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수이는 유로의 영정 사진 아래서 하염없이 울다 지쳐 영정사진 옆의 벽에 기대 넋을 놓고 있었다. 


유로 엄마와 유향 역시 갑작스런 유로의 죽음 앞에 반쯤 넋 나간 사람들처럼 서있었다. 


조문 오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는 것도 처음엔 넋이 나가 멍한 채 서있기만 했다.


유로의 담임 선생님과 선생님들 몇 분이 오시고 학교 아이들 중 연락을 먼저 받은 아이들이 왔다 갔다.


시간은 점점 늦어져 밤 12시가 몇 분 남지 않은 시각이 되었다. 그때쯤 복도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갈색 옷을 입은 소녀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그러다 유로의 영정사진을 보고는 한참을 멈춰 서있더니 두 눈에 눈물이 그렁 하는가 싶다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소녀는 유로의 영정 앞으로 다가와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옆에 서있던 유로 엄마를 향해 자기도 모르게 절규하듯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유로 오빠가 죽어요. 아줌마 말씀 좀 해주세요. 도대체 유로 오빠가 왜요. 


유로 엄마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니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도대체 이게 현실이라는 것을 유로 엄마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소녀는 영정사진을 다시 돌아보려다가 한쪽 구석에서 넋 나간 채 유로 사진만 바라보고 있는 수이를 발견했다. 소녀는 수이에게 달려들었다. 


-너 때문이야! 신수이! 너 때문이라고. 니가 유로 오빨 죽인 거야. 니가 죽어! 니가 죽으라고. 유로 오빠 살려내고 니가 죽어버려!


소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분노에 차 수이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이령아! 왜 그러니. 유로가 마지막.. 마지막 가는 길에 이게 무슨 소란이야.


유로 엄마가 이령이라는 그 소녀를 말리려 했지만 이령인 거세게 수이의 어깨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마침 이령의 어머니와 그녀의 기사 겸 보디가드가 M.G.I 멤버 중 소미, 이연과 함께 들어서다 이 광경을 보았다.


-언니 도대체 왜 그래요. 지금 언니보다 더 가슴 아픈 건 수이 언닐 텐데.


이연이 나서며 이령을 말렸지만 사실 수이 못지않게 이령이의 심정도 말이 아니었다. 지금 이령이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가 않았다.


-이제 그만해. 제발.


-놔! 놓으라구. 이거 못 놔! 


유향이가 나서서 이령이의 뒤에서 이령이의 어깨를 잡고 수이에게서 떼어냈다. 


정신이 나간 듯 조문 자리를 난장판으로 만들던 이령은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은 유향을 어깨너머로 돌아봤다.


-유로 오빠?


유향을 본 이령이 표정이 문득 밝아졌다. 하지만 곧 유향이가 유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다시 슬픈 눈빛으로 눈물을 흘렸다.



소미와 이연이가 수이에게 다가가 그녀를 안듯이 부축했다. 수이는 말없이 정신줄을 놓은 사람 마냥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언니 기운 내. 


-유로 오빠 같은 사람은 천국 갈 거야. 언니가 이렇게 힘겨워 하는 건 오빠도 원하지 않을 거야.


소미는 힘내라는 말밖에 뭐라고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연이도 수이를 북돋아 주고 싶었지만 이런 뻔한 말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놔! 이거 놔. 나 유로 오빠 곁에 있을 거란 말이야... 제발 날 좀 놔 줘. 


이령이가 이령이 엄마의 보디가드에게 끌려나가며 소리쳤다. 


유로 엄마는 이 상황에 너무 마음이 아팠지만 얼굴은 아무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처럼 표정이 없었다. 유향인 형을 잃은 마음도 말이 아니었는데 그런 엄마를 보고 더 가슴이 아팠다.


이령이의 엄마가 유로 엄마에게 다가왔다.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갑작스런 비보에 유로 군 어머님께서도 경황이 없으실 텐데 저희 딸이 이런 소란까지 피워 죄송합니다. 어떻게 사죄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령이도 소란을 피우겠다고 이런 건 아닐 거예요.


-아드님을 너무 아끼는 마음에 이령이가 제정신이 아니었나 봅니다. 다시 한번 사죄의 말씀드립니다.


