 운전석 남자가 외쳤다. 요즘 폭력단은 어디든 나이 어린 쪽이 상식이 있는 모양이었다. (324)


긴박한 상황에서도 상식을 언급하고 있는 사와자키 탐정의 이야기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코지와 하드보일드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하기도 하지만 탐정사무소의 의뢰에서 시작하여 은행강도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사건의 흐름은 뒤로 갈수록 정교하게 맞춰지는 퍼즐을 완성해가는 느낌이 든다. 


의뢰인이 아닐 것이다, 라는 확신과 달리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찾아 온 사람은 유명한 저축은행의 지점장이었고 그 의뢰 내용은 은행에 대출 예정인 아카사카 요정 여주인의 사생활에 대한 조사였다. 조사 의뢰를 받은 여주인을 확인하던 사와자키는 그녀가 이미 병으로 사망하였음을 알게 되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의뢰인이 모르고 있었는지, 혹은 알고 있으면서도 의뢰를 요청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결국 사실을 알리기 위해 지점장이 근무하는 저축은행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은행강도 사건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모치즈키 지점장은 계속 행방불명 상태로 찾을 수 없게 되는데...


솔직히 처음 이야기를 읽기 시작할 때는 도대체 이 분위기는 무엇인가, 싶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 퍼즐이 다 맞춰지고 난 후 다시 되돌아가 읽기 시작하면 그 세심한 묘사들이 정확하다는 생각에 두번째 읽는 글이 더 재미있어진다. 나만 그런것은 아니지 않을까? 의심스럽다면 다시 읽어보시길. 애매한 표현들이 명확해지는 재미가 보일 것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당신이 내 아버지입니까?'라는 질문에 웃어버렸지만 그것에 집중을 해버린 나머지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놓쳐버려 사건의 전환점, 아니 관점을 바꿔야 되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에서 허를 찔린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역시 나는 탐정보다는 탐정소설을 읽는 독자의 역할이 딱인가보다 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의미에서 사와자키 탐정의 다음 이야기는 조금 더 빨리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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