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중독자는 이 책이 뭔 책일지가 궁금하다]
용두리의 엄마 사투리가 넘나 고향 집이 생각나서(워매. 으째야쓰까잉. 엄마……) 즐겁게 보다가 막화에 드라마 속도가 너무 질질… 주인공이 “내 기억이 바로 나”라고 하는 장면들에서 정말 그럴까? 그렇긴 하겠지만. 그것만이 정말 너야? 따지고 들고 싶었다. “나로 살았으니 나로 죽겠다”라는 말. 그 완고한 [‘나’ 임 = 일종의 자긍심]에 대해 인정, 킹정 드리고 싶었지만.
논리적으로… 너에 대한 기억은 네 해마 말고도(몸도 있고). 모두가 나눠서 가지고 있잖아. 그 사람들의 기억들 역시 너라고. 즉 그들과 함께라면 너 자신을 잃어도 아주 다 잃은 것은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살아. (드라마 넘 늘어지쟈냐) 얼렁 뇌종양 수술해. (참고로 여자 주인공 평소에 논리왕 임) 새로 태어나서, 너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의 기억을 다 흡수해서 또 너를 만들어 가!
어쩌면 이것은 나의 사춘기 이후 (나름의 심각한 숙고를 거친 관계론적) 세계관이었다. 다만 이런 종류의 세계관이 얼마나 나 자신을 무책임하게 방치하게 되는 논리로 수월하게 작용했던지에 대해서 적고 싶진 않다. 즉, 해인은 옳기도 하다. 나는 죽도록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만겠는 사람들에 대해 차츰 차츰 이해하고 싶어져왔다.
다, 다르잖아. 누군가는 영혼을 질식시키느니 가스 오븐에 머리통을 스스로 넣어 질식사한다. (실비아 플라스의 예)
다리 다치고 난 뒤 느닷없는 불안이 우주 통째로 밀려와서 밤에 잠들기 전에 엉엉 울었던 날, 딱 하루 있다. 불안한 건 너무 당연하지. 실컷 울고 나니까 개운해서 푹잤다. 몇 년 전에는 그걸 느끼지 않으려고 술을 잔뜩 마셨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오늘의 나는 그렇지 않다. 아마, 다쳐서 술을 마실 수도 없었겠지만. 그때에 비해 상황이 딱히 좋아진 것도 아니지만. 나는 나의 ‘실체 있는’ 불안을 셈할 수 있을 만큼 가볍다. 가볍다. 가볍다니. 역시 지금이 좋아. 가벼운데다 한가하기 까지 한 나는 드라마 속 무언가가 너무도 중요한 해인의 괴로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았다. 절대 잊지 않아야 할 것(남편 이름)을 외우면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모습에서.
나는 누구의 이름을 부를까. 나는 무엇을 잃을 때, 가장 아까우려나.
불러야 할 것 같은 사람 말고 정말로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을까.
머리가 아닌 입술로 외워야 하는 이름이?
.
.
.
.
없다.
.
.
없네.
.
.
내 가벼움의 증거이며. 관계론 인생관 어쩌고로 살다가 제대로 큰코다친 자의 고독한 최후이다. (😭크흡)
.
.
.
나는 눈을 감기 전에 다시 태어날 내게 당부할 것으로 인간의 이름이 아닌 단어를 하나 정해두기로 한다. 체력, 체력, 체력 … 새로 태어난 쟝쟝아 너는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야. (*나여, 온 몸에 새겨진 운동 못함 기억*을 상실해 줘.) 다시 태어나면 다시 살아갈 수 있다면 다른 시냅스들은 연결 안돼도 되니까… 근육 좀… 운동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 난 운동을 이렇게 못하는가. 왜 신은 내게 몸치, 박치, 음치, 런치를 주셨는 가.
서론이 길었네. 드라마 리뷰 아닙니다. 독후감 맞고요.
매일 쓰는 병상 일지는 좀 무리고 몰아 쓰는
#병상읽기 1.