이령이 엄마는 그리 말하고 돌아서려다 유향이를 유심히 봤다. '형제라 그런지 많이 닮았어' 이령이 엄마는 이령이를 안정시키려면 어찌해야 할지 깊은 고민을 했다.



11


조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비우고 유로의 엄마가 실신하듯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유향이는 놀라 한쪽 무릎을 굽혀 앉으며 엄마를 감싸 안았다.


-엄마. 엄마. 정신 차려야 돼. 엄마 이러면 형이 슬퍼할 거야!


그리 말하고 유향은 울기 시작했고 유로의 엄마도 마냥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상황을 유로는 목도하고 있었다. 유로 곁에 서있던 흑백의 차사와 천사 남녀는 늘 보는 광경이었지만 사람에게 이 순간이 얼마나 애통한 순간인지를 알고 있기에 유로를 애처롭게 지켜봤다.


-엄마 저 괜찮아요. 다친데도 없고 배도 안고파요. 엄마... 엄마.. 죄송해요.


유로는 모두에게 이 깊은 슬픔을 자신이 안겨준 것 같아 너무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다시 가족 곁으로 수이 곁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럴 길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슬픔 보다 더한 아픔이 밀려왔다. 


-가족과 너의 수이 곁으로 다시 갈 수 있는 방법이 꼭 없는 건 아니야.


하얀 수트의 중년의 남자 천사가 말했다. 


-제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는 건가요?


-다시 죽기 전의 너로 되살아날 방법은 이제 없는 거야. 그런 망념은 접어둬.


검은 수트의 저승차사 누나가 유로의 들뜬 기대를 조각조각 내듯 차갑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수호천사가 되면 그래서 너의 가족과 수이라는 소녀 중 누군가를 수호하도록 지시가 내려오면 그들 곁에 있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야.


-괜히 애 바람 넣지 말아. 얘 판결부터 지시가 떨어지기까지 너네 천국 절차로는 한 세월이 다 걸릴 텐데. 괜히 애 바람만 넣지 말아. 


유로는 중년 천사의 말에 한껏 기대하다가 차사 누나의 말에 바람이 빠지는 듯했다.


그때 원 없이 울은 건지 무표정해진 표정의 수이가 일어나 유로 엄마와 유향 곁을 지나 장례식장 복도를 따라 걸어 나갔다. 수이의 머리 위로 유로가 죽기 전에 생겼던 바로 그 마법써클이 떠올라 있었다,


유로가 수이의 표정에서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따라나섰다. 수이 머리 위의 이상한 문양도 신경이 쓰였다.


-절차를 단축시키는 방법은 없나요. 


-그런 방법은 없지만 우리 천국으로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뭔가 대안을 주실지도 몰라.


-속지 마라. 그 하나님이란 존재에게 기도하고 응답받았다는 것들은 줴다 사기꾼들뿐이란다.


천사의 말에 뭔가 희망을 품으려 하면 차사 누나가 늘 찬물을 끼얹었다.



12


밖에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폭우였다. 그 폭우 속을 가르며 수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수이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그 마법써클이 있다.


-수이야. 너 왜 그래. 비가 오잖아. 그것도 이렇게 많이. 


유로는 수이에겐 들리지도 않을 말을 속삭이며 가슴이 저미는 것만 같았다. 


수이는 흐릿한 눈동자로 비에 푹 젖은 채 도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네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수이의 수호천사와 수호령이 수이에게 계속 정신 차리라고 주의를 주고 있는 중이야.


-무슨 수호천사가 말밖에 못한데요. 어떻게든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등급이 낮은 수호령이라 할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어. 저 아이의 수호령과 수호천사도 할 만큼 하고 있는 거야. 


다급한 유로의 말에 하얀 천사와 검은 차사가 답변은 해줬지만 시답지도 않은 말들만 같았다. 유로는 더 조급해져가며 말했다.


-어떻게든 해 주세요. 아니면 제가 수이 뒤에서 수이를 지켜주게 해주시던가요. 그럼 뭐든 다 할게요.


수이는 저 멀리에서 트럭 한 대가 빗길을 해치면 달려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작정 도로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그리고 붉은 도복의 그 어르신이 나타났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너만 결심한다면 절차를 생략하고 한동안 저 아이를 뒤에서 지켜줄 수 있는 수호령 지위로 봉해도 된다는 전갈이 왔으니 말이다.


