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는 온통 새하얀 공간에서 자신을 감싸는 파동 같은 또는 빛의 일렁임 같은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정좌를 하거라!


-네?


-양반다리를 하고 앉으라고!


어디선가 동굴 소리 같은 노년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로는 그 말을 따라 정좌를 하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 


-아무 생각도 하지 말거라. 내면의 요동에 반응하지 말고 그냥 느낌만 따라가면 된다.


아랫배부터 뜨겁고 찌릿한 기운이 일어나자 유로는 놀라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노인이 무언가 미더운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그의 말대로 의식이 따라가고 있었다. 불 같고 전기 같은 그 기운이 아래를 거쳐 꼬리뼈로 가더니 용암 줄기라고 할까 아래에서 위로 치는 번개 같다고 할까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느낌이 머리까지 곧장 올라갔다. 유로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마치 자신의 정수리에서 빛의 불꽃이 터져 오르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9


유로는 한참만에 의식을 차리고는 오히려 더 깊은 잠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는 듯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낯모르는 두 남녀가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아이를 왜 천당에서 관리하려고 드느냐구요? 이 아이는 기독교도예요. 어디까지나 저희 천국 소관입니다.


-천국에 영혼이 없어? 무슨 호객행위 하듯이 영혼을 홀려가려고만 해. 이 아이는 생전에 손씨 형의권을 사사 받은 아이야. 어느 모로 봐도 우리 천당하고 더 인연이 깊다구.


하얀 수트 차림의 중년 남자가 검은 수트를 입은 젊은 여성에게 따지고 들자 젊은 여성도 근거를 대며 반박했다. 


-그깟 무술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요. 크리스천을 천국에서 관리하겠다는데 운동을 이걸 했으니 얘는 우리 애다 이런 논리가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세요?


-공부(功夫)를 배우는 아이의 정신 속에는 동양의 정신이 자리 잡아. 허울뿐인 종교 나부랭이가 뭐가 중요해. 그 영혼에 어떠한 정신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하지.


-아니 그래서 상도덕도 없이 이러자는 겁니까?


-너네는 영혼을 장삿속으로 관리하니? 정신을 이야기하는데 상도덕이 웬 말이야?


하얀 수트의 중년 남자는 갓 입문한 초보 천사였고 검은 수트의 젊은 여성은 경력이 있는 저승차사였다. 그런데도 남자가 흥분하며 논리 없이 따지고 들자 여성까지 성이 차오르고 있었다. 마침 그때 새하얀 그 공간에 그보다 더 새하얀 빛이 어리더니 붉은 도복의 노인이 나타났다. 


-규약대로 하게 규약대로. 이 아이 자신의 결정이 중요한 거야. 


-네. 어르신. 규약대로 해야죠. 안 그래도 물어보려던 찰나였습니다.


-맞습니다. 영감님. 아이 의사가 가장 우선이죠. 


노인의 말에 젊은 여성이 되려 난처한 빛을 띠었고 중년의 남자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반면 유로는 이 상황이 오기 전에 들리던 동굴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타나자 왠지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할아버지 아까 제게 뭘 어떻게 하신 거예요.


-내가 니 할애비는 아니다. 


-아! 그럼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어르신 정도가 좋겠구나.


-예. 어르신. 그런데 아까 제게 뭘 하신 건가요?


-중유에 이르기 직전에 너의 임독맥을 타통한 것이다. 


-저는 아직 내공 수련은 해 본 적이 없는데 그게 가능한가요?


-네가 몇 해나 꾸준히 공부(功夫)를 게을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게지. 


유로는 노인의 말에 의문이 풀리나 싶었지만 그의 말속에 뭔가 꼭 묻지 않고는 안될 의문을 하나 품게 되었다.


-그런데 말씀하신 중유라는 게 뭔가요?


-그건 바로 우리가 있는 이 공간과 이 세계의 일부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네가 인간계의 시간으로 49일 동안 머물러야 하는 곳이지.


그 말을 듣고 유로는 '그렇구나. 나는 역시 죽었구나!' 하는 수긍과 함께 "내가 도대체 왜 벌써 죽어야 하나' 하는 억울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 것이란다. 억울함이나 난감함이나 당혹스러움 같은 것들은 망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그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인간계의 생에 미련만 가지며 영계에서 새로운 생을 부정하는 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너는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니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제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들이 있어요. 책임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구요.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책임지며 살아가는 거란다. 네게 어찌 그 모두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말이냐? 그런 생각은 자만이고 오만이다. 너도 너 스스로를 책임지는데 전념하는 것이 좋다. 현재의 너 자신 말이다.


유로가 너무 답답한 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하얀 수트의 남자가 유로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봐. 고유로 너는 크리스천이니까 천국 가야잖아. 그치.


유로는 확 한대 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 작자는 정말 천사가 맞는 걸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아니야. 너의 내면 깊숙이에서 올곧게 동양의 전통을 애호하는 그 정신의 흐름을 믿고 따라야 해. 우리 천당으로 오면 네가 배우고 싶어 하는 십대 문파의 절기를 가진 고수들이 숱하게 있단다.


유로는 외모와 다르게 노숙한 어투의 이 누나 역시 짜증이 났다. 이 둘은 방금 죽은 사람의 심정이 어떨지 전혀 감이 오지도 않고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 아니 영혼들인 것만 같았다. 


-천국이고 천당이고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저는 약속이 있다고요.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유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이가 걱정됐다. 이 두 사람 아니 두 영혼의 말보다 오늘 날씨가 일기예보하고 다르면 곧 비가 올지도 모르는데 수이가 우산은 갖고 나왔을지 하는 걱정부터 먼저 들었다.


-그 아이가 오래 기다릴까 봐 걱정이냐? 비에 젖을까 봐 걱정이냐? 더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단다.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위해 하게 될 걱정들이니까 말이다. 


-저는 이제 어째야 하는 거죠?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노인의 말을 듣고 유로가 참담한 심정으로 울부짖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노인은 조용히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올려 작은 원을 그렸다. 딱 그만한 크기의 빛의 구슬이 생기자 노인은 그걸 유로의 가슴께로 밀어 보냈다. 유로가 가만히 바라보자 그 빛의 구슬이 자신의 가슴께서 스며드는 것 마냥 사라졌다. 그러자 한결 마음이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너에게는 아직 7재 동안(49일)의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 사이에 결정하려무나.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사이 무얼 할 수 있나요?


-우선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을 보아라. 잠시 가슴 아픈 이들의 마음에 안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네가 빨리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며 노인이 허공에 손바닥을 펴고 내밀자 허공에서 상복을 입은 어머니와 유향이의 모습이 비쳤다. 아니 유로는 그리 생각했지만 그것은 차원의 문 같은 것이다. 유로와 흑백 두 수트의 남녀가 함께 차원의 문을 넘어가자 오열하고 있는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오빠. 오빠. 유로 오빠. 


눈물을 흩날리며 달려오는 수이를 보고 유로는 두 팔을 벌렸다. 수이는 유로를 관통하고 지나쳐 영정 사진 앞에 가 쓰러져 울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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