“(55)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침대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다리 부상으로 정형외과에서 읽기 좋은 책에 #카프카 의 #변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나는 출근을 안 해도 되고, 부모님은 내가 아직 그레고르가 된 것을 모르시며(영원히 모르게 할 계획), 살뜰히 들어둔 보험이 있는 데다, 각자의 *불행 앞에서만* 강해지는 자매애를 지닌 여동생이 둘이나 있다(그녀들은 마치 그레고르의 여동생처럼 청소기를 돌려주고 갔다). 그렇지만 고양이 털들과 먼지는 매일 쌓이는 법이다. 매 끼니는 내가 나에게 해서 먹여야 하는 것이다. 처음엔 확실히 거동이 힘들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힘든 것은.
“(60) 마침내 그 다리로 그가 원하는 동작에 성공했어도, 그 사이에 다른 다리들이 모조리 해방이나 된 듯이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고통스럽게 버둥거렸다. “쓸데없이 침대에 누워 있으면 안 돼.” 그레고르가 혼잣말을 했다.”
ㅋㅋㅋㅋㅋㅋ 아.... ‘쓸데없이 침대에… 누워…’ 있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그것이 나의 궁극의 수련 목적인 거시지만. 나는 타고 나기를 <눈물의 여왕> 속 홍해인이 아니라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 이입하기가 더 수월한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불러보는 그 이름 잠자,냥) 드라마 속 홍해인은 재벌 3세라서 수술 만 받으면 살겠지만… 평범한 가족의 평범한 사람들은 가족 성원에게 닥친 불행을 인식하는 순간 부턴 잠자 씨네처럼 계산 촤륵촤륵 머리 굴리겠지.
- 꼭 살아. 살기만 해.
를 부르짖는 변호사 남편 김수현? 드라마는 판타지다. 로맨스는 판타지여. 즉 바쁜 현대인의 감정을 몰아서 쓰게 끔 잘 설계되어 있단 말. 나는 끊임없이 철철 눈물을 흘리는 두 배우의 절절함에 자동으로 함께 울고 웃는 것에 걸끄러운 나 자신을 의식하며 찔끔 흐르는 눈물을 재빨리 닦아내고 현실로 돌아온다. 왜냐, 우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찬찬히 느끼면서 곱씹기엔 할 일도 많고 걱정도 많고 사야 할 물건들이 너무 많으시다.
바퀴벌레가 된 *평사원* 그레고르는 일단 출근부터 생각한다. 빚이란 무엇인가. 대출이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부장제란 무엇인… 사랑의 공동체인가. 기능의 공동체인가. 카프카는 알고 있다. 가족이 사실은 서로에 대한 명분의 공......읍읍🫢
아들 그레고르는 출근을 해야 했지만. 2024년 출근하고 싶어도 못하는 아들들이. 일자리가 없어요. 아, 그럼 수요와 공급의 논리에 맞추어 자기 계발을 해야죠. 살뜰히 남는 시간에는 투자를. 주식을. 코인을. 돈 벌기 참 쉬운 시절입니다. 부의 파이프라인을 2개 만드세요. 부업으로 자동 수익화를. 여러분 가난은 지능 순이며, 수저 타령은 루저들이나. 그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모든 것은 여자들이 살만하니까 눈이 높아져서이기 때문입니다. 드라마 속 재벌3세는 나를 잃는 게 싫고, 소설 속 그레고르는 출근 못하는 걸 걱정하고, 현실의 청년 그레고르들은 출근을 하.고.싶.어.서. 걱정일 것이다.
뭐 그건 이제 여남 상관 없다. *취업 당사자*가 되려면 이미 변신된 그레고르 취급을 받으면서 스펙을 쌓거나, 시험 공부를 하며. 집이 그 처지도 안된다면 똥 값인 저임금의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경력은 쌓이지 않는다. 숙련이 필요없는 플랫폼의 시절이니까. 키오스크가 대체해서 알바 마저 쉽지 않다. 누구나 투자자가 돼버린 현대사회는 누구나 녹아내린 돈을 복구하기 위해 엔잡을 뛰어야 하는 상황. 나랏님은 대파 값도 모르시니 알아서 각자도생 모두가 경쟁하는 한국은 빨리 빨리. 그런데 정이 많은 한민족 우리에겐 걱정도 참 많고 이 걱정 저 걱정 남눈치 보며 방어하기 위해 사야할 물건들이 특별히 더 많으시다. 바쁜 우리 쉴 때 도 가성비 넷플릭스. 눈물의 여왕. 다 보면 안된다. 유튜브로 한번에 몰아보기.