유로는 멈춰진 공간 속에 온통 비에 젖은 수이를 보고는 결심했다. 


-결심했습니다. 수이의 수호령이 되게 해주세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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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는 온통 새하얀 공간에서 자신을 감싸는 파동 같은 또는 빛의 일렁임 같은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정좌를 하거라!


-네?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라고!


어디선가 동굴 소리 같은 노년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로는 그 말을 따라 정좌를 하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거라. 내면의 요동에 반응하지 말고 그냥 느낌만 따라가면 된다.


아랫배부터 뜨겁고 찌릿한 기운이 일어나자 유로는 놀라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노인이 무언가 미더운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그의 말대로 의식이 따라가고 있었다. 불 같고 전기 같은 그 기운이 아래를 거쳐 꼬리뼈로 가더니 용암 줄기라고 할까 아래에서 위로 치는 번개 같다고 할까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느낌이 머리까지 곧장 올라갔다. 유로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치 자신의 정수리에서 빛의 불꽃이 터져 오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9


유로는 한참만에 의식을 차리고는 오히려 더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는 듯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낯모르는 두 남녀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아이를 왜 천당에서 관리하려고 드느냐구요? 이 아이는 기독교도예요. 어디까지나 저희 천국 소관입니다.


-천국에 영혼이 없어? 무슨 호객행위 하듯이 영혼을 홀려가려고만 해. 이 아이는 생전에 손씨 형의권을 사사 받은 아이야. 어느 모로 봐도 우리 천당하고 더 인연이 깊다구.


하얀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가 검은 수트를 입은 젊은 여성에게 따지고 들자 젊은 여성도 근거를 대며 반박했다. 


-그깟 무술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요. 크리스천을 천국에서 관리하겠다는데 운동을 이걸 했으니 얘는 우리 애다 이런 논리가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세요?


-공부(功夫)를 배우는 아이의 정신 속에는 동양의 정신이 자리 잡아. 허울뿐인 종교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 그 영혼에 어떠한 정신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아니 그래서 상도덕도 없이 이러자는 겁니까?


-너네는 영혼을 장삿속으로 관리하니? 정신을 이야기하는데 상도덕이 웬 말이야?


하얀 수트의 중년 남자는 갓 입문한 초보 천사였고 검은 수트의 젊은 여성은 경력이 있는 저승차사였다. 그런데도 남자가 흥분하며 논리 없이 따지고 들자 여성까지 성이 차오르고 있었다. 마침 그때 새하얀 그 공간에 그보다 더 새하얀 빛이 어리더니 붉은 도복의 노인이 나타났다. 


-규약대로 하게 규약대로. 이 아이 자신의 결정이 중요한 거야. 


-네. 어르신. 규약대로 해야죠.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찰나였습니다.


-맞습니다. 영감님. 아이 의사가 가장 우선이죠. 


노인의 말에 젊은 여성이 되려 난처한 빛을 띠었고 중년의 남자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유로는 이 상황이 오기 전에 들리던 동굴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자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 아까 제게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내가 니 할애비는 아니다. 


-아! 그럼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어르신 정도가 좋겠구나.


-예. 어르신. 그런데 아까 제게 뭘 하신 건가요?


-중유에 이르기 직전에 너의 임독맥을 타통한 것이다. 


-저는 아직 내공 수련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네가 몇 해나 꾸준히 공부(功夫)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게지. 


유로는 노인의 말에 의문이 풀리나 싶었지만 그의 말속에 뭔가 꼭 묻지 않고는 안될 의문을 하나 품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하신 중유라는 게 뭔가요?


-그건 바로 우리가 있는 이 공간과 이 세계의 일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네가 인간계의 시간으로 49일 동안 머물러야 하는 곳이지.


그 말을 듣고 유로는 '그렇구나. 나는 역시 죽었구나!' 하는 수긍과 함께 "내가 도대체 왜 벌써 죽어야 하나' 하는 억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이란다. 억울함이나 난감함이나 당혹스러움 같은 것들은 망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간계의 생에 미련만 가지며 영계에서 새로운 생을 부정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너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니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제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어요. 책임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구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거란다. 네게 어찌 그 모두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은 자만이고 오만이다. 너도 너 스스로를 책임지는데 전념하는 것이 좋다. 현재의 너 자신 말이다.


