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반양장)
쑤퉁 지음, 김은신 옮김 / 아고라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전쟁과 굶주림으로 어지러운 세상에서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억울하게 황천길로 떠났다. 그들은 모두 천하의 바보들이었다. 우룽은 자신은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 살아있는 것이었으며 둘째, 사람답게 사는 것이었다. 난 바보가 아냐! 그가 마음속으로 외쳤다.(132)

밝은 표지에, 멋들어지게 씌어진 제목인 '쌀'은 뭔가 근본적인 것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뭐니뭐니해도 역시 아직까지 우리의 주식은 밥이기에 '쌀'은 하늘, 곧 우리의 생명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느꼈다면 나는 역시 '사람답게 사는 것' 이전에 '살아있는 것'이 인간다운 본능이라는 것을 미리 깨달았어야 한다. 한때 친구들과 떠들곤 했던 김지하의 '밥은 하늘'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건 어리석은 우리들이 생명의 근원도 모르면서 '밥'을 떠들어댔었던 것이었다.
이 책을 읽어나가다가 문득 '쌀'은 좀 더 원초적이고 근원성에 가까운 말이라는 생각이 얼핏 스쳐갔다.

"난 너처럼 비굴한 놈이 제일 싫어! 겨우 돼지고기 한 점을 먹으려고, 그깟 은전 두 닢을 얻으려고 아무나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면 되겠어?

"그렇지! 이제야 네놈 눈에서 복수와 증오의 빛이 보이는구나. 너보다 훨씬 비참했던 내가 뭘 밑천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겠느냐? 복수심과 증오심이야말로 우리가 사람 구실을 하게 하는 밑천이지. 네놈의 부모는 잊어버리더라도 그 복수심과 증오심만은 잊지 말거라"(241)

쑤퉁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자신을 모욕하는 자에게 '아버지'라 부르기를 강요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했던 것처럼 굴욕을 감수한 후 복수와 증오심으로 삶을 유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려보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첫째, 살아있는 것 그리고 둘째,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두가지가 서로 떼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 아닐까.

쑤퉁의 소설 '쌀'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에의 집착과 인간의 본능에 대해 여과없이 까발리고 있다. 근친상간이 일어나고 친형제간의 살육이 자행되고 이득을 위한 배신과 학살이 있다는 것을 과장됨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이 끔찍한 이야기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오히려 더 무덤덤해져버리고 있다.
이것이 어쩌면 문명생활을 하고 있다는 우리의 실상인지도 모르지.

번성하던 쌀집에, 어느날 홍수로 모든 것을 잃고 오로지 '쌀'을 찾아 흘러들어온 우룽이 어떻게 쌀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지, 우룽이 들어간 쌀집은 그 이후 어떤 일들을 겪으며 변해가는지 천천히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이야기는 물밀듯이 세대를 지나 이어져간다. 극악무도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참혹한 이야기들은 서양문화의 근본이 되기도 하는 성서의 구약이야기와도 맞물려서, 나는 쑤퉁의 이야기가 설화처럼 느껴져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더 끔찍했고, 인간성을 잃어가버리고 있음을 표현한 그녀의 눈물에 당황스럽다.
'만약 쌀집 가족 중에 누군가 죽으면 자신이 지금처럼 가슴 아파하며 눈물을 흘릴지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처럼 상심이 클 것이라고는 단언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커져온 슬픔과 고통 속에서 자신의 희노애락의 감정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03)

쑤퉁의 이야기는 포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구석구석을 들춰내며 더 악랄하고 집요하게 인간의 본성을 후벼파낸다. 이것이 쑤퉁의 소설을 '적당히 야한 통속성'과 '적당히 그려낸 잔혹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끝내지 않게 해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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