지난 주 수업 마지막 날 선생님이 물어보셨다.
- 뭔 책을. 왜 (일반인이) 푸코 강좌를? 이렇게 열심히?
대략 이런 대답을 했다.
- 선생님. 저 역시 이런 걸 읽고 싶어 하는 제가 괴짜라고. 뻘짓이라고. 현실 도피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걸 하고 있으면. *적어도 다른 걸 덜 해요.* 어려워서… 읽으면 지치거든요. 집중하지 않으면 못 읽고요. 유튜브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만 뒤처진 것 같고, 인스타 보고 있으면 뭔가 사야 할 것 같고, 내가 엄청 못나 보이고. 어차피 느낄 자괴감이면 차라리 어려운 책 읽으면서 느끼자 싶더라고요. 다들 각자가 욕망하는 것을 선망/책망하는 구조라면 난 책으로 하겠다. 물론 그것도 책 읽어서 알게 된 거지만. 어쨌든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지금은 좋아요. 읽다보니 남들한테 중요한 것이 나한테는 안 중요해졌어요. 그게 주는 해방감이 있다. 그러니 샘, 더 열심히 공부하셔서. 공부 많이 나눠주셔야 해요. 저는 알 것 같아요. 인문학? 철학? 그러니까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이 평범한 사람일 수록 더 필요해진 세상 같아요.
#병상읽기 2.
어쩌다 보니 #나카마사마사키 의 책들을 좀 훑어봤는데. 이 사람 문체가 재수 없다. 사람이 뭣도 없이 저렇게 시건방을 떨면 내가 동질감이…읍읍🫢🫢 아니다. 뭐시 있으니까 건방진 것이다. (나는 없지롱 ㅋㅋㅋㅋㅋ 무지의 지가 아니라 무지의 건방 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라캉. 푸코. 아마추어. 푸하하. 미리미리 나대지 말자고 일러두길 다행. 안 그랬으면 이거 읽고 수치스러워서 냅다 던졌음. 나대는 스스로를 나댄다 알고 있기를 다행인데.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치고는 행동이 교정이 안된다. 나.는.내.가.기.특.하.단.말.이.다. 옆에 김수현도 없는 데 누가 나를 기특해하나. 나나 나를 기특해...
또 얼마 전에 주워듣게 된 풍문이 있는 데. 철학 제대로 하는 사람들은 프랑스 현대 철학은 너무 쉬워서 쳐주지 않는다고 한다ㅋㅋㅋㅋㅋㅋ (웅. 헤겔 레스토랑 읽다가 알 것 같아지긴 했다ㅋㅋㅋ너무 쉬운 것도 어려운 나 자신을 인정합니다.)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은 것이. 내가 아무리 서백남 통째로 재수 없다 씹어도 걔네가 그냥 세계 제패했겠냐고 뭐가 있응께 했겄제. 인정한다니까? 근데 남들이 쳐준다고, 나도 쳐줘야 하는 거냐??
제대로 읽은 사람들의 고상함이야 내 알 바 아니고, 각자는 각자의 읽기가 있지. 나는 올림픽에 나가고 싶어서 달리기 연습을 하는 게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말로 그걸 이해를 못하더라) 나의 아마추어임은 겸허하게 인정하는 바지만... 그렇다고 겸손해지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러니 프랑스 철학 쉽게 읽는 사람들은 좀 쉽게 써달라. 나는 내 기량에 맞게 조금씩 더 어려운 것을 긴장하며 읽을 준비가 되어있다. 아, 나는 못 읽어. 보단 이 태도가 낫지 않나? 그럼 마저 자뻑을 하면서 일본에서 건너온 입문서들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암튼 철학 꼰대 냄시 철철 나는 나카마사의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을 읽다가 점점 감탄하게 되어버려서 사람이 궁금해. 마지막 부분 저자 후기 먼저 읽다가 깨닫고 말았다. 나 *이 사람이 싫어하는 사람을 함께 싫어*한다. …… (역시 좋지는 않은 데. 싫지도 않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동질감을 느끼며.