유로가 너무 답답한 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하얀 수트의 남자가 유로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봐. 고유로 너는 크리스천이니까 천국 가야잖아. 그치.


유로는 확 한대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작자는 정말 천사가 맞는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아니야. 너의 내면 깊숙이에서 올곧게 동양의 전통을 애호하는 그 정신의 흐름을 믿고 따라야 해. 우리 천당으로 오면 네가 배우고 싶어 하는 십대 문파의 절기를 가진 고수들이 숱하게 있단다.


유로는 외모와 다르게 노숙한 어투의 이 누나 역시 짜증이 났다. 이 둘은 방금 죽은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전혀 감이 오지도 않고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아니 영혼들인 것만 같았다. 


-천국이고 천당이고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저는 약속이 있다고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유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이가 걱정됐다. 이 두 사람 아니 두 영혼의 말보다 오늘 날씨가 일기예보하고 다르면 곧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수이가 우산은 갖고 나왔을지 하는 걱정부터 먼저 들었다.


-그 아이가 오래 기다릴까 봐 걱정이냐? 비에 젖을까 봐 걱정이냐? 더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단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하게 될 걱정들이니까 말이다. 


-저는 이제 어째야 하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노인의 말을 듣고 유로가 참담한 심정으로 울부짖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노인은 조용히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올려 작은 원을 그렸다. 딱 그만한 크기의 빛의 구슬이 생기자 노인은 그걸 유로의 가슴께로 밀어 보냈다. 유로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 빛의 구슬이 자신의 가슴께서 스며드는 것 마냥 사라졌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에게는 아직 7재 동안(49일)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 사이에 결정하려무나.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사이 무얼 할 수 있나요?


-우선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보아라. 잠시 가슴 아픈 이들의 마음에 안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네가 빨리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며 노인이 허공에 손바닥을 펴고 내밀자 허공에서 상복을 입은 어머니와 유향이의 모습이 비쳤다. 아니 유로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것은 차원의 문 같은 것이다. 유로와 흑백 두 수트의 남녀가 함께 차원의 문을 넘어가자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오빠. 오빠. 유로 오빠. 


눈물을 흩날리며 달려오는 수이를 보고 유로는 두 팔을 벌렸다. 수이는 유로를 관통하고 지나쳐 영정 사진 앞에 가 쓰러져 울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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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미래보고서 2021 (포스트 코로나 특별판) - 세계적인 미래연구기구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예측한 코로나가 만든 세계!
박영숙.제롬 글렌 지음 / 비즈니스북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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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포스트 코로나라는 주제로 나온 이제까지의 그 어떤 저작 보다 깊고 넓게 조망하고 있다. 


넓게 다룬 주제를 다 언급할 수는 없겠지만 특히나 주목되던 것은 디지털 화폐와 토큰의 대중화로 실물 자산을, 그러니까 예술 작품이나 금괴나 집 같은 사적 재산을 지분 형태로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결국에는 개인 소유가 아닌 공유라는 말이기에 공유경제의 기폭제 역할을 암호화폐가 하게 된다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거의 모든 분야의 집약된 영향력... 원격근무로 수도권 인구 집중의 감소 (탈수도권화)와 그 영향인 임금 삭감으로 인한 기업의 비용절감과 유전자 기술 발전으로 인한 먹거리 생산 과정의 간소화, AI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 과정 전반의 자동화로 인한 비용 절감, 3D 프린팅 기술로 인한 운송 과정의 혁신과 건축 비용이나 제품 생산 비용 등의 절감 같은 것들이 생활비를 엄청난 규모로 축소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렇다면 기본소득 비용이 우리가 예측하는 것보다 상당히 적다해도 보편적 기본소득만으로도 일상을 살아가기에 충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격근무(재택근무)의 영향으로 세계 유수 기업들이 수도권의 사무실 숫자를 줄여 비용 절감을 하며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에게 영구 재택근무를 제안한다고 한다. 이때 임금 삭감을 제시하는데 거의 모든 직원들이 생활비가 더 싼 지역을 찾아 수도권을 벗어나며 생활비를 절약하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자연스레 대대적인 탈수도권화가 일어나며 세계 주요 도시들의 부동산가가 하락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부동산 불패의 신화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AI의 도입이 (금융, 의료, 법률, 언론 등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정치 분야에까지 확산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에스토니아, 뉴질랜드, 러시아, 도쿄에서 마저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순차적으로 국회의원 AI가 활동하고 있었고 어느 국가(뉴질랜드)에서는 총리 선거에 마저 출마한다는 정보는 신선하다 못해 다소 충격적이었다. 


