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리기 전과 후, 다시는 같아질 수 없어

매초 다른 사람으로 분리되고 있잖아. 괜찮아?

괜찮아

강렬한 긍정속에서 다시

태어나. 언니의 냉담에 동참하며. 엄마의 믿음에 부응하며. 돌이킬 수 없는 세계의 끝. 미개한 신앙인 타고난 몸으로

입술을 찢으며 웃을 수 있어.


- 권민경,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플라나리아 순간, 일부인용. 


















3년 전, 노화되는 현상이려니 하며 아픔을 견디고 견디다 병원에 찾아갔고 뜻밖의 진단에 서둘러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첫번째 수술은 정신없이 지나갔고, 그 수슬에서 요관의 상처를 입어 결국 내 몸속의 신장 하나도 사라졌다. 두번째는 재수가 없었나 체념을 했었지만 세번째는 솔직히 왜 내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전적인 영향으로 암세포가 잘 생겨날 수 있다니. 그냥 그렇구나, 하기에는 왠지 좀 억울한 기분도 들고. 

하지만 '니가 그런 몸으로 태어난건데 받아들여야지'라는 말에 담담하게 받아들이는척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독실한 신앙이이어서도, 운명론자여서도 아니다. 그저.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며 현재를 살아야 미래가 있을것이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척, 했지만 사실 그것이 그리 쉬운 건 아니다. 어쩌면 평생 소변줄을 하고 그걸 몸의 일부처럼 달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을 땐 돌아누워 우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잘리기 전과 후, 다시는 같아질 수 없어"라니. 권민경 시인의 문장은 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느낌이었다. 씩씩하게 인사를 나누고 혼자 공항 대기실에 앉아, 커다란 짐가방을 옆에 두고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어쩌나, 전전긍긍하다가 문득 꺼내든 시집은 나의 시간을 온전히 채워주는 친구였고 그 맑은 기분은 낯선이에게 가방을 잠시 맡겨두고 자리를 떠날수도 있게 해주는 도움이었고, 두려움의 시간을 견뎌내게 해 주는 위안이었다. 


그리고 다시 암이라는 소식은 한걸음 더 죽음에 다가서고 있다는 세상의 끝을 느끼게 했지만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있고 또 살아갈 것이다. 생각의 전환은 쉽지 않고 세상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살아가기에도 마냥 순탄한 삶의 굴곡은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왜 내게? 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럼에도 나는 행복하다 할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각자 저마다의 삶의 시련과 과제가 있고 자신 앞에 놓여있는 운명의 길이 순탄하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인데.


문득 그 어쩔 수 없는 삶들을 마주하고 담담히 자신의 길을 가는 그녀들이 떠올랐다. '강렬한 긍정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마음을 갖게 하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라는 비관이 아니라 당당히 내 삶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겠어, 라는 마음을 갖게 하는. 

















신도 인간도 아닌 마녀의 삶으로 당당히 나선 키르케. 


키르케는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세이아의 여정에 그의 발목이나 잡는 마녀로만 인식되었던 키르케를 다시 만나게 해 주었다. 수많은 님프들에 묻혀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게 되는 존재로 태어났지만 그녀는 운명에 맞서고 아버지인 태양신 헬리오스에 맞서 자신만의 삶을 이어나간다. 하급여신 키르케,가 아니라 마녀 키르케는 마녀사냥처럼 사용되던 '마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버리고 독보적인 '마녀 키르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거부한다, 가 아니라 신들이 바라는 하급여신 키르케로 살아가야 한다는 틀을 깨버리고 당당히 자신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겠다고 맞서는 모습은 굉장한 설레임을 갖게 한다.

나 역시 내게 주어진 환경, 상황들, 운명이라는 것에 짓눌려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야겠다는 의지를 불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녀 키르케의 마법은 단지 약초의 힘이라거나 마법만의 힘은 아니다. 키르케 역시 마법을 성공시키기 위한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운명에 맞서 자신의 미래를 바꾼다는 것은 의지의 힘이 큰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키르케, 그녀가 진정 마녀로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닐까.
















