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직후 오키나와.

제일 먼저 미군에 투항한 수형자가 뜻밖에 후대를 받고 그대로 시민경찰에 임명되는 일이 잇따랐다. 이것이야말로 가치 역전의 극치였다. 감옥에 있던 복역수가 하룻밤에 경찰관으로 환생했으니까. 그런 전과자들의 인맥이 이 섬의 경찰 조직에 한동안 뿌리를 내려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자가 지방공무원 자리를 꿰차는 일도 가끔 있었다. 1952년 미 민정부가 제정한 포고령 제 67호 경찰국 설치에 따라 출범한 류큐 경찰 시절에도 고용과 인사에는 그런 개방성이 남아 있었다. 147



그러니까.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지만 글의 맥락에서 자꾸만 역사를 떠올리게한다.
제주 4.3을 이야기할때, 강정에 군사시설이 들어온다 했을때, 오키나와는 동병상련처럼 연대를 맺는다.
전쟁의 희생자, 미군기지가 들어선 후 피폐된 섬의 모습들이 이 소설 곳곳에 담겨있다.


좋아서 말하려고 하는 이는 한명도 있다.
섬 주민들이 가슴속 밑바닥에 가라앉힌 채 들여다보지 않는 사건이 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들이 풍화되어 지역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일은 없다. 전 재산이 하룻밤에 사라졌다. 부모 형제를 한꺼번에 잃고 어제까지 보던 고향 풍경이 모두 불타버렸다.
우리 우치난주는 그런 원체험이 있어서인지 우연한 계기로 기존 상식이나 가치관이 뒤집히는 일이 일어나도 그리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치난주들은 안다. 중국의 책봉제 아래 조공국으로 있던 류큐 왕국 시대부터 야마토의 치세, 미국의 치세 - P145

로 지배체제가 바뀌었지만, 매번 ‘어떻게든 되겠지‘하며 고난을 견뎌왔기 때문에, 이 세상의 섭리라는 것은 어떤 시대에나 변덕스러우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뒤통수를 치는 듯 가치 기준이 바뀔 때도 높은 순응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 비가 뿌리고 지나가면 금세 하늘이 개는 것처럼 도둑질을 무엇보다 부끄러운 짓으로 알던 지역 정서가 돌변해 ‘센카아기야‘의 등장마저 받아들였듯이, 이 섬에서는 사소한 계기로도 광대가 금세영웅이 된다. 친한 이웃이 증오스러운 적이 된다.
얼간이가 선동자가 되고 정치가가 수형자가 되고 도둑이 경찰이 되기도 한다. 추억 속에 떠도는 과거 사건이 현실로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 P146

그 전쟁의 기억에서 야마코가 해방된 적은 없었다.
눈 한번 깜빡하는 사이에 눈앞에서 부모가 사라졌다.
포탄이 떨어져 두 사람을 구덩이로 바꾸어 놓았다.
서 있을 수가 없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왠지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었다. 본인을 지켜줄 것이라고는 얇은 피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이 노골적인 ‘죽음 앞에 내던져진 공양물처럼 느껴졌다. 그칠 줄 모르는 포성 속에서 의식이 아득해지고 눈앞은 눈물로 흐려지고 얼굴과 턱이 덜덜 떨려서 더 이상 도망가기는 틀렸다고 각오했다. 219



중요한 것이 하나 더.
기지 주위를 돌아다니다 보면 철조망 밖에 웅크리고 있는 여자를 종종 보았다. 술이나 쌀 같은 것을 펼쳐놓고 기지 안쪽을 향해 양손을 비비고 있다.
이 섬에서는 조상 묘소가 있는 땅을 군용지로 수용당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캠프 가데나 같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면 민간인 출입은 허락되지 않아 봄과 가을의 히간* 때는 철조망 밖에서 묘소 방향으로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래. 그랬구나.
야마코는 웅크리고 있는 뒷모습을 보며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섬에서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나만이 아니야. 누구나 소중한 사람을 빼앗긴 과거가 있다.
사라진 희망을, 이산과 사별을, 사라진 과거를 끌며 산다.



*히간.
춘분이나 추분의 앞뒤로 각 3일간을 합한 7일간, 이때 조상에게 성묘를 한다.


- P221

그래도 도민들은 대개 빠릿빠릿하게 하루하루를 생활한다.
현실과 마주하고, 밝고 강하게 일상과 일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안 그러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죽은 듯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아가야 해. 매일매일 갓 태어난 것처럼.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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