금융과 의료, 법률, 언론 등에서 솔직히 인간보다 AI가 100배 더 미더운 것이 사실이지만 정치까지 진입하는 것이 이리 빠르게 시도되고 전개되어 가는 줄은 몰랐다. 사실 정치도 딥러닝을 통해 분석하고 판단해 인류에게 보다 더 이로운 방식을 권할 수 있는 것도 AI가 인간보다는 훨씬 더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습성과 인간의 병폐까지 학습하다 보면 AI가 인간이란 존재의 존재가치를 어떻게 판단하게 될까? 그 이후의 인류를 어떻게 관리하려 할까 하는 두려움이 이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먼 또는 머지 않은 미래에 지구에 인간이란 생물이 계속 살아가고 있기는 하게 될까 하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또 개별 국가의 소멸과 가상국가의 도래를 예견한 부분은 사실 신박할 건 없고 2030년 이내에 일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예측은, 연도까지는 아니지만 소시민인 나도 하던 예측이다. 현존하는 국가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것은 아니고 더 이상 국경에 갇혀 이것만이 자국이라는 입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라질 것이라는 말이다. 개인 데이터 처리를 기업들이 관리하고 당연히 민영화가 가능한 가상화폐 생산을 기업이 관할하며, 메타버스마저 확산하는 이 세 가지만으로도 가상국가가 출연할 요소들은 다 준비된 것 같으니까 말이다. '와칸다 포레버'를 외치던 수퍼히어로 무비 팬들이 와칸다 가상 여권을 만들던 시절부터, 시스템만 갖추면 가상국가의 시민이 될 사람들이 다수라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았나? 어찌 보면 온라인 게임산업의 발전 과정에서 그런 예측을 하지 못한 사람이 더 둔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본서에 등장하는 그 외의 다른 대목들은 다 SF영화나 SF소설 등에서 몇 십 년 전에서 근 100년 전부터 예측해온 세계상이 이제서야 현실화되고 있는 거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리만치 거부감이 이는 미래상은 아니리라고 본다.


[세계미래보고서 2021]는 [UN미래보고서] 와 [세계미래보고서 2050]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읽은 박영숙님과 제롬 글렌님의 미래예측서인데 참 몰입하게 하는 저작이다 싶다. SF소설이나 SF영화가 주는 흥미진진함이 보고서라는데도 느껴지니 미래를 예측하고자 할 때 인간의 뇌가 느끼는 즐거움은 정말 끝이 없나 보다. 


본서의 단점을 하나 짚으라면 현재 세상 핫한 이슈인 메타버스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상현실 증강현실 등을 다루며 살짝 지나치고 있기는 하다.) 그 하나를 제외하면 근래까지 나온 코로나 이후의 세계를 예측하고자 하는 미래예측 분야 저작 중 가장 탁월하구나 싶다. 넓은 분야를 맥락을 지어 몰입감을 높이면서 깊이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꼭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할 수 있을 책이다. 이 책을 읽은 분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있게 권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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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1-10-12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래보고서 어쩌고 제목을 그다지 믿지 않는데 이하라님이 탁월하다고 하시니까 관심이 가네요 ^^;

이하라 2021-10-12 23:52   좋아요 1 | URL
저자들의 밀레니엄 프로젝트라는 기구는 유엔을 비롯해 유엔산하 연구기관들, 또 EU와 OECD 등 국제기구들과 협조 하에 4,500명의 연구진이 다양한 프로그램과 기법을 동원해 미래예측안들을 내놓는다고 하더라구요. 세계석학들의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저작들도 밀레니엄 프로젝트의 보고를 벗어나지 않는 내에서 자신들의 분석을 더하는 정도 같습니다. 코로나 이후 이제까지 국내 경제인들의 분석 저작과 제이슨 솅커님의 금융의 미래를 보았는데 다각도로 조망하는 데는 이 책이 더 탁월했던 것 같습니다. 투자 목적보다 미래상의 전개가 궁금하시다면 본서도 읽어보실만 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오거서 2021-10-12 23:59   좋아요 1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5


수이는 숙소에 소미와 같이 쓰는 1실에서 이층 침대 아래 칸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휴대폰 플립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오늘 안무실에서 한 고정도 대표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너희 다른 건 몰라도 사생활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는 건 꼭 명심해둬. 활동기간 동안 절대 연애 금지다 알지?> 


그러면서 고정도 대표는 명심하라는 듯 수이를 지긋이 쳐다봤다. 


