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낙타와 성자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품절


낯선 도시에 익숙해지려면 새롭고 이해할 수 없는 목소리들로 혼란스러워질 때 혼자 있을 수 있는 은밀한 장소가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 장소는 조용해야 한다. 그 장소로 피신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때까지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어야 한다. 막다른 골목으로 사라질 수만 있다면, 그리하여 열쇠를 갖고 문 앞에 서서 지상의 어느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그 문을 열 수만 있다면 가장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서늘한 집 안으로 들어가 잠근 문을 등진다. 실내는 어두워 한순간 눈 앞이 캄캄해진다. 마치 공터와 골목에서 버림받은 맹인처럼. 하지만 시력은 순식간에 회복된다. -53쪽

위층으로 가는 돌계단이 있고 위로 올라가면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고양이는 정적의 화신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 사람들은 고양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낀다. 그토록 소리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니. 사람들은 고양이가 하루에 천 번씩 '알라'를 외치지 않아도 밥을 준다. 고양이는 사지를 절단당하지 않고 잔인한 운명에 자신을 바칠 필요도 없다. 고양이는 냉혹할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그렇다고 말하는 일이 없다.-54쪽

집을 오르내리며 정적을 들이마신다. 넌덜머리 나는 소동은 어디로 갔는지? 현란한 색깔과 날카로운 소리들은? 수백 수천의 얼굴들은? 이곳 집들은 길거리를 향해 창을 여는 일이 별로 혹은 전혀 없다. 창문들은 하나같이 안뜰을 향해 열리고 안뜰은 하늘로 열려 있다. 안뜰을 통해서만 주변 세계와 원만하고 적당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지붕 위에 올라 도시의 납작한 지붕들을 한눈에 볼 수도 있다. 균일함의 광경, 전체가 커다란 계단들처럼 지어져 있다. 그렇게 위에 올라서서 보면 도시 전체를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좁은 골목들은 장애물이 아니고 오히려 더는 보이지 않아 그런 게 있다는 사실까지 잊고 만다. 아틀라스 산맥의 산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번쩍여 알프스의 산들을 본다는 착각에 빠질 수도 있을 터이다. 만일 그 산의 광채가 지나치게 강렬하지 않다면, 그리고 도시 곳곳의 야자수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말이다.-54쪽

여기저기 솟은 이슬람 사원의 '미나레트'라고 불리는 첨탑들은 교회의 그것과는 다르다. 미나레트는 더 홀쭉한 모양이되 뾰족하지는 않고 위쪽이나 아래쪽이나 폭은 같은데, 중요한 건 높은 곳을 받치는 대(臺)로서 그곳에 기도하러 오라고 사람들을 부르게 된다느 ㄴ것이다. 미나레트는 빛이 밝은 등대와도 같지만 차이가 있다면 미나레트에서는 빛 대신 목소리들이 울려 퍼진다는 점이다.-56쪽

집들의 지붕 위로는 제비 떼가 이리저리 날고 있다. 그 모양이 마치 제2의 도시를 이룬 듯하다. 다만 골목길의 사람들이 느린 데 비해 새 떼는 빠르게 이동한다. 제비들은 결코 한자리에 머물지 않아 사람들은 그 새들이 대체 잠은 자는지 궁금해한다. 제비들은 게으름이 결여되어 있고 미리 재어 보는 사려와 신중함이 부족하달까. 새들은 날면서 먹이를 훔친다. 속이 빈 지붕을 저 새들은 자기들이 정복한 나라쯤으로 여길 것이다.-5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