“(520) (영화 <한나 아렌트>를 보고) 세부 묘사 중에는 이러저러하게 불만스러운 점도 있었지만 영화 관람이 끝나고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누구의 시점에 동화되고 감정을 이입할까? 거칠게 말해서 세 가지 시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아렌트, ② 아이히만, ③ 아렌트를 아이히만의 편이라고 말하면서 비난하는 사람들. 그중 하나가 ‘정답’인 것은 아니다. 다만 무척 확실한 것이 있다. 아무런 의미 없이 ①에 동화하여 ‘감동’해 버리는 사람은 아렌트의 사상과 전혀 무관하다. 아니, 어떤 계기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상가를 만난다면 곧장 ③처럼 행동할 사람들이리라.
이런 질문을 하면 문화연구에 한쪽 발을 들인 바보들 중에 낭패 한 표정으로 이렇게 외치며 뛰쳐나올 사람들이 떠오른다. “아니야, 제4의 선택지가 있어. 그건 이 영화도 표상할 수 없었던 사람들, 즉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야. 여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나카마사는 수가 얕다고 해야겠지. 역시 심오한 사상을 이야기할 만한 인사가 못돼!” 영화 자체를 보지 않더라도 금방 떠올릴 수 있는 이런 생각을 트위터에 중얼거리며 낄낄거리는 놈들에게는 듣는 약도 없다. ①에 단순히 동화하는 사람들보다 질이 더 나쁘다.”
그러니까. 나는. 푸하하 나카마사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말았다. 제기랄. 팬심보다 강한 건 *안티의 동질감*이다. 정체성의 정치와 혐오의 쾌락이 (그리고 그게 드러나는 선거 결과가…) 그토록 위험하면서 치명적인 이유다.
참.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아마도 ③번의 시점에 이입했을 것이다. 그게 내가 정희진에게 배운 영화를 보는 방식이며. 아렌트와 관련한 책들을 읽을 때 스스로 가장 긁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적 당하는 순간의 부끄러움. 아렌트가 요구하는 끝끝내 사유하기를 중단했던 순간들에 대한. 부끄러움과 어쩔 수 없었음. 핑계대고 싶음. 다 그렇게 살아라는 익명성 속에서 책임을 면피하고 싶은 자기 기만. 그리하여 내가 사유하게 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음.에 머물러 있다. 현실직시의 어려움에 대한 현실직시일까나.
#병상읽기 3.
아렌트를 좋아한다. 멋있다. 나와 많이 달라서다. 아렌트를 배우고 싶다.
#사만다로즈힐 은 이렇게 <한나 아렌트 평전>을 마무리 짓는다. 거의 98프로에 가깝게 동의한다.
“(309)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한나의 말대로 우리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면서 눈앞에 놓인 것과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한나가 살던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한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이 한계를 설정하며, 다시 배열하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병상읽기 4.
다시 돌아가서 까먹기 싫어 써두자 싶은 부분이다. (이거 쓰려고 앞의 썰 풀다 보니 엄청 길어짐 🫠)
토요일에는 결국 나카마사의 <현대 철학의 최전선>까지 구매해서 1장을 순.식.간.에 읽고 말았는데. 두둔. 탁월하다. 그래서 더 재섭다. (1장 한정) 롤스의 ‘정의론’으로 뿌리(맥락이랄까) 잡고 논쟁적인 부분들 탁탁 잡아채 정리하는 데. 이해를 명쾌하기가 이를 데가 없네. 와. ‘정석적으로 공부 잘하는 사람’의 노트다.
이런 책의 장점은 왠지 다 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는 것이지만… 그게 저자가 제일 싫어하는 읽기 일 게 뻔하지만… (나카마사 아재여, 당신의 빼어난 필력이 자국 내 트이타 날라리 철학 평론 사태의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랑가요? 아님 말고ᄏᄏᄏ) 하지만 <OOO의 인생 강의>류의 철학 에세이조차 자기계발 시장에 밀리는 한국의 독서 생태계를 생각하면 이런 본격 인문학 입문서의 독자 시장 층이 형성되어 있는 일본 좀 부럽다.