수이도 알고 있던 사실이다. 유로 오빠가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지난 4년 7개월 노력의 시간과 M.G.I 데뷔 보다 중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빠가 나 없이 살 수 있을까? 난 그런 오빠를 두고 혼자서 내 일이나 잘하자면서 아무렇지 않게 살수 있을까?


소미가 샤워를 마쳤는지 젖은 머릿결을 수건으로 닦으며 들어왔다. 화장대 앞에 앉아 헤어 드라이기를 들었다가 거울에 비친 수이의 모습을 보고는 수이를 돌아봤다.


-언니 무슨 걱정 있어?


-음 아니야? 걱정은 무슨 걱정.


-언니 무슨 걱정하는지 알 것 같은데 인생은 선택과 집중의 문제래. 우리에겐 지금 2007년 2월 10일 보다 중요한 건 없어 알지?


소미가 고정도 대표가 알려준 데뷔 확정일을 되새기며 수이를 각성시켰다. 수이도 생각했다. 


=선택과 집중... 그래 난 이미 선택했고 집중만 하면 되는 거야!


수이는 휴대폰을 플립을 열고 입술을 앙다물고서 유로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 오빠 우리 일요일 오전 10시에 거기서 만나.


그 순간 수이와 소미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수이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원 안에 왼쪽에 초승달과 오른쪽에 태양이 서로 등지고 있는 마법써클 같은 음영이 잠시 생겼다 사라졌다.



6


2006년 7월 9일 일요일 아침, 유로는 아침부터 청바지를 입고 흰 티와 갈색 브이넥 티, 빨간색 셔츠 등을 입어보며 거울 앞에 서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로 엄마는 옅은 미소를 띠었다.


-수이 만나러 가는구나?


-어떻게 아셨어요. 엄마 눈은 못 속이겠다니까.


-속이고 말고 할게 뭐 있어. 여자친구 만나러 가는 게 아니면 니가 언제 옷 입는 거 고르는데 망설이는 애야?


-엄마 뭐가 어울려요?


-내 눈엔 그냥 흰 티가 나아. 화려한 옷보다도 심플한 옷이 잘생긴 우리 아들 얼굴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으니까. 


엄마 말씀에 유로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 아들이니까 그렇지. 뭐 그렇게 잘생겼다고 그래요.


-누구 아들이라도 이만큼 생긴 아들이 흔할 것 같니?


유로는 엄마 말에 웃으며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7


수이는 오늘이라도 마지막이라도 유로 보다 먼저 나와 유로를 기다리지 않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홍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수이는 등에 맨 가방 옆 주머니에서 미니카세트 플레이어 워크맨을 꺼내더니 이어폰을 연결하고 귀에 꽂았다. sg워너비의 '사랑했어요'가 흘러나왔다.


유로는 바쁘게 지하철역으로 가 홍대로 가는 지하철을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무슨 이야기인지 집중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4~5살 정도 되는 아이 둘이 서로 쫓으며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유로는 아이들이 좀 걱정돼 아이들 엄마가 누굴까 하고 아주머니들을 쳐다보았지만 마침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화면을 보고는 한 걸음 내디뎠다.


마침 그때 유로를 기다리던 수이의 머리 위 공간에 붉은색 원이 서서히 그려졌다. 그 원 안으로는 역 삼각형이 그려지더니 삼각형의 윗면에 뿔처럼 X자가 새겨졌다. 수이가 어지러운듯 머리를 짚으며 쓰러지려는 찰나 머리 위의 마법써클 같은 것이 사라졌다.