저 끝 어디라도 갈 수 있어. 다녀올게,라며 환하게 웃는 스즈와 그녀의 언니들


무표정한 모습에 어른스럽게 보이지만 무엇인가를 참아내는것처럼 보이던 어린 스즈를 가마쿠라로 데리고 와 함께 살게 된 네자매의 이야기,가 바닷마을 다이어리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이복자매... 그것만으로도 불행이 감돌것만 같고 안정되지 않을 것 같은 삶의 모습이 예상되지만 뜻밖에 그녀들의 일상에는 힘듦보다 웃음이 더 많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이혼과 재혼을 하며 혈연관계가 아닌 가족관계를 맺으며 천덕꾸러기처럼 여겨진다면 어떻게 삶의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아픈것은 낫게 하려는 의지를 가져본다지만, 돌아가신 부모님과 가족의 인연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것 아닐까.

하지만 스즈는 점점 더 밝은 모습을 갖게 된다.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듯 보였던 어린 스즈가 가마쿠라에 와서 언니들과 생활하면서 웃음을 찾고 그 평온함에 묻히지 않고 미래의 확신을 갖고 다시 가마쿠라를 떠나는 모습은 어린 소녀가 몸과 마음 모두 성장하여 '입술을 찢으며 웃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모습을 잃지않고 각자의 사랑과 삶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주체로서 꿋꿋이 자신의 일상을 지켜나가는 모습에 따뜻한 감동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평온한 따뜻함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장하기 위해 둥지를 떠나는 스즈의 마음은 '다녀올게'라는 말 한마디로 알 수 있을것 같다. 

"저 끝 어디라도 갈 수 있어. 다녀올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고리섬의 복자, 세상의 복자들


복자에게,를 읽기 시작할 때 어느날 들었던 뉴스가 생각났다. 의료원에 근무하던 간호사들이 8년여간의 투쟁끝에 산재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이 작은 섬, 같은 곳에 살면서도 그녀들의 이야기를 전혀 몰랐던 내게 그 뉴스는 충격이었지만 다행히 고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산재인정 소식이어서 마음이 좋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우연일까, 운명일까. 그녀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복자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그들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지만, 복자에게 전하는 이야기가 그녀들의 투쟁은 성공하였다,의 투쟁기가 아니라 수많은 복자들에게도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슬픔이 있고,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음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어서 좋았다. 이 척박한 섬에서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건 노동뿐, 이라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 분노와 기쁨 모두를 느끼며 당당히 바다로 나아가는 삶의 모습이 있어 좋았다.


"나는 제주, 하면 일하는 여자들의 세상으로 읽힌다.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 그렇게 매번 세상의 시원을 만졌다가 고개를 들고 물밖으로 나와 깊은 숨을 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다 잘되지 않겠니?"(복자에게, 189)



이 세상의 키르케, 스즈,복자 들은 모두 그렇게 각자의 삶 앞에 담담히 맞서며 당당해져 갔다. 운명을 거스른다거나 뭔가 특별하다거나 엄청난 용기가 있어서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은 아닌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 나는 왜 이런 상황속에서... 따위의 분통이 아니라 단지 '나는!'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나는. 

내게 닥쳐온 삶의 모습은. 늘 평온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바다의 파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다 똑같은 파도가 아니고, 평온한 바다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는 생태계의 생존이 치열하게 담겨있으며,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의 한가운데에서는 오히려 고요함이 감돌기도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떠올려보게 된다. 

나는 나로서, 의지로 기적을 일으키는 마녀처럼, 미래에 대한 나의 선택을 믿으며 내 앞에 있는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면 될 것이다. 그런 나에게, 내가 아닌 나에게, 나인 너에게 인사를 건넨다. 

복된 이들이여, 요망지게. 안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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