그만 부럽고 <1장. 정의론 - 공정한 사회의 근거를 둘러싸고>을 읽다가 롤스와 하버마스에 동의가 절대로 안 되는 것이… 나의 당파성에 기인한 것임을 눈치 깠다. (아마 이래서 공부를 못했나 보다. 성질 급한 것도 있지만… 대학에서 가르치는 분과 학문의 ‘전제’에 동의가 잘 안됨.)
이들의 (고상한) 주장에 대한 짜증스러움과는 별개로 그분들이 세우고자 하는 체계의 가치와 방향의 의도… 즉, 모종의 절박한 책임감으로서의 세계에 개입하려는 태도를 인정하게 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언제나 우리의 문제는 [이론+도그마+기득권(옹호 무의식) => 내맞너틀, 내로남불]인 것이다. 그들의 이론을 무전제로 추종(?) 하는 세력들은 내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한 채 물음표를 압살한다. 그들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인데, 나더러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기분이 드러워서 나의 물음표는 결국 ‘권력’으로 가게 되어버린 것도 같아. (여기서 푸코 쉼표, 한번 눌러주기ㅋㅋㅋ)
주체할 수 없는 나이브함과 직관은 내 읽기의 강점이지만. 내가 느끼는 책임감보다는 훨씬 더한 책임감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 세상에 책임질 거라고는 나불대는 내 손가락과 나 자신뿐인 안 겸손한 나는 겨우겨우 겸손을 찔끔 배운다. (나에게도 차릴 체면이 있었으면 좋겠...지않다. 없어 다행.) 그러나 겸손을 배운다고 재수 없는 기분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스스로는 나의 이 감정이 곧 지성이라고 생각하며, 이를 설명하기 위해 책의 54페이지를 가져오겠다.
“(54) (롤스를 포함한 자유주의자들 전제의 역설을 지적한 아시아인 최초 노벨 경제학 상에 빛나는 아마르티아 센과 그의 공동연구자인) *마사 누스바움*은 잠재 능력 측면에서 가장 곤란한 상황에 있다고 생각되는 (개도국의) 여성을 기준으로 그녀가 어떤 처지에 있든 반드시 있어야만 할 최소한의 잠재 능력을 목록으로 작성하고, 그것을 인간의 보편적 가치 옹호 차원에서 정당화하려 시도한다. 단, 누스바움은 *여성을 종속적인 위치에 처하게 만드는 관습 속에서 태어나 성장한 여성들, 요컨대 자기가 처한 현실을 ‘자연’이라 여기는 여성들의 경우에는 보편적인 잠재 능력의 목록을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고, 그런 것을 제안받아도 갈팡질팡하거나 도리어 성가셔 할 여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인정하고있다. 이는 노르웨이의 분석적 마르크스 주의 철학자 욘 엘스터(1940~)가 <신포도>1983에서 ‘적응적 선호 형성 adaptive preference formation’이라 칭한 문제로, 페미니즘과 자유주의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 확대와 급진적 사회 변혁을 동시에 표방하는 사회사상 분야에서는 늘 부딪히게 되는 난제다. 누스바움은 적응적 선호 형성이 건전한 인간성의 발전이 아니라고 보면서도, 이미 그런 식으로 적응되어 버린 사람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일종의 딜레마*에 빠져있다.”
‘적응적 선호 형성’. 나는 내가 가진 잠재적 가능성을 엄청나게 스스로 처박았다. 사실을 알고 난 뒤에는 좀 억울했지만 그 빡침을 이리저리 방사하던 시기도 지났다. 그게 나의 조건과 처지였고.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선 거기까지가 다였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서 ‘자연화’해 버린 나의 자기 기만을 들여다보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성가시고 두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을 만나기 이전까지 아니 그것을 포함하여. 나의 ‘스스로’가 있었는가. 있었던가. 있었을까. 질문을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실은 모두가 ‘적응적 선호 형성 중’인 것이다. 자기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고 거기서 성가셔서 멈춘다. 멈춘 채로 살다가 더.는.이.렇.게.는.못.살.겠.을.때. 그때. 그때. 다시 질문을 시작한다. (어쩌면 살만해질 때 질문은 끝난다.) 시작한 질문을 언제 어디까지에서 멈추는… 어쩌면… 거기까지가 딱 그 사람이 도달하는 인식이겠지만. 나는 치열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는 과정이 정말 너무 좋다. 고작 읽는 것뿐일 테니. 그 정도의 성가심은. 감수하다가 말겠지. 성가셔서 멈출 때 까지.