수이의 머리 위에 마법써클이 사라지는 그 순간 지하철을 기다리는 유로의 머리 위로 수이 머리 위에 생겼다 사라진 바로 그 마법써클이 생겼다. 유로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으앙


유로가 정신을 차리고 아이 울음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들 중 한 아이가 철로에 떨어져 정신을 잃고 있었고 같이 놀던 아이는 놀라 울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멀리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지만 유로는 생각할 틈도 없이 철로에 뛰어들었다. 정신을 잃은 아이를 아이 엄마인듯한 사람 손에 안기고 이제 자신도 승강장으로 올라가려는데 무슨 막이 막고 있는 듯 올라갈 수가 없었다. 지하철이 빠른 속도도 다가왔고 유로는 정신을 잃는 듯 멍하니 철로에 서서 지하철이 오는 걸 바라봤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눈앞에 이를 데 없이 새하얀 빛이 보였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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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6년 7월 7일 금요일 저녁 9:38 , JD엔터의 안무실에서 앨범 녹음을 마친 후 몇 주 전 갓나온 신곡으로 다섯 명의 소녀가 비지땀을 흘리며 안무 연습 중이다. 안무의 합이 너무도 잘 맞다가 머리를 뒤로 묶은 소녀가 반박자 느리게 동작을 취하자 리더 수이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카세트 플레이어를 정지시키더니 돌아본다.


-이연아 이제 우리 데뷔가 얼마 남지 않았어. 너 평소에 잘하니까 평소처럼만 해. 조금 긴장도 하면서 말이야. 데뷔 무대에서 이러면 우리를 응원하는 팬들도 적게 될 꺼 너도 알잖니.


-잠깐 담이 왔나 봐 언니. 쏴리~


-이연 언니 왜 틀렸는지 나는 알지.


효윤이의 말에 선희가 함께 대답하려고 준비를 했다.


-쉴 틈이 없으니까~ 


-좀 쉬었다 하자. 언니 잘 쉬는 것도 연습이라고 대표님이 그랬잖아.


효윤이와 선희가 합창하듯 대답하자 소미도 대표님 말씀을 무기 삼아 쉬자고 나섰다.


-니들 다 참 태평이다. 데뷔 날짜가 조만간일 텐데 쉬자는 말이 나오니.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좀 쉬어가 언니, 쉴 땐 쉬는 거지.


나만 조급한가 하는 생각에 수이가 답답해하면서 하는 말에 이연이 대꾸했다. 


마침 그때 안무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파란색 수트 차림의 고정도 대표가 비서와 함께 들어섰다. 


-그래 실컷 쉬어. 내일부턴 니들이 니들 쥐어짜게 될 테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대표님. 지금까지 계속 안무 합 맞추다 이제서야 쉬자는 말 나온 거예요.


-정말이라니깐요.


고 대표의 말이 자신들을 핀잔주는 말인지 알고 수이가 발끈했다. 그러자 아이들이 모두 억울해 하며 말했다.


-니들이 게으르다는 게 아니라 오늘 데뷔 날짜가 정해졌다. 얘들아 이제 진짜 데뷔하는 거야.


수이와 이연, 소미는 놀라 눈이 커다래지고 효윤, 선희는 마주 보며 주먹을 쥐고 소리를 지를 듯 좋아했다. 



2


늦은 밤시간 편의점, 아직도 교대를 오지 않는 다음 타임 대학생 알바 형을 기다리며 유로는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시곗바늘은 11시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형은 시간을 지킬 때가 없네


그리 생각하면서도 유로는 한 편으로 이 시간이 다행스러웠다. 이젠 가출했던 동생 녀석도 아버지 기일 전에 찾아왔고 큰 보탬은 안되지만 알바비도 안정적이다. 이제 몇 개월 후면 고딩 신분에서 벗어나니 아무래도 동생 학비 문제도 어머니께도 많이 보탬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한층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찰랑


차임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편의점 문을 보니 낯익은 얼굴이 들어서다 자신을 발견하고는 뒤돌아서 나가려 한다. 유로는 따라나가면서 이름을 불렀다.


-유향아! 


-아씨. 여기서 알바하냐. 집 앞에도 편의점 있잖아. 뭐 이 먼 데까지 와서 해.


-너 알고 온 거 아니었어.


-형이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고 와.


-시간이 늦었는데 너 또 왜 밤에 돌아다녀. 집에 엄마 혼자 계시잖아. 


-언제는 혼자 안 계셨냐? 형이 알바를 맨날 이렇게 했으면 엄마 맨날 혼자 계셨겠네.


사실 편의점에 사복을 입고 담배라도 사볼까 하고 들어서다가 딱 형하고 마주쳐서 뻘쭘해진 유향은 유로에게 다소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때 때마침 알바 교대할 대학생 형이 들어섰다. 


-조금 늦었지 유로야. 미안해. 내일부턴 시간 꼭 지킬게.



3


유로와 유향은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유향은 이 시간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지만 이제 겨우 고3인데도 세상 이런 꼰대가 따로 없는 형 유로한테 걸렸으니 별 수 없이 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 연습생 한다는 애랑은 아직 사귀지?


-음. 요즘 곧 데뷔할 거라고 많이 바빠! 


-그래도 연락은 하고 지낼 거 아니야?


-바쁜데 시간 뺏고 싶지 않아서 낮에 학교에서 보고 밤에는 잘 연락하지 않아.


-형. 그러다 여친 뺏긴다.


-뺏기긴 누구한테 뺏겨? 설마 너한테?


동생이 가볍게 하는 말이지만 유로도 그런 두려움이 제법 들고 있었기에 되려 농담으로 넘기려 했다. 하지만 유향인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았다.


-걔, 데뷔하면 폼 나는 남돌이 많을 텐데 형 좀 각오든 대비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각오는 무슨 각오고. 대비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유향이 그런 말을 하기 전부터 유로도 나름 생각을 많이 해봤지만 수이의 손을 놓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형도 기깔나는 대학 가서 뽀대나게 대학생 되면 걔도 뭔가 형한테 지속적으로 끌리는 그런 게 있을지 또 알아?


-대학은 니가 가야지. 형은 돈 벌어야 돼. 


-형 같은 범생이가 대학을 가야지 내가 왜 대학을 가. 나 잘하는 거는 쌈 밖엔 없어.


-그럼 체대를 가면 되지.


-체대는 무슨. 대학은 공부 잘하는 형이 가. 나 같은 문제아를 체대 보내서 뭐 하게. 


-체대 가서 경호학과를 다니던가 하면 돼. 장래성 있는 학과잖아.


-그러니까 형은 대학 왜 안 가겠다는 건데. 


-돈 벌어야 한다니까.


-돈 독 올랐냐? 돈. 돈. 돈 소리는.


유향은 형이 가족 생계 때문에 걱정하는 게 안쓰럽고 한 편으로 부담스럽고 그랬다. 하지만 자신 역시 형과 다르지 않았다.


-그럼 엄마 언제까지 저렇게 혼자 힘드시게 두냐? 아버지 돌아가신지도 벌써 5년째야.


-그러니까 내가 먹여 살린다니까? 형은 그냥 공부해서 대학 가. 이제 수능이 몇 개월도 안 남았는데 알바가 뭐야? 그 시간에 공부를 하라구.


-너 무슨 생각하는지는 알아! 집 나가서 파이트 클럽에서 숙식 해결한 것도 알고.


-그렇지. 어쩐지 나가라더라. 형이라고 동생 앞길 막아도 돼.


-그런 게 어떻게 앞길이야. 거기는 길거리 쌈짱 뽑아서 칼받이로 쓰는대라는데 그런 데서 죽거나 범죄자가 되는 게 니가 가족을 부양하겠단 방법이야.


-그럼 할 줄 아는 게 쌈 밖에 없는 데 날 더러 어쩌라구. 나 이렇게 살더라도 잘난 형이 성공하면 되잖아. 형 의대 가고 싶어 했잖아. 형 의사 되면 얼마나 좋아. 돌아가신 아빠까지 좋아라하시겠다.


-형은 이미 공부 포기했어.


유로는 계획이 다 있었다. 언젠가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세는 기울고 혼자 힘들게 일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속에서 계획들을 하나하나 지워가기 시작했다. 대신 동생 유향이가 나름의 성공을 하면 그걸로 마음의 위안을 삼을 작정이었다. 가끔은 답답하고 가끔은 우울해졌지만 엄마도 동생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책임의 울타리 안에 한 사람을 더 꼽자면 그게 수이였다. 엄마를 위해서 동생을 위해서 유로는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이를 위해서도...



4


집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삐리릭' 휴대폰에서 문자메시지 수신음이 들렸다. 유로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플립을 열었다. 


: 오빠 우리 일요일 오전 10시에 거기서 만나.


유로는 짧은 그 문자가 몹시 불안하게 느껴졌다. 마치 끝을 이야기하려는 말처럼 말이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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