아마도 그런 것 아닐까. 그 딜레마란 게. 특별히 제3세계의 여성들뿐만 아니라 인간 모두의 조건 아닌가. 홍해인에게도 잠자에게도 누스바움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모두에게. 모두가. 각자의 적응적 선호 조건이 있다. 기억이. 재화가. 경험이. 문화가. 가까운 인간관계와. 매체들. 우리의 잠재성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 특히 나 자신이 가장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딜레마는 해결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간파되어야 하는 조건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가진 역설들처럼. 심지어 다소 자명해 보이는 수학도. 물리학도. 아무리 엄밀한 체계를 구축한다고 해도 그것에는 구멍과 역설이 있다. 누스바움의 딜레마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인간들을 내가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것들이 화학 작용해서 빚어내는 알 수 없는 결과들을 진보로 애써 해석하지도 않지만. 다만. 이해를 다르게 하는 쾌락은 있다. 그 쾌락이 (이것 만큼은 공리주의적으로다가) 많았으면 좋겠다. 이런 나도 책을 읽는 기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건 내게는 참 다행이지 않은가.
그래서 다시. 로즈 힐. “한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이 한계를 설정하며, 다시 배열하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변하는 현실이 있고. 내 삶이 있고. 계속 배열하는 내가 있다. 내게도 이야기가 있다. 내가 누군가가 아닌 나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가진 딜레마를 간파하고 싶은. 다른 딜레마로. 다른. 또 다른.
*
그날 달리지 않았던 게 좋지 않았겠느냐고?
아니요. 지금도 빨리 나아서 달리러 가고 싶은데요.
왜요?
달리지 않았다면 달릴 줄 몰랐을 테니까. 이제는 달릴 줄 알고(물론 잘 달리지는 못한다), 그 쾌감을 느끼며, 조심히 살살 달리면서, 바닥도 잘 살피면서, 느리게 천천히 달리면 돼요.
그걸 꼭 넘어져서 다리 부러져 봐야 알아요?
꼭 넘어져야만 아는 건 아닌 데, 달려봐야 알아요. 음~~~청~~ 못 달려도요. 달리는 걸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카프카를 생각한다. 일과 글쓰기. 글쓰기와 일. 생존과 실존. 그는 분열 속에 살았다. 딜레마 속에 살았다. 나는 그의 글에 깊게 감동했다. 문학에는 그런 것들이 있다. 철학 역시 그런 것들이 계속해서 논쟁되며 열려 있는 채다. 괴델(수학)도 하이젠베르크(양자물리학)도 결국 그걸 말한다. 인간의 인식이 장담할 수 있는 닫힌 완결은 없다는 것. 요즘 들어 자주 낙담하는 동생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은. 인생 끝까지 가봐야 아는 겨. 물론 삶을 꼭 길게 살 필요도 없다.
자, 이제 생존하러 갈 시간이다. 나의 딜레마를 껴안는다. 미래를 설계하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불안해하느라 술을 마시게 될 테니까. 다시는 그렇게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낮잠을 잘거다. 나는 시간이 많다. 느끼지 않기 위해 취할 시간은 없다. 매일의 절단면을 만들어 둔다. 할 수 있는 걸 한다. 못하는 건 미룬다. 쓸 데 없이 침대에 누워있으면 안돼? 놉. 돼. 침대에 누워있어도 돼. 쓸데 없지 않으니까. (다만 누워 있을 때 폰은 끄자.)
시간이 흐르면 다리는 붙을 거고. 나는 일어날 거고. 충분히 누워있어도 된다. 누워 있는 것이 쓸 데 없다는. 생각.이 바로 현대인의 질병이다.
덧붙임, 참고 참으며 읽다가 병상 읽기4에서 결국 읽기를 포기한 당신. 이 있다면. 미안하다… 4장은. 오로지 미래의 나를 향해서 쓴 글이다….